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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제임스의 하루 |
“제임스 상병의 하루”
제임스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계바늘의 야광침이 뚜렷하게 8시 2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교대까지 40분이라!” 갑자기 나오는 하품을 재우며 기지개를 켜는데, 등 뒤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다보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여자가, 뇌살스런 표정으로 제임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식! 밝히기는!!” 제임스는 바닥에 떨어져 펼쳐진 플레이보이 잡지를 집어 들고,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샤프 중위의 불룩한 배를 바라다 보았다. 외부가 잘 보이도록 실내를 어둡게 하고, 난방을 위해 켜놓은 전열기 덕에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 없었겠지만, 언제나, 4시간의 위병 근무를 서비스 취침시간으로 여기는 녀석의 똥배짱은 부대 내에서도 이미 유명하다. “물론, 니가 날 믿고 이러는 거겠지만, 플레이보이 잡지는 너무 하지 않냐?“ 중얼거리며 제임스는 실룩거리는 중위의 배위에 잡지를 올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2월 초순의 밤이라 문을 열자마자, 제임스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몸을 비꼬며, 한껏 기지개를 켜고, 차가운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자, 순식간에 졸음은 사라졌다. 제임스는 위병소를 나와 바리케이트가 내려진 정문 너머로 보이는 시내 풍경의 일각을 바라다보며, 품속에서 간식용 쵸코바를 꺼내 물었다. 쵸코렛의 달큰함과 쌉쌀한 뒷 맛에 입속의 모든 침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역시, 미제가 좋아! 하기사, 국산에 비하면, 안좋은 게 있을라나?” 게다가, 얼마나 폼나냐? 아메리칸 소울져!! 어렸을 때부터 나름 키워온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죽을 똥을 써서 카튜사로 군 생활을 보내기로 작정한 자신의 결정을 제임스는, 아니 이 명복 상병은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쵸코 바의 맛을 입 한가득 느끼며, 부대 앞, 도로를 지나가는 한성 여객, 29번 버스를 보자, 신병훈련을 마치고 한국 육군에서 미군으로 배속되어, 입대 전에 그렇게 타보고 싶어 하던 미군 군용 짚인“ 허머”에 실려, 용산 역에서 이 곳, 캠프“ 레이나”로 들어오던 날이 뚜렷이 기억이 났다 그 때, 이 명복과 몇 명의 다른 카츄사를 인솔했던 장교가, 지금 위병소 안에 골아 떨어져 있는 샤프 중위였다. 어쩐 일인지, 그는 나를 이뻐했고, 제임스라는 별명도 지어 주었다. 그래서, 미군들은 모두 그를 제임스라고 불러주게 되었고, 어느새 이 명복은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파견한 한국 육군이 아니라, 아메리카 미 합중국에서 파견된 주한 미군 제임스라고 여기게 되었다. 캠프 “레이나” 근처에 있는 육군 본부나, 국방부의 정문을 지키는 한국 육군이 언제나 칼처럼 다려 입은 군복으로 폼을 내려고 하지만, 파스텔 톤의 얼룩무늬 특전복에 옅은 갈색 세무 군화를 신고, 검은 베레모에 선글라스를 걸치고 업무 차 정문에 들어서면, 사병은 물론이고 한국군 장교도 얼결에 경례를 하는 경우가 적잖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제임스는 폐부를 찔러오는 통쾌감을 가늘 수 없었다. 더구나, 외박이나 특박을 나가면, 서울 거리의 여자들은 죄다 자기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사실, 하루 밤 상대로 그에게 넘어온 여자들은, 이 명복이 아니라, 검은 베레모와 레이 밴 선글라스, 그리고 얼룩무늬 특전복의 아메리칸 소울져, 제임스와 잤던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 명복이도 그런 사실을 알고, 한편으로 찜찜했지만, 어느 새, 자신이 제임스라고 생각하게 되고나서는 거리낌이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미군사병이나 장교들, 특히 샤프 중위와 친하게 되고나서는 아예 미군으로 말뚝을 박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여간, 대한민국 땅에서 웬만한 일들은, 미군 특수복을 걸쳐 입고, 몇 마디 영어나 내둘러 주면, 돌아오는 답은 거의 “예~스!” 였다. 저번에 만난, 대학 2년생인 김 윤지를 이번 주말의 특박에서 만날 생각을 하자, 제임스는 저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부산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던 것이다. 게다가, 평소의 특박은 1박 2일 이지만, 이번은 3박 4일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합동훈련 “키 리졸브”가 끝나는 덕분이다. 지금쯤, 차출나간 동료 녀석들은 바깥에서 뺑이를 치고 있겠지? 자신은 샤프 중위 덕에 그 명단에서 빠졌기 때문에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 사실, 샤프가 나를 예뻐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 그가 요구할 때마다, 그가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를 소개해 주는, 말하자면 거래라고 할까? 