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
놀랍다. 이토록 깨끗한 물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도시의 생활하수와 염색공단에서 흘러나온 폐수가 뒤섞여 오염 수치가 최악일 거라 짐작했다. 그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유출수는 여느 계곡물처럼 맑기만 하다.
십여 년 전 어느 봄날,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 몸이 심하게 떨렸다. 뜨거운 기운이 몸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말이 어눌해지고, 운전하는 발에 감각이 없어지더니 결국은 오른쪽 입술이 아래로 쳐졌다. 괜찮을 거라며 울먹이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갔다.
눈을 뜬 곳은 중환자실이었다. 몸을 일으키려 해도, 팔을 들어 올리려 해도 마음뿐이었다. 간호사를 불렀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우우~'하는 소리만 새어 나올 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런 모습으로 평생 살아야 하나 하는 절망감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병실로 들어온 아내가 의식이 돌아온 나를 보더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표정은 앞으로 다가올 재활의 긴 여정에 대한 근심을 숨기지 못했다. 뇌출혈로 판명이 났으나 출혈량이 적고 자연 지혈이 되어 다행히 수술은 피했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자 간신히 팔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팔을 움직여 발가락이 보이게 이불을 댕겼다. 초조한 마음으로 힘을 주자 열 개 모두 내 의지대로 조금씩 움직였다. 신경이 마비된 곳은 없다는 생각에 안도했지만,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험한 재활의 길을 참고 이겨내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 무엇보다 더 급한 것은 수저를 드는 것과 입을 벌리는 것이었다. 팔을 들어 올리면 손가락은 중국집 문에 쳐놓은 발처럼 아래로 축 처졌다. 무엇을 집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 평범한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지루한 입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치료와 재활 운동을 하면서 긴 하루해를 보냈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수시로 찾아와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다. 혼돈과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간을 견디는 동안 내 몸은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정상인이 보기에는 오십 보, 백 보였겠지만, 신체의 기능이 미세하게 회복되었다.
수개월의 입원 생활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완쾌된 것은 아니지만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기에 집에서 스스로 재활을 해야 했다. 말이 제대로 되지 않아 볼펜을 입에 물고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힘이 오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며 불 꺼진 학교 운동장을 밤이 깊도록 돌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해가 바뀌자 조금씩 나아져 간단한 대화도 하고 몇 정거장 걸어서 한의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아직 젊은 나이에 그냥 집에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정상이 아닌 몸이라 취직은 기대하지 않았다. 자그만 개인 사업을 찾는 중에 지인의 소개로 편의점 개발팀 직원을 소개받았다. 사전분석 결과 일 매출은 얼마이고 경비를 제한 월수입은 얼마 정도가 될 거라는 시장분석표를 내밀었다. 일은 아르바이트생이 하고 나는 관리만 하면 된다는 회사의 말을 믿었다. 계획은 그러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일 매출은 회사가 제시한 분석표의 반에 불과했고 월수입은 회사지원금으로 간신히 적자를 면했다. 내가 쓰는 경비는 고스란히 손해를 보았다. 항의하자 예상치를 제시했을 뿐 결정은 내가 했으니 회사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발뺌을 했다. 관리만 하면 된다고 시작했지만, 아르바이트생이 비는 시간은 내가 대신 근무해야 했다. 이직률도 높았고 예고도 없이 결근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낮과 밤이 없었다. 24 시간 중 잠시라도 문을 닫으면 그나마 적자를 메워주던 회사지원금이 없어진다 해서 혼자 꼬박 이틀을 근무한 적도 있었다.
당시 두 아들은 대입 수험생이고 아내는 벌이 없는 가장을 대신해서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밤낮이 없었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고, 누군가를 독기를 품고 미워한 적이 있다면 그때였다. 자기의 실적을 위해 한 가정을, 한 인간을 그토록 힘든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미움이 끝이 없었다.
