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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30 금요일 감이당. 반야심경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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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 스님의 반야심경 강의
2024. 08. 30. 감이당
공이라고 하는 말을 약간 완전히 유사하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는 것인데 이 단백질 가지고 약간 설명을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단백질 설명하는 아니고, 우리가 음식물을 섭취할 때 단백질을 섭취해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고기라든가 육류를 안 먹으면 단백질을 어떻게 하느냐고 이렇게 질문을 하긴 하는데 사실상 소화 과정을 지켜보면 아무도 단백질을 드시는 분이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단백질로 된 음식물이 있는데 육류는 단백질이 좀 농축돼 있고 예를 들면 김 100g하고, 소고기 100g을 놔두고 같은 100g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더 단백질이 많으냐고 했을 때는 김이 더 많습니다. 저희가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는 게 아니고 단백질을 굉장히 많이 섭취하는데 물론 김을 100g 먹으려면 이만큼인데 아무도 먹을 수가 없죠. 그런데 소화 과정에서 우리가 이 단백질을 만드는 재료인 아미노
산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소화 과정에서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전부 다 분해합니다.
그러니까 실제 소화되고 난 이후에는 아미노산만 있지 단백질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미노산을 어떻게 섭취하느냐 하면은 사람에게는 아미노산 20가지 몇 개 중에서 대부분은 우리 몸에서 뭘 만들어내는데 몇 가지 필수 아미노산이라
해서 인체 자체적으로 생성하지 못하는 이런 것들이 있어서 그런 것을 외부에서 이렇게 음식을 통해서 섭취를 하긴 합니다.
바꿔 말하면 소의 단백질이 우리한테 들어오면은 소의 단백질이 있는 게 아니고 소의 단백질이라고 하는 현상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색이에요. 소의 단백질은 색입니다. 그런데 소화라는 특수한 과정을 거치면 단백질이 공이 돼요. 단백질이 사라져요. 남는 것은 뭐만 남는 거냐 아미노산이 남습니다.
이 아미노산이 어떤 순서로 배열되느냐에 따라서 단백질의 어떤 뭐가 되는데 소의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의 배열 순서하고 사람의 몸을 이루는 아미노산의 단백질 순서가 다르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단백질을 취하는
많은 생명체들이 이처럼 배열 순서를 달리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단백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몸에 들어오면 굉장히 많은 일을 하는데 만일에 소라고 하는 형질을 만들어내는 이 단백질을 그대로 우리가
섭취하게 되면은 그것이 하는 일이 자칫 잘못하면은 사람의 일을 하지 않고 소의 일을 할 수가 있답니다.
그래서 단백질을 공화시켜서 아미노산을 만든 다음에 이 아미노산을 가지고 사람의 일을 하는 단백질로 다시 재조립을 한다는 거예요.
단백질이라는 것은 없는 게 아니라 있기는 하는데 그 다른 단위로 보면 아미노산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그래서 단백질의 본질이 있느냐 물어보면 현상할 때는 단백질이라 하는 것으로서의
성질과 그다음에 일을 하고 있지만 다른 상태로 보면 바로 사라져버려요.
그러면 소화하는 과정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단백질이 없어졌어요. 근데 없어졌느냐 하면 없어진 게 아니죠. 다시 거기서 새롭게 재결
합을 하면 또 단백질이라는 게 나오는 거죠.
만일에 단백질이라고 하는 것이 완벽하게 자기 본질을 가지고 있어서 소에서 쓰이는 단백질이나 사람에 쓰이는 단백질이 전혀 다름이 없다라고 하면은 단백질이라는 본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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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단백질이라는 본질이 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백질이 없는 건 아니죠.
제법 공상을 말할 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말하죠. 일체의 모든 공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단백질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근데 그것이 본질적 단백질이냐라고 하는 것을 따져 물어보면 본질로서의 단백질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것들이 이렇게 현상하고 있는 물질계에서만 그러느냐 실제 내용에서는 굉장히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굉장히 추상적 산물들도 거의 대부분 그렇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남자라고 하는 것은 이래, 여자라고 하는 것은 이래."라고 하는 말을 아마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중에 남성들은 아시겠지만 고속도로 가다가 중간 휴게소 화장실 들어가 보면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이런 것이 써져 있죠. 그러면 남자의 정체성을 말할 때 우선 울면은 남자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다음에 혹시 소변기 밖에 오줌을 싸면은 그것도 남자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거의 남자란 무엇인가라고 정의 되어진 것이 이 범주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문제로서 이번 올림픽에 권투 선수 두 분이 생물학적으로는 생식세포가 XY인데 여성으로 살아와서 이 사람이 여성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러한 제기가 이번 올림픽에만 있었던 게 아니고 그전에도 있었더라고요. 그 말은 XY라고 하는 성염색체를 가지면 반드시 남성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아니라고 말해주는 경우거든요.
XY라는 염색체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 자체가 곧 남성의 본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물론 중요한 요소인 것은 맞지만 반드시 그것이
필요하다라고 할 때 이 반드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XY중에서 이 염색체는 거의 남성성의 형태를 결정하는 유전자 한 200개를 제외하면은 거의 다른 유전자가 없어요. 근데 X 염색체에는 그것보다 한 10배 많은
한 2천여 개의 굉장히 다양한 생식 과정에 참여하는 유전자가 여성의 형태를 결정하는 어떤 것 말고도 다른 것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X만 가지고 있는 성염색체를 가지고 있는 분은 여성으로서 일생을 그냥 살아갈 수가 있어요. 그냥 그 X라고 하는 성염색체 중에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유전자가 다 갖춰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수정을 할 때 X가 빠지고 Y만 수정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Y에 있
는 염색체가 한 200개밖에 안 되는데 이 성의 어떤 특징을 결성하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어서 삶을 살아낼 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 커갈 수가 있는 형태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권투 선수 같은 분들은 XY인데 이 Y에 있어야 할 어떤 스위치가 이 스위치는 임신 한 6주 경에 켜져요. 임신 6주 되기까지는 X든 XY든 남성 여성으로 아직 결정이 안 됩니다.
이 6주에 Y 염색체상에서 남성 호르몬을 방출하세요'라고 하는 스위치가 딱 켜지는 순간부터 아기가 남성으로 되어갑니다. 근데 그분은
이 Y 염색체상에서 그 스위치가 꺼져 있거나 아니면 작용을 안 하도록 어떻게 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 이 아이는 Y가 작용을 하지 않으니까 X가 저절로 작용하면서 여성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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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성의 정체성, 남성의 정체성 즉 여성의 본질과 남성의 본질이 있는가? 남성도 있고 여성도 있는건 확실해요.
●●그런데 X 염색체나 염색체 하나만 가지고도 그와 같은 상태로 바뀌기 때문에 완전한 본질로서의 남성, 완전한 본질로서의 여성은 원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은 공한 거예요.
근데 그 공한 상태에서 특수한 인연이 되면 남성이라고 하는 형태로 여성의 형태로 현상하는 이것이 색이에요.
●●그래서 《본질적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아까처럼 남성은 이러이러하다 여성은 이러이러하다는 말을 하지만 본래 그런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정체성을 훈련받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그 사회에 남성이나 여성의 특수한 문화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정체성을 교육받아서 교육받고 학습된 것이지 정해진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전혀 우리하고 교류가 없던 어떤 나라에 가보면 '남자가 왜 저래?'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제가 이 미얀마에 처음 가보니까 미얀마의 남자들은 치마를 대부분 다 입고 있더라고요. 수행 센터에서. 치마도 그냥 우리같은 치마가 아니고 그냥 이렇게 통으로 됐어요. 그래서 톡 걸치고 그다음에 이렇게 이렇게 딱 해서 이렇게 하면은 그냥 옷이 되더군요.
