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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학 못하면 ‘무리배치’
전쟁이 끝나자 공산당은 “김일성 원수님의 영활한 전략 전술로 미제와 16개국 추종 국가들을 쳐부수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떠벌리면서 ‘김일성 장군’이라는 호칭을 슬그머니 ‘원수’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었어도 산성리 마을에 평화는 오지 않았다.
전쟁 동안의 병역 기피자, 부역자, 반동분자를 색출한답시고 온 마을이 또 한번 발칵 뒤집히게 된 것이다.
맨 먼저 걸려든 것이 민청원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던 김정규였다. 그는 전쟁 동안, 심한 폐병을 앓고 있는 마을 사람 현장옥의 아들이 군대에 나가지 않으려고 산속 움막에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고하면 총살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따금씩 먹을 것을 갖다주면서 감싸주었던 일이 발각된 것이다.
김정규는 휴전이 되자, 산에서 내려온 청년과 함께 내무서로 끌려가 호되게 매를 맞고, 6개월의 두문(杜門:杜<막다, 닫다, 닫아걸다>)처분을 받았다. 청년에게는 2년간의 두문 처분이 내렸다. 두문이란 집 주위에 말뚝을 박고 새끼줄을 친 다음 줄 밖으로는 일체 출입을 못하게 하는 원시적인 처벌이다. 전쟁 때 원호 물자 공출에 협조하지 않았거나 민청원을 비난한 사람들도 두문 처벌을 받았다.
전시의 광란과 전후의 혼돈 속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김만철은 15세 때인 1955년 종성군에 하나밖에 없는 종성 고급중학교에 입학했다.
사회주의 재조직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농을 없애고 협동화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협동농장 관리위원장 등, 새로운 간부가 등장하게 되자 차츰 일반 계층과 차이가 생겨 계급이 없다는 사회에 새로운 계급이 생기기 시작했다.
김만철이 입학한 종성 고급중학교만 해도 군 당, 군 인민위원회, 내무서원 등, 읍내 사람들의 자녀가 60퍼센트를 차지했고 나머지가 시골 중학교에서 추천받은 아이들이었다.
김만철은 큰누이 김재복의 친구인 담임선생의 집에서 하숙생활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노처녀인 담임선생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하숙비라고는 집에서 살림을 하고 있는 둘째 누이 김재희가 보름마다 조금씩 보내주는 보리와 좁쌀이 고작이었다. 토지개혁 때 받은 땅이 협동농장에 편입되고 아버지가 총이 없어 사냥을 하지 못하게 되자 집안 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월사금(수업료)은 큰누이가 대주었으나 돈이 없어 무명옷도 해입지 못하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사시사철 삼베옷을 입고 다녔다. 물론 신발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다. 3년 동안 새 운동화를 신어본 것은 언젠가 담임선생이 한번 사다준 것이 고작이었고 나머지는 큰누이가 헌 운동화를 얻어와서 깨끗이 빨아 기원준 것이 전부였다.
고급중학교에서는 군사훈련이 엄격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군사학 시간에 삼베옷 차림으로 사지식(四肢式) 포복 훈련을 한 번 하고 나면 팔꿈치와 무릎은 금방 해지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자신의 삼베치마를 뜯어 기워주기가 일쑤였다.
누덕누덕 기워 입은 김만철의 삼베옷은 학교의 명물이 되었다. 그러나 김만철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학업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김일성 우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2학년 때의 어느날 ‘혁명 역사’시간이었다. ‘당투(黨鬪-조선 노동당 투쟁사)’ 담당 선생이 말했다.
“.......혁명의 영재이시고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께서는 20여 성상 항일 유격대를 이끄시고 백두의 눈보라를 헤치면서 동만주 일대에서 강고한 투쟁을 전개, 마침내 일제를 패배시키고 조국을 반세기에 걸친 오랜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알겠습니까?”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한 학생이 손을 들어 말했다. 김만철이었다.
“뭐야?”
선생은 이마를 찌푸렸다.
