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萬曆) 경신년(1620, 광해군 12) 겨울에 비천 박공이 태창(泰昌)이 승하(昇遐)한 데 따른 진위사(陳慰使)의 사명을 띠고 장차 연경(燕京)으로 떠날 예정이었는데, 그 하루 전에 내가 향리에서 입경(入京)하여 공을 찾아뵈었더니, 공이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윽고 밤이 되자 나에게 이르기를, “내가 그대의 어떤 글을 읽어 보았는데, 나의 뜻과 완전히 계합(契合)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 그대에게 나름대로 부탁을 하려 한다. 내가 마포(麻浦) 위에다 새로 정자 하나를 지었는데,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별칭임)의 시에 나오는 뜻을 취하여 수명(水明)이란 편액(扁額)을 내걸고는 아침저녁으로 거기에서 노닐고 있다. 지금 비록 먼 길을 떠나게 되었지만, 다시 돌아와서는 곧바로 벼슬을 그만두고 여기에서 노년(老年)을 보내려고 하니, 그대가 나를 위해 기문(記文)을 지어 주었으면 한다.” 하였다.
그리고는 그동안 역임한 각종 관직을 차례차례 서술하며 열거한 뒤에 그것을 종이 한 장에 써서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정자의 기문을 쓰는 데에 이런 것들을 모두 열거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대가 나의 마음 자취를 알아 두고서 천양(闡揚)해 주기를 바라는 뜻이 있기에 그런 것이다.” 하기에, 내가 삼가 그렇게 해 보겠노라고 응낙을 하고서 물러나왔다. 그런데 부탁한 그 뜻이 너무도 중하기만 하기에, 오래도록 계속 미루기만 하고 마무리를 짓지 못하였는데, 이듬해 여름에 공이 그만 바다 가운데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에 내가 그 소식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며 옛날의 그 종이를 다시 찾아 들여다보니, 완연(宛然)한 하나의 행장(行狀)이었다. 아,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그 뒤에 여러 자제들이 공의 유발(遺髮)과 의관(衣冠)을 받들어 양주(楊州) 관아 동쪽 비암산(鼻巖山) 선영(先塋) 뒤쪽의 정남향 언덕에 봉분을 세워 장사를 지내었다. 그러고 나서는 공의 맏아들인 관찰군(觀察君)이 매번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선인(先人)의 행적에 대해서는 그대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돌아보건대, 정자의 기문을 짓는 일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묘비명을 지어 주는 일이야 어떻게 그대가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아, 내가 공의 지우(知遇)를 받고서도 오래도록 약속을 지키지 못하다가 이제는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고 말았으니, 또 어떻게 이 요청까지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이서(彛叙)요, 자는 서오(敍吾)이며, 비천(泌川)은 자호(自號)이다. 박씨는 본디 밀양(密陽)의 대성(大姓)인데, 고려의 대광(大匡)인 밀천군(密川君) 박윤문(朴允文)으로부터 시작해서 대대로 현관(顯官)을 배출하였다.
증조 휘 환(渙)은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를 추증받았고, 조부 휘 덕로(德老)는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추증받았고, 부친 휘 률(栗)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이조 참판을 추증받았는데, 모두 공으로 말미암아 추증되는 은택을 입게 된 것이었다. 모친인 증 정부인(贈貞夫人) 이씨(李氏)는 종실(宗室)인 영양수(永陽守) 이춘복(李春福)의 딸인데,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 16) 8월 15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9세 되던 해에 부친을 여의었다. 이에 모부인(母夫人)이 매우 엄하게 교육을 시켰는데, 공이 또한 그 가르침을 명심하고 뜻을 가다듬으면서 문예(文藝) 방면에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 21)에 반시(泮試 알성 문과(謁聖文科))에서 등제(登第)한 뒤, 권지 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를 거쳐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으로 선발되었다. 이어 추천에 의해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임명되었고, 관례에 따라 사직(史職)을 겸대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병조 좌랑으로 승진되었다가, 얼마 뒤에 왜란(倭亂)을 맞게 되었다. 이에 분조(分朝)에 배종(陪從)하여 순찰사(巡察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해서(海西) 지방의 양향(糧餉)을 관장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대부인(大夫人)이 송화현(松禾縣)의 여사(旅舍)에서 우거(寓居)하던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병란으로 황폐해진 데다가 기근까지 겹쳤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모두 상례(喪禮)를 간략하게 행하곤 하였는데, 공은 장사를 지내고 제사를 올릴 적에 물품을 모두 갖추어 마련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피눈물로 삼년상을 행하면서 채소 국물도 입에 대려 하지 않아 몸이 삭정이처럼 마른 채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일컬었다.