여자분들도 그런 거 입고 , 다양하긴 한데 남성들도 우리처럼 바지 같은 건 안 입더라고요. 그러면 처음 보면 남성이 치마를 입고 있는 것이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거기에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옷을 입어왔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죠. 아마 제가 말을 안 했지만 그런 말을 했다라고 하면은 저의 시선이 대단히 이상
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옷을 어떻게 입어야 된다라고 하는 이 정체성조차도 실제로는 학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집니다.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도 몇 번 했는데 한 17~8세기에 유럽에 잘 사는 집안에 어린아이의 꾸민 방이 있는데
남성을 꾸민 방은 전부 다 핑크가 돼 있더라고요. 여성을 보면 전부 다 청색으로 되어 있어요. 근데 요즘 우리하고는 완전히 반대잖아요. 그 나라도 이미 이렇게 반대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어떨 때는 남성이 핑크 아닌 것을 입으면 남성의 정체성에 어긋난 그런 문화가 있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시기에 뭔가 바뀌어서 그걸 연구
하신 분들은 알겠지만 바뀌어서 갑자기 남성이 핑크색을 입으면 남성의 정체성에 어긋나는 것이죠. ●●근데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에요. 학습되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본질이 아니에요. 이런 것이 문화적인 것 하나만 있겠습니까?
호모 사피엔스라고 하는 사람은 현생 인류는 약 2-30만 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근데 그 이전에는 호모 사피엔스라고 하는 종에 본질이 없어요.
그보다 좀 올라가서 한 100만 년쯤 가면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라고 하는 우리 선조가 있는데 이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왜 중요하냐면 네안데르탈인이나 그밖에 또 저쪽에 시베리아에 있는 어떤 종 그다음에 호모 사피엔스의 직접적인 조상이에요. 그래서 한 100만 년 전에 있을 때 나타나셨는데 아프리카에서 그렇게 해서 한 몇십 년 사시다가 아프리카에서 그중에 지금부터
한 60만 년 전에 일부가 유럽 쪽으로 갑니다. 근데 이때 갈 때까지만 해도 내가 내일 어디로 간다라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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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추상적 사고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유럽까지 가게 됩니다. 그건 어떤 거냐면은 마치 우리 철새들이 기후 등등의 조건에 따라서 서식지를 옮기듯이 그때 우리의 선조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의 일부는
그런 식으로 점점 여러 영향을 따라서 유럽까지 갑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기후 문화하고 유럽에 있는 기후하고는 굉장히 다르니까 내부적으로 DNA 등등의 어떤 환경 영향 등을 받아서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누가 되냐면 네안데르탈인이 됩니다.
그다음에 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분들은 몇십 년 지나면서 호모 사피엔스로 바뀝니다. 그래서 한 2~30만 년 전에 그러니까 60만 년 전에 두 그룹으로 나눠져 있고 그
뒤로 한 30만 년 동안 각기 다른 환경에 처해지면서 우리가 말하는 같은 인류긴 인류인데 좀 다른 그런 인류가 나오죠.
그전에 우리가 인류를 말할 때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에 비해서 머리가 좀 떨어졌다. 두개골도
크고 힘만 세지 사용 능력이 많이 떨어져서 멸망했을 것이다. 멸망의 여러 조건이 있는데 그중에 그런 것
을 들고 있었는데 근래에 나온 책들에는 네안데르탈인이 전혀 그러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한 6만 5천 년 전에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동굴이나 그 밖의 주변의 유적을 살펴보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뭐냐면 조상을 묻어요. 조상을 묻는데 조상을 어떻게 묻느냐 하면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처럼 돌아가신 분을 몸을 태아처럼 둥그렇게 만들고 그다음에 거기다가 붉은 황토칠을 합니다. 근데 이때가 6만 5천 년
전에 어떤 무덤에 계신 분이 발견이 돼서 그 형태를 보니까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럴 때 이것을 고고학자들이 생각을 하기를 6만 5천년 전에 네안데르탈인들은 이미 사후 세계를 추상했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분이 어린애 모양을 하고 붉은 피죠. 피로 이렇게 해놓으면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데 그런 연결점을 갖는다고 하는 그런 사고를 했어요
6만 5천 년 전에는 어떠했냐면 호모 사피엔스라고 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J 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책이 나왔죠.
거기 제1장에 인지혁명이라고 그럽니다. 인지 혁명은 한 7만 년 전에서 한 3만 년 사이에 일어
났다고 하는데, 그 인지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은 뭐냐 하면은 화폐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화폐가 만원이다.
근데 이 만원은 이 화폐에 전혀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 만원을 우리 같이 사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인정해 주는 데 있어요. 본질이 화폐에 있는 게 아니고 그 시대를 같이 산 사람들에 의해서 이건 만원이야 라고 함께 쓸 때 비로소 그것이 만원이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생각을 내기 전에는 이 화폐는 만 원이라는 것이 지금 전부 다 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계신 대부분들이 갑자기 오늘부터 우리는 이 조개 껍데기를 가지고 쌀 한 가마니와 맞바꾸기로 한다는 어떤 동의를 갖게 되면 그 조개껍질이나 특별한 것이 요즘 말하는 화폐의 가치를 통해서 뭐가 일어나는데 그렇게 된 것이 인지 혁명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추상적 사고를 하게 된 것이 현생 인류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런 것들이 그 책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도 결정코 뒤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내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를 제외하고는 존재한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게요. 존재한다고.
내일은 우리의 사유 속에 있어요. 그러면
내일만 그러느냐 경험된 과거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유 속에만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사유 밖에서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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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내일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어제가 없었다고 말하지 않고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유를 제외하면 어제도 존재하지 않고 내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걸 시간으로 맞춰보면 현재라는 상황 속 상황을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가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경험하는 순간 이미 경험했다라고 하는 순간 현상과 사유는 괴리가 벌어지기 시작하거든요.
의식된 어떤 것들도 실 내용상에 있어서는 그것이 본질로서 우리하고 접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는 것은 또 아니죠. 이런 상태를 공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1980~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번역이 돼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던 걸로 저는 알고는 있습니다. 그 책이 어떤 책이냐면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프리초프
카프라라고 하는 분이 쓴 책인데 그 책의 내용이 고전 역학에서 양자 역학으로 새로운 역학의 범위가 굉장히 확대되죠. 그러니까 고전 역학 플러스 양자으로 확대되는 겁니다.
이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휠씬 더 정밀하게 현재를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이 하나 생긴 거죠. 양자 역학이라는 걸 통해서.
그런데 이 양자의 상황을 보면 굉장히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요즘에 양자 컴퓨터하고 일반 컴퓨터하고 비교를 하면서 일반 컴퓨터를 쓰고 있는 큐비트는 1이든지 0이든지입니다. 그래서 10 , 01 이런 식으로 쓰면, 그걸 가지고 특수한 정보를 읽어내는 그런 역할을 하는데, 양자 컴퓨터와 차이는 그 양자가 0이면서 동시에 1이 됩니다. 이걸 중첩이라고 부르고. 그러니까 우리 사고 속에는 1이거나 0만 지각됩니다. 근데 0 이면서 1인 것은 결코 우리의 지각 이미지로서 마주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으로 그릴 수는 있지만 이것을 이
미지로 그릴 수는 없어요. 이 실험이 무엇하고 똑같으냐면은 아마 양자의 특성이 입자냐 파동이냐라고 하는 실험을 할 때 작은 이 구멍인데 둥그렇게 뚫려 있으면 영어로 홀이라고 부르고 이렇게 길이로 길게 있으면 그것을 슬릿이라고 이렇게 해서 그것은 영어로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는 구멍이 좀 길게 나와 있는
두 개의 슬릿을 통과시켜서 파동이라고 하는 결과를 발생시키고 또 하나만 통과했을 때는 입자라는 결과를
발생시키는데 그때 한 말이 이 통과하기 전에 양자죠. 이 통과하기 전에 양자는 실제 0도 아니고 1도 아닌 거죠.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관측 도구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갑자기 이것이 파동으로 나타나고 또 입자로도 나타나는 거예요. 근데 이 전에 상황은 우리가 그냥 파동이면서 입자다 이렇게 말은 하고 있는데 사실상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거죠.