“저는 인민학교 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께서 소련군과 손을 잡고 15여 성상을 투쟁한 끝에 마침내 소련군이 조선을 해방시켰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김일성 원수께서 20여 성상 강고한 투쟁을 전개, 일제를 패배시키고 조국을 해방시켰다고 하셨습니다. 15여 성상과 20여 성상 가운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 또 조국을 해방시킨 것은 소련군인지 김일성 원수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순간, 선생의 얼굴이 당황과 곤혹으로 일그러졌다.
“그런 질문은 허락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룩하신 영광스러운 혁명 전통을 이어받아 참다운 공산주의 혁명가가 되도록 노력하면 된다. 다른 질문 없나?”
“있습니다!”
다른 학생이 말했다.
“박도만, 말해 봐.”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께서는 항일 투쟁을 하실 때 겨우 50명의 빨치산을 데리고 40일 간의 강고한 투쟁을 전개하시면서 눈을 끓여 먹기도 하고 때로는 수십 일을 굶기도 했으며 앞뒤에 적을 달고 수백 리를 강행군한 끝에 5천여 명의 적을 일거에 소탕하셨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수십일을 굶으면서 앞뒤에 적을 달고 수백리를 강행군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습네다.”
“왜?”
“사람이 어떻게 수십일을 굶고도 살 수가 있으며 앞뒤로 포위당한 채 어떻게 수백리를 행군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학생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히 해! 그러니까 너희들은 혁명정신이 되먹지 않았어. 거기에 수령님의 위대성이 있는 거야. 불세출의 영장이신 수령님께서는 솔방울로 총알을 만드시고 나뭇잎으로 배를 만드시며 손만 한번 쳐들면 비바람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지신 분이다. 그분을 한번 만나기만 하면 평범한 농부가 교사로도 될 수 있고 장군으로도 될 수 있으며 손길만 닿으면 앉은뱅이도 일어서고 장님도 눈을 뜨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수십리 길을 단숨에 주름잡는 축지법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간을 주름잡는 축시법도 자유자재로 구사하신다. 지난 전쟁 때 미제가 16개 추종 국가와 함께 이승만 역도를 충동질하여 우리 공화국을 침공했으나 김일성 원수께서는 놈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지 않았느냐. 이제 알겠지?”
“.......”
“김만철과 박도만은 수업이 끝난 후 사무실로 와!”
그날 오후, 김만철과 박도만은 교장에게까지 불려가 호되게 훈계를 받고 50장의 자기 비판문을 써서 제출하고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주일 동안 김일성 혁명 역사에 대한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것이 장차 자기 신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를 김만철은 모르고 있었다.
1958년 9월, 김만철은 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전의 3개월은 상급학교(대학) 진학을 위해학교장의 추천을 받는 기간이었으나 김만철은 성분 불량으로 처음부터 추천 대상에서 탈락되었다. 일단 성분 불량으로 낙인이 찍히면 아무리 수재라도 진학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1개 고급중학교의 졸업생은 1백 50명에서 2백 명 정도인데 추천 숫자는 10퍼센트인 15~20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에서 당 간부의 자녀가 최우선적으로 추천되고 그 다음이 학교 지원사업에 공이 많은 사람의 자제와 최우등생이다. 그리고 일반 학생이 추천을 받게 되는데 시험을 통해 그 중의 50퍼센트 정도는 탈락하게 된다. 물론 예외도 있다. 군에서 제대한 사람과 뇌물을 바친 사람은 아무리 시험을 못 쳐도 입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돈은 좋은 뇌물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돈이 있다해도 살 수 있는 물건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북조선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귀한 물건, 예컨대 일제 세이코 시계나 카메라, 라디오 등을 갖다 바쳐야 한다.
