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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고대일록은 정경운이라는 시골 선비가 1592년부터 1609년까지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의 소모유사, 의병장 김면의 소모종사관 등의 직책으로 의병활동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기록한 일기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과 전후 수습대책 등 전쟁의 모습을 기존 사료들보다 더 방대하고 낱낱이 담고 있다.
당시 왜군은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한 반면 조선군은 전쟁 경험이 거의 없어 백병전에서는 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수원전투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패전이었다. 수원에는 조선군사 1만명이 운집했다. 충청 순찰사 윤선각, 전라 순찰사 이광, 경상 순찰사 김수의 군사였다.
그런데 왜군 기병 단 6기에 패배했다. "말 탄 왜병 여섯이 깃발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나오자 1만이 넘는 우리 군사가 한꺼번에 무너져서 갑옷과 활을 버리고 달아났다. 버려진 군량, 활과 화살, 깃발과 북 등이 언덕을 이룰 만큼 널렸는데 그 밖에 잃은 것은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1592년 6월 15일)
익숙한 지형에 매복해 활을 쏘는 게릴라전에서는 승전 소식이 속출했다
"6월 9일 묘시(오전 5~7시)에 현풍 쌍산강에서 적선이 내려왔다. 황응남이 정병 30여 명을 거느리고 주요 길목에 숨어있다가 적선이 가까이 이르자 한꺼번에 활을 쐈다. 배에 탄 적병 80여 명과 우리나라 여인 대여섯 명에게 화살을 맞혔다. ~ 배에 가득 타고 있던 왜적 중에서 2~3명 만이 살아남았다. ~ 이튿날 또 강 언저리에서 싸워서 왜적 목 3급을 베고 베와 비단 등 50여 바리를 빼앗았다. 빼앗은 물건 속에서는 왕의 비녀, 비빈의 화관, 옷과 이불, 한양의 서책, 사가의 보물과 장식품 등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6월 14일),
"마을의 백성들은 스스로 단결해 요해처에 흩어져 매복했다가 오가는 소규모 적들을 공격했다. 왜적의 목을 베어서 바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8월24일)
▲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지 진주성
1차 전투에서는 부사 김시민의 탁월한 리더십으로 대승을 거뒀지만, 김시민이 죽은뒤 벌어진 2차 전투에서는 조선군이 몰살당한다.
두 차례 벌어진 진주성 전투는 전쟁에서 지휘관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1592년 10월 벌어진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이다. 파죽지세의 왜군에 맞서 패배를 거듭하던 조선이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승리는 진주목사 김시민의 탁월한 리더십이 있어서 가능했다.
"진주 목사 김시민의 품계가 통정대부로 올랐지만 이날 밤 관아에서 사망했다. 김시민은 통판으로 재직할 때부터 사졸을 편안케 하여 하나같이 은혜를 베풀어 진주 사람들이 부모처럼 존경했다. 위아래가 혼연일체가 되어 전혀 갈등이 없어 그들을 전쟁에 동원해도 이기지 않음이 없었고 성을 지키게 해도 수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방패와 성으로 간주했다. 큰 승리를 거둔 뒤에 적의 총탄에 맞은 곳이 날로 더욱 심해져서 그 정신이 혼미하고 어지러워져 사람들이 모두 대단히 걱정하였다. 21일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으니 병이 약간 나은 듯했으나 다음 날 병이 심해져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진주 사람들이 어른 아이 없이 통곡하여 밤까지 이어졌으니 마치 자신의 부모님 상과 같이 하였다." (1592년 11월 22일). 이처럼 상세한 내용은 실록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듬해 6월 도주하던 왜군은 대대적인 복수를 감행한다. 우리 군과 백성이 몰살당한 제2차 진주성 전투다. 여기서는 리더십이 실종됐다.
