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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언약의 하나님(II)
(계11:19)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 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언약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인류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11장19절에서 하늘 성전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지요. 그리고 마지막 최후의 심판인 대접 재앙을 기술하기 전에 12, 13, 14장에서 그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에 관해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했지요? 우리가 죄를 짓고 타락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그 죄로 인해 모두 죽어야만 하는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그 분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것이 바로 ‘언약이다’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분이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성경에는 모두 5만 4천 개의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줄 것이다’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리라.
성경에는 이렇게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약속들은 전부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한 약속들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5만 4천 개의 약속들은 전부 그리로 수렴되는 약속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그렇게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로 여겨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내가 너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그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열심히 매달리는데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갓 예수를 믿었을 때는 기도를 하면 잃어버렸던 지갑도 돌아오고 없던 택시도 어디선가 나타나고 하는데 차츰 차츰 신앙의 연륜이 더해가면서 하나님께서 오히려 나를 멀리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너무 답답하지요. 심지어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가 왕왕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보시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전부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13:1-4)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이 시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후 사울의 질투에 쫓겨 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할 때 쓴 시입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적국인 블레셋으로 도망을 해서 심지어 미친 짓까지 해야 했습니다. 침을 질질 흘리고 문을 머리로 막 받으면서 미친 사람인 척 행동해서 겨우 블레셋 사람들의 칼을 모면했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서 맨발로 도망을 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다윗이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해 대답을 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꺼내 주시지도 않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물맷돌 다섯 개로 2미터가 넘는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는 힘을 주셨고 용기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점점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과 도움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행13:22)
22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당신의 자녀가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침묵을 하셨을까요? ‘내가 너를 도와 줄 것이다. 내가 너를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들은 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욥1:1,8)
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그런데 욥은 엄청난 고난 속으로 던져집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38장 동안 욥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위로나 도움은커녕 그 고난의 이유도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욥23:8-9)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모세에게는 어떻게 하셨나요?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 나와서 미디안 땅에서 40년간 처가살이를 합니다. 자존심, 성질 다 죽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여든이 되었습니다. 그 때 당시 수명이 길어야 70이고 강건해야 80이었다고 하니까 이제 죽을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입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위로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일흔 다섯 되던 해에 그에게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25년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왜 25년이나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왜 요셉이 그토록 힘이 들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침묵하셨을까요? 왜 형들이 그를 팔 때, 억울하게 감옥에서 수년을 썩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을까요? 그 요셉이 하나님께 ‘여기서 나가게 해 달라고’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도 침묵하신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그 하나님의 침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열심이 특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라고 외칠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한번 보지요. 여러분 중에는 지금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그 병 고쳐달라고 많이 기도하셨죠?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십니까?
자녀의 문제로 고통 받고 계신 분들 계십니다. 그 자녀를 위해 많이 기도하셨지요? 뭔가 변화가 있나요? 하나님께서 침묵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특히나 생활이 어려우신 분들이 많으세요.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이 좀 나아지게 해 달라고 기도 많이 하셨을 겁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확 풀어주시지 않으시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왜 그렇게 긴 터널을 통과하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아픔과 고통에 빨리 빨리 대답하시지 않으실까요? 왜 이렇게 답답하게 침묵하실까요?
하나님은 분명 성경에 5만 4천 가지의 약속을 해 놓으셨으면서 왜 그 약속을 외면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답답하게 만드실까요?