그래서 고급중학교 졸업시기가 되면 일본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의 서신왕래가 부쩍 늘어나고 암시장을 찾는 발길이 잦아진다. 그러므로 간부들의 자녀도 아니고 뇌물을 바칠 형편도 못 되는 학생들은 아예 공부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가지 못하면 학교에서는 졸업자 명단을 구역 위원회 노동과에 통보, ‘무리배치’를 받게 된다. 무리배치란 일종의 강제 취업이다. 그것도 한 사람씩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1개 학급을 몽땅 청년 작업반이나 주택건설 돌격대 등에 배치하여 여자는 출가 때까지, 남자는 죽을 때까지 그 직장에 붙어 있어야 한다. 필사적으로 일을 하여 간부로 승진되면 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직장을 옮긴다든가 직업을 바꾼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직장에 나가지 않으면 ‘식량 배급 증명서’를 떼주지 않기 때문에 배급을 못 타고 굶는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식량 배급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북조선 사회에서 규칙을 어긴다는 것은 좀 과장되게 말해서 죽음을 의미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구역위원회 노동과장에게 뇌물을 많이 바치면 간혹 빠지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때도 현금은 소용없고 반드시 귀한 물건이라야 했다.
김만철은 운이 좋았다. 아버지가 노동과장의 친구인 정청룡에게 청을 넣어 졸업과 동시에 청진 철도관리국 나진 기관구(羅津 機關區)의 기관차 화부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철도국은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직장의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제복을 지급하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김만철은 취업과 동시에 면직으로 된 검정색 철도복을 지급받았다. 생전 처음 입어보는 새옷이라 얼마나 기뻤던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웅기군(雄基郡) 홍의리에 있는 두만강 기관 분구(機關分區)에 배치되었다. 두만강역은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신설 역으로서 역 구내의 길이만 해도 4킬로미터가 넘는, 평양역 다음의 큰 역이었는데 5백미터쯤 되는 나무다리를 건너면 바로 소련령 하싼 역이었다. 매웁기로 이름난 소만 국경의 장고봉(張敲峰) 바람이 불어오면 밤 사이에 모래산이 하나씩 생긴다고 하여 조산리(造山里)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그가 하는 일은 기관차 화부 겸 환차(換車) 작업이었다. 그러나 환차 작업은 나이 많은 고참 화부들이 도맡아 하고 신참들은 매일같이 고된 화부 노릇만 했다.
일은 매우 힘이 들었다. 기관차를 한번 타면 보통 16시간이걸리는데 차굴(터널)이 많고 더구나 회령(會寧)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이 많아 석탄을 15~16톤이나 때야만 했다. 차굴을 한번 지날 때마다 연기와 석탄 냄새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안 되겠다. 이러다간 젊은 놈 하나 잡겠군.”
보다못한 기관사 권칠봉 영감은 집에서 김치국을 가져와 먹여주기도 하고 빈둥거리는 고참들을 꾸짖기도 했으나 고참 화부들은 매일같이 근처의 술집 여자들과 부화(방탕한 행위)를 하고 와서는 골치가 아프다는 핑계로 드러눕기가 일쑤였다.
18세의 김만철에게는 그것이 고생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속옷까지 새까맣게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돌아와도 목욕 시설이 없어 찬물로 씻어야 하는 것과, 한창 먹어야 할 나이에 제대로 먹지 못해 배를 곯는 것은 역시 견디기 어려운 고역이었다.
두만강의 연정(戀情)
두만강 기관분구에서는 합숙생활을 했는데 보름치씩 식권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배가 고파 곱빼기로 먹다보면 열흘이 못 되어 식권이 떨어져 버리곤 했다.
“어, 큰일났다. 벌써 식권이 다 떨어졌으니 어떡하지?”
김만철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같이 들어온 최학구가 눈을 찡긋했다.
“김동무, 좋은 수가 있긴 한데 말이야.”
“좋은 수?”
“응, 지난 비번 때 부포리로 나가봤더니 굉장히 큰 오리 사육장이 있더군. 그걸 잡을 수만 있다면.......”
“그래? 그까짓 게 무슨 문제야. 나한테 맡겨.”
같은 또래의 조용욱이 큰소리를 쳤다.
“조동무, 큰소리치지 마. 당에서 관리하는 목장이야. 감시원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단 말이야.”
