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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수필집 『꼭! 봐요!』(2020. 해드림출판사)
서정과 서사를 아우르는 존재 인식의 토포필리아
- 임재문 수필집 《꼭! 봐요!》-
최원현
1. 들어가며
2010년대를 마감하고 2020년대를 맞으면서 여느 때보다 큰 희망과 기대 속에 새해를 맞았었다. 엄청난 변화의 시대, 어느새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일들이 속속 현실로 실현되고 인간의 수명도 100세를 바라보게 된 요즘이다. 사람은 몇 년씩 걸려 할 수 있는 일을 인공지능은 단 몇 시간에 해내는가하면 자동차가 자율주행으로 가고 있다. 뿐인가. 가깝게는 음식점엘 가도 사람 대신 기계에다 주문하고 결재를 하는 등 일상적 활동의 변화도 다양하다. 그런 것이 대단한 발전으로 보였다. 다 좋아보였다. 과학문명은 무엇이든 못 할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코로나19, 2020년 1월부터 지구촌을 경악케 한 사태는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최상의 방역은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이라며 거리·간격·비대면이 가장 흔히 쓰이는 일상어가 되고 심지어 부모와 자식, 형제며 친구도 만나지 말아야 할 대상이 되고 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의 한마당에서 가치 기준도 윤리도 신앙도 마구 흔들리고 있다. 이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련만 살아남는 것 아니 바이러스로부터 온전히 나를 지키는 것이 더 급하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대면 제한은 대화의 단절이고 관계의 단절이다. 만나고, 가까이서 마주 보고, 눈으로 보아야 정(精)도 생기는 것인데 그게 없어지고 또 그 기간이 길어지니 이젠 안 봐도 안 만나도 되는 덤덤한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 그 틈을 타 비대면의 상품들이 그 관계를 매워주지만 그건 매워지는 게 아니다. 여전히 거리는 거리이고 간격은 간격이다. 화상으로 본다고 해도 눈만으로는 가까워지는 게 아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활이 굳어져버리는 게 아닐까 심히 우려된다. 기차를 타고 열 시간을 넘게 달려가야 만날 수 있었던 사이들, 며칠 걸려야 받아볼 수 있었던 편지들, 애가 타고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어쩌면 그 시절 그 시대가 더 인간적이었던 때가 아니었을까. 화상으로 아무 때라도 지구 반대편 자녀들과도 소통이 가능한 시대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불편하기만 했던 시절의 향수가 더 애틋해지는 것은 왜일까. 왜 그때가 여전히 그리운 걸까.
주인도 없는 가게에서 기계에 결재를 하고 물건을 받아오고, ‘어서 오세요’ 인사도 없는 음식점에서 역시 기계에 주문과 결재를 한 후 놓아지는 음식을 그것도 벽을 마주하며 먹고 나오는 이런 현상을 정녕 고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이 코로나로 더 빨리 현실화된 것일까.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던 발달한 문명의 결과인가. 편한 것, 쉬운 것이 다 좋을 수만은 없는데 우린 언제부턴가 거기에 길들여지며 익숙해져 가고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지혜로움이라며 애써 자신을 설득하면서 그걸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옳은 것일까.
사람과 삶은 동의어일 수 있다. 살아있을 때 삶이고 삶이 있을 때 사람이다. 그런데 삶이 위협받는 일이 자꾸 일어난다. 코로나 속인데 장마에 폭염에 태풍까지 겹쳐 수많은 이재민과 사망자들이 생겼다. 인간의 존엄성이 여기저기서 사정없이 짓밟히고 있는 것 같은 현상 앞에서 너무나 나약한 인간 존재를 인정해야만 한다. 이러할 때 수필가 임재문의 수필집『꼭! 봐요!』가 나온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평범한 일상이 한없이 그리운 때, 하찮게만 여겨지던 지난 일상들을 되돌아보면서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제대로 본다는 것이 더없이 의미롭다.
수필은 문학으로 일상의 산물이다. 내가 겪고 보고 느낀 것 그리고 내가 경험한 시대·환경·삶이 문학으로 승화된 것이 수필이다. 먹을거리의 음식을 넘어 최소한의 작품적 미학을 갖춘 요리가 수필이다. 격(格)이 있는 글쓰기로의 수필이다. 그런데 아주 맛있어 보이고 실제로 먹어보면 맛도 있는 인스턴트식품들이 요즘엔 더 인기다.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설명에도 보기 좋은 것으로 먼저 눈이 가고 손이 간다. 이럴 때 자기 살아온 얘기가 주 화소가 되는 수필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인간의 3대 기본 욕구를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표현의 욕망을 더한다. 특히 글을 쓰는 작가에게 표현은 존재감과 삶의 맛과 멋을 나타내는 중요한 욕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존재감으로 임재문의 수필집《꼭! 봐요!》속 작품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임재문은 다작의 작가는 아니다. 30년 동안 겨우 세 권의 수필집이다. 그런데 그 ‘겨우’가 얼마나 수필에 사랑을 쏟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무렇게나 내놓는 글이 아니라 아프게 진실하게 뜨겁게 정성스레 보여주고자 한다. 예쁘게 치장하지 못했는데도 예뻐 보인다는 그의 수필쓰기는 진실하고 따뜻하다. 너무 소박하다. 그래 짠하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썼다. 써왔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그리 쓸 것이다.『꼭! 봐요!』는 그런 임재문의 삶이고 모습이다.
