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上 最後에 만들어진 關城 三國史記 新羅本紀에 수많은 新羅城의 名稱이 나온다. 이 중 우리 地域에 있는 山城과 이름이 一致하는 것은 “石峴城” 하나 밖에 없다. 三國時代에 築造된 우리 地域 代表的인 山城인 姑母山城도 正確하게 그 이름이 보이질 않는다. 다만 母山城 이라는 名稱은 보인다. 新羅本紀에 나오는 石峴城이 우리 地域 麻城面에 있는 姑母山城 옆의 石峴城과 같은 山城인지는 疑問이지만, 다만 姑母山城은 2000년부터 施行된 姑母山城 復元事業과 地表 및 發掘調査 結果에 의하면 史蹟 235号인 忠北 報恩의 三年山城보다 약 1世紀가 빠른시기에 築造된 山城으로 알려져 있다.
깔끔하게 整備된 石峴城 周邊과 鎭南門 (麻城面 新峴里)
그런데 姑母山城 옆으로 마치 날개처럼 뻗쳐 築造된 石峴城(姑母山城의 翼城이라고 함)은 正確하게 어느 時代에 築造된 山城인지 正確하게 結論을 내지 못하고 있다. 만약 姑母山城과 같은 始期에 築造되었다면 그 規模와 城壁의 두께, 門樓 樣式 등 新羅時代에 附合되는 部分이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는 않아 보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高麗 太祖가 南下할 때 이곳까지 왔다는 記錄으로 보아 南征 루트의 길목으로 判斷하여 이곳에 城을 쌓았을 可能性도 전혀 排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2001年 施行된 石峴城 地表調査와 石峴城의 中心 樓門인 鎭南樓의 試掘調査 結果로 보았을 때 壬辰倭亂 또는 朝鮮後期에 築造되었을 可能性을 題記해 石峴城에 대한 疑問은 커져 있는 狀態이다. 調査當時에 남아 있던 城郭의 痕跡을 土臺로 調査한 結果는 鎭南門을 中心으로 姑母山城과 맞다은 部分의 길이가 150m, 남쪽으로 토끼비리 始作部分과 닿은 部分까지가 235m로서 全體 385m 길이의 城郭이다. 城郭은 基礎部와 城壁의 몸인 체성부가 남아 있고, 여장부분과 체성부의 上部는 一部 損傷되어 있었다. 특히 여장부분은 총안과 사혈 및 여장 지붕의 形態를 알기가 어려워 現在 復元된 部分은 當時 비슷한 始期에 築造된 北漢山城, 聞慶關門 등의 여장과 비슷한 形態로 復元이 되어 있다. 石材는 周邊 地域에서 採取한 것으로 推定되며 一部 江돌도 使用되었다
첫 번째, 한글學會에서 만든 『韓國地名總覽』5, 慶北片Ⅱ(1978) 에서는 石峴城을 鎭南關門터로 記錄을 했으며 鎭南關門터는 돌고개 남쪽, 곧 할미성(郡 山川)의 南門樓인 鎭南關門의 터. 東學亂 때 불탐. 八景紀念碑가 있음으로 記錄되어 있다.
2004년 “鎭南門” 懸板을 달고 있는 모습
鎭南門 懸板 (글씨-심경 황규욱, 板刻-향산 김승수)
두 번째,『(嶺南邑誌)』에 있는『(聞慶邑誌)』는 1894年 11月부터 1895年 5月 사이에 慶尙道 各 邑에서 作成한 邑誌를 議政府에서 합철한 資料로서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石峴城(當 癸巳 府使金楨根新築 門曰鎭南門 門樓六間 東西長三百八十五把 設置守城別將) 石峴城은 癸巳年 (1893, 高宗 30면) 聞慶府使인 金楨根이 鎭南門이란 門樓를 6칸 規模로 新築한 것이며, 城壁의 길이가 385파(把)라 하였다. 以後 없어진 것에 대하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세 번째, 1920년 11월 16일 곽인호, 권영섭에 의하여 姑母山城 國有林 境界圖가 1/6,000의 縮尺으로 그려져 전해온다. 姑母山城은 新峴里 山 30番地, 石峴城은 山 36番地 林野와 39番地 林野의 境界로 되어 있다. 姑母城에 이어진 石峴城은 두 줄로 標示되어 있는데, 位置가 確實하지만 精巧한 實測이 아니다.
네 번째, 以後 1992년 聞慶文化院의『聞慶地域의 山城』1998년 鄕土史料 제13집으로 發行된『姑母山城』이 있다. 특히 姑母山城에서 石峴城 部分을 石峴城을 姑母城의 翼城으로 取扱하였다. 뿐만 아니라 “壬辰倭亂 5년째인 宣祖 29년 丙申(1596)에 本城의 東南쪽 城壁에서 始作하여 한길이 지나는 돌고개의 남쪽 溪谷을 가로막고 兎遷 斷崖(絶壁)까지 뻗어 새의 날개마냥 길게 벌린 翼城을 築造함으로써 남쪽으로부터의 侵攻을 遮斷하였다”라고하고 3區間으로 나누어 城壁을 說明한 다음 立面圖, 斷面圖, 寫眞을 添附하였다. 이 調査에 의하면 石峴城은 1896년 1월 15일 雲崗 李康秊이 이끄는 聞慶 義兵이 退却한 뒤에 倭人들이 불을 놓아 태운 것으로 되어 있다. 가장 仔細한 調査紀錄이므로 學術的 價値가 높다.
이러한 資料를 土臺를 볼 때 果然 石峴城의 築造始期를 언제로 볼 것이냐의 問題는 오히려 더 풀지 못할 宿題가 된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의 數 많은 山城의 年代를 正確히 알기는 매우 힘들다. 물론 文獻上에 初期 築造에 대한 部分이 있으면 正確하게 알 수 있으나, 잦은 戰亂에 持續的인 補修가 進行되었기 때문에 事實上 初期의 樣式은 찾기가 어려운 것이 事實이다. 石峴城의 境遇도 이와 비슷한 事例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姑母山城의 築造始期와 高麗太祖 南征, 壬辰倭亂 等 歷史上 굴직굴직한 事件들이 이곳에서 벌어진 것으로 보아 적어도 朝鮮中期에는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城郭의 形態는 갖추고 있지 않았나 推定해 본다.
첫댓글 석현성의 역사를 문헌을 통해 안내해 주어 지역의 산성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어 감사합니다.
심경 황규욱선생의 "鎭南門" 현판 글씨가 묵직하고 힘차게 보여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