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의 대중문화
1. 1920년대는 일제의 통치가 교묘한 방식으로 강화된 시기였다. 일방적인 무력이나 강압보다는 통제가능한 조직을 허용하고 일정한 수준의 언론 출판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한국민의 정신과 문화적 토대를 서서히 장악하는 방식으로 식민지 정책이 진행되었다. 한반도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일상적으로 공유되던 지대였다. 일본 식민지 정책에 반항하고 조국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의열단이나 사회주의 세력의 무력봉기나 파업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새로운 문물과 문화에 열광하는 소위 ‘모던 보이’, ‘모던 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2. 새로운 문물과 물질적 변화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특히 영화와 축음기는 도시 사람들의 문화적 감각을 급속도로 변화시켰다. 영화가 상영되던 극장은 사람들이 몰렸고,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기 위해 사람들은 카페나 다방에 운집했다. 전화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라디오 방송국이 개국되었다. 일본 식민지 정부도 한국민의 사상적 응집을 막기 위해서 물산장려회와 같은 대규모 상품 전시회를 통해 통제의 정당성을 홍보하였다. 새로운 것은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청춘, 청년, 연애와 같은 새로운 용어가 확산되었고 사람들의 실질적인 삶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3. ‘청춘’이나 ‘청년’의 활발한 사용은 과거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국토에서 희망은 오직 청년들의 정신과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변화는 청년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민족개조론’을 외치는 사람들도, 새로운 국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실질적인 움직임의 중심은 청년이었고 청춘이었다. 당시 사람들을 지배했던 또 다른 말은 ‘연애’였다. 과거 유교적인 엄격한 질서 속에 통제되었던 인간의 감정이 서구문화의 도입과 함께 ‘자유연애’라는 말에 열광하였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라고 불리는 윤심덕의 자살과 연이어 신문을 장식하던 연인들의 비극적인 죽음은 ‘연애’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집안의 반대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좌절하며 벌어진 ‘자살’은 당시 유행처럼 퍼져나갔던 것이다.
4. 점차 늘어나는 일본인들은 현재의 명동 중심에 새로운 상업문화를 확산시켰고, 사람들은 이러한 문화에 열광하였고 동경하였다. 일본의 물질문화는 점차 확산되어 한국인이 주로 거주하고 활동하는 종로 쪽으로 이동하였고 새로운 형태의 다방과 카페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질적인 욕망은 통제할수록 더욱 커지는 법이다. 신문과 언론에서 비판적인 기사를 통해 물질적인 낭비를 비난한다 할지라도 새로운 문물에 대한 욕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단발이 유행하였고 최첨단의 옷들이 선보였으며 사치스러운 문화가 확산되었던 것이다.
5. 특히나 번성한 것은 ‘성문화’였다. 일본은 의도적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일본의 성매매 문화를 도입하였고 포르노 사업을 확산시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매매 업소를 출입하였고 성병이 만연하기도 하였다. 어떤 신문에서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매독’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여학생은 ‘모던 걸’과 동일시되었고 여학생과 모던 걸에 대한 선정적인 기사가 신문을 장식하였다. 거리의 광고에는 몸을 드러낸 여성들의 야한 사진들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시대든 항상 문명의 변화를 이끄는 것은 ‘성’이었다. 당시 한국의 물질적 변화, 대중적 문화의 중심에는 ‘성’에 관한 다양한 담론이자 실제적인 변화가 있었다.
6. 성문화의 확산은 건전한 사회 분위기를 훼손시키고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언론은 타락한 성문화를 비판하였지만, 선정적인 기사를 보도함으로써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기독교 단체나 시민단체에서 ‘성문화’ 확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고 정부에서도 형식적인 단속에 들어갔지만, 사실 ‘성문화’와 이에 따르는 음주 및 아편의 확산은 일본 정부의 ‘식민지 정책’이었다. 한국민의 독립투쟁을 약화시키고 일본에 대한 종속을 강화시키기 위한 치밀한 계획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계획과 방치에 따른 성문화의 확산은 1920년대 조선 사회의 향락적 분위기를 강화시켰다.
7. 일본의 식민지 강점 기간 동안 상대적으로 통제나 억압이 적었고 쾌락적인 물질적인 변화가 확산되던 시기가 1920년대였다. 일본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신문사를 허용하였고 시민단체의 창립을 인정하였다. 1927년 급진적인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신간회> 설립도 형식적으로는 일본의 인정을 받고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강압정책이 결코 느슨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 대한 저항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탄압에 뒤따랐고 잔혹한 고문이 실행되었다. 단체 설립을 허용한 것도 항일조직을 손쉽게 통제하기 위한 전략으로 진행되었을 뿐이었다. 외형적으로는 탄압의 강도를 낮추는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치밀하면서도 집요한 문화적 침입, 정신적인 점령이었다. 향락적이고 쾌락적인 문화를 도입시켰고 사람들을 성과 마약에 중독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신’의 강도를 분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물질적인 쾌락이라는 점을 알고 있던 식민지 일본의 교묘한 책략이었던 것이며, 그러한 정책은 실질적으로 경성의 분위기를 바꾸어놓은 것이다.
첫댓글 - 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쾌락의 3S 정책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장 효과적으로 먹혀들어간다. 특히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사회에서, 자본주의 체계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정신을 우선시하는 사회에서 물질의 힘이 더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회로 변화되어가는 시점에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