그런 것이 있다. 뭐, 당연한 거 아닌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이 명복이 배우고 살아온 삶의 방식이 미군이라고 다를 게 없는 것이다. 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던가?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제임스는 히죽거리다, 갑자기 들려온 박수에 소리나는쪽을 돌아다보았다. 겨울인데도 새파란 양잔디가 깔린 연병장 건너편, 장교 클럽에서 들려온 소리임에 분명했다. 3일 전부터, 부대 내의 장교들이 정해진 시간에 장교 클럽에 모여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여느 때의 작전기간이라면, 장교들은 모두 자기의 책임위치에서 24시간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장교들이 모일 때마다, 전부 각자의 소지품을 꾸린 더플 백에, 군복도 아닌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채 모이는 것도 미심쩍었다. 3일 간이나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 부대 내의 전 장교가 집합하는 것은 상관의 지시일 수밖에 없으니, 장교들은 작전과 관련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거라 생각한 자신의 추리가 클럽에서 들리는 휘파람소리, 환호성에 박수소리에 쩌억, 금이 간 느낌이다, “그럼, 대체 뭐하는 거지? 뭣들을 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서울 도심의 미군이지만, 이따위 장난스런 행동들은 지나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자, 올해 훈련의 양상이 완전히 바뀐 것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예년의 경우는 항공모함전단에 대규모 한 미 연합병력이 해상에서 육지로 상륙하고, 설정된 임의의 목표로 전진하면서, 공포탄뿐 아니라, 실탄사격에 전투기에 의한 폭격까지,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규모였음을, 자신도 직접 참가했던 두 번의 작전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더구나, 작년에 있었던 두 번의 전쟁위기상황에 한미 양국은, 북한에 대해 더욱 강력한 군사적 압박을 가할 것이라고 떠들어대지 않았던가? 실제로 북한과 전쟁을 하는 게 아니라면, 누가 생각해도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북한의 영해가까이에 바짝 들이대어, 북한을 압박하는 “키 리졸브”같은 대규모 군사훈련이야 말로 미국의 장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작전 2주전에 갑자기, 훈련의 규모와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한마디로 평양시를 목표로 한 도심 대 테러훈련으로 바뀐 것이다. 뭐, 북한내부의 급변상황이 예상되어서, 그에 따른 작전변경이라고 했지만, 작년 말, 서해 사태에서 보여준, 한국군의 대응은 누가 봐도 한국군의 쪽팔림으로 끝난 일이었기에 그 뒤를 책임진다는 혈맹, 미군의 입장에서는 여느 때보다 더 강력하게 최강미군의 위상에 걸맞게, 북한뿐 아니라, 전 세계에 반드시 보여줄 타이밍이거늘, 느닷없이 북한 붕괴라는 핑계로 “도심 대 테러 작전”으로 전환한 것도, 솔직히 정치따위 잘 모르고, 관심조차 없는 내 고개마저 갸우뚱거리게 했다. 하기사, 내가 남북 관계, 북미관계를 제대로 알아서 뭣에 써먹을 것이며, 송구스럽게 일개 사병이 알려고 할 필요도, 암기할 필요도 없는 일이니까, 그냥 닥치고 까라면 까는 것이 군대라는 건, 국가를 불문하고 똑같은 것이지. 나는 그저 다치지 않고, 재미있게 군 생활을 보내면 장땡인 것이잖아?!라고 생각했었다. 어쨌건 작전의 많은 부분이 서울 도심지와 근교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제임스는 장교들이 전투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집합하는 것을 모종의 훈련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임스는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킨 뒤, 손가락으로 허공으로 튕겨 버렸다. 하얀 연기를 날리며, 빠른 속도로 공기와 접촉한 담뱃불은 순간적으로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보기에도 꽤나 높이 튕겼다 싶었지만 ,담뱃불은 이내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떨어진다 싶었던 꽁초는 갑자기 불덩이가 되어 하늘높이 솟아 오르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밤하늘 높이 솟구친 불꽃이 일순간에 더욱 밝아진 채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조명탄처럼 말이다. 제임스는 꿈벅거리며 두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또 하나의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 똑같이 밝아졌다가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낙하하는 것을 보고야, 부대 근처에서도 도심 훈련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곤, 피식 코웃음을 쳤다. “조명탄을 신호로 가상 공격이 시작되었군! 흠, 흠. 위치로 봐서는 국방부가 타겟이고, 흐흐, 애들 좃뺑이치겠구만!” 