그러나 이 상태가 없는 건 아니죠. 근데 관측
이라는 특이한 조건을 가하면 여기에서 파동이나 입자가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색이라고 그랬어요. 나타나는 것은 색이에요. 근데 나타나지 않는 것을 공이라고 말하죠. 그런데 이 나타난 것을 또
공이라고 말하죠. 색즉시공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색즉시공이냐면 아까 단백질 말할 때 단백질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단백질의 본질이 없어요. 아미노산을 특수하게 조립하면 거기서 창발적으로 플러스돼서 뭔가 나타나서 단백질이라는 형태로 변화가 일어나거든요. 단백질이 현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살펴봤더니 단백질의 본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단백질이라는 색이 현상했는데 거기에 본질이 없는 거죠. 그래서 색즉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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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불러요. 그 이전에는 단백질이 전혀 없었는데 아미노산이 특수한 상태로 조립되자마자 단백질이 나타나는 게 공즉시색입니다.
여기에 양자 상태에서는 그것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 없는 무가 있죠. 있는 상태인데
거기다가 특수한 관측자를 중간에 놓자 갑자기 파동이라는 색과 입자라는 색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입자라는 색과 파동이라는 색은 그 자체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서 이런 것으로 흘러가는 것으
로 보면 공즉시색이 되는 거고, 여기에서 이쪽으로 비본질적 사유로 가면은 색즉시공이 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물론 이런 상태를 전혀 알 수 없는 시대 분들이니까. 반야심경이 쓰여진 지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한 2천 년 가까이 되니까. 2천 년 전에 우리 선배 수행자들이나 선조들이 요즘 말하는 이런 일들을 현상적으로 경험할 수는 전혀 없었죠.
근데 이것을 2천 년 전에 분들도 경험을 했죠. 어떻게 경험을 하느냐. 그분들의 경험은 오로지 마음 관찰로서 경험한 거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아까 말한 관찰자가 뭐냐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관찰자, 양자 역학에서 이중슬릿이니 반슬릿이니 이런 것이 관찰자라고 했는데, 반야심경 시대의 관측자는 됩니까?
자기 마음을 지켜보는 거예요.
이것이 반야심경에서는 '조견'이라고 합니다.
살필 조照, 볼 견見
살펴본다. 뭘 살펴봤느냐. 우리 몸과 마음을 살펴본 거예요.
지금 상태는 내가 색입니다. 몸을 살폈어요. 아무 의심 없는 색입니다. 근데 마음 관찰을 하는 거예요. ●●마음관찰을 계속했더니 갑자기 몸의 감각지각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색이 공이 돼요.
왜냐하면 몸을 통해서 일어나는 지각상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요. 그것은 앉아 있을 때만 그런 게 아니고 눈을 뜨고 걸어가도 몸도 보이고 현상도 보이는데 몸에서 일어나는 아무런 감각 지각이 없는 거예요. 발밑에 땅을 밟고 가는 데도 여기에 아무런
그냥 아무런 느낌 없이 그냥 걸어갈 뿐이에요.
색이 있었는데 마음챙김이라는 관찰 훈련을 했더니 갑자기 몸이라는 색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것을 처음 경험할 때는 저는 이상했어요. 갑자기 그렇게 되니까. 그래서 집중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집중을 안 하자마자 몸이 돌아와요. 그러니까 몸의 감각이 사라졌는데
집중을 안 하잖아요. 관측을 바꾼 거죠. 그러니까 여기에 관측이 어떤 상태로 몸을 지켜보느냐에 따라서 색인 몸이 갑자기 공인 몸이 돼요.
아무런 지각 느낌이 없으면 그걸 우리가 있다고 할 수가 없잖아요. 몸에 감각은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관측 심리 상태를 풀자 바로 생겨나서 있습니다. 근데 그것이 다른 몸인 것처럼
되는 게 아니고 한 몸에서 아까 양자가 0이면서 1에 겹쳐 있듯이 감각 지각이 있음과 없음이 겹쳐 있듯이 특수한 조건을 가했더니 없음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랬더니 다시 그 관측한 심리적 조건을 제거했더니 있음이 나타나는 거예요. 한 몸에서 특수한 인연에 따라서 있던 몸이 없는 것 같고 없었던 몸이 있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몸만 가지고 보면 됩니까? 오온을 조견 했더니 조견오온이라고 했잖아요. 오온은 됩니까? 마음 챙김을 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은 아까 우리가 사건 사물을 볼 때 학습된 내용 학습된 본질적 사고를 전부 다 내려놓는다고 하는 거랑 똑같아요.
만일에 제가 우리나라에서 형성된 남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예를 들면 생전 못가본 어떤 나라에 가서 우리하고 전혀 다른 족 그 나라는 남성이 여성의 정체성으로 활동하고, 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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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정체성으로 활동한다고 하면은 우리가 그 사람들을 봤을 때 굉장히 이상할 텐데, 내가 학습된 나의 정체성을 다 내려놓고 보면 그냥 일어난 사건인 거죠. 반드시 남성이 반드시 여성이 그래야 될 이유가 어디에도 없는 거죠.
만일에 남성의 본질이 다 같다면 한국 땅의 남성이나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의 남성도 그래야 될 텐데, 본질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오온을 조견했더니 있는 듯한 것이 없기도
하고 없는 듯한 것이 있기도 한 거죠. 그래서 오온 중에 색수상에 색色이 몸이거든요.
그다음에 상을 말하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보고 있으면 이 부분이 좀 이런 식으로 보여요. 눈만 뜨면 보입니다. 근데 아까처럼 의식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관측자쪽의 마음이 관측자인데 마음의 관측자가 바뀌는 거예요. 상태가 지금 바뀌었어요.
그랬더니 이분이 저기 있는데 갑자기 저분이 않은 자리에서 몸이 쑥 늘어나서, 얼굴이 제 눈앞에까지 와 있는 거예요. 제가 처음 경험할 때 너무 신기해서 손으로 만져봤어요. 있을 턱이 없잖아요. 저기는 영상이 사라졌어요.
저분의 얼굴은 저기는 없어지고 저 얼굴이 지금 제 눈앞에 와 있어요. 손으로 만지는데 안 만져지고 눈으로는 보여요. 이상하잖아요. 이미지인데 눈으로 비춰진 내부 이미지인데 반드시 저기서 저렇게 보여야 한다라고 하면은 내가 어떤 관측적 마음 상태가 됐을 때도 저렇게 있어야 되는데
내 관측의 조건이 바뀌니까 갑자기 저분의 형색이 달라지는 거예요. 이것을 유전학자들이 말할 때 뭐라고 말합니까?
DNA하고 그다음에 형질이라고 그러지요. DNA가 특수한 작용을 하면 특수한 형질이 나타난다고
일반적으로 정의됐어요. 그런데 만일에 이것이 전혀 이 DNA조차도 완벽하게 본질적으로 변치 않는다고 하면은 지구상에서 종이 사라진다든가 종이 새로 생긴다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 거죠. 심지어 DNA조차도 그런 거예요.
