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시: 2026년 7월 17일 (금)
2. 날씨: 맑음
3. 경로: 남산공원입구 - 백범광장 - 안중근 의사 기념관 - 목멱산방 석호정 - 포토아일랜드(남측지점) - 서울타워 - 포토아일랜드(북측지점) - 조선신궁 배전터 - 남산공원입구
4. 거리: 약 8.3km
5. 소요시간: 2시간 50분
6. 코스정보 : 남산둘레길, 남산, 서울타워
7. 지역: 서울특별시
8. 트랙:
9. 코스지도
[남산둘레길] 도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남산은 서울의 랜드마크이자 사계절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는다. 남산둘레길은 서울타워를 기점으로 남산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길로 걷기 좋은 산책 길이다. 총길이 7.3㎞로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누구나 걷기 좋은 북측순환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길, 남산의 자연환경을 엿볼 수 있는 자연생태길과 야생화원길, 그리고 산림숲길로 이어지는 코스이다. 그중에서도 북측순환로는 휠체어나 유아차 사용자와 시각장애인 등 보행 약자가 동행자 또는 보호자의 큰 도움 없이 다닐 수 있어 무장애산책로로 선정됐다. 남산둘레길 북측순환로는 남산케이블카 입구에서 시작하여 국립극장까지 이어지는 3.4㎞의 산책로로, 자동차와 자전거 통행이 금지되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모든 길의 가운데에는 점자 블록이 설치되어 있고, 점자 블록이 설치된 중간 길을 기준으로 비장애인은 우측으로 통행하며 질서를 지키자는 의미로 ‘배려의 길’이라고도 불린다. 남산둘레길의 관광포인트로는 안중근 의사가 남긴 붓글씨, 관련 사진, 건국공로 훈장과 서한, 공판 당시 신문 보도 내용, 유명 인사 휘호 등이 전시되어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잠두봉의 포토존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남산서울타워 광장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의 자물쇠’, 남산 정산 부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파 송출 및 관광용 타워 ‘남산서울타워’ 등이 있다.
[남산]은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 경계에 있는 산이다. 목멱산·종남산·인경산·열경산·마뫼 등으로도 불렀다.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안산(案山) 겸 주작(朱雀)에 해당되는 중요한 산으로 능선을 따라 도성이 축성되었다. 정상에는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국사당이 있었으며, 봉수제의 종점인 봉수대도 있어서 국방상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지금은 정상에 방송탑이 세워져 전파를 발송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1910년에 시민공원으로 개발되어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서울수본작전 남산전투지] 1950년 9월 25일 서울수복을 위해 미 제7사단 제32연대 제2대대가 새말나루터(현 강남구 신사동 한강변)에서 서빙고로 한강을 도하하여 남산을 점령한 후, 다음 날 이곳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9월 26일 새벽 4시 30분 제2대대는 약 1천여 명에 이르는 북한군의 역습에 진지 일부가 돌파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예비대를 투입하여 결국 북한군을 격퇴했다. 이 전투의 치열함을 보여주듯, 작전 후에는 북한군 394구의 시체가 확인되었고, 174명을 포로했다. 이때 북한군이 서울 고수 방침을 포기하고 의정부 방향으로 철수했다. 이곳은 6·25전쟁사에서 서울 재탈환 작전을 성공시킨 전투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안내판)
[와룡묘]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모신 사당이다. '와룡(臥龍)'은 제갈량의 호이며, 와룡묘는 중국에서 유래한 제갈량 신앙과 관련된 사당이다. 현재의 건물은 1924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와룡묘 경내에는 대문인 대성문, 제사를 지내는 숭성전, 그리고 여러 부속 건물이 있다. 숭성전 내부에는 제갈량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관우·장비 등과 관련된 인물들도 함께 배향되어 있다. 와룡묘는 중국의 제갈량 신앙과 우리나라 민간신앙이 함께 나타나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안내판)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1396년(태조5)에 백악(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래도록(1396~1910) 그 역할을 했던 건축물이다. 한양도성의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고친 역사가 남아 있으며,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을 두었는데,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없어졌다. 현재까지 한양도성 전체 구간이 정비되어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안내판)
[국사당터(國師堂)址] 조선 태조 4년 12월, 남산산신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작, 목멱신사를 세워 국사당이라 불러오다가 1925년 종로구 무악동으로 옮김. (표지판)
[목멱산(木覓山) 봉수대 터]는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京烽燧)라고도 불렸는데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었던 곳이다. 봉수제도는 신호체계에 따라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까지 전달하여 알리며,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알려 빨리 대처하도록 하는 일종의 통신수단이다.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불을 피워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남산에서 집결하였고, 남산 봉수대는 제1봉수대부터 제5봉수대까지 다섯 곳의 봉수대가 있었다. 이곳은 1993년에 김정호의 '청구도' 등의 관련 자료를 참고해서 남산의 다섯 개 봉수대 중 하나를 복원한 것이다.
제1봉수대: 함경도-강원도-양주 아차산,
제2봉수대: 경상도-충청도-광주 천림산,
제3봉수대: 평안도 강계-황해도-한성 무악 동봉,
제4봉수대: 평안도 의주-황해도 해안-한성 무악 서봉,
제5봉수대: 전라도-충청도-양천 개화산 (안내판)
서울과학전시관 남산 분관 앞에 위치한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은 2013년~2014년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성벽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 유적은 한양도성 남산 구간의 일부로 그동안 멸실된 줄로만 알았던 성벽 구간이다. 전시관이 자리 잡은 남산 자락은 한양도성의 오랜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다. 한양도성 유적, 조선신궁 배전 터, 남산 분수대 등을 포괄하는 전시관 권역에서는 조선시대 축성의 역사, 일제강점기의 수난, 해방 이후의 도시화, 최근의 발굴 및 정비 과정을 모두 볼 수 있다. 전시관 일원에 발굴된 한양도성 유적은 태조, 세종, 숙종 이후에 지속적으로 보수하면서 시기별 충석 양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신궁 배전 터가 발굴되었다. 1925년 일본의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조선신궁 건립으로 크게 훼손되었다. 일제가 한양도성을 철거하고 그 위에 조선신궁을 세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의 관람데크는 남산 둘레길과 연결되며 남산타워까지 오를 수 있고 둘레길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야외 관람데크에서 고즈넉한 남산의 아름다운 전경과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고즈넉한 풍경을 관람하며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안내판)
[조선신궁 배전터] 1925년에 건립된 조선신궁의 배전(拜殿) 터이다. 5년에 걸쳐 계획된 조선신궁은 약 43만㎡의 부지에 신전(神殿), 신고(神庫), 배전 등으로 구성되었다. 배전은 일반인들이 기도하며 참배하던 곳으로 가로 18.9m, 세로 14.9m 크기의 콘크리트 기초 위에 세워졌다. 일제가 세운 종교시설인 조선신궁은 일본의 건국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한일 병합 당시 일본의 왕이었던 메이지(明治)를 섬기는 최상급 신사(神社)였다. 1930년대 동화정책을 실시하면서 신사 참배를 강요한 대표적인 곳이며, 식민통치를 선전하던 주요 장소였다. 조선신궁이 세워지면서 남산 자락은 크게 훼손되었으며, 한양도성의 남산 성곽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2013년 남산 일대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배전 터는 조선신궁의 규모를 알게 해주는 대표적 일제 식민유산이다.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