하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9시 정각이다. “어, 벌써, 그런데 다음 근무자는 왜 안오는 거야? 이 새끼 쏘옥~~빠져 가지곤” 밥, 아니 햄버거 먹듯이 지각교대를 하는 흑인 병장 사이먼이 다음 근무자였다. 제임스는 중대본부로 연락을 하기위해 위병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전히, 샤프 중위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고, 전화기를 들던 제임스는 갸웃뚱하며 샤프의 뒤편에 놓인 물건이 중위의 개인 더플 백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뭐야? 근무 끝나자마자, 다른 곳으로 전출이라도 가려는 거야?” 하곤, 중대본부를 호출했다. 그러나, 답신이 오지 않는다. “HQ, HQ!!" 불러보지만, 아무런 대꾸도 없다. 접촉 불량인가 싶어 여기저기 툭툭 쳐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니, 아예 신호가 가지 않는다. 고장일리는 없는데, 입대 후, 이런 일은 한번도, 그리고 들어본 적도 없다. ”참, 내. 이 자식들이 장난치는 거 아냐? 골탕먹이려고??“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방금 전, 밤하늘로 올라간 세 발의 조명탄말이다. "그건 신호였잖아? 작전을 개시한다는 신호?!! 그럼, 우리 부대가 타겟??!! 쉣!! 서너버비치!! 귀찮게 됬구만..!! 어쨌거나 보고는 해야지! 쉣!!" 투덜거리며 샤프를 깨우려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제임스는 찢어지는 경적소리와 함께, 눈부시게 밝은 헤드라이트를 번득이며 정문의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진해오는 검은 물체를 보았다. "콰~~광!!" 그리고, 무언가에 박살이 난 듯, 위병소의 정면 유리창의 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얼결에 머리를 구석에 쳐박으며 업어진 제임스는 놀라기도 했지만,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 너무 오바하는 거 아냐? 이 새끼들, 대충 훈련레벨로 해야지. 여기가 미군 캠프라는 걸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겁대가리없이 미 아메리카 합중국 재산을 박살내?? " 사실, 제임스는 자기 부대가 타겟이라 해도, 대항군인 한국군들이 설렁설렁 흉내정도로 끝내리라 생각했다. “ 이건, 그냥 사고야. 사고! 시발노무, 쫄따구 운전병새끼하고 지휘관놈, 바로 영창이다!! 하여간, 아메리칸 소울저인 자신을 놀라게 한 것만으로도, 늴리리 당나라 군바리자식들은 남한 산성감이다” “ 무슨 일이야? 제임스 상병??” 배불뚝이 샤프 중위가 자신의 더플 백으로 몸을 가린 채,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았다. “아, 샤프 중위님! 사고 같습니다. 망할 코리안 아미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씩씩대며 베레모를 눌러쓴 제임스가 위병소의 문을 열자마자 목격한 것은 번쩍하는 눈부시게 하얀 섬광의 찰나와 순식간에 찾아온 어둠이었다.
화창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수증기같은 연기가 새파란 풀 위로 피어오르고, 뽀오얀 아지랑이 너머로 무엇인가가 꼬물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꿈을 꾸는 건가? 흐트러진 시야에 차츰 초점이 맞아오자, 제임스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묵직한 통증이 온 몸에 번져가기 시작했다. 턱주가리를 정통으로 얻어 맞았는지 고개조차 까딱하기 어렵다. 꼬물거리던 것들은 부대 내의 장교들이었고, 환하게 밝혀진 조명탑아래, 푸르른 양잔디로 덮힌 운동장에 있던 장교들이 모두들 개인 더플 백을 들고, 대기되어있는 60트럭 속으로 하나 씩, 하나 씩 올라타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느끼는 동시에, 턱 주변으로 강한 통증이 번졌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자신을 부축해준 것은 , 후임 카투사인 김 진권 일병, 알렉산더다. “괜찮습니까? 제임스 상병님” 조심스레 물으며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알렉산더를 의식하며 둘러보자, 경계를 서고 있는 완전 무장한 군인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한국군 전투복이다. “ 야! 이거 훈련아니냐? 통증을 참으며, 제임스가 작은 소리로 물어보았다 ” 그러게요. 훈련은 훈련인데, 우리가 타겟이고, 대항군이 기습해 왔고, 캠프가 점령당하고 대항군한테 접수된 건 맞는 거 같은데요. 아예, 포로처럼 실려가는 장교들은 뭐랍니까?“ 연병장의 잔디를 깔아뭉개며 정문 쪽으로 달려가는 넉 대의 60트럭을 보며 알렉산더도 당췌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을 짓다가. ” 어!! 코피!! 코피“ 하며, 제임스의 고개를 젖혀주었다. 찝질한 피내음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갔다. 좀 전에 먹었던 미제 쵸코바의 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비릿함에 침은 커녕, 입 안은 바싹 말라있었다. 억지로 입안에 고인 피를 삼켜 버리자, 밤하늘의 별이 눈에 들어왔다. 별? 공해로 찌든 서울도심에서 별이 보이다니...하지만, 제임스는 지금의 밤하늘이, 이제껏 보았던 어느 날의 서울 하늘보다 맑고 깨끗하다고 생각했다.마치, 어렸을 적, 어느 방학 때, 강원도 외가에서 보았던, 손에 잡힐 듯 가까이서 반짝거렸던 그 날의 별처럼....