2. 임재문 문학(수필)의 시작
수필가 임재문은 (당시) 계간『한국수필』(발행인 조경희. 주간 서정범) 천료(薦了)로 등단을 했다. 1983년 청송교도소에 근무할 때 <고향 그림>으로 초회 추천을 받고, 그 3년 후인 1986년 봄호(통권43호)에 <노자돈>으로 천료 등단했다. 그때는 서울구치소에 근무하고 있을 때다. 임재문은 교정직 공무원으로 그의 삶 대부분을 수형자들과 함께했다. 홍성교도소를 시작으로 청송 서울 광주 춘천 안양 목포 춘천 원주교도소를 거쳐 강릉교도소 복지지원과장으로 2007년에 정년퇴임 했다. 어쩌면 그런 그의 순환이 삶의 전부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의 삶속엔 또 하나의 큰 맥이 있다. 바로 수필가로의 삶이다. 그는 등단(1986년) 후 7년만인 1993년《담 너머 부는 바람》이란 첫 번째 수필집을 발간하고 춘천 어린이회관에서 수필의 은사인 고 서정범 교수님을 모시고 출판기념식을 갖는다. 춘천교도소에 근무할 때다. 그리고 또 7년 후인 2000년에 두 번째 수필집《사형수의 발을 씻기며》를 발간했고 그로부터 20년이 되는 올해 2020년에 세 번째 수필집《꼭! 봐요!》를 펴내는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빛을 보는 세 번째 수필집이다.
그사이 그는 벌써 퇴직 후 13년이나 되어버렸고 아들은 장가를 가서 손주를 낳아 할아버지가 되었고 나이도 일흔이 넘어버렸다. 여기 오기까지 그의 삶은 참으로 희로애락의 질곡도 많았다.
58편이 실린 세 번째 수필집인《꼭! 봐요!》는 그런 그의 삶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자신과 삶을 조명해 보는 글들이다. 특히 여기 실린 작품들은 그의 삶의 장소를 통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하고 있다.
장소란 삶이 펼쳐진 또는 펼쳐지는 무대다. 장소가 중요한 것은 삶이 펼쳐졌거나 펼쳐져야 할 공간(무대)이기 때문이다. 무대가 먼저 정해지는 경우도 있고 삶에 맞춰 나중에 정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임재문에게는 무대(장소)가 먼저인 경우가 더 많았다. 명령에 따라 임지가 정해지는 특수직(?) 공무원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임재문에겐 아니 사람에겐 일이 먼저일 수 있다. 일은 곧 돈(밥)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 아내와 자식까지 책임져야 하는 가장에겐 밥의 해결이 먼저이고 그것이 곧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일만큼이나 중시했던 게 임재문에겐 하나 더 있었다. 문학이었다. 1983년《한국수필》과 연을 맺어 1986년 봄 호로 등단 수필가가 된 후 걷게 된 수필가의 길이다. 임재문에게 수필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 86년 봄《한국수필》추천완료로 문단에 등단했다. 문단 등단 전에는 우리 교정직 공무원의 기관지 월간《교정》에 투고 형식으로 쓴 글들이 최초로 한정된 독자들에게 선보인 글이다. 그때 호평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수필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결국 작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내 삶의 흔적을 남기고파> 중
그는《교정》잡지에 실린 글로 호평을 받게 되자 청송교도소에 근무하던 3년간 당시《한국수필》주간이던 경희대 서정범 교수께 작품을 보내 첨삭지도를 받으며 정식으로 수필을 공부했다. 그렇게 초회 추천을 받고 추천완료를 받기 위해 애쓰던 중 서울구치소로 전보가 되자 직접 찾아뵙고 지도를 받아 초회 추천 후 3년 만에 추천완료(천료)를 받는다. 정식 수필가가 된 그는 그때부터 일과 글, 직업과 문학이라는 두 길을 기차의 선로처럼 평행으로 운전해 가며 살았다. 그런 그에게 글쓰기는 뭐였을까. 왜 그는 굳이 글을 쓰려고 했고 써야 했을까.
