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신학의 사회적 배경
신학과 4학년주간 A반
2007111116 곽 덕 보
1. 들어가는 말
사도 바울의 신학과 그의 선교 및 목회 사역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바울이 속해있던 시대의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여겨진다. 이는 그가 그 시대적 사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속해있던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바울 에 대한 연구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바울이 사역하고
전도 하였던 사회적 상황과 배경에 대해서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알아본다.
■고대 그리스 로마사회의 계층의 구조
로마 사회의 계층구조는 피라미드 형식임을 보여준다.
1.귀족계급 : 황제 와 원로. 기사계급이다. 원로는
가장 높은 공직과 종교적 위치에 있을수 있고 기사
계급은 제국 행정으로 두 번째
서열이다 (빌라도와같은유대총독들)
2, 중간층 : 상인 .기술자 로 구성되어있는데
이때 상업 활동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노예를
상업하도록 하여 그 이익금을 7대 3 이나
6대 4로 나누어 가졌다
기술자들은 짐꾼이나 사공으로 목수 장막제조
써비스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3.하급계층 : 소작농, 날품팔이, 노예가 존재한다.
①소작농은 부자들의 농사를 지어주는
사람들로 노예들로 간주된다.
②날품팔이는 일당 직으로 미천한 일을 하는
자들로 가축몰이꾼이나 땅 파는
일꾼이다 (예: 마 20:1~16절 장터에 나와 있는 노동자들 )
③ 노예들은 사회에서 신분상 가장 밑바닥 에 처한
존재들로 모든 법적 권리가
부인된 이론상 사람이 아니었다.
■ 도시문화의 영향
로마도시 문화가 신약 성경에 미치는 영향은
후견인.가신관계. 다양한 사회조직, 유동성이다
1,후견인 가신관계_: 부유한 귀족들과 하류계층들의
관계로 부자는 약한 자에게 도움을 주 고 약한 자는
부자에게 충성을 다하며 부자들이 공공사업에
재정을 담당하는 조건으로 정 부는
그들에게 명예를 보상해준다
2,사회조직: 특정한 종교적 모임 .같은 직업자들의
모임.장례를 위한 기금의모임이다
이들의 모임은 대개 부유한 남자나 여자를 후견으로
추대해 재정적 정치적 지원을 받았다
3,유동성 :로마는 어느 지역이든지 두 종류의길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를 을 만들었다
육 로는 통치용이며 수로는 목욕문화와 관련 되어 있다
도로는 엄청난 상업적 변화와 무역의 성행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여행자들 철학자들 학자들이 거쳐가며
문학적 지적대화와 새로 운 사상과의 만남이 가능했다
바울및선교자들도 사업상의 이유로 여행을 하며
선교 사역의 큰 유익을 얻었을 것이다
2. 맺는말
바울 서신을 해석함에 있어 사회학적 해석이 유용한
방법으로 들어났다 기본적으로 바울 서신이 기록된
당대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바르게
해석될수 있음을 제시하면서 사회학적 방법론은
신약 성경을 바른 해석을 할수 있도록 돕는 도구라 할수 있다
신약신학 기말고사 예제 및 답안
1)바울신학의 사회적 배경
2)겸직 사역론
3) ①230p 구체적인 문제들,
②241p 노예와 자유자, ③243p 남자와 여자
④246p 성과 결혼, ⑤250p 부자와 가난한자,
⑥253p 사랑과 정치
※정리해서 가지고 와서 OPEN하세요.
답안지에 ~ 나이를 쓰고 30대는 암기하는게 좋다.
신약신학 기말고사 참조하세요
신학과 4학년 주간 A반 2007111116 성명 : 곽 덕 보
1. 구체적인 문제들
바울은 자신과 그가 선교한 교회들이 직면한 구체적 문제들의
견지에서 그 새로운 분별력을 행사하였다. 이들 구체적인
문제들에 관한 바울의 도덕적 가르침을 점검해 보면
바울이 주장한 분별력의 형태와 바울의 윤리의
목회적 성격을 알게 될 것이다.
① 유대인과 이방인
가장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교회 내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관계였다. 갈라디아인들과
로마인들에게, 이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바울이 서신을
쓰게 되었던 돈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아에서 어떤 이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유대인이 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어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의 무법성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였고, 반대로 어떤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양심상의 가책에 따른
주저함을 모욕하고 경멸하였다. 이 문제는 바울의
사역에 있어 하나의 지속적인 위기였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합과 평등은 바울에게
"복음의 진리"(갈 2:4, 14)와
"믿음의 순종"(롬 1:5, 16:26)과 긴밀하게 관련된 것이었다.