그런데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보다 휠씬 더 비본질적인 것을 바탕으로 작동을 하
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 상태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갑자기 그림이 바뀌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떨 때는 완전히 의식 주관이 사라져요. 그러니까 마음이 엄청난 본질인 줄 알고 마음은 언제나 다 항상 이렇게 눈만
뜨면 의식만 차리면 작용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싹 사라집니다. 의식이 성성한 상태에서 갑자기 사라져요. 깊은 잠에서 사라진 게 아니고. 그러면 아무런 이미지가 형성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는 몸을
관측했더니 있었던 몸이 없는 것처럼 되고 그다음에 일상 의식으로 관측했더니, 없었던 몸이 있었던 몸처럼 되고 이것도 또한 똑같더라고요. 그래서 그것이 와 있어요. 그래서 다시 의식을 일상 의식으로 하니까 쑥 가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의식 집중하면 쑥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의식이 어떤 상태에 되느냐에 따라서 이놈이 왔다 갔다 하고 해서 그 시간에는 약간의 그런 장난을 하면서 그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조견하는 거예요. 조견오온 했더니 어떤 것도 반드시 그래야 할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고 알아. 조견오온 했더니 개공이구나 다 본질이 없구나. 오온을 조견해서 오온이 다 공한 줄을 알았다고 하는 것이 조견오온개공입니다. 그럼 그 뒷 이야기들은 전부 다 여기를 바탕으로 두고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 들면 12인연에서 제일 끝에 보면 생.노사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한테는 태어나고 죽는다라고 하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죠. 어떤 사람도 의식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와 같은 의식이 인류의 언제 생겼느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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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을 때 인지 혁명은 7만 년 전에부터 시작됐다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7만 년 전에는 태어남과 죽음을 연결시키는 추상적 생존의 양태가 사유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양상으로 탄생, 우리가 생각하는 양상으로 죽음이 없었습니다. 아픈 것은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프니까 내일 죽겠다라는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그냥 아픈 거예요.
이렇게 태어났어요. 그냥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12인연에서 생.노사 할 때 생.노사는 우리가 생각할 때 그냥 저렇게 태어나서 저렇게 죽는구나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고 사유된 생
.노사예요.
그래서 《미래 중독자》 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생물학자이면서 철학자인 프랑스 사람인데 그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거기는 7만 년 전부터 시작되지 않고 5만 8천 년 전이라고 써났어요. 5만 8천 년 전에 아프리카에 있었던 호모 사피엔스 입니다. 아까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쭉 살다가 60만 년 전에 갈라졌다가
또 몇십 년 지난 다음에 아프리카에 있는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는 유전적 변형이 일어나서 호모 사피엔스가 되고 그다음에 호모 하이델베르겐스가 지금 유럽을 가서 환경과 접하면서 유전적 변이로 인해서 네안데르탈인이 됐다고 했잖아요.
근데 네안데르탈인도 아까 말했을 때 6만 5천 년 전의 무덤에서 그냥 묻는 게 아니고
이분에 사후 세계에 생의 연속성을 사유했겠거니 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시신의 형태가 발굴됐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거기도 6만 5천 년 전이에요. 근데 지금도 보면 《사피엔스》 라는 책에는 한 7만 년 전이나
나와 있는데 이런 고고학적 발굴이 더 많아지면 그것이 한 10만 년쯤 올라갈지도 몰라요
생과 노사를 사유할 수 있게 된 인류.
■■그러니까 생과 노사를 사유하지 않을 때는 생.노사가 없는 거예요.
●●탄생과 죽음이라는 사건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건을 요즘처럼 해석하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즘에 우리가 보는 생과 노사의 사건과 한 10만 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생과 노사를 보는 것은 전혀 다른거예요. 그래서 12인연에 쭉 보다 보면 뭐라고 나와 있냐면은 생.노사도 없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제일 첫 번째가 뭐라고 했습니까? 무명이라고 합니다. 이 무명은 뭐라고 합니까? 앞에서 말한 대로 몸과 마음을 관찰했더니 어떨 때는 있고 어떨 때는 없네. 근데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라고 말해야 될 거 아닙니까? 아까 저분이 저한테 오는 거예요. 가는 거예요. 오고 갔어요. 그림자로는 오고 갔어요. 현실은 오고 간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걸 좀 바꿔 말하면 오고 가는 것 그것이 진짜 이런 것 아니겠는가.
이래서 불교에서는 이런 것을 완벽하게 깨달은 분을 즉 무명이 명이 된 분, 어둠이 밝음이 된 분
어둠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밝게 알지 못한다는 말이지 어둡다는 말하고
좀 차이가 있어요.
■■당시 인도에서는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 죽음 이후에나 가능했어요.
■■살아생전에 해탈한다는 말 자체가 부처님 이전에 인도 종교 사상계에서는 없는 말입니다. 죽어야만 해탈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해탈 방법은 , 실제로 따지면 엄밀하게 따지면 ■■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는 별 문제가 안 돼요. 뭐가 문제 되느냐 하면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 마음에 들면은 그냥 좋은 데로 보내주고 마음에 안 들면은 그냥 보내고, 이것이 미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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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1심에 있는 배심원들이 판결을 내린 것과 똑같습니다. 배심원들이 엄청 법적으로 정확히 해서 잘 따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거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구속시켜서 수사를 할 것인가 이것을 풀어주면서 수사를 할 것인가 이걸 결정하는 그런 이것만 쪽 추려서 아주 많은 통계를 냈는데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재판을 받으러 온 사람들은 한 25% 정도만 석방이 돼요. 75%는 너 같은 나쁜 놈은 감옥에 가예요.
근데 2시에서 3시에 온 사람들이 완전히 반대에요. 그 뭐냐? 내가 배가 부르냐 배가 고프냐의 차이입니다. ●●배가 불러서 기분이 좋으면 이 정도는 풀어줘.
배가 고파서 지금 짜증이 나면 이런 놈들은 감옥안에 넣어야지. 이렇게 된 판결하고 똑같다고 그 책에 쓰여 있더라고요.
우리가 굉장히 막 우월 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그렇게 안 하는데, 우리 죽음 이후를 관장하는 신께서 배가 고프면 이럴 때 나쁜데 보내고 배가 부르면 좋은 데 보낸 거예요.
근데 이분의 배를 부르게 해 줘야 되잖아요. 뭘로? 제사를 지내요. 제사를 지냈는데 이분이 그 기분도 올라가고
또 보면 지전이라고해서 막 돈을 태우잖아요. 그럼 돈을 태워서 이 돈의 기운이 돌아가서 신의 기분을 좋게 해줘요. 그러니까 최종 결정은 신이 하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근데 붓다가 나와서" 야! 그런 거 없어. 니가 결
정할 수 있어." 해탈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대요. 지금 우리들이 이 말 들으면 당연한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당시에 종교적 정체성은 절대 이 말이 성립되지 않는 사회예요. 그 어떤 놈이 나와서 그렇게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엄청 말이 안 되는 소리죠. 내가 어떤 놈이랑 하는 말은 그 당시 같은 동료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해탈하고 왔을 때 그렇게 말을 해. 좋게 하면 저 사람은 저놈은 고행을 포기한 아주 수행을 포기한 놈이랑 똑같으니까 우리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자. 이런 식으로 하다가 와서 하니까 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바뀌었잖아요.
■■그렇게 해서 살아생전에 신의 판결을 받지 않고 스스로가 해탈을 이루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납득을 통해서 교단이 커져가는 거죠. 그래서 그런 분들을 타타카타라고 불러요. 인도말로 잘 가셨다.
