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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인물(제41강) 조지 뮐러 |
● 기독교 역사상 기도응답을 가장 많이 받기로 알려진 인물이 있다. 5만 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은 조지 뮐러이다. 조지 뮐러(George Müller, 1805-1898)는 독일 사람이었으나 거의 70년 동안 영국에서 살면서 사역했던 19세기 대표적인 믿음의 사람이었다.
조지 뮐러는 1805년 독일 프로이센에서 한 세무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는 출석했지만 술주정꾼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말썽꾸러기요, 종종 경찰에게 붙잡혀 교도소에 끌려 다니는 비행청소년이었다. 경찰들도 감당할 수 없어 몇 번이고 그를 풀어주거나 심지어 도망치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12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밤에도 그는 새벽 2시까지 카드놀이를 하였고, 그 다음날에 술집에 들러 술을 마시고 놀았다. 어머니의 죽음조차도 그의 생활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조지는 이성과 양심조차 없는 지존파나 막가파는 아니었다. “도대체 나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왜 이런 못된 일만 저질러대고 있을까?” 하며 남몰래 괴로워하였다. 그러나 한 번 젖은 악습인 거짓말, 도둑질, 도박, 욕설 등은 나쁜 것인 줄 알면서도 늘 벗어나지를 못했다. 이때 어느 목사님과 상담하는 가운데 “나쁜 버릇이란 하루아침에 고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한 번 당신의 자녀로 삼은 사람을 절대로 버리는 법이 없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죄와 싸우기 바란다.”라는 소망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을 심령에 영접한 철부지 조지는 나쁜 행동을 하나씩 고치고자 애쓰게 되었다. 새벽4시에 일어나 열심히 공부도 하고 틈만 나면 조용한 시간에 자기의 신앙생활과 앞날의 일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아직 훈련되지 않은 그는 19살 되던 해 할레대학에서 루터교 성직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할레대학은 경건주의 운동이 시작된 곳이요, 많은 젊은이들이 학생복음운동을 통해 은혜 받고 세계로 나가는 뜨거운 곳이었다. 이런 할레대학에, 그것도 신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조지는 그리스도를 머리로만 알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늘 썰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뮐러를 그냥 버려두시지 않았다. 그해 11월 중순 어느 토요일, 그는 친구의 인도로 어느 기도모임에 참석하여 감동을 받은 후 비로소 자신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예전의 나쁜 습관들을 벗어던졌으며 그동안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간절히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눈물로 기도하는 가운데 구원의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구원의 감격으로 그는 자신의 삶을 선교사로 하나님 역사에 드리고자 하는 영적소원이 간절했다. 그러나 선교사의 길을 가로막는 두 개의 걸림돌이 있었다. 첫째는 그의 아름다운 여자 친구였다. 여자 친구는 끊임없이 그에게 선교사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과 독일에서 비둘기처럼 아기자기하게 살자고 갖은 유혹을 다했다. 둘째는 그의 아버지였다. “비싼 돈 들여서 대학공부 시켜놨더니 고작 하는 말이 선교사냐? 네가 장남으로써 그게 할 말이냐?" 하며 호통 쳤다. 때론 눈물을 흘리며 ‘너 하나 믿고 살아온 애비의 심정도 이해 해다오.’ 하며 정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조지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지 뮐러는 하나님 편에 서고자 결단하였고, 결국 아버지로부터 왔던 모든 지원이 중단되었다. 그렇게 졸라매던 여자 친구도 포기하고 떠나갔다.
● 이때부터 조지 뮐러의 위대한 기도의 삶이 시작되었다. 당장 살아갈 생활비와 학비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선교사로서 주님 사역에 헌신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저의 부친은 선교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여 모든 물질지원을 끊었습니다. 제가 선교사로서 헌신하기 원하시는 주님, 제게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의 절박한 물질문제를 즉시 응답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게 도와주셨다. 졸업 후 조지 뮐러는 할레를 떠나 유대인들을 향한 선교사로 훈련받기 위해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는 병에 걸려 치료차 데번이라는 곳으로 갔고, 독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작은 독립교회의 목사직을 맡아 그 지역에서 널리 설교하면서, 장래 목회 형태가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뮐러는 그곳에서 메리 그로우브즈와 결혼하였다.
1832년 그들은 브리스톨로 이주하였는데, 그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콜레라가 도시 전역을 휩쓸고 지나가게 되었다. 콜레라가 지나간 브리스톨은 가난과 무지로 허덕였다. 어린 아이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음식을 찾았고, 불결하고 비정한 거리에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조지 뮐러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브리스톨을 위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그는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으나 차츰 그의 관심이 학교에서 고아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고아원에 수용된 아이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해골처럼 말라있거나 병이 들어 퉁퉁 부어 있었다. 조지 뮐러는 고아원 아이들로 인해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조지 뮐러는 고아원을 설립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일을 추진했다. 그러자 반대는 거세게 일어났다. 브리스톨에서 그의 입지는 아직 개척단계였다. 그의 교회도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학교를 세우면 공부만 가르치면 되지만 고아원은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공부도 가르쳐야 하는데, 어디서 그 많은 물질을 얻을 수 있습니까?” 교인들조차 그를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충고를 주기도 했다. “기도하면 뭐든지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리하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놀리는 일이에요. 현실을 보고 언제나 가능한 것만 선택해 기도하세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어요.” 뮐러는 고아원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맥이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고아원을 개척했던 프랑케라는 사람의 전기를 읽고 용기를 다시금 얻게 되었다.