돌아가신 내 아버지께서는 이십대 초반에 나를 낳으시고, 훌쩍 군대로 떠나셨다. 그리고 육군 장교로 직업군인이 되셨다. 내가 아장아장 걸을 무렵, 하늘에 비행기만 뜨면, 나는 비행기를 향해 "아버지!" 하고 부르며 서럽게 울었다.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늘 길을 열어놓고> 중
한참 아버지가 필요할 때, 아장아장 걸음마를 할 무렵 군대의 임지로 떠나버린 아버지, 철이 없어 이별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였지만 하늘의 비행기만 보면 아버지를 부르며 서럽게 울었던 그, 어린 그에게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을까.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 어머니께서는 20세에 나를 낳으시고 내 나이 아홉 살 때 서른도 채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 <칠순의 기적> 중
그렇게 떠나버린 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집에 자주 올 수도 없었는데 어머니마저 작가의 나이 아홉 살 때 스물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전역을 하셨지만 한창 아버지가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지 않았던 그런 아버지에 대한 채워지지 않던 아쉬움과 안타까움 거기다 아홉 살에 잃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어린 그의 삶과 후의 성장한 삶속에서도 늘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정한(情恨)이 글을 쓰게 했을 것 같다. 또 하나 그의 근무가 사실은 갇혀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보니 외부와는 격리된 삶으로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를 표현하며 채워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갖게 되었을 것 같다. 담 안의 삶은 세상 밖의 삶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것이지만 안과 밖은 너무나도 다르다. 아무 때나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누군가와도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들어오게 할 수도 있는 자유로움이 제한된 공간(장소)에서 내가 여기 있다고 소리치고픈 그 무언가가 계속 꿈틀대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교정직 공무원의 기관지인 월간《교정》을 통해 작게나마 기회가 주어졌고 그게 씨가 되어《한국수필》을 찾고 등단의 길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임재문 문학의 시작은 한정된 공간인 담 안에서 ‘나 여기 있소’를 소리치고 싶어 하는 마음의 발로였을 수 있다. 그런 그의 마음이 담긴 것이 1993년 첫 번째 수필집《담 너머 부는 바람》이었고, 그런 그의 삶 내용들이 2000년에 나온 두 번째 수필집《사형수의 발을 씻기며》일 것이다. 결국 임재문 문학(수필)에서 삶과 문학은 분리될 수 없이 늘 함께 한 것으로 삶이 문학이 되고 문학이 삶인 운명공동체 같은 것이었을 수 있겠다.
3. 고향·임지(任地) 그리고 왕송호수
임재문 수필들은 몇 개의 키워드를 갖고 있다. 고향·임지 그리고 퇴임 이후의 삶이 펼쳐지는 왕송호수다. 그것들은 장소에 대한 사랑, 공간에 대한 사랑 곧 토포필리아(topophilia)로 나타난다.
어느 한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장소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환경일 수도 있지만 사람과의 관계, 일과의 관계 등으로 체화되는 공간이다. 인본주의 지리학자인 이-푸 투안(Yi-Fu Tuan)이 “장소는 머무름이고 개인들이 부여하는 가치들의 안식처이며 안전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중심처”라 말한 토포필리아(場所愛, topophilia) 개념이다. 임재문 수필 속엔 이런 토포필리아가 그리움으로 나타나는데 그 첫 번째가 고향이다.
. 전남 해남군 계곡면 당산리에 위치한 내 고향 뒷산 흑석산에 대한 그리움과 그리고 그 산으로부터 느껴오는 고향냄새가 그렇게 절실하게 느껴오기 때문이다.
. 이미 폐교가 되어버린 계곡동 초등학교도 그곳에 있고 내 아버지께서 개척하신 교회도 내려다보인다. 내 아버지는 그 교회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누워 계신다.
. 흑석산 그곳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그려주신 동양화 ‘고향그림’의 배경이 되고 내가 초회 추천을 받은 <고향그림>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또 내가 첫 수필집으로 낸《담 너머 부는 바람》표지그림이 되기도 했으니 내가 꿈에도 그리던 흑석산이요 또 내가 고향을 떠나 있어도 흑석산이 있기에 마음 푸근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흑석산> 중.
임재문에게 고향은 흑석산을 통해 세 개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하나는 실제 흑석산이라는 장소적 공간적 고향인데 거기선 원초적 고향인 아버지 냄새가 고향냄새로 환치된다. 그리고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아버지가 개척했던 교회와 그곳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잠들어 계신 아버지로 연결되는 ‘내 고향 나의 장소’로서의 흑석산이다. 마지막 하나는 내 삶속의 지주가 되어준 흑석산이다. 아버지가 그려주신 그림인 ‘고향그림’은 첫 수필집《담 너머 부는 바람》의 표지가 되어 내 문학과 함께 한다. 이처럼 흑석산은 임재문 작가에게 고향이란 마음이 담긴 장소며 공간으로 투안이 말한 ‘머무름-안식처’로의 중심처가 되어 그리움의 표상이 된다.