우리가 좀 전에 언급한 것처럼 그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이 전부 어디로 수렴되는 것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답답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은 약속을 밥 먹듯 어기시는 분’이라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게 만드시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최종 적인 언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지엽적인 약속들만을 우리 임의대로 해석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자칫 ‘하나님은 약속도 안 지키시는 분’으로 오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모든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침묵을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는 것 뿐이지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의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열심히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유익을 위해 침묵을 하시는가? 한 번 짚고 넘어가 보지요.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 볼 수 있는 시금석이 바로 시간입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님은 미국에 입양이 되신 분입니다. 그 분은 4살 때 엄마에게 버려져서 미국으로 입양이 되셨는데, 하루는 엄마가 놀이 공원엘 데리고 가셨답니다. 그 엄마는 4살짜리 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주고 벤치에 앉혀놓은 다음 ‘엄마 화장실 다녀올게’하시고 떠나셨답니다. 해 질 때가지 그 벤치에서 앉아서 기다리다가 경찰에 넘겨졌고 그리고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새 엄마가 백인 할머니셨는데 너무나 좋은 분이셨답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 정말 친자식 이상으로 잘 보살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홉 살 때 양 어머님과 함께 디즈니랜드에 갔는데 자기가 처음 버려졌을 때와 똑같이 어머니가 화장실에 가셔서 한 시간이 넘게 안 오시더랍니다. 이 전도사님은 ‘분명 새 엄마도 나를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 때 생각하기를 ‘그렇게 버릴 거면 갔다 오겠다는 약속이나 하지 말고 가지, 왜 어른들이 그렇게 약속을 초개같이 깨 버릴까?’ 굉장히 분노했었답니다. 그 전도사님은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자기를 버린 두 어머니를 마음속에 떠 올려놓고 사람 죽었을 때 입는 베옷을 입혀놓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상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답니다.
그런데 지난 5년간 자기를 거두어 주고 자기에게 그토록 헌신적으로 대해 주었던 양어머니가 자기를 버렸다는 것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답니다. 지난 5년간의 양어머니와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그 전도사님은 ‘우리 엄마는 꼭 올 거야,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절대로 우리 엄마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 라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그 전도사님은 그 때서야 ‘내가 진짜 우리 엄마를 사랑하고 믿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았답니다. 그렇게 어머니를 기다리면서 그냥 벤치에 앉아있었는데 두 시간쯤 지나서 어머니가 911 차에 실려서 아이가 있는 곳에 오셨답니다. 열로 하신 어머니가 하루 종일 무리를 하셔서 화장실에서 졸도를 하신 겁니다.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고 응급처치를 받으신 후 정신이 들자 바로 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신 겁니다. 그 전도사님께서 어머니를 보자마자 ‘Mom I know you're coming’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하나님은 그 침묵 속에서 ‘너 정말 나를 믿고 있니?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나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킬 것을 정말 믿고 있니?’ 이렇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시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 분을 아버지로 여기고 있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그 분을 신뢰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침묵하시게 되면 우리는 얼마간은 잘 견디는 듯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점점 줄어들고 맙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닥치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그 분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금방 탄로가 납니다.
멀쩡할 때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다가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냐? 하나님이 있다면 나를 이렇게 놔 둘 수 있어?’이렇게 하나님을 부인하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업이 잘 될 때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다가 오래도록 사업이 회복되지 않으면 이내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엉터리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 모든 상황들이, 그 오랜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것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면서 자신들의 믿음이 진짜 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른 어떤 것으로 이 땅에서 보상해 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만으로 기쁩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존중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십니다. 그 인격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자로 대우해 주시는 증거가 바로 하나님의 침묵인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울며 보챌 때 부모는 절대 침묵할 수 없습니다. 그 아기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기는 이해력과 사고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부모는 아기가 울면 얼른 기저귀도 살펴보고 젖을 물리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들은 아이들이 도움을 청할 때 종종 침묵을 합니다. 그 것은 그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 상황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워주기 위한 부모의 따뜻한 배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침묵하시기 시작하셨다면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이제 하나님은 드디어 여러분을 신뢰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래, 이제 아버지는 너를 믿는다.’라는 우리 아버지의 신뢰를 받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침묵하신 13년 간 다윗은 하나님께 신실했습니다. 하나님을 여전히 경외했고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 사울에게 깍듯한 예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부하들을 선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침묵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침묵 속에서 더욱 더 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졌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침묵을 통과한 다윗이 70이 넘어 그의 말년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시23:1-4)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아,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외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극적인 지키심이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복된 시간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다고 술회를 합니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나에게 해가 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키심의 순간들이었다는 것을 다윗은 안 것입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하나님의 침묵은 주의 지팡이요 주의 막대기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주의 지팡이 ‘미쉐나’는 목자가 양을 지키는 막대기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대기’‘쉐베트’는 아이에게 바른 삶을 가르치기 위한 회초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 내실 것이라는 ‘너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그 언약을 지켜내시기 위해 우리에게 침묵하신 다는 것을 다윗은 안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을 잘 견뎌내고 통과 해 낼 수 있는 하나님의 신뢰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때때로 자신을 감추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벧전2:19-21)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고난을 당하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왜 부르심을 받았다고요? 선한 일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그럼에도 그 것을 잘 참는 삶을 배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삶이 우리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이해가 잘 안가는 삶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삶은 바로 이런 거야’라고 본을 남겨 놓으셨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삶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에를 잘 아시죠? 누에가 뽕 잎을 먹고 실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실로 고치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번데기가 되지요. 그렇게 2주정도 번데기로 지내다가 껍데기를 벗고 나방이 됩니다. 그 나방이 고치를 찢고 나오는데 보통 하루가 걸립니다. 나방은 그 고치 안에서 이리 저리 몸을 뒤척이며 그 고치를 찢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안쓰러워서 인위적으로 그 고치를 조금 찢어주면 그 나방은 하루를 못 살고 죽는 답니다. 하루의 고통을 통과하고 스스로 고치를 찢고 나온 나방만이 찬란한 삼차원의 삶을 수명대로 살다가게 되는 것입니다. 2차원을 살던 누에가 삼차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침묵의 시간, 고난의 시간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다른 차원, 다른 dimension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새로운 삶으로 가는 관문에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을 하고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지키려고 하는 시도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고난이요, 고통입니다.