● 그는 혼자서 조용히 고아원 설립을 위한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과정 속에서 그의 아들이 가슴과 목에 유행성 염증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는 잃어버린 자신의 아들 대신 고아들을 살려 그들을 내 자식처럼 키우고자 하는 결심이 더욱 간절케 되었다. 그리고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굳은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부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브리스톨의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고아원이 세워지기를 주님이 원하심을 믿습니다. 제가 고아원 일을 시작하려면 우선 아무래도 1천 파운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빈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뜻을 받아주신다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다 채워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며 기도했다. 기도를 하면서도 뮐러는 ‘내가 처음부터 하나님께 너무 많은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렵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1천 파운드는 약 2천달러에 해당하는 돈이지만 지금부터 약 170여년 전의 일이므로, 지금의 가치로 친다면 수십억도 넘을 엄청나게 큰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편81:10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말씀을 묵상하다가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어, 말씀의 힘을 덧입어 혼자 조용히 부르짖는 기도를 계속해서 드리게 된다.
사람들은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고아원 설립을 위해 바자회나 모금운동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원하는 사람들의 성금과 성물로만 이 일을 하고자 거절했다. 그리고 분명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기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었다. 그의 기도는 불과 1년 만에 응답받기 시작했다. 10파운드를 가져온 부인을 필두로 일생을 벌어 모은 100파운드의 돈을 가져온 부인도 있었다. 물질뿐 아니라 부엌용품, 큰대야, 주전자 음료수 컵, 반찬 담는 그릇 등 많은 그릇과 용구들도 들어오게 되었다. 뮐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상한 분이신가를 체험하였다.
● 기도로 고아원을 세운 후에는 아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신의 딸을 고아원에서 고아들과 함께 살도록 했다. 하나님 앞에서 네 아이 내 아이 구별해서는 안 되며, 또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아원이 세워진 후 5,6년 동안은 그야말로 숱한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 시련의 때였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조지 뮐러의 믿음과 인내는 더욱 견고케 되었다.
아이들에게 줄 먹을 것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자리에서 때론 부엌바닥에서라도 조지 뮐러는 직원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했다. 마치 아이가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달라고 청하는 것만큼, 그의 기도는 자연스럽고 단순하고 간절했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이 모두 굶주릴 형편입니다. 차라리 제가 굶는 일은 참을 수 있지만 우리 아이들이 굶주리는 일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여 우리 아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 고아원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조지 뮐러는 400명의 고아들과 함께 빈 식탁에 둘러 앉아 손을 맞잡고 식사기도를 드렸다. 그의 기도가 끝났을 때 한대의 마차가 고아원 문을 두드렸다. 그 마차에는 아침에 막 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가 가득했다. 인근 공장에서 종업원들을 위한 야유회에 쓰기 위해 주문했지만 폭우로 취소되자 고아들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모두 그를 가리켜 미친 자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1834년 소규모로 시작된 고아원 사업은 해를 거듭할수록 확장되어갔다. 그는 시작부터 이 일에 필요한 어떠한 도움도 사람에게 알리거나 요청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께 요청하기로 원칙을 세웠다. 이로써 하나님은 예나 이제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고아원 사업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대로(어떤 경우에도 빚을 지지 않았고)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아쉴리 다운에 마련했고, 2차, 3차, 4차, 5차로 시설은 계속 확장되어 마침내 2,050명의 고아들과 직원이 거처할 수 있도록 확장되었으며, 그들의 필요를 적시에 채워주시는 체험 속에 65년간 경영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조지 뮐러는 65세에 그의 부인과 사별한 후 고아원 사업을 사위에게 인계하고 영국은 물론 유럽전역과 미국, 캐나다, 호주, 인도, 중국 등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의 신앙과 사랑을 격려했다. 그는 17년 동안 42개국에서 설교했으며, 25만 마일을 여행하여 약 300만명에게 강연하였다. 그는 교파를 초월하여 그를 초청하는 어느 곳에나 주님의 은혜를 끼쳤다. 그의 메시지는 지극히 단순했으며,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의지했다.
1898년 3월 10일 이른 아침에 그는 지상에서의 수고를 그치고 만왕의 왕을 뵙기 위해 급히 떠났다. 전날 저녁에도 일상 업무에 분주했고 평상시와 같이 기도회에 참석하였던 그가 눈깜박할 사이에 아무런 고통도 모른 채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92세였다.
● 조지 뮐러는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바르게 기도하는 것도, 얼마동안 기도를 계속한다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끝까지 기도를 계속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축복(응답)을 받을 때까지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쉬지 않고(끝까지) 기대하지도 않는다.”
뮐러가 얻은 신앙의 승리가 너무나 위대했기에 우리는 “뮐러가 언제 시련을 겪을 때가 있었나.” 하고 반문하기 쉽다. 또한 그가 받은 응답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5만번 이상이라고 함) 그 응답이 하나님께로부터 즉각적으로 오지 않아서 “언제 실망할 때가 있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며, 지난 세월동안 조금씩 신장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다.
“여러 번 내가 근심걱정으로 내 정신이 아니게 되었을 뻔한 경우에도 나의 영혼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진리를 믿었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평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