작가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또 하나 고향이 있다. 작가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결혼으로 맺어진 고향인 처가다.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천 구백 팔십 년 일월, 떠꺼머리 노총각이 장가를 갔다.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하고, 일정한 직장도 없이 방랑삼천리 떠돌이 생활을 하던 서른 살 노총각이 장가를 갔다. 어찌어찌 하다가 말단 공무원시험에 합격을 하고나서 이어지는 경사가 결혼식이다. 신부는 스물여섯 그래도 꽃다운 나이에 이 노총각과 함께 80년도를 힘차게 새 출발 하게 된 것이었다. <결혼 사십년> 중
. 결혼을 위해 지금의 아내와 맞선을 보는데 나는 보기 좋게 장모님께 퇴짜를 맞았다. 얼굴도 추남인데다가 몸이 너무 허약해서 비실비실하고 또 말단 공무원에 박봉이니 더 물어볼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완강하게 반대하는 장모님을 제치고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역할이 너무나 크다.
. 장모님이 결혼 승낙을 하면서 아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데, 임 서방이 머리털은 까맣고 맘에 들더라 그러셨다는데 사실은 그 때 내 머리털은 흰 머리를 염색한 것이었기에 나는 장모님께 더 할 말이 없다.
비록 맘에 안 드는 결혼이었지만 나는 장모님께 남달리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 다른 사위들은 재력도 든든하고 몸들이 튼실한데 유독 나만 그렇게 비실비실하니 행여나 쓰러지면 어쩌나 해서 더욱 더 노심초사 걱정거리였던 것이다.
해마다 개소주를 해서 보내오시고, 개소주뿐이 아니다. 장인어른이랑 같이 산에 가서 약초를 캐어다가 한약을 달여 보내주시고, (중략) 그렇게 비실비실한 덕분에 장모님 사랑을 더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장모님의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아직 맘 편하게 못해드리고 효도 한 번 못해드린 것이 한없이 송구스럽기만 하다. <구월에 구순잔치> 중
. 처가는 초가만 면했을 뿐 뜨락을 거닐면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마치 민속박물관을 찾은 듯하다. 내가 결혼했을 때는 아래채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살고 계셨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바로 뒤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지금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곳 마루에 걸터앉아 있노라면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할머니의 따사로운 손길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그곳에 앉아 큰기침을 한 번 해본다. 나도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그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행낭 채에 내려 앉아 남은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아서이다. <처가의 뜨락을 거닐며>
어릴 적에 아버지와는 직업군인이라 함께 할 수 없었고,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할머니로부터 사랑을 받다가 새어머니를 맞았지만 어찌 그게 다 마음을 채워줄 수 있었겠는가. 그러다가 결혼을 했는데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마땅치 않은데도 자신을 받아준 장모님에 대한 감사도 그렇고 어릴 적 받지 못하고 해드리지 못한 부모에 대한 아쉬움들을 처가로부터 받고 주게 되니 처가가 구체적인 고향의 모습으로 자리해버렸던 것이다. 거기다 나이 들면서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되어갈 자신의 모습까지 보게 된다. 이런 두 고향은 임재문에게 채워지지 않는 안타까움과 채워지는 감사 그리고 내가 채워야 할 공간으로 존재하면서 더 큰 그리움으로 승화되고 있다.
다음은 삶의 중심처로서 임지(任地)다. 전술한 바 있지만 작가는 대한민국의 모든 교도소를 다 돌며 근무했다. 이번 수필집엔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의 글들이 별로 없지만 오늘의 임재문을 있게 한 중요한 삶의 근거지였다. 특히 수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던 힘듦과 안타까움이 ‘아내는 이삿짐 꾸리는 달인이 되었노라고 홀로 웃음 짓는다.’로 표현되면서 애잔한 마음이 들게 한다. 그러면서도 첫 부임지를 떠올리는 그의 기억 속엔 젊음과 꿈과 낭만으로 가득했던 그리움을 안는다.