"왜적들이 진주성을 함락했다. 우도 절도사 최경회, 창의사 김천일, 충청 병사 황진, 거제 현령 김준민이 모두 전사했다. ~ 진주 목사 서예원은 군졸들을 구휼하지 않아 식량 지급을 줄이고 활과 화살의 지급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진주 백성들의 마음이 떠나고 용감한 군사들도 흩어졌다. 성을 지키는 모양이 김시민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사람들이 예측할 수 없는 참화를 걱정했다. ~ 적이 성을 넘어 들어온 지점은 김천일이 지키고 있던 곳이다." (1593년 6월 29일)
명나라 파병이 없었다면 전쟁의 국면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명나라 군대는 전쟁의 큰 물줄기를 바꿔 놓은 것은 분명했다. 그들의 전과가 많지는 않았지만 의병들에게 희망을 줬다.
"하늘이 우리가 당한 화를 애석하게 여겨 명나라가 군사를 보내주니 흉적이 도처에서 패했다. 또 각 고을의 여러 장수가 스스로 더 힘을 쓰고 분발하니 이러한 승세를 타고 국토 회복의 공을 도모하게 될 것이다." (1592년 8월3일)
특히 평양성 전투 이후 전세의 역전 현상이 뚜렷해졌다. 왜적의 퇴각 조짐은 남쪽에서도 감지됐다.
"성주의 적들과 내통한 사람인 황언이 몰래 연통하여 말하기를 '성주의 적들이 쌀을 찧어 군량을 지니는 것은 달아나기 위한 계책이다'라고 하였다. 개령의 적들 역시 서로 이끌고서 도망해 돌아갈 조짐을 보이고 있으니 북쪽의 적들이 살육당한 것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졌기 때문이다." (1593년 1월 28일)
동시에 중국 군대는 우리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겼다. "명나라 군대가 군(함양)에 가득하고 주민은 텅 비었으니 긁어모으는 피해가 왜노와 다를 바가 없다." (7월 14일), "명나라 장수 유참장(劉參將)이 운봉에서 군으로 왔다. 성주(이희급 함양군수)의 멱살을 잡고서 향소에서 마구 구타하니 지금이 어느 때인가." (1595년 5월 11일)
전대미문의 국란 속에서도 신하된 자들은 여전히 당파싸움에 급급했다.
"온 나라의 신민들이 곧바로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지만 어가를 따르고 있는 여러 신하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합치기는커녕 정적에게 유감을 갚는 것을 때를 얻었다고 여기니 슬프구나! 썩은 나무가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걸어다니는 시체가 권력을 쥐고 있으니 나라의 불행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구나." (1593년 1월 1일)
1593년 10월 3일 도망갔던 선조가 드디어 환궁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각은 싸늘했다.
"주상께서는 환궁하던 날 비단옷을 입고 들어오셨지만 세자는 베옷을 입고 눈물을 비와 같이 흘리며 행색이 초췌하여 감회를 떠올리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받들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과연 우리 임금의 아들이시다'라고 했다." (10월 15일). 백성을 버렸던 자가 비단옷을 걸치고 올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실록은 부역자를 숨기지만 이 일기에서는 부왜자를 빼놓지 않고 기술한다.
"무주에 사는 전 군수 김종려가 적진에 들어가 투항하였다. 적의 푸른 철릭을 받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슬프다! 이증은 왜놈에게서 받은 짐을 지고 종려는 적의 소굴에서 호미질이나 하면서 호령을 달게 받아들이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국가의 은혜를 저버리고 절의의 규칙을 무너뜨려 도리어 개나 말만도 못하니 애통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1592년 7월 8일)
김덕령(1567~1596)은 의병장으로 왜적에 맞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지만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옥사했다. 그는 성혼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문인이었지만 무인을 능가하는 압도적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장군이 남문 밖에서 진법을 익히도록 명령하였다. ~ 쇠갓(철립)을 쓰고 두 겹의 갑옷을 입었으며, 쇠신(철혜)를 신었고 쇠치마(철상)을 둘렀다. 7척의 장검을 쥐고 말 위에 올라 성을 나갔다. ~ 장군의 사람됨이 매우 침착하고 무거워 말이 적었으며 완력이 뛰어났다." (1594년 2월 8일)
▲ 고니시 유키나가 동상. 고니시는 임진왜란때 일본군을 지휘했다. 일본 구마모토 우도성 소재
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의 최후도 다룬다. 노량해전에서 전투가 끝나가는 즈음 조총을 맞고 운명한 것으로 우리는 알고있다.