몸이 다 낫지 않은 상태여서 하루 야간 근무를 하면 한 살을 더 먹는 듯 기력이 빠져나갔다. 편의점 계약은 5년이라 중도에 그만둘 수도 없었다. 해지 비용이 투자금의 두 배가 넘었다. 경비를 한 푼이라도 줄이려고 시간 지나 폐기된 삼각 김밥으로 점심을 때웠다. 흐르지 않을 것 같았던 세월이었지만, 지나고 되돌아보니 아픔과 후회의 흔적을 남긴 채 바람처럼 지나갔다.
편의점 계약이 끝나던 날, 손해 본 돈보다도 고생한 게 더 억울했다.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재활의 시간을 보냈다고 자신을 스스로 위로했다.
다시 사업하려 했지만 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취직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어디서도 나이 많고 기술 없는 더욱이 장애인인 나를 기다리는 곳은 없었다. 구인 광고를 보고 수없이 이력서를 보내고 면접 보러 다녔지만, 합격 통지는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환경공단에서 장애인 수목관리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았다. 나이가 걱정되었지만, 복지 카드와 원예 교사자격증을 앞세워 면접을 보러 갔다.
염색공단과 달서천 하류가 만나는 지점에 환경공단 사업장이 있었다. 담당자는 기간제 계약직이고 별 사유가 없으면 재계약된다고 설명했다. 힘든 일을 해보았냐고 물었다. 군대 다시 들어가는 각오로 왔다고 하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다며 웃음을 보였다.
며칠 뒤 곧바로 필요한 서류를 가지고 오라는 연락이 왔다. 가족들, 특히 아내와 아버지는 진정으로 축하와 격려를 보내 주었다. 내가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편하게 웃었다.
인고의 시간 끝에 마주한 제3의 인생길은 또 다른 정화를 꿈꾸게 될 것이다. 앞으로 인생길에는 저 물처럼 진정 맑은 물이 오래도록 흐르게 하고 싶다. 감회에 젖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피리와 잉어가 헤엄치고, 두루미와 청둥오리가 노니는 달서천에 햇살이 내리쬔다.
창작 동기
뇌출혈로 건강을 잃었다. 차츰 회복되자 가장으로 그냥 놀수는 없었다. 장사도 해보았지만, 손해만 보았고 잘 할 자신도 없었다. 이곳저곳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수없이 원서를 내었지만 오라는 데는 없었다. 해를 넘겨 어렵게 환경공단에 취직하였다. 관로 작업하러 강으로 나갔다가 공단에서 정화되어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물을 보았다. 내 몸도 정화되어 다시 옛날처럼 건강해지고 싶었다. "정화"라는 의미 속에서 나의 몸과 공단의 물을 연결해 보았다.
작가의 서가
아픈 만큼 사랑합니다
머리말
책을 만들며 실린 글들을 수없이 읽고 다듬었다. 수필 본연의 목적인 '감동과 깨달음'은 고사하고 문학적 깊이가 너무 얕아 부끄럽기 짝이 없다.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터득하지 못해 가족과 다투는 얘기만 가득하다. 작가의 시대적 역할을 생각할 때 한참을 모자란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독자의 독후감
지금의 모습으로 서 있기까지 그에게 아픔이 많았고 컸고 길었다. 우리에게 미소를 주던 재미는 그에게는 아득한 아픔이었다. 아파서 아픈것이 아니라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억울함과 후회 같은 만감의 아픔이다. 회고와 성찰에서 우러나는 눈물 같은 아픔이다. ---홍억선
작가님의 책을 접하며 사람의 인품은 얼굴에 모두 나타난다는 저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말은 작가님에게 적용할 수 있는 참말이었어요. 작가님의 글에서는 따뜻함과 푸근함 그리고 편안함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작가님의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음에 평화와 행복이 제게 남아 있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작가님.---윤경심
제가 문단에 발 들여 놓은 지 30년 동안 수많은 수필 집을 받았지만 선생님 작품만큼 혼자 박장대소한 적은 없습니다. 문학성을 논하는 이들에게 이런 수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처럼 자신이 체험한 일들을 해학과 풍자로 솔직하게 까놓은 작가는 없었습니다. ---김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