“당에서 관리하는 목장? 그건 좀 곤란한데.......”
조용욱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이 젊으나 젊은 나이에 굶어가면서 일을 할 수는 없잖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아무튼 가보기나 하자구.”
김만철의 제의에 따라 세 사람은 비번날을 맞추어 두만강변의 부포리로 갔다.
오리 목장은 기관분구에서 십리쯤 떨어진 적진늪에 조성되어 있었다. 세 사람은 강변의 모래언덕에 배를 깔고 늪을 살펴보았다. 꽤 큰 호수였다. 호반에는 키를 넘는 갈대밭이 우거져 있고 호수에는 수천 마리의 오리떼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늪의 가장자리를 따라 서너 군데의 감시 초소가 마련되어 5, 6명의 처녀 관리원들이 한가로이 오리떼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녁무렵, 세 사람은 그물망태기를 허리에 차고 사지식 포복으로 늪을 향해 다가가 갈대를 꺾어 입에 물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오리의 다리를 잡아 물 속으로 끌어들여 망태기에 집어넣었다. 잠시 수면이 흐트러졌다가는 이내 잠잠해졌다.
오리는 20여 마리나 되었다. 그들은 강변의 사방용 막대기를 뽑아 털째로 구워 포식을 한 다음 나머지는 합숙소 여자 관리원에게 주고 식권과 맞바꾸었다.
고참들이 눈치챈 것은 몇 달이 지난 후였다. 최학구와 조용욱이 이따금 고참들에게 오리 몇 마리를 주고 화부일을 대신 시키는 바람에 탄로가 난 것이다.
“이새끼들아, 그 오리가 어디서 났는지 바른 대로 대라!”
고참들은 세 사람을 불러놓고 윽박질렀다. 김만철은 두만강에 날아오는 물오리라고 잡아뗐으나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여기에 몇 년씩을 근무했지만 물오리는커녕 갈매기 새끼 한 마리 잡지 못했다. 똑바로 말해!”
마침내 세 사람이 오리 목장의 소재지를 실토하자 시간이 많은 고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오리 목장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물 속에서 큰 구렁이가 나와 오리를 잡아채 간다.”
오리 목장의 처녀 관리원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고참들이 물속에 몸을 숨긴 것까지는 좋았으나 오리를 많이 잡으려고 조심성없이 팔을 물 위로 내놓는 바람에 구렁이로 착각을 했던 것이다.
적진늪의 오리 사냥은 얼마 후 중단되고 말았다. 고참 한 명이 처녀 관리원들에게 붙들려 내무서로 넘겨지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김만철은 오리 사냥 못지않게 어떤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당시 두만강역에는 소련에서 수입해오는 설탕 등, 각종 물자들이 매일같이 하역되고 있었다. 그러나 창고시설이 허술해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철로변에 그대로 쌓아두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측에서는 하역 작업이 지체되면 화차 1량에 얼마씩 연체료를 물리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만철은 여느 때처럼 화차 밑에 들어가 선로에 떨어진 석탄을 치우고 있는데 누군가가 엉덩이를 툭 걷어찼다.
“어떤 놈이냐?”
친구들의 장난인 줄 알고 김만철이 소리를 꽥 지르자 갑자기 깔깔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파란 눈의 로스께 처녀였다.
“이봐, 왜 차는 거야?”
화가 난 김만철이 정색을 하고 따지자 처녀는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 새까맣게 되어 일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장난을 한 것뿐이야.”
처녀는 뜻밖에도 우리말로 말했다.
“장난? 넌 도대체 누구야?”
“난 따말리아. 소련에서 온 국제 화물원이야. 동무는 누구지?”
“난 김만철이다, 왜?”
“화내지 마. 내가 사과할께. 잠깐 시간낼 수 없어?”
김만철은 따말리아의 숙소로 따라가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음식을 대접받았다.
따말리아는 조선계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다. 나이는 김만철과 동갑나기인 열 여덟 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따말리아는 매일같이 먹을 것을 갖다주기도 하고 김만철이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찾아가면 웃으면서 숙소의 목욕탕을 사용하도록 해주었다.