마음이 흔들림 없이 잘 가셨다는 뜻이에요. 무엇에서?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노래도 있지만 그런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타타가타입니다. 그래서 여거라고 쓰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갔다. 갔다 그러면 무슨 말입니까? 갔다라는 이미지는 나로부터 멀어졌다는 이미지 잖아요. 근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돌아가셔서 좋은 해탈 세계를 가는 게 아니고 지금 내 옆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분을 여거如去라고 부르면 애매해요. 그래서 갔다 오신 분이잖아요. 그래서 여래如來라고 해요.
그러니까 옛날에는 피안은 죽음 이후에나 갈 수 있는데 그 피안을 차안으로 옮겨온 거랑 똑같아요. 그러니까 종교적 해탈의 정체성이 그 이전이고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됩니까?
그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는
어떻게 됩니까? 해탈은 살아서는 없어요.
근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살아서 있지 않느냐! 마음 관측을 통해서 없던 것이 생긴 것과 똑같잖아요. ●●만일 해탈의 본질이 있고 그것이 죽음 이후에야 가능했다라고 하면은 절대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해탈을 이룰 수가 없지요. 금생에. ●●그런데 그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 특수한 본질이
있는게 아니고, 그냥 이와 같은 마음을 닦으면 그마음속에서 아까 같이 중생적 사유의 흐름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처의 사유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는 무명과 지혜가 함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선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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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이것을 극단적으로 말해서 《번뇌 즉 보리 》라고 말합니다.
■■만일에 번뇌하고 보리가 본질이 완전히 달라서 우리가 보리를 다른 특수한 상태에서만 깨달을 수 있다고 하면은 우리가 이런 상태에서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근데 보리의 본질이나 번뇌의 본질이 비본질이라고 하는 데서는 차이가 없어요. 그러니까 번뇌의 비본질성을 완전히 깨닫게 되면 갑자기 해탈을 이루는데 동시에 사유 자체가 어떠한 상태에서
도 본질 상태로 가지 않으니까 불교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집착이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집착 끊기 엄청어려워요. 본인한테는 집착을 덜할지 몰라도 자식 볼 때는 집착이 나오잖아요.
근데 무명은 앞서 말한 대로 이와 같이
《 번뇌의 본질도 공하고 보리의 본질도 공하다라고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다》라고 해요.
그러다 보니까 없던 해탈도 생겨났다고 말하고 사라지지 않는 것도 사라졌다라고 말하는 생.노사가 심리적 지각상 플러스 현실성에서 살아있게 되는 것이죠.
■■반야심경에 가장 중심적인 것은 '관'이라고 하는 말과 '조견'이라고 하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우리가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의 그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언제나 존재하는 게 아니고 형성됐다는 거, 만들어졌다는 것. 만들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추상적 사고입니다.
이 생물학적 우리 몸으로 보면 우리 몸은 DNA라고 하는 굉장히 중요한 생물의 어떤 요소를 통해서 발현이 되죠. 발현이 되는데 여러분 우리가 배웠을 때 뇌세포의 DNA 정보나 피부의 DNA 정보가 100% 일치합니다
. 그런데 이상하잖아요. 여기는 피부만 되고 뇌는 뇌세포 활동을 할까요? DNA는 똑같아요. 완전히. 이것이 DNA가 수정이 되면서 세포 분열이 일어나서 상당한 세포 분열이 일어난 상태를 배아 생긴 상태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 상태가 되면 세포가 바깥에 있는 놈, 가운데 있는 놈, 중간에 있는 놈이 형성돼요. 그때 이 세포들이 서로 이렇게 화학 물질 등등을 분포하면서 이렇게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이때 세포들의 언어는 화학물질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정자가 난자를 열심히 막 헤엄쳐서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많이 배우는데 실제로 그런 건 아니고 난자가 화학 물질을 방출해서
'내 여기 있으니 이쪽으로 오세요'라고 길을 열어줍니다. 그런데 난자들은 한 2억 마리 정도 많게는 한 2억 마리 정도가 함께 의샤의샤하는 힘이 없으면 이 작은 거리를 결코 갈 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정자 수가 적은 사람은 아이를 갖기가 엄청 힘들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봤을 때는 몇
센티 되지 않는 곳이지만 정자가 여기를 가려면은 우리가 저기 히말라야 가는 것보다 더 힘들어해요. 그런데 히말라야 쪽에서 줄을 내려주는 거죠. 줄을 내려주는데 이 줄이 화학 분자예요. 근데 화학 분자로 내려진 줄이 오면 이 정자가 이 신호가 뭘 말하는지를 알아요.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이나 애들이 화학물질을 분사한 거나 신호 체계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어요. 예를 들면 암세포가 전이를 하잖아요. 전이 할 때도 그냥 아무대로 가는 게 아니에요. 암세포가 일정정도 커서 여기에서 커집니다. 그래서 자기가 여기 살기가 힘들어지면 자기에서 화학물질을 자기 몸에 피를 통해서 보냅니다. 그래서 갔다가 돌아오면서 그 신호를 파악해서 내가 어디에 가서 정착하면 되겠구나라고 판단될 때 전이가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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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속에서는 계속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자기가 무엇이 되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피부 세포는 없어요. 피부 세포는 없습니다. 그런데 조건에 따라서 피부 세포가 생겨나는 거예요.
근데 원 DNA 속에서
'너는 반드시 피부가 돼라' 이런 것이 있는 게 아니고 피부가 될 수 있는 정보는 있지만 그것이 뇌로 가면은 그 정보를 다 끕니다. 누가 끄냐. 세포 스스로 꺼요. 세포에는 그것을 끄는 족 유전자를 조절하는 조절 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끕니다. 이런 것들이 계속 생겨나면서 각기 다른 한 200종류의 세포군이 형성되는 거죠. 근데 그것도 이렇게 전부 다 이야기를 통해서 이렇게 꺼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가 끊어지면 없는 거예요. 이야기가 되면 생기는 거죠. 근데 그 이야기의 내용을 자기 몸한테만 한정시켜놓으면 못 살꺼잖아요.
그래서 외부로 열어놨어요. 즉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열어놓고 거기에서 계속 우리가 모르는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우리 몸에 어떤 것을 만들어 갑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적도에 살면 이 온대에 살 수 있는 이야기는 사라져요. 그리고 적도의 이야기가 우리 몸에서 쌓여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말한 대로 양자적 상태죠. 적도의 이야기도 우리처럼 이렇게 온대 이야기도 다 될 수 있는 어떤 중첩된 상태에서 즉 뇌세포도 될 수 있고 뭣도 될 수 있는 중첩된 상태에서 내가 어떤 인연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이야기가 발현됩니다. 만일에 그것들이 본질이 정해져 있다고 하면 이런
일들이 다른 식으로 발생했을 것이고, 더더군다나 새로운 환경이나 특이한 일이 발생하면 생명의 연속성은 절대 담보되지 않는 거죠.
그래서 공이야말로 모든 생명체들이 즉 자기 비움이야말로 모든 생명체들이 자기다움과 세계상을 형성해서 삶을 이어가는 가장 인지되거나 인지되지 않거나 생명의 키워드가 공이다라고 하
는 이야기를 반야심경에서는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이야기를 드리면서 제 강의를 마치고 질문받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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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시간
질문 : 구경 열반과 아녹다라삼막삼보리가 있는데 그 차이점을 쉽게 설명 좀 해주세요.
