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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너더리통신 6/161220]‘효원의 도시’ 수원 화성(華城) 트레킹
영명하신 산행대장이 ‘6山회’ 2016년 송년 산행지로 세계문화유산인 ‘수원(水原) 화성(華城)’을 정한 것은 백 번 잘한 행사였습니다. 감사의 뜻을 담아 그날의 의미를 졸문으로 엮습니다. 왜냐구요? 경기도의 수도 ‘효원(孝園)의 도시’ 수원을 모처럼 제대로 둘러봤기 때문입니다. 효도(효심)의 동산이라니요? 조선조 22대 임금 정조대왕 이성(李祘. 이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이 ‘이성’으로 불러달라 했으며, 당시 자전에도 ‘성’으로 표기돼 있음)의 230여 전 효심(孝心)이 도시 곳곳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기에 ‘효원의 도시’라 했을 것입니다. 수원은 정조임금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요? 오늘날 정조의 예화(禮話)를 팔아먹고 산다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얼마 전(10월 8∼9일) 화성축성 22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시와 수원시가 30억원을 들여 최초로 재현한(부분재현은 몇 차례 있었으나 전구간은 처음임) ‘정조대왕 능행차(陵行次)’를 방송에서라도 보셨나요? 3093명과 말 368필이 동원된 거창한 행사였습니다(1785년 당시엔 1779명과 말 779필이 동원됐다는군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창덕궁을 출발하여 화성 행궁까지 48.1km(서울구간 21.2km+경기 구간 26.4km)를 이틀에 걸쳐 걸어 도착한 후 이레 동안 잔치를 베풀었다지요(<원행을묘정리의궤 진찬연(園幸乙卯整理儀軌 進饌宴>을 바탕으로 재현).
정조는 ‘모태효자(母胎孝子)’였던 듯합니다. 9살 때부터 스스로 일기를 썼는데,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자 그 충격으로 두 달간 한 줄도 못썼다고 합니다. 두 달 후 작심을 하고 일기를 다시 시작하며, 할아버지 영조의 눈에 들어 기어코 왕세손으로 임금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지요. 14년 동안 절치부심, 와신상담하여 25세에 드디어 임금이 됩니다. 만조백관이 모인 경희궁 조정에서 첫 말씀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했다지요. 그러니 반대파 세력들이 얼마나 전전긍긍했을까요? 그러나 ‘원수 갚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국왕이 된 후에도 계속 일기를 썼는데, 너무 바빠 못쓰게 되자 규장각 검서관(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홍이수)에게 ‘임금의 시각’으로 대신 쓰게 한 후 5일마다 검사를 하여 남긴 책이 ‘일성록(日省錄)’입니다. 이 일기는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때까지 신하들이 대신 쓰게 됩니다.
임금이 된 후 맨먼저 한 일이 현재의 서울대병원 자리에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敬慕宮)’을 짓고 한 달에 한번씩 창경궁의 작은 문(월근문)을 통하여 참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폐세자이므로 양주에 버려진 ‘수은묘’였지만, 왕세자 묘에 해당하는 ‘원(園)’으로 승격을 시키고 수원 화산(花山)으로 천장을 해 ‘현륭원’이라고 했습니다. 임금의 묘인 ‘릉(陵)’은 1899년 고종임금이 ‘장조(莊祖)’라 추존하고 ‘융릉’으로 승격을 시켰습니다. 천장 후 13차례나 ‘원행(園幸)’를 한 것을 봐도 효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아실 것입니다. 천장할 때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었답니다. 왜냐하면 릉은 왕궁으로부터 80리 안에있어야 하는데(당시 10리는 5.4km), 수원은 90리 가까이 되었답니다. 어지간하면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조인데도 이때만큼은 “내가 수원이 80리라면 80리”라며 고집을 피웠다지요. 그래서 ‘수원 80리’라는 속담이 생겼는데, 왕고집을 가리킨답니다. 지금도 수원 원로(元老)들은 ‘수원 팔십리’라는 속담을 쓴다지요. 천장할 때에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않으려 대토(代土)를 하고 서호(西湖)를 준설하는 등 세심하게 정성을 쏟았답니다. 환궁할 때에도 아버지를 그리며 몇 번이고 뒤돌아보고 아쉬워하며 머뭇거렸던 곳이 현재의 ‘지지대(遲遲臺)고개’입니다. ‘지’자는 ‘머뭇거리다’을 뜻입니다.
또한 어머니와 함께 말년을 수원행궁에서 살고자 화성을 쌓았습니다.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華) 성(城)’이 되었습니다. 현륭원을 보호하려 원찰(願刹)인 용주사도 짓고 수원을 신도시로 조성했었답니다. 백성들에게 쌀을 내려주며 어머니가 하사하는 것이라고도 했다지요. 실제로 5년만 더 살았어도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수도도 한양에서 수원으로 옮길 계획이었니까요. 융릉의 문인석(문석인)은 사람 얼굴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것이 정조의 실제 얼굴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정조의 어진은 한국전쟁때 부산에서 타버려 실제 용모는 알 수가 없습니다. 본인의 릉인 ‘건릉’도 융릉 옆에 조성했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습니다.