바울의 분별력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
또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다"(갈 3:28; 비, 고전 12:13),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방인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고(롬 6:1-11),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롬 7:1-6),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동등하게
"믿음으로 얻어지는… 은사로서의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롬 3:24-30; 비, 갈 3:6-14) 실로
이신득의에 관한 바울의 담화는 개인의
내관적인(intro-spective) 질문, 즉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항상 초대 기독교 공동체들의 사회적 질문,
즉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을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칭의는
그 내부에 "차별이 전혀 없는" 하나의 사회적
실재를 수립한다(롬 3:22; 10:12)
이 화합과 평등은 확실히 하나의 종말론적 실재였고,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이고 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임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유대인들이 율법 지키는 것을 중지하거나
또는 이방인들이 유대인처럼 살기를 시작하는 것을
결코 요구하지 않는다. 실제로, 바울은 그런
요구들을 반박한다.(갈 2:14) 그러나 그 종말론적
실재는 목하 교회의 사회적 실재를 형성해야만 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처럼 살 필요가 없으나,
또한 이방인들을 정죄하거나 반박해서도 안될 것이다.
이방인들은 할례받거나 유대인들처럼 살 필요가 없으나,
또한 유대인들을 멸시하거나 조롱해서도 안될 것이다 (롬 14-15)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한 그리고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
복음의 선포는 자유와 사랑 - 다르고 또 다른 채로 남아있는
자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특징 지워진 교회내부의 조화적
다원주의-을 요구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명령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비, 14:1)고 말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종말론적 화합은 또한 이미
부조(扶助, collection)를 통하여 표현되고 있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기억할 것"을 약속하였다.(갈 2:10)
그의 약속의 성취는-즉 예루살렘 교회가 받은 이방인
교회들로부터의 현금-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일체감을 공고히 하였을 것이다.
그 선물(扶助)들을 보내면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빚진 것을 인정하였을 것이다(롬 15:27; 고후 9:12). 한편
그 선물들을 받으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에게 허락된 "지극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였을 것이다(고후 9:13-14). 이리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감은 극복되었을
것이고, 비록 여전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면서"(고후 9:15),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을 것이다.
② 노예와 자유자(자주자)
노예와 자유자 사이에도 또한 종말론적 화합이
있다(갈 3:28; 고전 12:13). 그 화합은 획일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노예와 자유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부름받기 이전 상태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새로운 분벽력이 비판적이고
변형적인 시각 아래로 노예와 자유자 사이의 관계를 끌고 들어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회적 차별은 하찮은 것이 된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2). 노예 제도의
사회적 질서는 폐지된다.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니라"(고전 7:31). 그러나 바울의종말론적
안목은 고린도교회 회중 가운데 일부 광신자들을 경고한다.
그들의 주장 즉 그들이 이미 완전하게 새 시대 안에 살고
있다는 주장은 허세적이며 교만한 주장이다.
이 세상의 형적은 아직 단순하게 지나가지
않았으며, 새로운 분별력은 자신의 역할의 포기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족을 요청한다(고전 7:17, 20). 이 논의는
임박성의 가정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 시대에 완전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고린도교회
광신자들의 주장의 부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실존의 "아직-아니" 성격에 있어서, 노예와
자유자의 평등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기능들과 역할 책임(assignment)을 창출하지 않는다.
바울이나 광신자들 그 누구도 서로 경명할수 없고 또
완전히 새로운 사회적 제도를 창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새 시대는-노예와 자유자의 평등-이 모든
것에 대해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정체성,
종말론적 관점, 사랑과 자유의 근본적인 원리들,
그리고 노예와 자유자의 평등이라는 특별한 원리
등은 옛역할 가운데서 새로운 관계를 가능케 하고
또 이를 요청하는 것이다. 자유를 얻을수 있는 기회를 가진 종들에게 대한
바울의 조건은(고전 7:21) 애매모호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울은 종에게 자유를 얻기 위해
기회를 "잘 이용하라"고 말하는가?(고전 7:21b),
아니면 "대신에 너의 현 상태를 잘 이용하라"고
말하는가?(고전 7:21; RSV 여백 참조) 어떤
역본을 따르든지, 바울의 근본적인 요점은 "주 안에서"는
종도 자유자도 없다는 것이다.