내 직장생활에서 가장 인상 깊고 가장 재미있었던 때를 들라고 하면 홍성교도소 직장 초년생 시절일 것이다. 내 생애에 첫 직장이었던 홍성교도소! 나는 그곳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 곳에는 참으로 젊은 시절의 꿈과 낭만이 있던 곳이다. 직장의 한 부가 20-30명으로 가족적인 분위기였기에 한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면 우리는 만남과 이별의 희비를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교정야사> 중
유난히 첫 직장의 초년생 때가 그리운 것은 그의 30년 삶이 쉽지 않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는 30년 근무기간에 많은 위기의 순간을 겪었다. 수필 <위기일발의 순간들>을 보면 청송교도소 때는 30여명을 인솔하여 영농작업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하수구를 통해 도주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서울구치소(지금의 서대문) 근무 때는 드럼통이 폭발하여도 다친 사람이 없었고, 또 소년수 거실 천장이 무너졌지만 다친 사람은 없었다. 춘천교도소 때는 외부 병원 수용자가 도주했다는 소동이 있었고, 광주교도소 때는 수혈을 받기 위해 간 수용자가 도주하다가 붙잡히는 등 어느 한 가지만으로도 바로 옷 벗고 나와야 할 위기의 순간들이 많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잘 막아져서 무사히 정년퇴직을 할 수 있었다고 감사한다. 그런데 새삼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는 왜 어떻게 교도관이 되었을까.
. 그렇게 흘러간 세월이 어느덧 내 나이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바로 그 때부터 내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 있었다. 내 주위의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고 살아가는 것들을 지켜보며, 아! 나도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려야하겠구나! 그런데 현실은 너무나 멀리 도망쳐 나와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는 내 인생의 내면은 너무나 초라하고 볼품없이 무너져 있는 것이 아닌가?
. 나는 공무원 생활을 가장 싫어했다. 공무원은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교성도 없고, 또 윗사람에게 예속되는 것이 죽기보다도 더 싫은 것이 내 삶이 아니던가? 그런데 멀리멀리 도망쳐 나와서 돌아갈 길은 공무원 사회의 커다란 테두리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내 머리 속을 흔들어 놓았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돌아갈 곳은 공무원인데 기왕 구속 될 것이라면 교도관 생활을 해서 커다란 감옥 속으로 내 삶을 묻어버리자! 그래서 택한 것이 교도관의 길이요!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사천리 시험 준비를 하고 온 심혈을 다 기울여 9급 교정직 시험에 합격을 했다.
운명이란 말이 있지만 사람의 길은 어떤 큰 힘에 의해 인도되고 지배되는 게 아닐까싶다. 결국 그는 공무원 그것도 9급 교정직으로 출발하여 ‘4년 만에 7급 공무원 시험에 당당히 합격을 하여 도망쳐 나온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한꺼번에 2계급 승진을 했고, 법무부 연수원에서 감독자가 될 연수교육을 받고 감독자로 인생 제2막을 장식하게 된다. 인생 터닝포인트에서 그가 교도관의 길을 택한 사유였다.
공무원으로의 그의 삶은 비교적 평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피해갈수 없는 또 하나의 길 바로 나이 앞에서 그는 정년을 맞았고 공무원으로의 멍에와 짐을 모두 벗었다. 한데 오랫동안 길들여진 생활의 리듬과 버릇이 바뀌질 않는다. 거기다 전국을 떠돌던 그에게 한곳으로의 정착은 적응키가 쉽지 않은 또 다른 변화로 다가온다. 그 변화의 시점과 지점에 왕송호수가 있다.
. 강릉교도소 복지과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한지 일 년이라는 세월이 꿈같이 흘러갔다.
. 퇴임하여 집에서 첫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니 우선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찍 눈이 떠지는 것은 오랜 습관 때문이리라. 허겁지겁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려고 보니 아! 나는 퇴임했구나 생각해보고 혼자 웃는다. 그러고 나서 조금 있으니 핸드폰에 문자가 뜬다. ‘지금 전 직원 비상소집을 알립니다’ 하는 문자다. 아내에게, ‘여보! 나 지금 들어가 봐야 해요 전 직원 비상이라네요’ 하고 옷을 주섬주섬 입는데 아내가 하는 말, ‘당신 퇴임 했잖아요’ 해서 또 해해 함께 웃었다. <퇴임 후 1년> 중
. 직장을 따라 전국의 이 곳 저 곳을 부평초처럼 떠돌던 내가 새롭게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삶의 뿌리를 내린지 어느덧 삼 년째 접어든다. 의왕시 부곡동이라고 불리우는 이 곳은 전철로 한 시간 이내에 서울의 심장부를 관통할 수가 있어서 좋다. <왕송호수의 청둥오리> 중
.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앉은 청둥오리들의 자리가 조금씩 넓어진다면 틀림없이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봄을 찾아 왕송호수를 거닌다. 그뿐인가? 길가에 벚꽃멍울이 수줍은 처녀의 젖멍울처럼 부풀어 오르면 바로 그것이 왕송호수의 봄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왕송호수의 봄소식>
. 내가 살고 있는 의왕시부곡동에는 매일 시골장터가 열린다. 나는 그 시골장터가 좋다. 고향냄새 흙냄새가 그 옛날 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하기도 하고, 흘러간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굴레>
왕송호수는 오랜 이동의 터널을 지나 비로소 안정된 삶의 정착지로 주어지고 택한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비로소 안주하는 자신을 본다. 하지만 오랜 직장생활의 습성은 자꾸 옛날을 상기 시킨다. 왕송호수는 그런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감싸준다. 또 누리고 싶었던 자유로움과 평안함과 여유로움을 동시에 가져다주면서 어느새 새로운 삶의 터로 지극한 애정을 갖게 된다. 의왕시 부곡동, 자신의 주소지 그리고 시골장터와 호숫가로 봄이 오는 모습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도 젖는다. 그런 그에게 감당키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
. 퇴임 후 큰 변화 없이 마음의 큰 동요도 없이 잘도 견디고 있었는데, 금년 사월 갑자기 사랑하는 내 딸 아미가 하늘나라로 가는 큰 슬픔을 겪어야 했다. 심장이 안 좋아 병원에 입원 치료 후 많이 좋아져서 퇴원했었는데, 심장마비를 일으켜 갑자기 하늘나라로 갔다.