(창3:17-18)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여기 18절의 가시와 엉겅퀴가 바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고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당하시는 고난과 고통은 모두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땅에 생기게 된 가시덤불과 엉겅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이 땅에 사는 한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하나님 손으로 벌초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 것들을 그대로 놔두시고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 정글 속을 헤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이라는 나침반과 지도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우리 스스로 그 곳을 벗어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나침반과 지도가 없는 사람들은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 속에서 헤매다가 결국은 그 속에서 죽게 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 속에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물해 주신 그 구원이,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더욱 더 확연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코파이를 제일 맛있게 먹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세요? 군대에 가서 이등병 때 초코파이를 먹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코파이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군에 입대를 하고 하루 종일 훈련을 받다보니까 늘 배가 고파요.
그 때 PX에서 한 개 씩 사먹는 초코파이는 정말 꿀맛입니다.
제가 군에 가기 전에는 참 식성이 까다로웠습니다. 반찬타박도 많이 하고 입도 짧았습니다.
그런데 훈련소에서 한 달 지나고 나니까 제가 사회에서 먹던 음식들이 얼마나 맛나고 좋은 것들이었다는 것이 저절로 확인이 되더라고요. 훈련소에서는 그 짬밥에 깻잎 통조림 하나만 있어도 진수성찬처럼 느껴집니다. 거기다 가끔 고참들이 먹다 남긴 라면 국물이라도 조금 얻어서 거기다 밥을 말면 진시황이 안 부럽습니다.
모든 것이 풍부한 곳에서 초코파이의 가치는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나의 배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들이 다 사라진 곳에서의 초코파이는 그야말로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고통 속에서 그 구원의 진가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의 구원을 바라보는 확대경’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의 지지대로 여기고 있던 것들이 하나 둘 씩 떠나 갈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진짜 의지하고 바라볼 곳이 어디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 고통스러운 할례를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기 바로 전인 길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를 명했는지 아십니까? 온 힘을 다해 가나안과 전쟁을 해도 이길까 말까 한데 군사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상징되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꼭 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가 뭐죠? 남자의 고추 끝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의미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인간의 생식 능력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뭡니까? 고대 시대의 남자의 생식기는 그 사람의 전 존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의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능력의 단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의 노력과 나의 열심히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옛 사람과의 결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길갈의 교훈입니다. 남자가 할례를 행하고 나면 그 할례 자국을 평생 동안 하루에 몇 번이나 보게 됩니까? 여러분 하루에 화장실 몇 번이나 가세요. 화장실 갈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을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될 것이고 그 언약의 완성을 위해서는 나의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완전히 단념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바로 그 할례의 완성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나의 옛 사람을 죽이고 나의 능력을 단념하는 바로 그 할례의 완성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 없이 절대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No Cross, No pain을 원하지만 그런 영광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만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만 그런 고통 속에 내던져져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에게만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똑같이 그 침묵의 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의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라고 했습니까? 정확한 원어대로의 번역은 ‘누구나 흔히들 겪는 고난’이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영어로는 ‘such as is common to man’입니다.