스님 : 니르바나라는 말은 약간의 인도의 전통 종교 사회에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른 새로운 운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단어입니다. 니르바나는 불을 껐다 라고 해요. 번뇌의 불을 껐다. 그런데 당시의 브라만교는 이 불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브라만 사원에서 절대 불을 꺼서는 안 돼요. 그냥 그 불의 상속으로 신의 상속을 증명하는 거와 똑같아요.
근데 니르바나라는 말은 우리 마음 공부란 불교 글들은 이런 불들을 다 꺼요.
■■니르바나 열반에 내용은, 그런 본질적인 사유 통로는 다 꺼졌다. 그런 의미고,
구경열반 아녹다라삼막삼보리는 무상정등정각이라고 깨달음의 내용을 말하는 건데 반야심경 책에도 써났습니다마는 요즘에 어떤 지식인들도 지식만 따지고 보면 핸드폰보다 더 뛰어난 지식인이 없어요. 그런데 그 핸드폰보다 휠씬 더 굉장한 놈이나왔죠. 그것이 A.I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식 정보를 계속 쌓아간다고 하는 측면에서는 상향선으로서는 끝이 없어요. 계속. 그런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비워놓고 새로운 인연하고 새로운 장을 만들어내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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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능력을 만들어내는 이 역할은 다 비우면 끝이 있잖아요. 가장 최상의 말은 니가 가지고 있는 어떤 지적 정보한테도 집착하지 않는 특별한 상태에서 애착하지 않는 그런 몸과 마음을 우리는 무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야만 그 인연에 맞는 꽃을 피운다. 무상정등각. 이때 인연에 맞는다는 꽃을 피운다고 하는 거 보면 겨울을 나는 꽃 아시죠? 수선화 같은 것을 그냥 아무 때나 피우고 싶으면 수선화 뿌리를 사다가 냉장고에다가 일주일만 놔두고 피우면 꽃이 피어요. 아무 상관없이. 왜냐하면은 겨울을 얼마 정도 났다라고 하는 것을 그 꽃세포들이 그냥 인지만 하면 봄이 왔다고 꽃을 피우는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로 ●● 정등정각은 그 시절 인연하고
잘 맞아야 돼요. 그래서 그 시절하고 잘 맞는 인연을 깨워줄 수 있는 창조적 기능성이에요.
그래서 앞에 ■■니르바나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이것이 종교적 본질이라고 여겨왔던 불을 꺼버린 거고,
■■그다음에 행동 현상으로는 마음을 비우면서 시절 인연이 온전히 깨어있는 활동한다고 해서 이쪽으로 보면 무상정등 정각이고 이쪽으로 보면 니르바나라고 이렇게 봐요
질문 : 책 173페이지 보니까 반야바라밀다 주문에서 보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ㅡ 이런 주문이 나와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헷갈립니다
반야심경 본문 내용을 열심히 이해하려고 노력해 가는데, 끝에 갑자기 위없는 밝은 주문하면서 주문이라고 나오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스님: '어찌 보면 모순처럼 들립니다. 무언가를 갖고 있어야 시절 인연과 수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마음이어야 시절 인연과 온전히 수순할수 있다는 것이' 이 표현이 되게 놀라운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마음이어야 시절 인연과 닿는다는 것 같은데.
스님 : 보살님 자녀분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럼 잘 모르겠네요. 자녀가 부모한테 인생 상담하시는 분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인생 상담의 1순위가 친구예요. 왜? 부모가 봤을 때 자식을 자기가 살아봤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살아봤으니까 저놈이 이렇게 살았다가는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전 지식을 갖고 있어요.
아이는 그런 지식 없어요. 근데 이 지식이 반드시 얘가 컸을 때 20년 뒤에 똑같은지는 몰라요. 근데 내가 살아본 경험으로는 이놈은 이렇게만 해야 돼요.
근데 지금 내가 알 수 없는데 이 애를 니가 그렇게 살면 앞으로 20년 후에 뭐 안 된다라고 스스로가 생각을 해놓고 애를 그렇게 다뤄요. 근데 애는 전혀 이것하고 접속이 안 되잖아요. 근데 아들딸이 부모 말을 안 들어요. 더군다나 생물학책 읽으면서 가장 큰 느낌 중에 하나가 부모가 자식을 낳을 때 어떤 말을 하냐면은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DNA의 구성도 좀 달라요. 표현 양상이 다르고.
그 다음에 세계 지도를 만드는데 세계 지도의 %을 환경이 환경과 인터페이스 접속해서 결정하라 라고 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당시 환경과 접속해서 결정하라 그것이 30%나 돼요.
●●부모가 환경하고 접속하는 시대, 25살 정도 되면 그 지도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거든요.
●●부모가 환경하고 접속했을 때 만든 지도의 환경하고, 자식이 컸을 때는 환경하고 절대 같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애는 자기 나름대로 지도를 만들라고 정자 난자가 결합 될 때부터 '너는 니 지도를 니 나름대로 잘 만들어서 살아라'라고 부모가 물러줘 놓고, 지도를 부모인 자기가 그리려고 그래요. 그릴 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뜻이 안 통해요. 부모 자식 간에 시대 인연도 편안하지 않다니까. 그래서 어른이 됐으면 내려놓고 저놈의 지도가 무엇인지를 들어봐야 돼요. 그것도 한 번 두 번 들어서는 인정이 안 돼요. 1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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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3년이고 계속해서 자기를 긍정하고 들어줘야 그때 비로소 이 지도 속에 우리 부모는 내 이야기를 정말로 자기 생각 보태지 않고 들어준다 라고 하는 지도가 만들어졌을 때 둘이 맞아요.
근데 부모 자식도 안되잖아요. 근데 마음은 완전히 다르겠어요.
근데 부모 인연하고 자식의 시절 인연하고 이 생각의 연대를 잘하려면 그걸 완전히 비워야지요.
원래 DNA 처음 자식에게 물려줄 때부터 그렇게 해줬더라고요 안 되게.
더군다나 요즘처럼 갑자기 변해가는 사회에서는 부모는 이 애들 세상을 근본적으로 잘 몰라요. 그게 안 되지요. 그러니까 배워야 돼요.
■■아이의 지도와 접속하려면 내가 내려놓고 그 애하고 새로 접속을 해야돼. 그게 주문이지요. 비우는 주문.
《신묘장구 대다라니 》라고 하는 긴 주문이 있습니다. 그 주문이라는 것은 내용을 일부러 해석하지 않는 거에요.
우리가 가진 분별의 장, 본질적인 사고의 장을 멈추는거에요. 입으로는 외우고 있지만 머리에는 어떤 상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문을 계속 외우면서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무분별의 장 ,즉 공을 자기 몸안에서 직접 경험하게 되는 수행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질문 : 반야심경에서 무안이비설신의하고 무색성향미촉법인데 저는 의意와 법法이 잘 이해가 안가서 거기에 대해서 좀 궁금합니다.
스님 : 법은 전적으로 내부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세계를 이해하는 내부 이미지예요. 우리가 자꾸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 안에는 경험의 정보들이 촉적합니다. 근데 이 경험의 정보들은 있는 대로 기억되는 게 아니고
아까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해체되듯이 기억된 것도 해체됩니다. 실제로 지금 제가 이렇게 보고 있는데 지각은 어떻게 이루어지냐면은 이렇게 딱 보고 있으면 제 눈에 들어옵니다. 눈에 들어오면 크게 위쪽으로 가는
통로가 있고 또 여기가 시각 중추니까 보는 것의 정보가 1차적으로는 이 v1이라고 하는 데로 먼저 갑니다. 그럼 v1에서 정보를 가지고 이쪽으로도 보내고 또 여기서 이쪽으로 보냅니다. 이쪽에는 주로 언어 중추가 있는데 언어 중추도 반드시 왼쪽에 있는 게 아니고 오른손잡이는 주로가 대부분 90 몇 %가 있어요. 근데 왼손잡이는 한 50%가 오른쪽에 있어요. 언어 중추가. 그러니까 언어 중추가 만들어진 쪽으로 언어를 하면 이렇게 갑니다. 근데 문제는 들어올 때 같이 들어오는데 이리 간 정보는 저리 간 정보가 무엇이 갔는지 몰라요. 다른
쪽으로 간 놈은 그리로 간 정보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러면 이리 간 것은 뭐였냐면은 어디, 영어로 where 어디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정보 루트예요. 이리 간 것은 무엇이라는 what이라고 하는 것을 해석하는 정보루트입니다.