발레몬과 그가 회원으로 속해 있는 가정 교회에서
보낸 작은 서신은 교회 내에서의 노예 제도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매우 훌륭하게 다룬 편지이다.
바울은 명령하지 않는다. 그는 빌레몬에게 새로운
분별력을 행사할 것을 호소한다(8, 9, 14절). 비록
바울 자신이 도망친 노예를 되돌려 보냄으로써 법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관습적인 법적 대응은 빌레몬의
분별력을 위한 마지막 규범이 되어서는 안된다.
분별력은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정체성에
의존한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육신과 주 안에서… 사랑
받는 형제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16절). 오네시모는
변하지 않은채 남겨진 옛 역할 관계의 조직
속으로 단지 다시 들어가서는 안된다.
바울은 "빌레몬이여, 주 안에서 당신과
오네시모는 하나입니다만, 그러나 물론
육신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소"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 안에서의"화합, 평등,
평화를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현실
세계"와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 화합은 종말론적이다.
그러나 허상적이 아니다(docetic).
그것은 어떤 "육신적인" 표현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화합과 우애의 "육신적" 표현이
바울에게 있어서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빌레몬의 새로운 분별력이다.
바울은 해방을 명백하게 요구하지는 않지만,
자신과 함께 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하여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13, 14절; 바울은
"나는 주 안에서 당신으로부터 어떤 혜택
얻기를 원합니다"고 말한다-20절은
동음이의(同音異義)의 어구로 이뤄진
바울의 재담(才談)이다[pun]).
그 결정은 빌레몬의 새로운 분별력에 맡겨졌다.
그러나 사사로운 문제로가 아니라,
분별력은 도덕적 설교의 공동체-그 안에서 종과
주인들이 분별력에 있어 동등한 몫을
갖는 공동체-로서 기능하는 교회의
맥락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바울은 노예제도를 완전하게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별력의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새 신분과 사랑, 자유, 화합 그리고 우애의
원리들은 노예 제도의 사회적 구조들을
마침내 타파하고 있는 것이다.
③ 남자와 여자
바울은 또한 남자와 여자의 종말론적 화합을
본자(갈 3:28). 이 화합 역시 획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현 상태로 남아 있는다.
결국, 차별은 율법뿐만 아니라 원래의
창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고전 11:8, 9;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남자나 여자가 없다"고 말하기
위해 창세기 1장 27절의 언어[αρσεν χαιθηλυ]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화합은 바울의 분별력에 따른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생명을 형성한다.
바울은 브리스가를 자신의 "동역자"로
간주하며(롬 16:3-5, 비, 고전 16:19; 행 18:2,
18, 26, "집사" 뵈뵈를 자신의 "보호자"로
부른다.(롬 16:1-12)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복음에 나와 함께 힘썼던 부녀"라고
회상하며(빌 4:2), 또한 그의 교회들에게 중요한
역할들을 감당했던 다른 많은 여자들을 언급하거나
그들에게 인사를 보낸다(특히 롬 16:6, 7, 12, 15를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여자들이 예언하고 기도할 때 머리에 두건을
쓸 것을(11:3-16), 더욱이 "잠잠할 것"을 주장한다.
이 구절들은 서로 조화시키기에 어려운 점이 있는데,
바울의 관습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가 없다는
그의 종말론적 인식과 조화시키기에는 더욱 어렵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의 권면은-교회생활에
있어서 여자들의 완전하고도 동등한 참여를
억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은
인정되어야만 한다-교회가 여자들에게 두건을 쓰는
필요성에 관해 가르침과 동시에 그들이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바울은 분명히,
어떤 고린도의 여자들이 그 두건을 내어
던져버렸기에, 또 그 남편들로부터의 독립과
관습적인 예법에서의 해방을 주장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두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다. 영적인
은사들을 근거로 이미 완전하게 새 시대에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고린도의 관신자들 가운데는,
분명히 그 신령한 은사들을 행사함으로써 또 독립을
주장함으로써 교회와 가정의 평화와 질서를
파괴하였던 여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의
종말론과 자유에 대한 개념에 꽤나
비동정적(냉담)이었을 것이다. 율법, 랍비들의
가르침, 교회 관습, 그리고 본성 등 다양한
권위에 호소하면서, 바울은 이들 여자들의
부절제를 용인하지 말도록 교회를 설득하고 있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가 "주 안에서" 일체이고
동등하다는 원리에 반대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밝힌다(고전 11:10, 11). 그러나 또한
새로운 분별력은 독립을 주장함이 아니라 상호
복종에로 이어져야 될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주 안에는 남자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11:11).
