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은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
세자의
둘째
아들이었다
남의눈에
피눈물
흘리게하고
잘사는
인간없다
엉
잘사는
중생들도
있든데
조카단종을
죽이고
어거지로
왕위에오른
세조가
자식
복이있을리
없었다
큰아들
의경
세자가
일찍
죽어버렸다
둘째아들
의황이
세자에
올랐고
세조의
뒤를이어
예종으로
왕위를
이었으나
몸이약하여
재위
일년도
넘기지
못하고
20살에
떠나버린다
요단강건너
이때
왕실에서
가장
나이가많고
지위도
높은이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였다
이제
누구에게
왕위를
전하느냐
하는것은
오로지
정희왕후
윤씨의
말한마디로
작정이
되게되었다
하지만
신숙주와
정희왕후
사이에는
자을산군을
내세우기로
사전
의논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대신들
앞에서
쇼를한다
정희왕후는
원로공신
신숙주에게
물었다
대신들
의견은
어떠한가
신숙주는
대답했다
그전부터
세조께서
자을산군을
가장귀여워
하셨으니
속히
상주로
정하여
민심을
안정
시키소서
자을산군은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의
둘때
아들이었다
차례대로
말하면
첫째아들
월산대군이
될것이지만
나이가
너무어리고
병약하다는
이유로
후계자에서
제외
되었다
엉
나이는
자을산군이
더어린데
하지만
세상에
목이두개인
사람은없다
아무도
여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왜
그카다가는
잘린다
뭐가
엉
하이바
하하
예종이
세상을
떠나기직전
자을산군은
영의정
한명회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였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자을산군은
예종의
뒤를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때
성종의
나이는
13살이었다
성종은
조선왕
중에서도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한
인물로
정사도
잘돌보았
지만
그이상
주색잡기
에도
몰두했다
성종은
당시
장안에서
절세
미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판봉상시사
윤기무의
딸을
숙의로
삼는다.
이여인이
바로
성종5년
한명회의딸
왕비
한씨가
19살로죽자
왕비에
오르는
윤씨이다
화면으로
후궁에
만족해
살았다면
무난한
생을
살았을
여인은
팔자에도
없는
왕비가
되면서
본모습이
뽀롱이난다
워낙
규모없는
가정에
태어난
몸이어서
어려서부터
별로보고
들은것없이
자라
행실이
투박하고
타고난
성품이
워낙투기가
심했다
그녀의
점방에서
그녀의
결함을빼니
오히려
마이너스
성종도
질리기
시작한다
쭈욱
널린기
여자이니
독이
오를되로
오른
그녀는
급기야
성종의
화면에
손톱자국을
남긴다
당연히
다음
그녀가
걸어가야
할길은
황천길
그녀가
건너야할
다리는
무지개다리
그녀가
사약을받고
저주를
퍼부은후
떠난다
바로
이여인의
아들이
바로
연산군이다
성종의
주색잡기와
윤씨의
상스러움을
물려받은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면서
역사상
가장난잡한
조선
왕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디엔에이가
어기
가겄냐
아버지는
가장
정력적인왕
아들은
가장
난잡한왕
둘다
자기
분야에서
일등이다
하하
중생들
사는게
그렇지뭐
별거있겠냐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으로
어머니
인수대비
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비운의
인물이다
인수대비는
알다시피
의경세자가
죽고
세자빈으로
조용히
살다갈
팔자였는데
아들이
왕이되는
바람에
손자
연산군에게
맞아죽는
비운의
여인이다
인수대비의
아버지
한확의
누이둘은
명나라
영락제
여비한씨
선덕제후궁
공신
부인이되고
이여인들로
인해
청주한씨
집안은
일약
조선
명문가로
떠오르게
된다
인수대비
또한
이모들을
닮아
점방도
출중했고
아버지
한확의
막강한
명나라
연줄로
인해
세자빈이
된것이다
후일
눈이뒤집힌
연산군에게
까불다가
맞아죽는다
어쨌든
월산대군은
왕위
경쟁에서
밀려났고
동생성종이
왕위에
오른뒤
평생
시를지으며
은막에
묻혀
살아야 했다
그런데
월산대군의
부인박씨는
독실한
불자였다
그녀는
시어머니
남편과함께
자주
절을찾았고
남편이
죽은후에는
그의
명복을
빌기위해
흥복사를
건립했다
과부가된