그들은 남들의 눈을 피해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김만철이 오리 목장에 잠입하여 ‘기술적’으로 잡아온 오리를 구워먹으며 시시덕거리기도 했다.
김만철은 따말리아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풍만한 육체와 열정적인 행동에 쩔쩔매기가 일쑤었다. 따말리아는 강변에 드러누워 얘기를 하다가도 느닷없이 김만철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가 하면 목욕실의 문을 덜컥 열고 들어와 목욕중인 김만철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김만철은 따말리아의 그런 개방적인 성격이 싫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순박해서 여자의 그러한 행동에 대응할 방법을 모르고 있었을 따름이다.
몇 달이 지난 어느날, 여느 때와는 달리 풀이 죽은 모습으로 따말리아가 말했다.
“만철 동무, 마담스키 있어?”
“마담스키? 난 그런 거 없어. 왜 갑자기 그런 것을 묻지?”
“나, 파견근무 기한이 됐어. 며칠 후 소련으로 돌아가야 돼. 만철 동무, 나 사랑해?”
“물론이지.”
“그럼 우리 결혼해.”
“결혼?”
“우리도 결혼할 나이가 됐잖아.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낼 테니까. 하바로프스크에 가서 같이 살면 된단 말이야. 조선에서 이렇게 살기보다는 몇 배나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응? 그렇게 해.”
따말리아는 그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로 김만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김만철은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식구들을 버리고 혼자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라나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인민군에 입대해야 돼.”
“몇 년인데?”
김만철은 잠시 망설였다. 의무 연한은 3년 6개월로 되어 있었으나 보통 10년 이상씩 복무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3년쯤 돼.”
김만철은 거짓말을 했다. 그녀에게 더 이상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따말리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또렷하게 말했다.
“하라쇼! 그럼 3년 후에 결혼하기로 해. 약속했어.”
“응.”
김만철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따말리아는 김만철의 목을 껴안고 열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1958년의 어느 겨울날, 따말리아는 3년 후의 재회를 몇 번이나 다짐하면서 어스름이 짙어가는 두만강역을 떠났다. 하바로프스크의 자기집 주소가 적힌 쪽지와 소련제 우랄 시계 하나를 김만철의 손에 쥐어주고서.
따말리아는 전망차 밖으로 나와 계속 손을 흔들었다. 김만철은 고꾸라지듯이 플랫포옴을 달리면서, 빨간 테일라이트가 가물가물 어둠에 묻여 가는 것을 언제까지나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짧은 첫사랑의 이별이었다.
첫댓글 민청원이란 말 정말 오랜만이네 ...
가슴속 사연들을 종합하면 얼마나 많을가
특히는 나이많은 사람들부터 .
오늘도 84세된 아저씨 만나보았는데 말을 안한다
자식이 있단다 ...
좋은 글 많이 올려줘봐요
우리가 모르는 미국에 대해서도 ...
김만철님도 41년생이니 이제는 70이 지났죠...
고등학생땐가? 이웅평 소령 뱅기 타고 귀순해 올때 라디오 듣다가 왜~~애앵 하면서 경보울리고 전쟁났다고 라디오에서 듣고 깜짝 놀랐었어여..인천시내도로에 사람이 다 숨어서 한명도 안보였다는 ....나중에 귀순이란걸 알았지만...이 분도약 20년전쯤인가 ? 뉴스에서 본거 같읍니다. 배타고 일가족 모두 오신분들 아니신지요? 만세부른거 본기억도 있고...그뒷 애기들은 못들었는데... 안전을 위해 꼭꼭 숨긴건지
탈북자들이 많아졌으니 이제는 취재거리가 안되니 그냥 평범하게 사는 거죠. 가끔씩 사이드 뉴스에 나오기는 하죠.
하이고..이분 인터넷 검색하니 사기꾼들에게 엄청 고초를 당하셨네여. 씁쓸합니다. 여기있다는게 슬프네여..현실이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