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며느리 / 조숙향(1960-2024)
나는 한 마리 쥐며느리였네
세상의 장판 밑에 숨어 살았네
밤마다 마음의 자리를 뒤적거리며
마음에 잿빛 가로줄을 그었네
나는 내 얼룩무늬를 안쓰러워하며
어둠과 습기만 갉아먹고 살았네
누군가 툭 건드리기만 하여도, 갑자기
머릿속은 둥근 백지로 변했네
분명하게 나를 드러내지 못한
불안한 눈빛이 모여서
안으로 몸을 말아 올리는
나는 작은 공벌레가 되었네
오늘 장판 위로 기어올라
찬연한 햇살의 눈을 보았네
산란하는 빛의 자유로움
나를 바라보는 따스함
내 생은 빛의 반대편에 있었네
그 따스함에 두 눈이 먼다고 하여도
이제 나는 장판 밑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걷기로 하였네
글쓴이의 단독목회는 여객선사무소와 관련해있다. 총각전도사가 되어 딸랑 성경책 한 권 들고 신진도에서 시작한 첫 목회는 여객선사무소를 예배당으로 꾸민 단출한 곳이었다. 결혼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단독목회를 나간 곳 또한 장흥 바닷가 마을이었다. 간척사업으로 물길이 막히기 전까지 작은 여개선사무소로 쓰던 장소였다. 두 곳 모두 낡은 장판 깔린 바닥에서 쥐며느리를 쉽게 볼 수 있었던 음습한 곳으로 문정영이 말한 것처럼 “빛에 반응하는 내 안의 어두움”이 떼굴떼굴 굴러 나온다.
쥐며느리는 습한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곤충이다. 일반적으로 혐오의 대상이다. 그러나 유기물의 처리능력 등 환경정화와 관련한 생태학적인 가치가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쥐 앞에선 마치 시어머니 앞의 며느리처럼 꼼짝 못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쥐며느리고, 몸을 둥글게 마는 습성 때문에 ‘콩벌레’라고도 한다.
조숙향이 쥐며느리를 통해 자신을 투사하고 있는 것처럼 존재에 대한 상관물들은 다양한 종으로 그려지고 있다. 장생포에서 친구들과 먹던 고래 고기는 “작살에 찔려 피 흘리며 눈물짓는 내가 떠오르”(「연민은 늘 비릿하다」)는 것이고, 칭얼거리는 남동생을 업고 어두운 골목길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다리는 13살의 여자 아이는 도둑고양이(「도둑고양이 되기」) 같았으며, 훌쩍 고향을 떠나온 그녀는 “강물을 오래오래 굽어보고 있는” 두루미가 되기도 한다(「잿빛 두루미가 섰던 자리」).
살쾡이=시나위=조숙향(「살煞」)으로 “숲길을 천천히 뱀이 되어 걷는” 그녀는 “아직 에덴이 보이지 않는” 다만 기어 다니는 “구불구불 징그러운 길”(「에덴을 향하여」)의 존재인 “소유적 인간”에서 “존재적 인간이 될 수 없느냐”(「시인의 말」)는 시의 물음을 가지고 “제 빛깔로 사는 일이/얼마나 소중한지/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까닭”(「메꽃」)을 사물들을 빌어 자신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절절 기는 절망의 줄기가 너무 많았던”(「호박꽃」) 그녀가 가방 속에 담고 살아온 갖가지 물건처럼 쓸데없이 느껴졌던 인생의 무게를 알게 된 것은 심야버스에서 자신의 추운 무릎을 가방으로 덮어주었을 때이다(「무게의 쓸모」).
어쩌면 맞닥뜨린 세상의 불행과 불편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쓸모없는 것으로 버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따뜻하게 덮어주는 인생의 무게가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우리가 빚을 졌다면 “소유적 인간”에서 “존재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삶의 태도와 목적성을 깨우쳐준 것에 있다. 이것은 예수를 읽는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소유적 인간”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부활’과 ‘영생’이 없다.
시인의 투사인 쥐며느리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녀의 삶이 때로는 주눅 들어 있어 “누군가 툭 건드리기만 하여도, 갑자기/머릿속은 둥근 백지로 변”하는 카프카의 『변신』의 한 장면 같은 것이다. 그녀는 분명 ‘오늘’이 있기까지 “분명하게 나를 드러내지 못한” “공벌레”로 살았다. 그러나 ‘장판 밑에서’ ‘장판 위로’ 뒤집어지는 지난한 삶의 지향점이 바뀐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갑자기 빛을 보면 눈이 상처를 입듯이 “두 눈이 먼다고 하여도” 감행하겠다는 시인의 굳은 결의가 돋보이는 언표이다.
이처럼 시인의 생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은 무엇일까. “고양이는 명치끝이 붉게 타들어 가면 검어진다는 것을 알았”(「도둑고양이 되기」)기 때문이며, “내 생은 빛의 반대편에 있었네”라는 시인의 깨달음과 견딤 속에서 “산란하는 빛의 자유로움”으로 비추는 “찬연한 햇살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의 시를 통해 ‘몸으로 있는 존재와 몸을 가진 존재’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을 가진 존재로만 사는 사람은 그래서 살아도 불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