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으로 좋은 터이다.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꼭 찾는 곳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천방산 기슭에 있는 아계 이산해의 묘이다.
그 묘소는 옥녀탄금혈(玉女彈琴穴)의 기가 막힌 천하의 명당으로 꼽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혈(穴)은 주산 천방산 줄기가 감싸고 있다. 주산 천방산이 아주 실하고 든든하다.
좌우에서 청룡과 백호의 용맥이 두 세겹으로 보호하고 있는 모양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여러 산의 철통 같은 경호를 받는 혈(穴)의 앞은 너른 들이고 물이 넉넉한 연못과 방산저수지다.
풍수에서 말하는 배산(背山)과 임수(臨水)의 조건이 완벽한 곳이다.
너무 아름답고 예쁜 나머지 선녀들이 내려와 가야금을 타고 한껏 즐긴 명소였다.
그 선녀들의 유람 놀이터 옥녀탄금의 혈(穴)자리인지라 예로부터 풍수가들의 관심이 쏠렸다.





아계 이산해의 신도비가과 신도비이다.
이 신도비문은 번암 채재공이 찬술했다.
그 비문은 한호 석봉의 글자를 집자했다.
비 머리부문의 전액은 미수 허목의 글씨를 집자했다.
높이는 325cm, 너비는 75cm, 두께는 31cm이다.

아계 이산해가 갑자기 죽었다.
둘째 사위 한음 이덕형이 호상으로 장례를 총괄했다.
작은 아버지 토정 이지함이 조카 사윗감으로 고른 한음 이덕형이다.
가정형편이 몹시 어려웠던 이덕형이다. 이산해는 그의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과거에 2등으로 합격한 이덕형은 승승장구한다. 한음의 부인, 아계의 딸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욕을 보일까 두려워 자결하였다. 이덕형은 재혼을 하지 않았다.
장인 아계 이산해를 정성껏 섬겼다.
이덕형은 호상으로 장인 아계의 장레를 앞장서 치렀다.
한음이 보기에는 천하의 명당 여기에도 결정적인 흠이 있었다.
우선 주산에서 보았을 때 전면에 물이 부족했다. 그 혈맥 하단에 연못을 팠다.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을 손으로 날랐다. 이웃 천방사 스님들이 나서 ‘지와바지’,
손을 흙을 운반해 봉분을 쌓았다. 제전도 조성했다.
아계는 생전에 연꽃을 몹시 좋아했다.
그는 연꽃이 만개했다는 말을 들으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말을 타고가 구경하였다고 한다.
아계의 아들 이경전과 사위 이덕형이 아계가 생전에 그토록 좋아하던 연(蓮)을 심었다.
연당 내에 삼신도(三神島)를 인위적으로 조성했다.
각각 나무를 심었다.그 나무가 4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노거수(老巨樹)가 되어
연당을 수호하고 있었다. 삼신도는 곧 도가의 신선사상에서 나오는 삼신산을 의미한다.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를 가리킨 삼산이다. 신선이 거처한다는 전설상의 곳이다.
아계가 죽은 후에도 선계(仙界)에서 노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삼신도를 조성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연못 가운데의 삼연봉(三連峰)은 또다른 기능을 한다.
이곳은 풍수상 물줄기를 따라 기(氣)가 그대로 빠저나가는 설기((泄氣)의 약점을 안고 있다.
아주 급하게 설사를 하듯 직사(直射)로 기가 빠지려는 설기(泄氣)를 막아주는 바리케이트
바로 삼봉이다.


아계 이산해의 사당과 영당이다.


영의정 아계 이산해 묘의 설명문이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치가이자 문장가 이산해의 합장묘이다.
상단 봉분 앞에 혼유석 상석이 있으며, 상석 좌우측면에 귀석(龜石)과 좌측에 묘비석이 세워졌다.
하단 상석 전면에 향로석(香爐石)과 좌우에 망주석, 문인석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현재의 석물은 1609년 묘 조성 시 세웠다.묘비는 1856년 중수(重修)하였다.
본관은 한산이며, 자는 여수, 호는 아계, 죽피옹, 초성이라 불릴 만큼 초서에 능하였다.
광국, 평난공신, 아성부원군에 봉군(封君)되었다."