형수를위해
성종은
사찰건립에
필요한
물자들을
적극
지원했다
유교의나라
조선
조정의
대신들이
하이바를
들고
극구
반대했다
성종은
작은재암을
지을뿐
이라며
신하들을
달랬고
월산대군
부인은
왕실의
지원을받아
흥복사를
건립했다
수개월뒤
흥복사에서
큰법회가
열려
많은인파가
법회에
참석했고
그중에
월산대군
부인이
포함돼
있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가만이있을
중생들이
아니지
조정의
대신들은
먹이를
발견한
하이에나
처럼
월산대군
부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비전의
반대를
무릅쓰고
애써
제정해놓은
부녀자
사찰출입
금지법령이
월산대군
부인으로
인해
휴지조각이
된것이다
흥복사에서
불교행사를
행하자
사대부의
부녀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승려들과
뒤섞여
머물다가
하룻밤
지내고
돌아왔으니
월산대군
부인과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
또이를
뽐푸질한
승려들을
붙잡아
심문
해야 한다
유신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국가의
기강과
원칙이
무너지기에
이르렀다
조정
대신들은
50여차례
성종에게
상소를
올리거나
면담을
요청해
월산대군
부인과
관려자
처벌을
요구했고
사헌부
사간원의
대간들이
수십일동안
대궐문
앞에엎드려
농성을
벌였다
하하
중생들
노는거보이
그런다가
되겠어
성종은
끝끝내
그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킬킬
봐라
중생아
내가
뭐라하드노
이와
관련한
유신들의
반발은
그해12월
성종이
죽을때까지
이어졌다
월산대군
부인박씨는
인수대비나
성종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후덕하고
순종적인
며느리이자
형수였다
인수대비는
생모가없는
연산군의
보호를
자신의
큰며느리인
월산대군
부인에게
맡겼다
참고로
박씨는
1455년생
이며
연산군은
1476년생
으로
21살
차이가나며
그녀가
1466년에
시집을
왔으니
연산군이
태어날무렵
시집살이
10년차
고참이었다
성종은
윤씨가죽고
다시
장가를들어
연산군
에게는
계모가
있었다
그러나
계모인
정현왕후
에게
연산군에
대한
따뜻한정을
기대
할수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현왕후와
연산군은
14살
차이였다
또한
인수대비가
보기에는
무엇보다
성품이
온화하고
후덕한
그녀가
어린
세자를맡아
기르는것이
가장
안심이
되었다
무엇보다
월산대군
부인에게
아이가
없었다
월산대군이
첩에게서
자식둘을
보았으니
아마
씨앗보다는
땅이
문제였던것
같다
연산군을
맡긴것은
자신의
친아들처럼
정성으로
돌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처럼
연산군에게
있어서
박씨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왕실에서
병이나면
사가로
피접을
나가는것이
일반적
이었는데
세자시절
연산군이
병이났을때
가는곳이
바로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잔병치레가
잦았던
연산군은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월산대군의
집에서
보냈다
후일
연산군은
자신의
세자를
박씨에게
맡겨
기르도록
한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후
월산대군
부인에게
종종
쌀과노비를
하사했으며
부인이
큰병이
들었다는
소식을듣자
승평
부부인의
이름앞에
대자를
더붙여
승평부
대부인이라는
시호를
내릴것을
명한다
자신과
세자를
정성으로
길러준
큰어머니에
대한감사의
표시였다
하지만
이것이
그녀를
조선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여인으로
만든
단초가된다
왕조
실록에서는
그녀가
죽기한달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박씨는
수십년을
홀어미로
지내며
불교를
받들고믿어
죽은남편인
이정의
묘곁에
흥복사를
세우고
따라서
명복을
비느라
자주
그절에
가므로
사람들이
의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이
박씨에게
그집에서
세자를
봉양토록
하다가
세자가
장성한후
경복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면서부터는
왕이
박씨에게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모시게하고