딸아이의 손을 잡고 걷던 왕송 호수가의 벚꽃이 만발하던 그날을 난 잊을 수가 없다. 이제 딸아이가 간지 삼 개월이 흘렀건만 잊을 수가 없는 내 딸 아미다. 내 딸은 외출할 때면 항상 메모를 남겼다. 철도대학에 산책 다녀오겠습니다 한다든지. 자전거 타고 오겠습니다 한다든지. 꼭 메모를 남기는데 막상 하늘나라에 갈 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냥 갔다. 난 왜 가는지 왜 떠났는지 물어볼 수조차 없다. 26년 전 청송교도소 근무당시 경북 안동병원에서 장대비가 천둥 번개와 함께 쏟아지던 칠월 말 딸아이는 태어났다. 그리고 봄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날 봄비와 함께 갔다. <퇴임 후 일 년>
나는 진도 팽목 항 바다를 향하여 내 딸아이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가슴 공동묘지>
. 애지중지 사랑하던 내 딸이 스물여섯의 나이에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하늘나라로 갔다.
. 직장생활도 정년퇴임을 했고 아들도 결혼해서 분가를 해 초등학교 6학년 손녀와 4학년 손자가 있어서 주말이면 둘만 살던 아파트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결혼 사십년> 중
퇴임 후 1년, 겨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때 심장이 안 좋던 스물여섯 살의 딸이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외출 때면 꼭 메모를 남겼는데 아주 멀리 가는데도 아무 메모도 없이 가버린 딸아이를 생각하며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 세월호의 팽목항을 찾는다. 그리고 딸아이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정년퇴임 후 아들네와도 함께 하며 주말이면 손주도 찾아와 웃음꽃이 피는데 딸을 잃어버린 가슴은 왕송호수 만큼 큰 슬픔의 바다가 된다. 새롭게 삶의 터가 되었던 왕송호수는 그렇게 작가에게 희망과 평안을 주는 곳이기도 했지만 한편 큰 슬픔을 누르고 사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삶은 각양의 모습으로 사람을 흔든다. 하지만 왕송호수는 그런 그의 삶을 살아가는 마지막 공간으로 그와 함께 할 것이다.
4. 한국수필과 한국수필작가회
임재문은 청송교도소의 3년과 서울구치소의 첫 해 봄까지 서정범 교수로부터 첨삭지도를 받으며 수필을 공부했다. 그렇게 등단을 한 그는 한국수필로 등단한 작가들의 모임인 한국수필추천작가동인회 발기에 참여한다. 그리고 회장으로까지 작가회와 함께 한다. 임재문 수필가에게 수필은 삶의 지주라고 했는데 한국수필작가회는 그 지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을 인생의 꽃이라고까지 표현한다.
. 글 쓰는 것이 취미였던 내가 교도관 생활을 바탕으로 글을 써서 수필가로 등단하게 되었으니 내 인생의 꽃을 피워냈다고 해야만 한다. 한국수필작가회 창립회원이 되고 초대 감사 초대 이사를 거쳐 11대 부회장 11대 한국수필작가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니 내 인생의 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교도관의 길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방황의 생활이 계속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폐인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저버릴 수가 없다.
. 또 다시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강릉교도소 복지과장을 끝으로 정년퇴임 한 후 수필가로 또 제2종교개혁연구소 사무국장으로 인생 이모작을 열심히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
임재문에게 글을 쓰는 것이 그리고 작가회의 일원으로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보람이고 자랑이고 긍지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기에 그를 향한 배려도 많았고 그러니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함께 할 가장 소중한 모임으로 강조된다.