고린도전서 14장 33절b-35절의 여자들에 대한
별난 조언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비바울적 삽입으로
간주되어왔다. 이런 논의들이 아주 근거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또한 전적으로 설득력이
있다고도 보기어렵다. Furnish는 이들 구절들이
바울의 논의의 흐름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영적 은사들의 구체적인 남용에-특별히
예배중의 방언-관하여 권면하고 있으며, 여기서의
그의 조언은 같은 요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맥에서 "말하는 것"은 방언하는 것을
가리킴이 옳은 줄로
보여진다(λαλειν, 14:34b, 36; 비, 14:2, 4, 5, 6, 9, 23, 27, 39).
잠잠하라는 명령 또한 문맥의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같은 단어(σιφαω)는 앞서 예언과 방언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으며(14:28, 30), 두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절대적인 명령이 아니라, 분명히 은사들의
어떤 구체적인 남용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복종하라"는 여자들에 대한
명령은(RSV, 14:34;) 32절의-"예언하는 자들은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니라"-견지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바울이 여기서 호소하는 법은,
디오니소스 축제 때 황홀경에 빠진 여자들의
부절제에 대하여, 고린도 여자들의 황홀경에
취한 발언 및 자제의 상실을 금지시켰던 고린도
내의 로마법을 가리키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자들에게 대한 이 권면의 취지는
불변적 법규의 한 요소 또는 하나의 영원한 원리를
수립코자 함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예배시
발생한 한 구체적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분별
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 원리들은
상호교화(edification, 14:12)와 평화(14:33)이다.
이런 분별력은 이 세상과 그 역할 책임을 부정한,
또 자제나 상호 복종을 시행하지 않는
어떤 "지나친 광신"을 가진 여자들의 방언의
남용(濫用)에 종지부를 찍을 것을 요구하였다.
바울은 노예 폭동을 요구하지 않듯이
『여자들의 해』를 선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느 쪽의 경우이든지 기존의 사회적
역할들과 제도들을 단순히 허락하지도 않는다.
바울은 그런 기존의 관계들을 부정하지도
않고(광신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또한 그것들을
최후의 규범으로 수용하지도 않는다. 바울은
새로운 분별력의 견지에서 기존의 관계들을
흡수, 완화, 그리고 변형시킨다. 우리는 바울의
사역에서, 그리고 그의 교회들 내에 있는 여자들의
중요한 위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신분의
첫 번째 열매들을 목도하게 된다. 그 새로운 신분은
자유를 그리스도의 견지에서 섬기기 위한 자유로서보다는
독립으로서(또는 방종, 고전 6:12; 10:23을 보라)
해석하는 어떤 노력에도 도전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무지개를 찾아 다니시나요
④ 성과 결혼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종말론적인 화합에
대하여 고린도전서에서 결혼에 관한 그의 교훈에서
한 것보다 더 분명하게 논한 곳이 없다.
이 주제에 대하여도, 바울의 목회적 분별력은
이미 완전하게 성령의 새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고린도 교회의 광신자들에 의해
공격받고 도전을 받는다.
이런 광신자들 중 일부는, 그들이 이미 실제로 영의
새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몸을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관심 밖의 일이라고 주장하였다(고전 6:12-21).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들의 성적 방종을
자랑하였다(5:1-2). 이런 사람들에 대항하여 바울은
그들은-그리고 그들의 몸은-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며,
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고 주장한다(6:17).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기시키며,
또 그들의 종말론적 가정에 대항하여 하나님이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
주장한다(6:14). 그는 그들의 슬로건(표어)-"모든 것이
가하다(봅적으로)"-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하기 위한 자유임을 그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그리고 방종주의는 다른 아닌 바로
육체에 속한 노예 제도임을 깨우침으로써('그러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6:12) 방종적 해석에 반대하여
그것을 보호한다("그러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6:12).
새로운 분별력은 성적 부도덕을 지지하지 않는다.