이산해의 탄생 설화는 아주 유명하다.
아버지 이지번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중국 산해관(山海館)에 유숙하던 날 밤
멀리 집에 있는 부인과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눴다.
그날 밤 부인도 남편과 잠자리를 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곧 임신하게 되었다. 당시 문중에는 난리가 났다.
“여자 혼자 아이를 가졌다.”
그를 뭇매를 때려 친정으로 내쫓도록 했다.
동생 토정 이지함이 나섰다.
“형님이 귀국할 때까지 기다려 보자”
토정은 적극 만류했다.
이지번이 중국에서 일을 끝내고 귀국했다.
이지번은 귀국하여 꿈꾼 사실을 말했다.
그의 부인이 꿈 꾼 날짜까지 일치했다.
문중에서는 부인이 불륜으로 잉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출생한 아들이 이산해이다.
아버지 이지번이 그 꿀맛 같은 운우지정의 꿈을 꾼 장소가
산해관(山海館)이다. 그 아들의 이름을 산해(山海)라고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산해에게는 손자 이구(李久)가 있었다.
이구는 어릴 때 이산해를 빼어 닮았다.
그는 글도 잘 쓰고 학문도 출중했다.
과거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예문관 검열에 중용되었다.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선비 손자 이구였다.
그 손자 이구가 문과에 합격하고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24살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은 것이다.
이산해는 손자 이구의 죽음으로 큰 쇼크를 받아 쓰러졌다.
그는 거기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다.
그의 나이 72세 때이다.
다른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그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아계 이산해는 세상을 떠난 것이다.

손자 이구의 죽음으로 쇼크를 받아 죽은 아계였다.
아계 이산해는 인(仁)의 선비였다. 곳곳에서 그 면모를 볼 수 있다.
유교에서 인(仁)은 측은지심(惻隱之心)에서 나온다고 했다.
퇴계 이황은 애인으로 관기 두향을 두었다.
매화(梅花)로 상징하는 둘의 사랑은 애절했다.
두향은 퇴계 이황의 임종을 지켜본 뒤 단양으로 돌아갔다.
그는 퇴계와 노닐던 남한강 강선대에 몸을 던졌다.
그 강선대에 두향의 묘를 썼다.
퇴계 이황은 아버지 이지번의 친한 벗이다.
그리고 이계 이산해의 스승이었다.
이산해는 그 퇴계의 애인 두향의 제사를 대대로 모셨다.
일제강점기까지 두향의 제사를 이산해 가문에서 지냈다고 전한다.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아계 이산해의 마음, 그 인(仁)의 면모를 실감할 수 있다.

이산해는 말년에 남양의 구포(鷗浦)에 살았다.
잠시 뒤에 신창(新昌)의 시전(柿田)으로 이사해 보냈다.
이때 예산을 자주 들렸다. 천방산 기슭의 '옥녀탄금혈'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을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점지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아주 검소한 삶을 살았다.
이 무렵 이산해는 노량에 작은 정자를 세웠다.
조정의 하례 참석 등 서울에 왔을 때 거처할 곳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용맥이 꿈틀거리고 봉분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저 앞에 둘째 사위 한음 이덕형이 정성껏 조성한 연당과 삼신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세상에 흠 하나 없는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풍수에서 명당(明堂)은 더더욱 그렇다.
결점 하나도 없는 완전한 명당,누구나 찾는 이 명당을 전미지지(全美之地)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전미지지의 명당 결점 하나 없는 길지(吉地)가 없다고 했다.
저마다 갖고 있는 부족한 부문을 보안해서 쓴다. 풍수에서는 이를 비보(裨補)의 방책이라고 한다.
이곳 옥녀탄금혈의 명당,
사람이 마치 설사를 하듯 기(氣)가 곧바로 빠져나가는 그 결점
천방산에서 흘러가는 물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 물이 부족한 결점을 지녔다.
둘째 사위 한음 이덕형이 정성을 다해서 그 결점을 보완하는 비보(裨補)의 정성으로
전미지지(全美之地)의 길지(吉地)을 천하에 보여주고 있는 곳 아계 이산해의 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