■■그런데 이 두 루트는 합쳐지기 전까지는 이쪽에서는 이름만 보내고 이쪽에서는 장소만 보냅니다
■■그래서 이름과 장소가 만났을 때 어디에 있는 무엇이라고 이렇게 알려줘야.
■■그런데 기억은 이것이 다시 해체됩니다. 그래서 어디는 어디에 있고 무엇은 무엇에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것을 나중에 기억을 회상할 때
이렇게 다시 모여서 기억을 회상하게 돼요. 그렇게 모일 때는 대체적으로 상이 일치하는 게 많은데 모일 때
다른 놈이 끼어들면 갑자기 다른 얘기가 써져요. 그래서 내가 옛날에 이런 걸 했는데 하고 가서 비디오를 봤더니 그중에 어떤 것들은 전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기억은 반드시 있는 그대로 회상되는 게 아니고 지금 회상할 때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면 그 이미지가 아미노산으로 해체 됐잖요. 단백질이 된 거, 회상된 이미지가 법이에요.
■■그 회상 된 이미지를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의예요. 그러니까 이 정보가 들어오면 알아차릴 수
있는 이미지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해요. 이 과정이 법화의 과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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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렇게 들어오는 순간 내가 이 사건을 보는 많은 정보들이 결합하면서 최종 그림이 만들어지는데 가장 빨라야 0.2초 걸립니다. 0.2초 사이에 여기에 들어 있는 색깔 정보, 얼굴 정보, 분위기 정보 이런 기억들이 전부 다 매칭을 해서 이 시각의 이미지를 만들어줘요. 늦어도 0.5초 안에는.
그래서 지각 이미지는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인데 지각 이미지는 0.2초 내지 0.5초의 시간 지연이 일어나요. 근데 시간 지연이 일
어나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안에서는 시간 보정을 해주는 장치가 또 있어요. 지금 즉시 내가 아는 게 아니에요. 안에서 그 경험을 통해서 그걸 보정해주죠.
그런데 만일에 이런 것을 통합하는 것에서 문제가 생기면 지각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스피노자의 뇌》 라고 하는 책을 여러분들이 읽어보시면 나오는 내용인데 프랑스에서는 65세 되는 여성분께서 파킨슨병의 초기였는데 파킨슨병이 걸리면 뇌에 특정한 부위에 칩을 심는 수술을 합니다.
이 칩에서 도파민이 나오는 도파민 통로에 자극을 줘서 도파민이 일정 부분 나와서 파킨슨병을 조율하는 그런 역할을 하게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그 책을 쓸 당시에 세계에서 한 50만 명 정도가 뇌에다 칩을 심었더군요. 그랬는데 심어놓고 다 아물어서 작동을 하는데 갑자기 그분께서 막 슬피 울어요. 도파민이 발생해서 이
러이러한 증상이 나와야 되는데 그런 증상이 안 나오고 갑자기 막 우는 증상이 막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스위치를 다시 끄고 또 켜보니까 또 울어요. 그래서 봤더니 어떻게 됐냐면은 이 심은 칩에서 어느 쪽에서 자극을 줘야 되는데 반대로 가서 자극을 다른 쪽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이리 가면 도파민 통로에서 자극을 줘서 도파민이 적당하게 분출돼야 되는데 이쪽에 갔더니 슬픔의 통로가 열려서 그렇게 막 울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슬퍼한다라고 생각하는데 거기만 건드리면 그냥 슬픈 거예요. 또 이분은 그렇게 해서 그 슬픔의 통로가 자기가 의도가 아닌 수술의 실수로 그런 게 열린 거잖아요
또 이 남자는 뇌에 문제가 있어서 수술을 했어요. 근데 어떤 부분을 좀 도려냈는지 해서 수출하고 다 나아서
퇴원할 때 다른 책에 나오는데 제목이 기억이 안 납니다만, 퇴원할 때 어머님이 아들을 데리러 왔어요. 수술한 의사하고 어머님하고 아들하고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이 아들이 이분을 자기 어머니라고 안 해요. 그 이유를 뭐라고 했냐면 나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이와 이와 같은 감정 상태를 느끼곤 하는데 이분한테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안 난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를 닮은 분이지 내 어머니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한 법을 만들 때 거기에 있는 그런 감정도 개입하고 등등이 개입해야 우리가 일상의 법이 만들어지는 거고 그중에 어떤 것이 잘못 개입하거나 빠지면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닌게 돼요.
■■그래서 법은 있는 대로 보는 게 아니고 자
기가 경험한 기억을 잘 조합을 해서 지금을 해석할 수 있는 내적 이미지가 법입니다.
질문 : 반야심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쭉 잘 학습을 이렇게 따라와서 이렇지, 이렇지 이해가 됐는데 마지막에 신비한 주문이다에서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라고 하니까 뭔가 건너뛰어서 마치 지금까지 학습을 잘
기승전결로 해온 느낌인데 갑자기 이것이 주문이다라고 해버리면 갑자기 이렇게 뭐가 이렇게 다 하면서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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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다른 걸로 건너뛰는 느낌이라 뭔가 약간 여기 사이에 매치가 필요하지 않은가요..
스님 : 그것이 아제아제란 말이 학습된 곳으로 가자 가자 그 말이에요. 그런데 이때는 주문의 기능은 원 뜻인
지 몰라야 돼요. 주문을 계속하면은 아까 말한 관측자가 있잖아요. 앉아서 아무 토 안 달고 그냥 지켜볼 때도
일상의 관측자가 지킴의 관측자로 바뀌잖아요. 그러다가 이 관측자까지 사라지잖아요.
그러면 일상의 관측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어하고 그다음에 내부 이미지예요. 근데 주문은 말은 있는데 뜻이 없어요. 내부 이미
지에 잘 안 맞는 거죠. 그래서 계속해서 외우고 있다 보면 언어 통로하고 이미지 통로가 작동을 안 하는 순간이 와요. 그런 순간 공과 바로 접속이 돼요.
그래서 이 반야심경이 엄청 힘들고 어렵잖아요. 그런데 일반 사람한테 그 어려운 거 학습할 거 없어, 그냥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외우면 니가 어느 순간 언어 이미지하고 그다음에 내부의 그림 이미지를 넘어선 상태에서 반야의 공성하고 니가 접속할 수 있어 라고 하는 거예요. 아셨죠?
첫 번째는 학습된 것을 내가 계속 기억하고 실천하자 이런 의미고 그것도 잘 학습이 안 돼 있으면 그냥 외우고 있으면 공성과 접속할 수가 있다. 그게 주문입니다.
■■주문의 가장 큰 특징은 이미지화되지 않는 것하고 접속하는 접속 통로예요. 그래서 주문을 많이 외운 사람들도 신비한 체험을 가끔 해요. 그래서 천수다라니를 주문수행하신 분들 생각
보다 많습니다. 나모 라다나다라 하는거 있잖아요 천수다라니를 막 계속 외우고 있으면 일상의 지각 상황과 다른 상태 지각 상태로 자기가 경험하게 돼요.