고린도의 광신자들 중 다른 이들은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완전히 새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금욕주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성관계를 절제하였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는 것은
바울이 한편으로는 배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즉시 완화시키고 있는 고린도인들의 또다른
슬로건이다(고전 7:1, 2). 그들 편에서 볼 때,
바울은 독신주의가 새 시대의 선호이며,
새 시대에 결혼을 더 이상 의무가 아님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 반대하여 바울은
우리 실존의 "아직-아니" 성격을 주장하고,
부도덕에의 유혹을 인정하며(7:12), 그리고
독신주의 역시 의무로 만드는 것을 거절한다.
독신주의나 결혼 모두 은사(χαρισμα, 7:7)이지
의무가 아닌 것이다. 비록 바울이 독신주의를 새 시대의 신호로 확인한다
할지라도, 그는 그들이 그 독신주의까지도 우리 실존의
"아직-아니" 성격의 안목에서 바라볼 것을
일관성 있게 주장한다. 바울은 그것이 새 시대의
신호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는 심지어 결혼을
억제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선호(選好)의 근거는
독신주의자가 그럼으로써 새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새 분별력은 독신의 선호를 승인한다.
그러나 광신자들의 종말론적 가정을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독신주의를 우리 실존의 "아직-아니"
성격을 감안할 때, 매우 실제적인 선택으로써
추천한다(7:26-35). 그의 요점은 재림의 임박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종말론적
실존의 특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결혼도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은사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실존의 "이미"와
"아직-아니" 성격 모두에 관계한다. 결혼을
위한 근거는 생산의 의무에 우선권을 둔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이미 강림했고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욕정의 치료"로서의
결혼을 허락하는 것은 분명히 옛 시대의 세력의
지속적인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또한 남자와 여자의 종말론적 화합과
평등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바울의 분별력은 "한 몸" 결합으로서의
결혼을 경시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창 2:24; 고전 6:16).
결혼은 부부관계의 성적인 측면을
포함하여, 그 관계의 완전한 상호 의존성과
평등에서 그 종말론적 결실을
발견한다(고전 7:3-4). 남편이 그 아내의
몸을 "주장한다"고 바울이 말하는 것은 1세기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거의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고전 7:4a); 그러나
아내가 그 남편의 몸을 "주장한다"고 바울이 말하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엇으며,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다(고전 7:4b). 결혼 배우자들의
상호 주장 및 복종은 성관계(sexuality)에 관한
새로운 분별력의 구체적 결과이다. 남자와 여자의
종말론적 화합은 방종을 허락하거나 독신주의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성관계의 한 몸 결합을
진정한 상호 의존의 완성으로 만들면서,
겨혼관계를 허락하고 또 변화시킨다.
종말론적 상황은 독신주의와 결혼 양자를
허락하고 또 완화시킨다. 이제 어느것도
하나님께 거룩해질 수 있게 된다. 이 종말론적
상황에서 이미 결혼한 고린도인들은, 비록 그
책임이 바울의 새로운 분별력의 견지에서
변형될지라도, 결혼상의 책임으로부터
해방되지는 않는다. 바울은 이와 똑같은 맥락에서
이혼을 반대한다. 이혼에 대한 교회의 경향은 여전히
그 문제에 관한 예수님 말씀에 의해
형성되어야만 한다(고저 7:10; 비, 막 10:5-9).
그러나 바울은 그 말씀을 법적인 규칙들을 위한
근거로서 활용하지 않는다. 그는 괄호 속의 발언을
통하여 교회 내에서의 이혼의 실재를 인정한다(7:11a).
그리고 불신자와의 결혼이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구체적 문제에 직면하여, 바울은 자기
자신의 분별력을 활용한다(7:12-16). 결혼의 한 몸
이해에 근거하여, 부부는 한쪽 배우자가 신자이면 거룩하다.
신자는 그 결합을 "거룩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자에게 이혼을 먼저
도모하지 말도록 권면한다.
그러나 불신자가 먼저 이혼하고자 한다면,
바울의 권면은 그것을 허락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화평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고전 7:15).