흔들거리는 트럭의 차단막사이로, 시내의 야경이 흘낏 흘낏 보인다. 눈에 익은 거리라, 건물이나 간판의 일부분을 보아도 어딘지 알 수 있다. 신호로 대기 중인 여기는 서울역 앞이 틀림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기차를 타러가는 시민들의 모습들이 분주하고, 고향을 다녀왔는지, 물건을 잔뜩 지닌 또 다른 시민들이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역 앞, 여기저기에 군인들이 단독군장으로 무장하고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인다. 대테러 훈련 중임은 틀림이 없다. 충분히 알려진지라 시민들은 군인들의 모습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택시 승강장 우측으로 시계탑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키 리졸브” 작전이 끝나면, 제임스는 이곳에서 윤지를 만나, 부산으로 2박의 여행을 떠나려고 약속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자, 다시금, 이게 훈련인지 뭔지, 현실인지 아닌지를 짐작할 수 없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트럭에 타기 전에, 이거, 너무 한 거 아니냐며, 따지듯 대들었던 B중대의 동기 녀석이, 한국군에게 엄청나게 작살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 소지품, 시계, 휴대폰마저 압수당하고, 하라는 대로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한 마디와 함께, 우리들은 트럭에 태워졌으며, 지금 어디론가 운반되는 중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출발하는 트럭의 차단막 사이로 얼핏 보이는 시계탑의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윤지는 나와 통화가 안되더라도 저 곳에서 기다릴 것이다. 장교용 피엑스에서 판매하는 한정판 명품핸드백을 주기로 했으니까............... 작전이 개시된 지 3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대체 트럭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꿈인지, 술에 취한 것인지, 아주 빡센 훈련인 듯하면서, 실제로 일어난 무시무시한 사건인지, 어쨌거나 순식간에 엄청난 일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존재가 참, 웃기는 물건이라는 것을, 자신이 꾸벅 꾸벅 졸고 있는 것을 느끼며 새삼 깨달았다. 그것도 배고픔을 느꼈기 때문이어서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하찮게 여겨진다. 한마디로 좃같은 기분이다. 한 삼, 사십분 졸았을까? 서울 시내를 벗어나면서, 속도가 빨라져 바깥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일정하게 흔들리는 트럭의 진동에 졸음을 느낀 것도 그 때였으리라. 도심을 벗어나고는 서지 않고, 내내 달릴 수 있었던 것은 필시, 고속도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도심 근처의 고속도로라면, 경부, 경인, 아니면, 순환도로나 외곽 도로일 수 도 있다. 목적지는 과연 어디일까? 하지만, 아까부터 트럭은 고장인 난 듯 움직이지 않고 있다. 트럭의 엔진소리로 보아 고장은 아니고, 마치, 구정 연휴 기간의 도로처럼 완전히 막혔기 때문인가?이런 저런 궁리를 해보자, 더 이상 생각하지도 말라는 듯 두통이 시작되어 머리가 뻑뻑해져 왔다. 그 때, 클락션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아니다, 이건 차의 경적소리가 아니다. 이건, 훨씬 저음이고 묵직한 베이스로 아주 길게 울려 퍼진다. 이 소리는 바닷가에나 가야들을 수 있는 소리, 뱃고동 소리다. 그렇다면, 여기는? 서울에서 한 시간거리 정도의 항구는? 그래! 여긴 인천이다." 정답이라고 대답이나 하듯, 다시 한 번 뱃고동소리가 울려 퍼졌고, 제임스는 얼핏, 바다냄새를 느꼈다. 그러자, 부르릉! 하고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럭의 차단막이 젖혀지자, 화물칸으로 눈부시게 밝은 조명이 쏟아져 들어왔다. 줄곧,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에, 시야는 온통 히뿌옇게 보일 뿐이다. 수정체의 동공이 광선에 적응이 되자, 눈앞에는 마치 영화와 같은 장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과 차량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일부는 모여 있고, 일부는 화물을 내리기도, 싣기도 하고, 또 일부는 부둣가로부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얼핏, 혼란스러워 보였으나, 모든 것이 이미 계획된 것처럼,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곧 알 수 있었다. 