상복(喪服)을 벗고 나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예조 좌랑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병신년(1596, 선조 29)에 다시 정언으로 복귀하였다. 이때 왜노(倭奴)가 속임수로 화의(和議)를 요청하자, 그 진위(眞僞) 여부를 탐색하기 위하여 장차 사신을 보내려 하였는데, 공이 상소하여 원수인 왜적과는 화해할 수 없다고 극력 반대하였으므로, 묘당(廟堂)의 의논과 크게 어긋나게 되어 결국은 해서(海西)의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화의에 대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천병(天兵)이 대대적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는데, 공이 홀로 번잡한 지역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양향을 조달하고 운송하는 일을 무난하게 조처하였으므로 군민(軍民) 모두가 그 덕분에 구제될 수 있었다. 조정에 돌아와서 다시 정언이 되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기해년(1599, 선조 32) 가을에 이이첨(李爾瞻)이 또 사론(士論)과 반목하여 갈등을 빚는 가운데, 홍여순(洪汝淳)이 바야흐로 중임(重任)을 위임받고 권세를 휘두르자, 공이 동지들과 이에 항거하며 차자(箚子)를 올려 논핵하다가, 여기에 걸려들어 폐출(廢黜)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여강(驪江)에서 8년 동안이나 숨어 살게 되었는데, 맑고 검약한 생활을 하면서 오직 경훈(經訓)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삼았다.
정미년(1607, 선조 40) 여름에 대사령(大赦令)이 내려짐에 따라 다시 서용(敍用)되어 조정에 돌아왔다. 관례에 따르면 앞서 천거받은 사실이 적용되어 전조(銓曹)의 낭관(郞官)으로 맨 먼저 의망(擬望)되어야 마땅했으나, 갑자기 승진되면서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맡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체찰사(體察使) 막부(幕府)의 종사관과 해서(海西)의 순안어사(巡按御史)로 외방에 나가게 되었는데, 이 역시 내직(內職)에 몸담고 있기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광해(光海) 초에 사간(司諫)으로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이때 완평상(完平相 완평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봉호임)이 폐정(弊政)의 개혁을 의논하여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자, 공이 여기에 낭료(郞僚)로 선발되었는데, 그 당시에 강구하여 정한 각종 법규들이 지금까지도 유지되어 기민(畿民)들이 혜택을 받고 있다. 그 뒤 응교(應敎)로 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며, 호조와 병조와 이조의 참의(參議)를 두루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신해년(1611, 광해군 3)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으면서 전시(殿試)의 고관(考官)으로 참여하였는데, 임숙영(任叔英)이 직언한 책문(策文)을 급제시켰다가 죄에 걸려 체직(遞職)되었으며,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있다가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직질(職秩)의 기한이 차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는데, 다시 외직(外職)을 구하여 담양 부사(潭陽府使)에 제수되었다. 이때 전조(銓曹)가 의망을 다시 고치는 바람에 조정에 돌아와 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공의 뜻이 아니었다.
특진되어 품계가 올라 이조 참판에 임명되면서, 비변사 유사 제조(備邊司有司提調), 훈련도감 제조(訓鍊都監提調),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임하였다. 품계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올랐다.
계축년(1613, 광해군 5) 이후로는 권간(權姦)이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며 한세상을 지배하였으므로 공이 청요직(淸要職)에 몸을 담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관찰군(觀察君) 역시 권념(權淰) 등이 정조(鄭造) 등을 성토하며 배척하는 의논을 극력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유감을 가진 무리들이 마치 고슴도치처럼 털을 세우고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한찬남(韓纘男)이 또 공이 사적(私的)으로 공전(公田)을 점유하였다고 무함을 하자, 대론(臺論)이 번갈아 일어나면서 공의 부자(父子)를 국문(鞫問)하여 다스려야 한다고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이토록 심하게 극성을 부리는 속에서도 공은 안색이나 말투 하나 변하는 일이 없이 태연하기만 하였다.