왜냐면 주문을 입으로는 외우는데 머릿속으로는 아까 말한 대로 어디나 무엇인가가 사라져요. 그래서 공과 같은 것을 직접 체험하게 만드는 경험 통로 중에 하나입니다. 화두도 그렇고요.
질문 : 반야심경을 공부하다 보니까 색이 공하다 했는데 뒤쪽에 가서 갑자기 공색이라고 안 하고 왜 공중무색. 무자를 써서 단멸상을 짓게 만들었는지 그게 좀 궁금해서요.
스님 : 아까 말했잖아요. 아미노산 속에는 단백질이 없어요.
질문 : 예! 그건 알겠는데요. 그런데 유식불교에서 갑자기 불요의경으로 해버리니까 무자를 쓰니까 단멸상을 지어서 유식불교에다가 불요의경이
스님 : 그런 것은 절대 믿지 마세요.
■■ 왜냐하면 늦게 나오는 학파가 언제나 최고입니다. 내 전까지 한 것은 뭔가 하나 빠졌어. 내가 이 답이 나오면 너도 빠졌어. 거의 대부분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요의고 자기 이전에는 다 불요의다. 요의 불요의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질문: 여러 다른 책에서도 보면 어떤 번뇌가 들면 생각의 생각을 하라. 이전에 늘 해오던 그런 생각의 길이 아니라 생각 생각을 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던데 굳이 생각 생각을 하는 그런 스스로의 힘도 수행이 되지 않으니 이전 생각을 해야지 또 다른 질문을 하고 질문을 해도 이전의 생각길로 가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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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생각에 힘을 기를 수 있는지.
스님 : 그거 기르려고 하지 마세요. 왜 그러냐면은 번뇌로 괴로워하면은 이것이 나다. 지금 이 순간은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이 나밖에 없다. 그렇게 아까 부모가 자식을 알아주듯이 자기가 자기를 알아줘야 됩니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면 안 돼요.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것이 올라오는 순간은 '니가 참 괴롭고 힘든 이것 밖에 없구나. 나라도 너를 온전히 살아내겠다' 이렇게 해야죠. 올라오는 순간에 그러한 자기밖에 없는 거예요.
●●생각으로 없어지지도 않고 주문으로 없어지지도 않고 뭘 해도 안 없어져요.
그것은 지 시간대로 갑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는 나를 절대 상정하지 마세요. 그런 상태에서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자기 안음.
그런 자기를 낳는(24:13) 자기하고 마음 편한 자기하고 대비시키면 안 돼요.
●●그때는 특별한 생각 없이 그 생각은 '지금
니가 존재하는 양태가 이렇구나' 그렇게 해야죠. 그밖에 다른 거 할 거 없습니다.
질문 : 소개 글에서 불만족이 사라진 사람이 이런 말씀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불만족스러움에서 벗어나려고
잘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너무 불만족스러웠거든요. 그러니까 제목을 이렇게 한 이유가 뭔지.
스님: 네 어렵죠. 영어책을 읽는데 한 페이지에 몇 개의 단어만 모르는게 나오면
그 페이지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빨리 사전을 찾아야 돼요. 이 책이 어려운 게 아니고 지금 쓰여 있는 많은 단어가 보살님한테는 개념이 안 잡혀 있어서 그래요.
한글은 한글인데 영어 있는 것과 똑같지요.
영어는 우리가 모른다는 전제하고 사전을 찾아보죠, 근데 한글도 단어뜻 모르면 불교 사전을 찾아서 그걸 알아봐야 돼요. 초등학생이 국민 전과 요즘도 있는가 모르겠는데 저희 다닐 때는 국민 전과, 동아 전과가 있었어요. 그걸 가지고 낱말 뜻풀이하듯이... 공부를 하시려면은 그렇게 시작을 해야됩니다.
그 책이 어려운 게 아니고 불교라고 하는 새로운 사유 체계 속에서 쓰고 있는 단어들이 지금 우리 일상에서 쓰고 있는 단어하고 맥이 안 닿아 있어요. 그러니까 한 페이지에 막 수십 개 모르는 단어가 나오는데 책이 안 어렵다고 하면, 그것이 거짓말이거나 깨달은 사람이에요.
■■불만족은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거지요.
(어느분 질문인데 목소리가 마이크 없어서 안 들림)
스님: 그건 출판사가 뽑았지 제가 안뽑았어요.(스님 대중 웃음😄😄😄) 출판사한테 낚였네요. 😄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11쪽
요즘에 어떤 지식인들도 지식만 따지고 보면 핸드폰보다 더 뛰어난 지식인이 없어요. 그런데 그 핸드폰보다 휠씬 더 굉장한 놈이 나왔죠. 그것이 A.I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식 정보를 계속 쌓아간다고 하는 측면에서는 상향선으로서는 끝이 없어요. 계속. 그런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비워놓고 새로운 인연하고 새로운 장을 만들어내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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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능력을 만들어내는 이 역할은 다 비우면 끝이 있잖아요. 가장 최상의 말은
■■ 니가 가지고 있는 어떤 지적 정보한테도 집착하지 않는 특별한 상태에서, 애착하지 않는 그런 몸과 마음을 우리는 무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야만 그 인연에 맞는 꽃을 피운다. 무상정등정각.
그와 마찬가지로
■■ 정등정각은 그 시절 인연하고 잘 맞아야 돼요. 그래서 《그 시절하고 잘 맞는 인연을 깨워줄 수 있는 창조적 기능성》이에요.
그래서 앞에 ■■니르바나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이것이 종교적 본질이라고 여겨왔던 불을 꺼버린 거고,
■■그다음에 행동 현상으로는 마음을 비우면서 시절 인연이 온전히 깨어있는 활동한다고 해서 이쪽으로 보면 무상정등 정각이고 이쪽으로 보면 니르바나라고 이렇게 봐요
9쪽
근데 무명은 앞서 말한 대로 이와 같이
《 번뇌의 본질도 공하고 보리의 본질도 공하다라고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다》라고 해요.
살아생전에 신의 판결을 받지 않고 스스로가 해탈을 이루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납득을 통해서 교단이 커져가는 거죠. 그래서 그런 분들을 타타카타라고 불러요. 인도말로 잘 가셨다.
마음이 흔들림 없이 잘 가셨다는 뜻이에요. 무엇에서?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노래도 있지만 그런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타타가타입니다. 그래서 여거라고 쓰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갔다. 갔다 그러면 무슨 말입니까? 갔다라는 이미지는 나로부터 멀어졌다는 이미지 잖아요. 근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돌아가셔서 좋은 해탈 세계를 가는 게 아니고 지금 내 옆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분을 여거如去라고 부르면 애매해요. 그래서 갔다 오신 분이잖아요. 그래서 여래如來라고 해요.
그러니까 옛날에는 피안은 죽음 이후에나 갈 수 있는데 그 피안을 차안으로 옮겨온 거랑 똑같아요. 그러니까 종교적 해탈의 정체성이 그 이전이고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그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는 어떻게 됩니까?
해탈은 살아서는 없어요.
근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살아서 있지 않느냐! 마음 관측을 통해서 없던 것이 생긴 것과 똑같잖아요. ●●만일 해탈의 본질이 있고 그것이 죽음 이후에야 가능했다라고 하면은 절대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해탈을 이룰 수가 없지요. 금생에. ●●그런데 그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 특수한 본질이
있는게 아니고, 그냥 이와 같은 마음을 닦으면 그마음속에서 아까 같이 중생적 사유의 흐름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처의 사유가 나타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