"적장 평행장(平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이 도망쳤다. 숭정대부 전라 좌수사 겸 통제사 이순신이 죽었다. ~ 통제사가 사졸들의 앞에 서서 종일 혈전을 하던 도중 철환을 머리에 맞아 전사했다." (1598년 11월 19일)
제3국에서 원조물자를 보낸 사실도 전한다. "여국(女國) 사람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군량 1000섬을 명나라에게 바쳤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도착했다. 아! 뜻밖의 일이다." (1953년 10월 22일)
전쟁의 참혹함도 가감 없이 싣는다. 농사를 짓지 못했고 흉년도 되풀이되면서 백성들이 최악의 기아에 허덕였다. "정사연을 만나 개령, 김산에서 난리를 겪고 있는 궁인(宮人) 등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말을 듣고서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오늘의 세상이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 과연 누구의 잘못인지 혼자서 한탄하였다." (1593년 4월 25일)
전란으로 몰락한 양반의 일면을 털어놓기도 한다. "시장에서 양식을 구걸했다. 두꺼운 얼굴이 부끄러워 마치 시장판에서 매를 맞는 것 같으니 곤궁함에 마음이 상하는구나!" (1598년 4월 10일)
조정에서는 다급한 심정에 강원도 산간에서 재배되는 메밀을 가져와 남쪽의 기근 지역에서 키웠다.
"순찰사가 가뭄으로 장계를 올려 강원도의 메밀 종자를 경상도로 옮겨 백성들이 내년 봄 구황의 먹을거리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경상 좌도는 가뭄이 더욱 심하여 뿌린 씨앗이 모두 시들었고 그루갈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1603년 5월 25일)
전염병도 창궐했다. 1593년 5월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맡아 동분서주하던 학봉 김성일이 전염병에 걸려 목숨을 잃는다.
"김성일이 진주에서 사망했다. ~ 강직하고 방정하며 정직해 권세에 맞서다가 뭇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명령을 받아 초유사가 되었다. ~ 뿔뿔이 흩어진 병졸들을 불러 모아 의병진에 나아갈 것을 권장했다. 한 지방을 막고 흉악한 적 무리들의 칼끝을 차단하니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의지함이 실로 컸다. 이때 와서 전염병에 걸려 진주에서 사망하니 사람들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서는 탄식하며 모두 눈물을 흘렸다." (1593년 5월 1일)
앞서 3월에는 병마절도사로 승진한 의병장 김면도 전염병으로 죽었다. 이어, 자신의 딸이 희생됐다. "막내딸(저자는 이 딸이 죽고도 계속 딸고 아들을 낳았다)이 요절했다. 전염병에 걸려 오한과 설사로 고생하다 사망하니 슬프기만 하다."(5월 6일)
고기잡이를 하면서 시름을 잊었다.
"최계형 어른이 천렵을 가자고 부르시기에 함께 혈계(남계천)로 가니 산음에 사는 배응종 형제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배군이 작은 배를 띄우고 작대기로 크게 소리를 내니 누치가 여울을 거슬러 올라왔다. 시내 한가운데에 그물을 쳐서 89마리를 잡았다. 평생에 좋은 일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1595년 4월 8일).
일기에서는 고기잡이 장면이 여러 차례 소개된다.
▶정경운(1556~?)=호는 고대. 경남 함양 출신으로 26세에 대북의 영수 정인홍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 1000명을 김성일, 김면 휘하에서 활약하면서 경상도 지역의 왜적을 격퇴하는데 기여했다. 1617년에는 남계서원 원장에 올랐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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