드디어
간통한뒤
박씨에게
은으로
만든
승평부
대부인이라는
도서를
만들어
주었다
그로부터
한달뒤
그녀가
죽은직후
실록에서는
기가막힌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월산대군
이정의처
승평부부인
박씨가
죽었다
왕에게
총애를받아
잉태하자
약을먹고
죽었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그녀의
간통과
관련된
사실들은
이렇듯
대부분
카더라식의
사론으로
편집돼있다
폭군
연산군에
대한비난과
국법을
어긴
불심깊은
여인에
대한복수가
동시에
이루어
진것이다
하지만
주변정황
으로
볼때
이를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월산대군
부인은
연산군보다
적어도
스무살이상
연상인
50대
여인이었고
평생아이를
낳지못했다
모정에
굶주린
연산군에게
있어서
친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승평부
대부인이라는
시호가
내려질무렵
월산대군
부인은
위중한
병에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였다
그녀가
죽기한달전
연산군은
큰어머니에게
대라는
글자를
더내렸고
그녀가
죽기1주일
전에는
박원종으로
하여금
누이의병을
극진히
간호하라는
명까지
하달한다
후일
박씨의아우
박원종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주역이었다
연산군이
폐위된이후
두사람의
관계가
간통에서
음독자살로
둔갑한다
박원종이
나름
누이체면을
살려준다
중종실록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월산대군
부인이
연산군에게
치욕을
당한후
동생
박원종으로
부터
왜참고
사는가
약을마시고
죽으라는
독촉을받고
자살했다
월산대군
부인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연산군의
신임을받아
높은벼슬에
올랐던
박원종에게는
연산군을
배신하고
반정을
주도할만한
결정적인
명분이
필요했다
연산군을
어린
시절부터
돌보았으며
연산군
으로부터
큰신망을
얻은
누이와
폐주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반정행위가
정당화
될수없었다
자기행위도
정당화하고
누이체면도
살리고
일거
양득이다
박씨는
34살되던
해에는
한명의
자녀도없이
남편과
사별하고
말았다
연산군5년
1499년
에는
왕의세살된
큰아들도
맡아서
기르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부탁
때문이었다
당시
마흔다섯
살의
박씨는
비록
자기자식은
아니지만
여동생의
딸과
연산군의
큰아들을
키우며
나름대로
행복했다
연산군의
큰아들은
일곱살되던
연산군9년
1503년
세자로
책봉되면서
궁궐로
돌아갔다
당시
박씨의나이
마흔아홉살
이었다
박씨는
세살부터
일곱살까지
4년을
직접키운
연산군의
큰아들에게
정이깊게
들었다
연산군의
큰아들이
보고싶을
때마다
박씨는
궁으로
들어가곤
했다
연산군은
입궁한
큰어머니
박씨를
자주찾았다
큰아들을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쌀과면포를
하사하는
일도
자주있었다
심지어
어떤때는
함께밤을
지새우는
일도있었다
당연히
연산군과
박씨를두고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게다가
박씨의
입궁에
뒤이어
남동생
박원종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하자
소문은
더더욱
기승을
부렸다
박원종은
마흔살이
되던해인
연산군12년
1506년6월
정승급인
숭정대부에
올랐다
숭정대부를
받은직후
박원종은
자청해
함경도
관찰사가로
떠났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쯤지난
7월3일에
박원종은
연산군
으로부터
누나박씨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니
직접
간병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7월20일에
박씨는
쉰두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야사에선
연산군에게
성병을옮아
자결
하였다고도
한다
지금은
의학을
힘을빌어
50대몸짱
아줌마도
있지만
당시50대는
완전히
할머니였다
50대의
박씨가
아이를가져
자결했다거나
성병에
걸렸다는
것은
불교를
믿었던
그녀에대한
유생들의
질시와
연산군을
패륜아로
엮을려는
반정
공신들의
음모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