광해가 처음에는 공을 삭직(削職)시키도록 허락하였다가, 그 뒤에 공전에 대한 일을 재삼 조사해 보아도 끝내 소득이 없어 대론이 수그러들자, 비로소 서반(西班)에 복직시키도록 명하였다. 그 뒤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나가 한 해를 넘겼을 때, 마침 이창후(李昌後)가 관찰사로 부임하여 형편없이 탐학(貪虐)한 짓을 자행하자, 공이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병을 칭탁하고 파면되어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시 서반에 몸을 담고 있을 때, 진위사(陳慰使)로 차임(差任)되었는데, 이것 역시 권신(權臣)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공의 나이가 벌써 60이었고, 요동(遼東) 가는 길도 오랑캐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으므로, 친척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병을 칭탁해서 거절하라고 청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것은 신자(臣子) 된 의리상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내가 이 길을 떠나지 않더라도 중상(中傷) 받는 일을 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고는, 마침내 길을 떠나 연경(燕京)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요동 땅이 오랑캐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황조(皇朝)에서 해로(海路)를 통해 귀국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는데, 해로의 통행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가 벌써 200년이나 되는 때였다. 그래서 산해관(山海關)에서 길을 떠나 동쪽으로 바다를 건널 즈음에 뱃사람들도 그 길이 얼마나 험하고 평탄하며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를 알지 못하는 형편이었는데, 철산(鐵山)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태풍을 만나고 말았다.
이에 함께 가던 배가 방향을 바꿔 여순(旅順) 어귀 쪽으로 피하면서 깃발로 신호를 보내며 공의 배를 불렀지만 공은 일절 응하지를 않았는데, 이는 요동 땅이 이미 오랑캐의 손에 들어간 만큼 그 해안에는 정박하고 싶지 않다는 공의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는 공이 어디에서 최후를 맞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게 되었으니, 그때가 신유년(1621, 광해군 13) 5월 10일이었다. 아, 생각하면 비통한 일이다.
공은 나라의 일을 행하다가 죽었다고 하여, 애도(哀悼) 속에 자급(資級)이 뛰어올라 추증되었고 임금으로부터 후한 제사도 내려졌는데, 이는 묘당의 의논을 따른 것이었다.
공은 천품이 엄중하여 말하고 웃는 것도 모두 때에 맞게 하였다.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도 보통 사람의 식견을 멀리 뛰어넘었으며,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맡게 되더라도 칼 놀리는 솜씨가 절로 여유롭기만 하였다. 그리고 학문을 좋아하여 저술에 힘쓰는 일을 노년에 이르기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친을 여읜 뒤로는 늘 수심(愁心) 어린 기색이 떠나지 않았으며, 표모(表母)인 이씨(李氏)에 대해서 혼정신성(昏定晨省)하며 공양하기를 한결같이 자친(慈親)과 같이 하였다. 또 형인 첨지(僉知) 박천서(朴天敍)가 늙어서 가난하게 살자, 공이 근방의 집 한 채를 매입하여 살게 하고는 아침저녁으로 보살펴 주며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였고, 사당에서 제사를 올릴 때에도 자신이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대신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첨지의 아들인 박호(朴箎)가 시신(侍臣)으로 장수의 막부에서 종사하다가 임진년에 상주(尙州)의 전역(戰役)에서 의롭게 순국(殉國)하였다. 그런데 갑오년(1594, 선조 27) 봄에 공이 그가 죽은 곳을 알고 있다는 패졸(敗卒)을 만나 보고는 그 즉시로 그와 함께 그곳을 찾아갔는데, 그 자취가 이미 매몰(埋沒)되었으므로 글을 지어 통곡하고 제사를 지낸 뒤 초혼(招魂)을 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당시에 길을 나서기만 하면 도적들에게 약탈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여행하는 것을 무척이나 어렵게 생각하고들 있었다. 그런데 공이 바야흐로 거상(居喪)을 하느라 기력이 다 빠진 수척한 몸으로 조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屍身)을 찾으려고까지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