. 앞으로도 나는 이 모임을 계속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내가 시작한 모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시작한 모임을 내가 스스로 탈퇴하면 나 자신을 탈퇴하는 것과 같다. 이 모임을 통해서 내 인생의 모든 보람을 찾아야한다. 어느 누가 너는 어디로 가느냐 묻는다면 나는 세월 따라 바람 따라 그렇게 가고 있고, 우리 한국수필작가회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고 힘 있게 설파 하리라. 그리고 내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그렇게 남기고 가야만 하리라. <내 삶의 흔적을 남기고파>
. 그런 내 실정을 알기에 모임날짜를 정하려면 먼저 나에게 통보를 해서 내 비번에 맞추어 모임날짜를 정하는 배려도 아끼지 않는 것이 우리 모임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임에 참석을 하더라도 꼭 끝날 무렵에야 나타나서 얼굴만 비추고 가는 것이 태반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정직 야간 근무를 하고, 인수인계를 다 마치고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서울구치소 근무시절에는 오공 시절 학생시위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빠져 나올 수도 없는 형편이 아니었던가? 서울 모임이라면 그래도 내 차지가 상당히 많아서 좋았다. 지방 모임일수록 내 차지는 줄어들기 일쑤다.
초창기 지방모임인 전주 모임 때도 밤늦은 시각에야 도착을 해서 정해진 숙소에 들러 잠깐 눈을 부친다는 것이 깜빡 잠에 곯아떨어져 아침에 깨어 보니 내가 잠잔 숙소는 전주농고 동창회 모임을 위해 마련된 숙소였다. 자칫했더라면 여관비까지 추가로 부담을 해야 할 판국이다. <가슴 뛰던 그 시절>
그만큼 임재문의 자긍심이요 자랑인 작가회는 금년으로 34집의 동인지를 내고 있다. 그가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치적처럼 사랑을 쉬지 않는 이유다.
. 한 가지 작은 꿈을 이루었다고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받는 일이 있다면, 우리 한국수필작가회의 최초 발기인이 되어 초대 감사 이사를 거쳐 제 11대 부회장 제11대 회장을 역임하고, 또 우리 한국수필작가회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처음에 8명이 "뿌리를 내리는 사람들" 이라는 8인 수필집 출간을 기반으로 시작한 모임이 200여명의 회원 수를 돌파했고 이제는 어느 곳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작가회 모임이 되었다는데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 <내 삶의 흔적을 남기고파> 중
5. 나가기 – 삶 그리고 문학을 위하여
70여년을 살아오면서 임재문은 ‘유년기-직장초년기-결혼기-정년퇴임기-현재’로 이어오면서 직장과 문학의 두 길을 충실히 잘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몇 번의 죽을고비도 겪었다.
첫 번째 죽을 고비는 초등학교 일학년 때이다. 그네를 타다가 친구의 그네를 밀어주고 바로 피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해 내가 그 그네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사건이다.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불명으로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두 번째 죽을 고비는 작가회 초기 시절 전남 광주교도소에 몸담고 있던 88년도 이야기다. 우리 회원이 운영하던 산 귀래 목장에서 빨간 양주 한 병을 손에 들고 안주는 이제 막 따온 오이로 하고, 선녀는 나를 한없이 유혹하였다. 나는 선녀의 유혹에 못 이겨 그녀를 따라 한없이 그녀의 품속으로 아방궁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리고 여성선배님이 화장실 가다가 쓰러진 나를 발견했다.
의사인 회원께서 가다가 사망할거라는 진단으로 현장에서 응급처방이 실시되어 깨어나게 되었다.
세 번째 죽을 고비는 춘천교도소 초창기 근무 시절 산수경석을 주워서 등에 짊어지고, 집에 돌아와 몸살을 앓아야 했다. 십 여일 정도 입원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유증으로 두 눈이 쌍까풀이 될 정도로 바짝 말라버렸다.
네 번째 죽을 고비는 진주종성 중이염인데 뼈와 살을 다 갉아 먹는 무서운 병이었다. 여덟 시간에 걸쳐 수술이 진행되었고, 생명을 건졌는데 한쪽귀의 청각을 잃어야 했다.