⑤ 부자와 가난한 자
부와 가난에 관한 바울의 도덕적 가르침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놀라운 사실은, 공관복음서에 보존된
예수님의 전승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이 그 문제에
관하여 매우 드물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가서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막 10:21)는 것과 같은 과격한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탐욕"을 경계하는 경고들은 분명히
있다(롬 1:29; 비, 고전 5:10; 6:10). 그러나 이들
경고들은 악의 목록의 맥락에서 등장하며, 바울의
초점이나 관심이라기보다는 거의 불가피한 전승의
한 부분으로 보여진다. 바울은 부를 비난하거나
또는 부의 포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에
순종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하지 않는다.
그는 자급자족하며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도록
권면한다(살전 4:11; 비, 살후 3:10-12). 이 원리는
자급자족의 스토아 철학적인 냄새를
풍긴다(고후 9:8; 빌 4:11). 각 사람은, 자신의
자립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필요를 채울 만큼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 그가 가진 것에
"자족"해야만 한다. 바울의 가르침은 외견상
예수님의 전승에 그 근거를 두기보다는
중류층 인사로서 스토아 철학의 도덕을
존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바울의 권면을 스토아파의 그것과는
다른 분별력의 견지에 위치해있다. 스토아 철학의
자족의 근거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이를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활동중인 위대한
이성에 사람이 참여하는 방법이었다. 바울의 만족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정체성을 우주의 이상에서보다는
거기에서 발견하며, 그 정체성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목적에의 참여를 가능케 하고 또 요구한다.
바울의 종말론적 관점은 데살로니가의 "건달들"과 같이
경제적 책임을 포기하지
않은채(살전 4:11, 12; 5:14; 비, 살후 3:6-12) 그로
하여금 재산과 돈의 상대적 무가치성을 깨닫도록
인도한다(예, 빌 4:5, 6; 거기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바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 다음에 이어지고 있다. 또한 고전 6:2,
거기서 그는 돈에 관한 법정 시비를 "지극히
작은 일"이라 부른다). 이러한 것이 자급자족하라는
바울의 권면의 근거이다. 바울은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패턴은 존재한다.
그는 여기서도 획일성이나 또는 공동기금(common fund)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회적 신분을
따라 모일때-심지어 주의 만찬에서도-바울은
부자들의 행실을 분명하게 꾸짖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고전 11:22). 바울은 "합당치
않게(11:27), 몸을 분변치 못하고(11:29)" 참여하는
것으로 언급하는 것은 바로 그들 가운데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관심의 부족이다. 왜냐하면 잔과 떡은
"많은 우리가 몸이 되는"(10:17) 그리스도에의
공동참여의 표시이기 때문이다(χοινωνια, 10:16).
성례가 부자들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관심의 부족으로
인해 더렵혀질 수 있다고 한다면, 관대한 행위와
대접 자체가, 신령한 은사의 물질적 표시라는
의미에서, "거의 성례적"이라는 주장을 내세울
수 있게 만든다(빌 4:18).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화합과 평등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부자들이 "손대접을 시행"할
때(롬 12:13; 비, 16:23), 너그럽게 나눠
줄때(롬 12:8; 비, 몬 4-7), 긍휼을 즐거움으로
베풀 때(롬 12:8), 그 선생들과 함께 나눌
때(갈 6:6; 비, 빌 1:5; 4:14-20). 바울은
부자들에게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거나 공동기금에 바치라고 명령하지 않으나,
부자들이 교회를 섬기는 차원에서 자유와 사랑으로
그들의 부를 사용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부에 관한 바울의 새로운 분별력이 아마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부조에 관한 그의 권면에서이다.
우리는 이미 부조에 대한 관심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화합을 세우는데 있어 도구적으로 사용된 바 있음을
알고 있다(롬 15:25-31; 고후 3:11-15).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부조에 동참할 것을
권면하면서, 바울은 돈의 책임에 대한 분별력의
양식(pattern)을 그러내 보여준다. 그는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는다(고후 8:8); 대신 그는 그들의
정체성, 즉 그리스도의 은혜안에서의 그들의
삶에(고후 8:9),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종말론적
확신에(고후 9:6-10), 사랑(8:8, 24)과 자유(9:7)의
근본적인 원리에 호소한다. 이 새로운 분별력은
그들의 품성과 성향에 근본적인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그들의 주고자 하는 "마음", 고후 8:12).
그리고 그런 변화된 성향은 그들로 하여금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이를 표현할 것을 요구한다.