공은 평소 조정에 서서 논의를 할 적에 구차하게 영합하려 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오직 의리에 입각하여 논하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 광해가 처음 정사를 펼친 수 년 동안 잇따라 청요직(淸要職)에 있었는데, 그 당시에 선류(善類)를 극력 끌어 모으면서 간사한 자들을 탄핵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이이첨(李爾瞻)으로부터 심하게 질시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시사(時事)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무옥(誣獄)이 잇따라 일어나 참혹한 화란(禍亂)을 빚게 되었는데, 그때에도 공이 주선(周旋)을 하며 구제해 준 결과 온전히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으며, 사림(士林)에서도 공을 의지하여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금용(金墉)이 다행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나 백마(白馬)의 침몰을 면할 수 있었던 것도 대체로 보면 거의 대부분 공이 힘써 준 덕분이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공 자신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 4) 가을에 이이첨의 두 아들이 모두 위과(僞科)에 급제되었다고 하여 경축하는 자리를 베풀자 온 조정이 들썩거릴 정도였는데, 이이첨이 공을 반드시 그 자리에 나오게 하려고 직접 집에까지 찾아가서 요청을 하였다. 이때 공은 치질(痔疾)로 고생하고 있었으므로 더러운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는데, 이이첨이 억지로 청하여 들어가 보고는 이불을 들추고서 상처를 어루만지는 등 다정한 뜻을 곡진하게 표시하고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이 끝내 그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공이 철저하게 사악(邪惡)함을 미워한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문밀(文密)의 두 집안과는 공이 본래 평소부터 친하게 지내 오던 사이였다. 그런데 두 집안이 척리(戚里)로 은총을 받게 되면서부터 이이첨과 삼각(三角)의 형세를 이루기 시작하였는데, 공은 옛날의 우호 관계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흉악한 의논을 배격할 때에는 상당히 조력(助力)하는 태도를 보이곤 하였다. 그러다가 혼란스러운 상황이 극에 달한 나머지 두 사람 모두 바로잡아 구원해 낼 수가 없게 되자 공이 이를 대단히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부자(父子)간에 늘 서로들 몸을 깨끗이 하여 한가한 곳에 물러나 살자고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는 다시 그 사이에 더러운 자취를 남기지 않으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수명정(水明亭)이라는 이름 속에 담겨진 은미(隱微)한 뜻이다. 아,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공의 배필인 정부인(貞夫人)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군수 이사율(李士栗)의 딸이다. 온화하고 공손하며 인자하고 베푸는 성격으로 공의 뜻을 잘 받들다가 공보다 18년 앞서서 갑진년(1604, 선조 37)에 죽었는데, 공과 같은 묘역(墓域)에 묻혀 있다. 부인은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관찰군(觀察君) 박로(朴𥶇)이고, 차남 박진(朴)은 생원이며, 장녀는 관찰사 윤지경(尹知敬)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생원 송길룡(宋吉龍)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으로 4남이 있으니 박전(朴筌), 박범(朴範), 박잠(朴箴)이고, 2녀가 있으니 훈도(訓導) 이한룡(李漢龍)과 생원 심뉴(沈紐)가 사위이다. 관찰군은 7남 2녀를 두었다. 아들 박수소(朴守素)는 현재 의금부 도사이고, 박수초(朴守初)는 학업을 닦고 있고, 박수현(朴守玄)은 진사로 지금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이고, 박수고(朴守古)는 진사로서 재주가 있었는데 일찍 죽었고, 박수화(朴守和)는 박진(朴)의 후사(後嗣)가 되었고, 박수허(朴守虛)와 박수충(朴守沖)은 모두 학업을 닦고 있다. 윤 관찰의 아들 윤집(尹鏶)은 문과(文科)에 등제하여 현재 함평 현감(咸平縣監)으로 재직중이다. 이 밖에 내외의 손자와 증손으로 모두 90여 인의 남녀가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달도 지금 하현을 넘어서서 / 月過下弦
산하가 칠흑처럼 어두운 이 밤 / 湖山夜黑
저기 우뚝 솟은 남쪽 봉우리에 / 倬彼丙岑
달빛이 교교하게 뿜어 나오네 / 爰吐英魄
어룡은 박수치며 뛰어오르고 / 魚龍抃踊
망량은 물 밑으로 몸을 숨기나니 / 魍魎潛匿
누대에 오르신 우리 공께서 / 公在樓居
한 가닥 마음을 서로 비춰 주시는 듯 / 寸心相照
어둡게 함으로써 밝게 빛나고 / 用晦而明
숨어 살면서도 저절로 드러난 분 / 處幽自燿
아 청량(淸涼)한 공의 혼백이여 / 惟玆精爽
죽어도 없어지지 않으셨으리 / 歿而不亡
공의 속마음 내가 잘 알아 / 我識公衷
공의 안식처에 하나의 글 지었나니 / 而表公藏
저 물도 저 달도 영원히 존재하듯 / 水續月恒
천고토록 밝은 빛을 뿌리시리라 / 千古逾光
첫댓글 공의 배필인 정부인(貞夫人)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군수 이사율(李士栗)의 딸이다. 온화하고 공손하며 인자하고 베푸는 성격으로 공의 뜻을 잘 받들다가 공보다 18년 앞서서 갑진년(1604, 선조 37)에 죽었는데, 공과 같은 묘역(墓域)에 묻혀 있다. 부인은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관찰군(觀察君) 박로(朴𥶇)이고, 차남 박진(朴)은 생원이며, 장녀는 관찰사 윤지경(尹知敬)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생원 송길룡(宋吉龍)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으로 4남이 있으니 박전(朴筌), 박범(朴範), 박잠(朴箴)이고, 2녀가 있으니 훈도(訓導) 이한룡(李漢龍)과 생원 심뉴(沈紐)가 사위이다.
관찰군은 7남 2녀를 두었다. 아들 박수소(朴守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