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황매산(黃梅山, 1113m)과 허굴산(虛屈山, 이칭 ; 虛屛山, 虛佛山, 682m)의 동남으로 향하는 지맥의 산줄기에는 삼계(三溪), 삼리(三里)가 있다.
쌍백면 죽전천(川)의 죽전리(竹田里) 골, 삼가면 하판천의 하판리(下板里) 골과 문송천의 문송리(文松里) 골이다.
3개의 골짝은 5~8km로 좁다랐고 길다. 3개의 골 중에서는 가장 긴 죽전천 죽전리의 윗쪽에는 삼리(三里)라는 리(里)가 하나 더 있다.
삼리는 상기의 3개 골짝인 삼계를 지칭하는 어원의 지명이라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삼리에 100여 호가 살았다 한다.
옛날 큰 도로가 없고 소로, 농로, 산길만 있던 시대에는 합천 용주면, 대병면 사람들이 삼가장을 왕래할 적에는 삼리를 거쳤기에 삼리에는 주막과 술 도가(옛날 양조장)가 있었다 한다.
옛날에는 삼가 5일장이 군청 소재지 합천장보다 컸다.
현재 합천군에서 쌍백면 평구리와 가회면 월계리 산두(山頭)마을로 연결하는 지방도로 개설 공사가 한창이다.
산두는 허굴산 바로 아래의 마을이다. 현재 대병면, 가회면 소재지와 산두마을까지는 2차선 지방도로가 포장되어 연결되어 있다.
구암재(龜巖齋, 이칭 ; 耳巖齋)는 삼계 삼리의 하나인 쌍백면 죽전리 귀바위(耳巖) 마을에 소재한다. 구암재는 초계정씨 정배걸(鄭倍傑) 시조로부터 18세손 되는 정춘경(鄭春卿), 정이경(鄭頤卿) 형제의 재실로 부(父) 정홍적(鄭弘績 ; 17세손), 조부(祖父) 정몽일(鄭夢馹 ; 16세손)은 조선조에 2대에 걸쳐서 사과(司果 ; 정6품, 성균관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문관) 관직을 지냈다.
현재 이암재공파 종중의 대표자는 정이경의 10대손이 되는 삼가면 문송리에 거주하시는 정수영(鄭守永 ; 시조로부터는 28세손)이 맡고 있다.
구암재는 역사에 나오는 주요 건물이다. 삼가현(三嘉縣) 객사인 봉성관(鳳城館)은 현재 삼가면사무소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객사의 바깥채인 정금당(淨襟堂)은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초 임진왜란에 합천 삼가에서 내암 정인홍, 박사제, 노순, 윤탁, 윤선, 허자대, 조계명, 허홍재, 박사겸, 정담수,정질, 정경, 정방준, 정진선, 정진철, 정덕희 등 유림과 장정이 초유사 학봉 김성일을 만나 우국충정을 다짐하며 창의(倡義)한 유서 깊은 곳이다.
1919년 삼가장터 3.1만세운동 때는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역사적 건물이기도 하다. 정금당은 훼철되었지만 사적지로 복원이 거론되기도 하는 중요 건물이기도 하다.
1871년(고종 8) 삼가읍지에 나와있는 정금당은 일제시대에 훼철된 후, 목재와 기와 등 자재(資材)를 1923년 계해(癸亥) 10월 쌍백면 죽전리 이암(귀바위)마을 초계정씨 재실인 이암재(耳巖齋, 일명 ; 龜巖齋)를 새로 지을 때 재사용되었다.
구암재 건립은 1927년 삼가농업보습학교 기성회 창립위원으로 활동한 정의규(鄭義圭)의 주도 하에 매입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지금도 조선시대 전통 목재 가옥의 우람함을 엿볼 수 있다.
구암재는 바로 옆에는 귀바위가 있다. 이번에 신작로 개설 공사를 하면서 귀바위의 훼손이 없도록 마을에서 합천군에 요청하여 도로가 산의 바위 귀퉁이를 훼손하지 않도록 비켰다고 한다. 지금은 방치되어 있지만 예부터 귀바위는 소원을 들어주는 소원성취(所願成就) 바위로 마을에서 신성시 한다.
옛날에 마을 이름이 된 귀바위의 전설은~?
귀바위 마을은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나이 육십에 귀가 순해졌다', '육십세가 되어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다', '예순살에는 무슨 일이든 듣는 대로 순조롭게 이해돠었다'의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의 교육철학 때문으로 천석꾼이 나온 부자마을이었다. 귀바퀴 테와 귀청(귀 구멍)도 있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셔터를 눌렸다.
그런데 마을의 탁발하던 승려와 양갓(良家)집 홀로 사는 젊은 여인(寡婦)과의 깊은 사랑이 발각되어 마을에서 견우와 직녀의 애틋한 사랑의 비유처럼 스님의 내왕을 차단시키는 러브 스토리 전설이 있다. 그 후로 누가 그랬는지 귀바위를 탓하여 귀바위 귀바퀴 테의 귀밥(부처님 귀밥 모양)이 좀 깨뜨려졌다고(破損)한다. 허굴산에는 지금도 스님이 바랑(이칭 ; 배낭, 걸망, 행낭)을 벗어 걸어두었다 해서 생긴 '바랑거리'란 지명도 이에 연유한다.
현재는 50여 세대가 살았다는 옛날 귀바위 마을에는 이암재 재실과 이암소류지만 남았고, 마을은 아랫쪽 새담(이칭 ; 샛담)으로 마을이 옮겨졌다는 전설이다.
상기의 전설로 보건데, 귀바위는 유학 유가의 공자님 이순(耳順) 바위와 불교 불가의 부처님 귀밥(귀뿔 ; 훼손되기도 했지만) 바위의 두 내력을 함께 품은 뜻이 큰 바위이다. 귀바위 전설의 의미는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귀바위를 손상(損傷)없이 잘 보존(保存)하여 귀바위 마을이 옛날처럼 인물(人物)도 나고 흥성(興盛)했으면 한다.
- 전설 청취 ; 정수영(77), 김갑석(78), 김치현(84)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