어떤 여인이 아들을 사고로 잃고 너무나 낙심이 되어서 살기가 싫어졌습니다. 그 여인이 현자를 찾아가서 자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우니 이 고통을 좀 잊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현자는 흔쾌히 ‘그러마.’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지금까지 전혀 고통을 당하지 않은 집이 있거든 그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얻어오라고 했습니다. ‘그 겨자씨로 당신의 고통을 없애 주겠다.’고 현자가 약속을 했습니다.
그 여인은 정말 열심히 이 집 저 집 문을 두드리며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집을 찾아다녔습니다. ‘저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왔습니다. 혹시 고통을 당해 본적이 없으시면 저에게 겨자씨 한 알만 주세요.’ 집주인은 이내 최근에 자기가 당한 고통을 그 여인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여인은 오히려 그 집주인을 위로해 주느라고 자신의 고통을 잠시 잊어 버렸습니다. 다른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저는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어서 겨자씨를 얻으러 왔습니다. 혹시 고통을 당해 보신 적이 없으시다면 저에게 겨자씨를 하나만 주세요.’
그 집주인도 그 여인에게 자신에게 닥친 최근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여인은 또 그 집 주인을 위로해 주느라 자신의 고통을 잠시 잊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수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고통이 없는 집은 없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 고통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 주면서 고통은 자기에게만 닥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주며 위로해 줄 때 자신의 고통이 잠시 잊혀 질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모든 이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그 속에서 숨 막히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그 때 여러분은 ‘하나님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하나님을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누구다 다 겪는 이 가시덤불과 엉겅퀴의 정글 속에서 그래도 나는 나침반과 지도가 주어져 있지 않은가? 이제 곧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나침반과 지도를 받지 못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 속에서 헤매고 있는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성숙한 여러분,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저의 요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요구를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아니 여러분에게 전달하기 전에 저에게 먼저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그렇게 설교하는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라고 궁금하실 때가 있으실 겁니다. 아니요, 이렇게 설교를 하는 저도 그렇게 못 삽니다. 그래서 참 괴롭습니다. 어떤 때는 마음속에서 끊이지 않고 솟구쳐 오르는 어두운 생각들 때문에 가지고 있던 볼펜으로 허벅지를 내리 찍은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 왜 제가 가끔 열흘씩 금식을 하는지 아십니까? 무슨 소원이 있어서 금식하는 거 아닙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겠지 해서 금식하는 것 아닙니다.
목회를 하다보니까 문득 문득 욕심이 머리끝까지 차 올라와서 ‘도저히 이래서는 안 되겠다’싶을 때 밥을 굶습니다. 저는 먹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밥 생각밖에 안 납니다. 그래서 잠시나마 그 끓어오르는 욕심을 잊을 수 있어서 밥을 굶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죄에게 당합니다. 그 때마다 발버둥을 치는 겁니다. 그게 저의 한계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설교를 해 놓고 누군가가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지 않는가? 하는 마음에 열심히 싸워봅니다. 번번이 녹다운 되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나서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왜 우는지 아십니까? 대부분 왜 예수를 믿고 나서도 나는 이렇게 변하지 않는가? 에 대한 눈물입니다.
여러분, 제가 저의 설교처럼 살고 있는지 아닌지가 왜 궁금하십니까?
혹시 여러분이 싸워 보시기도 전에 미리 자포자기(自暴自棄) 하시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동지를 구하는 마음으로 궁금해 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제가 그렇게 못 살고 지옥에 가면 여러분 저 좇아오실 겁니까? 남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하시지 말고 성경에서 요구하는 하나님의 요구에 여러분이 일대일로 서십시오. 고통이 찾아왔을 때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속 침묵하고 계실 때 ‘목사는 어떻게 하는가?’를 궁금해 하지 마시고 ‘너는 내 백성이 될 것이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그 언약의 완성을 위한 나의 섭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니까 기뻐하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서 여러분이 이겨내십시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내용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뭐가 두려우세요. 잘 이겨내십시오.
이제 12장 13장 14장을 공부하시게 되면 ‘그런 고난을 우리가 정말 이겨낼 수 있을까?’ 생각되실 겁니다. 여러분은 이겨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기고 계신 것입니다.
잘 하고 계신 거예요.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열심을 보시는 진짜 실력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