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롬 12장 14~21절
오늘 메시지는
너를 박해하는 자
너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박해 받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나를 박해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거나
피해를 주었다면
박해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남에게 피해준 일도 없고
잘못한 일도 없는데
미움 받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이유 없이 텃세를 하고
기득권을 행사합니다.
그것은 어느 직장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대에서도 신고식을 해야 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경쟁에 부딪혀야 합니다.
나를 모함하고
나를 파괴시키려는 세력들이
항상 주변에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군대에서 기합 받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용서했지만
제 사수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 믿는 저를 보고
재수 없다고 때렸습니다.
그리고 술을 주고 나서
안 먹는다고 때렸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주는 술을 먹지 않는 것은
자기를 무시해서 그러는 것이니
너 한번 맞아 봐라
라면서 때렸습니다.
제가 일등병 때
그 사람은 저를 골탕 먹이려고
몰래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충성 하면서 경례를 합니다.
그리고는 졸병이 고참이 인사하는데
먼저 인사하지 않았다고 때립니다.
또 돈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때립니다.
그리고 마음은 참 착한데
저를 때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대학원까지 졸업한 사람인데
“내가 졸병때 하도 많이 맞아서
너를 때리지 않을 수가 없다”
면서 때렸습니다.
그래서 맞았습니다.
그렇게 계속 맞으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힘들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굳어지고
치를 떨게 됩니다.
그런데 제대후 서울에서 목회하던중
우연히 사당동 에서 만났습니다.
사당동 시장에서 식당을 하더라고요
물론 그 사람을 먼저 찾아가서
악수를 청했지만
그 사람을 보니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시 보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축복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어디 이런 일 뿐이겠습니까?
자기를 고문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법적으로는 걸리지 않게 사기 쳐서
자기 기업을 부도나게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기업이 부도가 나고,
가정이 힘들어지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들어졌을 때
왜 분노가 없겠습니까?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박해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향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스데반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 저들은 자기의 죄를 잘 모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0~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 안에 있을 때는
가능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둘째 메시지는
다른 사람의 고난에
방관자가 되지 말고
참여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태도를 가집니다.
비판을 하던지
방관을 하던지 합니다.
남을 도와준다는 말은
내가 손해 보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내 명예가 상하거나
내가 손해를 볼 때는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우리들에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방관자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들어가고, 동참해서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스스로 벽을 만들어 놓고
성을 쌓아놓고
성속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이
나를 건들지 못하게 하고
보호 장치를 해서
안전하게 만들었지만
외로워합니다.
점점 외로워집니다.
우리나라의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면
그 사람이 잘되기를 원하고
잘되면 좋아합니다.
자식 잘된다고
질투하는 부모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잘될수록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왜 남이 잘되는 것을
잘 보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심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사심이 많으면
다른 사람을 축복하지 못합니다.
자꾸 경쟁하게 됩니다.
우리가 화를 잘 내고
섭섭해 하고 미워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나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안에 경쟁심, 소유욕,
이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축복하지 못합니다.
축복을 해주어야 하겠는데
축복이 안 되는 사람의 얼굴을
본 일이 있습니까?
‘저 사람이 저렇게 복 받으면 안 되는데’ 하는
경쟁심, 이기심이 있을 때
축복할 수 없습니다.
사심없이 정말 축복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될수록 좋아합니다.
저는 한국사회가
이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을 축복해 주는 사회,
격려해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계속해서 15절을 보면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아닙니다.
약자에 대한 동정심은
화가 나게 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긁어놓는 것입니다.
그런 동정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아파요.
하나님 저 병을 나를 주세요
내가 대신 아플께요”
라고 하는 기도는
그저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통 속에
함께 들어가겠다는 말입니다.
같이 눈물을 흘리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자와 함께
가난한 자가 되고
나는 누릴 수 있는
가정환경이 있지만
그 모든 환경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와 함께 있고,
병든 자와 우는 자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었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느끼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높은 곳이나
화려한 곳에 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낮은 곳에 가서
며칠만 지내다 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
병든 자들 속에
가서 도와주십시오.
억울한 자들을 도와주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죽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세례요한을 참 좋아하는데
“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요
빛에 대하여 증거자요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을 알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한다” 는 것이
세례요한이 외친 소리였습니다.
세례요한이 한 말 중에
“높은 산골짜기는 낮아지고
낮은 골짜기는 높여서
주의 길을 평탄케 만든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높아진 사람들은
다 낮아지시기를 바랍니다.
또 낮아진 사람들은
모두 높아지시기를 바랍니다.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박해하는 사람을 축복하시고
고난당하는 사람을 옆에서
그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어려운 사람은
어려울 때 도와줘야 도움이 됩니다.
어려움이 다 지나간 후에
도와주는 것은
도움이 아닙니다.
가장 어려울 때
같이 있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하십시오. 낮추십시오.
교회 안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장교와 졸병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재벌과 서민이 함께 봉사하고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모든 높아진 사람은
모두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잘난척 하지 마십시오.
낮아있는 사람은
지나치게 열등감에 빠져 있지 마시고
올라오십시오.
자동차는
도로를 달려야 합니다.
산같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굴곡이 심한 곳은
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넷째, 17절을 보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우리는 17절에서 엄청난 도전을 받습니다.
구약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고 했습니다.
누가 나를 때려서
오른쪽 두 번째 이가 빠지면
마찬가지로 때린 사람의
오른쪽 두 번째 이를 빼내면 됩니다.
눈이 빠지면 눈을 빼면 됩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의 사회는 무섭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적극적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도모하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선으로 보답하라
이것이 주님이 원하는 사회이며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람은 많이 모이는데
왜 능력이 없을까요?
세상과 비슷해서 그렇습니다.
세상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자기 박해하는 자를 저주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모두 이익을 따라 살고
필요하면 하고
필요 없으면 하지 않는 이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교회가 크다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일 때 능력을 주고
영향력을 주는입니다.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성도들이 주님의 명령을
온 마음으로 이 지키고 있다면
그 교회는 진짜교회 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다섯째,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를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방관자도 비판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화해자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가치관, 인생 인생관을 가진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웃음꽃이 피고, 사회가 변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도 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함께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
고난에 구경꾼이 아니라 동참하는 사람,
선을 추구하는 사람,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이 있는 곳,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지 아십니까?
용서할 때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래 사랑하고 축복하자"
하고 포기를 하면
그순간에
하늘에서 기쁨이 옵니다.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이
나를 만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낮은 자리에 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만
높은 자리에 가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겪으면
주님이 거기에 계십니다.
억울한 일 당할 때 거기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십자가를 지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이익을 얻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박수를 받고 칭찬을 받고
화려하게 등장하면
예수님은 온데간데 없어집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잠시 후에 네가 악인을 살필지라도
눈을 씻고 보아도
악인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0~21 . 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의 갈 길은 이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용서할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것은 분노입니다.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미움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축복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주님, 우리들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낮추어지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외로운 사람들과 ,
함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시고
주의 거룩과 축복이
어천교회에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