행동으로의 표현은 엄격하게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을 따라 이뤄지지는 않는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수고하게
하기"위하여 (고후 8:13) 모든 것을 나눠주도록
고린도인들에게 명령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평등의 원리의 견지에서 사랑의 구체적 의미를
표명한다(고후 8:13, 14; 참조 눅 3:10-11).
바울은 더 나아가 다른 이의 부요함으로부터
어떤 이들의 필요를 제공해 주는 배분적 원리에서
그 원리를 표명하고 있다(고후 8:13).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제공하신
사건을 담은 출애굽기 16장 18절에 호소함으로써
그 논의를 확증한다. 축적은 쓸데없는 것이었으며,
매일의 필요는 채워졌고, 하나님은 양식을 제공하여
주시는 분으로 신뢰되어야만 했다. 더욱이,
만나는 친숙한 종말론적인 상징이다. 평등,
나눔, 축적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의존으로 특징 지워진 경제적 패턴은
이미 만나에 의해 상징화된 그 종말론적 실재에 참여하는 것이다.
⑥ 사랑과 정치
새로운 분별력은 또한 바울의 정치적 권위에
대한 권면에서도 행사된다. 물론
로마서 13:1-7은 국가에 대한 바울의 견해의
고전적인 말씀이다. 애석하게도,
그러나 이 말씀은 그 역사적, 문학적 문맥을
떠나 왜곡되어, 정권이 아무리 불의하고
사악하다 할지라도 국가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져 왔다. 역사적으로,
이 말씀은 젊은 네로가 공의와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처신할 것이라는 상당한 희망이 여전히 존재했을 때
기록되었음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이 말씀은
국가에 대한 헬라 유대주의의 조언과 문학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로마의 교회들,
특히 로마에 있는 유대 교회들에게, 그들의 정치적
자세를 형성케 했던 그 전승을 지킬 것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이 통치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임명된다고 주장할 때(롬 13:1-2),
그들의 법적 기능은 죄없는 자들을 보호하고
선을 조장하며 악을 징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13:3-4), 질서 잡힌 공동체 생활을
원하는 자들은 적절한 세금과 존경을 권세자들에게
드려야 한다고 주장할 때(13:5-7), 바울의 권면은
헬라 유대주의의 지혜와 매우 흡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조언, 그 도덕적 지혜를 새로운 맥락,
즉 변화시키는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그것은 바울이 요구하는 새로운 분별력의
일부이며(롬 12:1, 2) 바울은 그 전후에 종말론적
상황과 사랑의 의무를(12:9, 13:8) 상기시키는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다(12:2; 13:11-12).
정부에 대한 복종은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보다
긴박한 의무의 맥락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여전히 욕심과 불의로 특징지워진 세상에서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정치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이 전제자의 욕심과
불의에 의해 위협을 당한다면, 새로운 분별력의
정치적 책임은 이웃의 권리의 우선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 대항하여 송사를
벌일 때, 고린도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고전 6:1-8),
그것은 바울에게 있어 그들의 품성과 공동체를
특징지워야 하는 그런 류의 삶을 살지 못하는
실패의 신호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종말론적
정체성을 망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즉, 성도들이, 세상과(6:2) 천사들을(6:3)
판단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패배"(6:7)이며,
고린도의 광신자들의 주제넘은 주장에 모순되는 것이다.
바울은 희생적 사랑의 근본적 원리 아래 그런
송사드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왜 차라리 애매히
고난 당하지 아니하느냐?"(6:7)
그러므로 사랑의 정치학은 자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차라리 애매히 고난받기를
즐겨한다(고전 6:7).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불의와 욕심이 가득한 세상에서
이웃을 위해 통치와 보호를 주장한다(롬 13:1-7).
복음은 새로운 정치적 분별력을 제공하고 또 요구한다.
⑦ 결론
이들 구체적인 각 경우에서 바울의 분별력의
패턴은 활동적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는 도덕적
정체성과 세상에 대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특정한 근본적 가치들을 수립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규칙들이나 역할들이나
제도들을 창조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경우들을
다루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은
도덕적 지혜의 다른 전승들을 흡수하며 변형시킨다.
그리하여 그들 마음의 갱신(更新)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끔 만드는 것이다(롬 12:1-2).