마지막은 우리 작가회 총회모임 후 귀가 중 지하철에서 떨어져 대퇴부 뼈가 부셔진 사건이다. 119 구조대에 실려 가서 입원, 무릎수술과 대퇴부 수술을 하여 가까스로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죽음에 대하여> 중(주. 필자 내용 축약 조정)
어떻든 그런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는 칠순에 이르렀고 ‘칠순은 나에게 있어서 기적이다.’(칠순의 기적)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어머니는 20세에 그를 낳고 아홉 살 때인 스물아홉에 저 세상으로 가셨고, 아버지는 겨우 회갑 이듬해에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자신은 칠순까지 살았으니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 생일 전날 나는 밤을 지새우고 자정을 기다렸다. 칠순의 기적을 맛보기 위해서다.’(칠순의 기적)라고 했다. 어쩌면 그에겐 취직-결혼-퇴직-칠순 등이 다 기적일 수 있다. 주어진 하늘의 은혜요 자신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은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러나 나는 작가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작가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의 쓴 글로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등단 30여년이 되었는데도 나 자신이 그렇게 왜소한 글쟁이로 남아 있다는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내 삶의 흔적을 남기고파)며 지극한 겸손함을 나타내며, 남은 삶에 대해서도 ‘이제 나는 또 고향교회 내 아버지께서 개척하신 모동교회에 찾아가 머리 숙여 기도드리며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쏟아 내야 하겠다. 남은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하겠다. ’고 말한다. 그만큼 겸손과 사랑과 감사로 사는 삶이다.
마지막으로 수필집의 표제작이 되고 있는 <꼭! 봐요!>를 통해 그의 삶에 대한 자세와 오늘을 살아가는 마음을 한 번 더 살펴보자.
. 낚시도 등산도 여행도 그 무엇도 삼십년 넘게 이어져온 내 삶의 틀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60대 한창 일할 나이에 정년퇴임을 하고나니 끊임없이 근무하던 그 옛날이 눈앞에 아른아른거리고 무엇인가 소일거리가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 직장의 끈을 놓아버리면 내가 아무리 몸 관리를 한다고 해도 직장생활 하는 것만큼 건강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서야 다시 직장생활을 한 것이 아니던가.
. “꼭! 봐요!” 이 말 속에는 보이지 않는 확고한 자신과의 약속 또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 “꼭! 봐요!” 하고 철석같이 약속하더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가버린 그 사람이 한없이 슬프게 했다. <꼭! 봐요!> 중>
<꼭! 봐요!>는 이 시대를 사는 60대 이상 그리고 인생 일모작을 끝낸 이들이 갖게 되는 공통된 상념일 것이다. 하루하루를 정해진 틀에 따라 수십 년을 살아온 이들에게 정년은 피하고 싶지만 불가항력이다. 문제는 하던 일이 갑자기 사라져버림에 따른 상실감에 매일 일과를 소화해 내던 그 자리도 없어져버림에 따라 자유로움이 아닌 줄 끊긴 연이 된 황당한 심정이 되는 것이다. 규칙적인 생활의 리듬을 잃게 되니 몸 관리도 안 되어 건강유지도 안 되고 내일도 오늘처럼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도 없으니 꿈도 없어진다.
‘꼭! 봐요!’란 ‘보이지 않는 확고한 자신과의 약속 또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내일도 오늘처럼 같이 일을 하자는 다짐이고 바램의 기도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약속을 했으면서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 삶이란 그런 것 아니냐는 작가의 슬픈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미 사랑하는 딸을 그렇게 예고 없이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작가에게 동료의 갑작스런 떠남은 남의 일이 아니다. 따라서<꼭! 봐요!>는 총 58편의 임재문 수필세계를 주도한다. 삶은 내 의지만으로 되지는 않는다는, 그러니 그날그날에 보다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는 다짐도 된다. 이미 남은 삶의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꼭! 봐요!’를 빠트리지 않는 작가 임재문의 마음이 공감으로 다가오는 것도 그가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꿈을 꾸는 자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나는 백조의 꿈을 안고 발길을 돌린다. 왕송호수에 내 아름다운 백조의 꿈을 마음껏 펼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왕송호수의 청둥오리> 중
삶은 희망이다. 꿈을 꾸는 것이다. 꿈은 이뤄질 수도 있고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꿈을 꾼다. 산다는 것은 꿈을 꾸는 것이고 그게 삶이기 때문이다.
임재문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살아온 장소를 사랑의 대상으로 깊은 정감을 갖고 보았다. 그것은 삶의 경험과 감정으로 자신만의 문화를 이루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추억이 되면서 의미 있는 특정한 장소로 애착을 갖는 물리적 심리적 그리움의 장소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런 소중한 기억들을 소환하여 문학화해 냈다. 물론 변질되거나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지만 그 또한 오늘과 미래를 살아가는 나침반으로 삼았다. 곧 임재문만의 토포필리아로 회복시켜 가슴에 안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토포필리아를 구축해 낸다.
그런 작가의 목소리는 내일도 꼭! 봐요! 하며 오늘을 사는 이 시대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긴 여운을 남긴다. 하루하루를 어렵게 힘들게 살아가는 오늘에 꼭 맞는 인사다. 그렇고 보면 임재문은 이 시대 가장 평범한 소시민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수필집 《꼭! 봐요!》를 통해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고 해야겠다.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수필가·문학평론가·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월간 한국수필 주간·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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