모든 움직임들은 차량과 화물, 그리고 인원들 사이에 배치된 군인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군인들의 좌측 어깨와 가슴에는 눈에 익은 마크를 달고 있었다. 청명하게 푸른 하늘색 바탕에 하얀색의 한반도 모양의 마크였다. 저 멀리 부둣가에 정박된 선박에도 한반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동료들과 제임스가 의아함을 채 느끼기도 전에 “정렬!!” 하라는 고함소리에 모두는 총알같이 뛰어내려 트럭앞으로 정렬했다.어느 새, 한반도 마크를 바꿔단, 동기병장을 난타하던 장교가 단호하지만, 한층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껴냈다. “여러분은 현 시각으로부터 미군이 아닙니다. 잠시 후, 여러분은 새로운 부대로 배치될 것이고, 그 곳에서 나머지 군 생활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불려지면 복창하고, 사무실로 차례로 들어가십시오!” 제임스와 동료들은 너무도 혼란스러워 서로 마주볼 수밖에 없었다. 트럭에 타기 전에, 건방진 태도로 물어보다 얻어맞았던, B중대의 병장 녀석도 궁금해 죽겠는지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호명이 되는 사이에 지시에 따라 일체의 부대 마크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부둣가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람?! 모여 있거나, 이동하는 사람들은 전부 미국인들이었다. 머리카락의 일률적인 길이로 보아 미군들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 그들의 한 손에는 개인 더플백이 들려있고, 또한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작고 큰 트렁크들을 소지하고 있었다. 뭐야? 이상황은? 어쨌든 다들 떠나는 모습임에는 분명하다. 떠난다기보다, 쫒겨 가는건가? 앞뒤 상황을 대충 뚜드려 맞춰보면 철수? 그렇다! 미군들이 한국을 떠나는 상황이다. 어째서? 왜? 누가? 순식간에 대여섯개의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그런데, 대체, 재들의 표정은 뭐지? 그들은 이미 모든 상황을 이해했고, 적응한 듯한 모습이다. 마치, 공항에서 출국수속을 하는 것 같은, 기다리던 먼 여행을 떠나는 듯한, 묘한 흥분감마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절차를 마친 사람들은 밝은 표정으로 버스에 올랐고, 버스는 부둣가에 정박된 커다란 화물선을 향해 경쾌하게 달려갔다. 그제야 어렴픗이 무언가를 이해하기 시작한 우리들의 발밑에는 뜯겨져 버려진 미국 육군과부대 마크가 어지러이 널려있었고,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이 명목 상병!” 서류를 들여다보며, 자신에게 다가선 사람은 여군이었다.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녀는 재차 , “이 명목 상병?” 하며, 확인하듯, 말꼬리를 올리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갸름하지만 단아한 미인형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아니 억양이 영 이상하게 들렸다. 서울 표준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방 사투리도 아니었다. 현기증을 느끼며, 이 명목은 그녀의 말투가, 우연히 보았던 북한방송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았다. 그녀도 한국군과 똑같은 전투복차림에 가슴과 좌측어깨에 선명한 한반도 마크가 달려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는 이 명목을 바라보다가, 그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반갑습네다.!" 하곤, 빙긋이 웃어 주었다. 그러자. 이 명목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치밀어 올랐고, 뿌~~웅~!! 출항을 알리는 힘찬 뱃고동 소리가 부두에 울려 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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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보니 한순간에 다 보았습니다 .. 소설이 현실이 되는 그날까지 ..... 제미있서서 펌 질 좀했습니다 .
첫댓글 지금 가슴이 뭉클해지는것이 예전에 이현세 작가의 남벌이란 만화에서
남한이 북한에게 핵미사일을 받으면서 우리측 안기부요원 백두산과 북측 요원이 손을 마주 잡고 한 말(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조선은 하나?,민족은 하나? 그 장면 보고 눈물이 핑 돌던데 아~~ 그 장면이 지금도 선 하네요
우와.. 정말재미있게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