겸직 사역론의 성경적 조명
신학과 4학년주간 A반2007111116
성명 : 곽 덕 보
■들어가는말
목회를 하면서 목사나 전도사들이 교회의 생활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 생계를 유지하며
사역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성경적이라면 그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본다 구약에서는 성직자
즉 제사장직은 가문으로 이어졌고 그들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목회자의 기원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들이라
볼 수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많은 민중을 대상으로
하여 말씀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하며 병자를
치유하는 사역을 담당하였다 목회의 근본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예수님의 이사역이
목회자의 원형이라 보는 것이다
1,목회자의 원형으로서의 예수님
예수님은 공(公)과 사(私)가 분명하셨다
30세 이전의 예수님은 육적 부친인 요셉의 뒤를
이어 한 가정의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세례를받은후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도울 열두제자를선택하여 이들과 함께
사역하신다 이때의 예수님은 목회이외에
직업을 가지 않으셨다 그러나 직업이 없어
궁핍한 예수님에게는 많은 후원자들이 있었다
마리아와 마르다. 삭개오. 이밖에도 부유한
바리새인들의 도움으로 세속적 직업이 없어도
불편함 없이 하나님 나라 일을 하셨다
2.목회자로서의 사도 및 제자들
예수님의 열두제자는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재산과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였다.
의식주를 위하여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만 전력을 다하는
이들에게 사도행전에 공동기금의 모금의 목적은
과부들과 가난한자들을 돕는데 있었지만 기도와
말씀 전파하는데 전무하였던 사도들의 재정을
돕는데도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 보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사역의 댓가를 교회에 의존하고 오직
목회만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3 특수한 경우로서의 사도바울
예수님이 선택한 사도들은 목회외에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았지만 교회가 택한 바울과 바나바는
직업을 가지고 자비량하며 목회를 했다
그러나 바울도 교회의 헌금을 받은 경우와
거절한 경우가 있다 교회의 헌금을 받지 않음은
전도자 자신이 일함으로 그리스도인의 건전한 생활을
보여주고 교회의 페가 되지 않게 하기위함이며 새로운
도시에서 생계를 위해 취할수 있는 방법인 일하면서
가르치는 일을 택해 자급자족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을
노예로 간주하여 노예는 돈을 받지않는다고 인식했다
■맺는말
목회자의 겸직과 자비량의 사역에 관련하여 획일적인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의 경우를 보면 목회자의 겸직은
비 성경적이라고 생각할수도있다
그러나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는 교회에만
의존하지 않고 목회이외의 다른 직업을가질수
있는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자비량사역은 충분히
성경적이라 말할수 있다
|
첫댓글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한 1서 5:14-15)
상대에게 쾌활함을 전달하라.
의견 차이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의견 차이는
공손한 태도로 대하면 해결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는
자신이 놀림을 당할 경우를 생각하라.
사람들을 상대 할 때는
참다운 관심을 표시하라.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에 관해
얘기 할 기회를 주라.
미소를 짓는 데는 돈 한푼 안 들지만
미소에는 큰 부담이 따른다.
그것은 또 자신을 기분좋게 할 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을 기분 좋게 해준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안녕하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고 말하라. "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내일을 예약합니다.
저기 저 아침해같이
타오르는 붉은 내일을 예약합니다.
내일은 생각이 요동쳐서
좌잘했던 자리에 도전하는 자리로 바뀌고
내일은 가슴이 뜨거워져서
사랑을 위해
진실의 고백을 나눌 수 있고
내일은 마음이 손을 잡고
시기와 질투가 없는 정스러운 날이길.
내일을 예약합니다.
남은 건
어제의 실패와 어지러움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흘린 진실한 땀과 소중한 노력으로
내일을 예약합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아가페 사랑을 나눕니다
욕심은 내지 않습니다
넘치지도 모나지도 않습니다
툇마루 밑의 댓돌이 되어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만을 창조합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닙니다
웃어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날씨가 많이 추운 주말입니다.
연평도 사건으로 어수선 하지만
이럴때 일수록 더 많이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늘 감사 하자. 그리고 또 감사 하자.
늘 기도 하자. 그리고 또 기도 하자.
항상 기뻐 하자. 그리고 또 기뻐 하자.
♧살다보니...
돈 보다잘난 거
보다많이 배운 거
보다마음이 편한게 좋다...
살아가다보니
돈이 많은 사람보다
잘난 사람보다
많이 배운 사람보다
마음이 편한 사람이 좋다...
내가 살려하니
돈이 다가 아니고
잘난게 다가 아니고
많이 배운게 다가 아닌
마음이 편한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