아무튼, 화성을 짓는데 다산 정약용의 과학적 사고가 빛을 발했답니다. 다산은 오늘날 크레인에 해당하는 거중기를 발명하고 성을 설계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한강을 건너오는데 ‘배다리’(舟橋)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어 칭찬도 받았습니다. 화성은 정조 18년인 1794년 착공하여 2년도 채 안돼 1796년에 완성하였는데, 성곽의 둘레는 5.7km 성벽의 높이는 4∼6m입니다.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아 크게 타원(橢圓)의 모양이며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입니다. 다른 성곽에서는 보기 힘든 4대문, 즉 창룡문, 장안문, 화서문, 팔달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치, 공심돈 등)과 돌과 벽돌을 섞어 쌓은 게 특징입니다. 한국전쟁때 크게 파손되었는데 1975년 보수, 복원하여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연무대는 활을 쏘는 곳인데, 실제로 정조는 명궁(名弓)이어서 100발을 쏘면 100발을 명중시키는데도 신하들이 너무 기가 죽어 5발은 엉뚱한 데를 쏘았다는 ‘성적표’가 책으로 남아 전합니다. 임금 중에 이성계 다음으로 명궁이었다지요.
정조임금(1752∼1800)은 여러 가지로 믿기 어려울 정도의 천재였습니다. 저금만 더 살았어도 ‘조선의 르네상스’의 꽃을 활짝 피웠을텐데, 아깝게 49살의 나이에 자연사인지, 병사인지 지금도 논란이 분분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유일한 임금이었는데, 살아 남기 위하여 혼자 피 터지게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말을 탔지요. 11살때부터 25살때까지, 아니 임금이 되어서도 항상 암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 자기를 지키기 위해 무술을 익힌 것이지요. 그때의 수많은 에피소드는 소설이 10여종이나 되고(소설 목민심서, 영원한 제국 등)사극으로 15편이나 제작되었고, 영화로도 5편, 뮤지컬 1편이 있을 만큼 ‘황금 소재’인 셈이지요. ‘여유당전서’를 남긴 다산이 위대한 학자이지만, 정조도 그에 못지 않아, 문집 ‘홍재전서’ 100책을 남겼으며(한국고전번역원에서 17책으로 완역 출간했음. 홍재(弘齋)는 정조의 호(號)), ‘주서백선’(주자의 모든 편지글 중에서 뛰어난 100편을 고른 것임)을 엮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호학군주(好學君主)라고 했겠습니까? 문집을 남긴 최초의 임금이며, 후대 왕들의 문집은 신하들이 명의를 빌려준 것이라 합니다.
정조의 효심과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걷은 화성의 성곽길은 날씨마저 쾌청하며 넘 좋았습니다. 그것도 마음에 맞는 고등학교 동창친구들과 함께하는 길이니까요(산행대장 순암 노윤성, 벽곡 장상수, 운재 마남일, 달우 박치원, 운보 김선종, 미우 이승호, 고천 민장식, 우천 최영록). 이 겨울 대낮 한데에서 같이 도시락을 까먹으며, 달우가 빚은 맛좋은 막걸리 한잔에 세월도 잠시 멎는 듯, 수원은 18세기에 머물고 있더군요. 그때의 벼슬아치와 백성들은 과연 어땠을까요? 타임머신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타고 가보고 싶은 게 조선시대입니다.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생각을. 5.7km, 걷기도 딱 안성맞춤입니다. 길지도, 짧지도 않고, 성곽을 내려온 후 남문시장인가 치킨골목에서 생맥주 한 잔도 좋았습니다. AI라고 난리가 났는데도, 이 많은 닭들은 우리를 위하여 죽어가는 걸까요? 가마솥에 튀긴 치킨은 아삭한 맛도 있는데, 점심을 거하게 먹은 뒤라 그걸 못먹고 싸가자고 나왔습니다. 한 명은 장충체육관 격투기를 보러 간다 하고, 몇몇은 광화문 집회를 가자고 하고, 세종시에서 올라온 친구는 ‘이렇게 찢어질 수는 없다’며 2차, 3차 시동을 걸었습니다. 끝내 정자역 근처에까지 와 얼큰하게 취한 후에 세종시까지는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바쁜 연말에 참 한갓지게 다녀온 6산회 송년산행이었습니다. 산행대장님, 올 한 해 우매한 ‘백성’들 이끌고 다니시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해피 뉴이어(happy new year)입니다. 모두 모두 새해에 더욱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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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산회 2016년 산행일지>
1월 태백산 눈꽃맞이
2월 덕유산 곤돌라산행
3월 불암산 시산제
4월 서해 청산도
5월 지리산 바래봉 철쭉축제
6월 곤지암 화담숲(쌍륙절 소풍 대체)
7월 방태산 아침가리골(알탕 따봉. 내년 꼭 다시 한번 갑시당)
8월 횡성 천렵(대체)
9월 남해 욕지도&연화도
10월 오대산 단풍
11월 ‘천년고도’ 경주 남산
12월 수원 화성 성곽 트레킹(6산회 114회차 기록)
첫댓글 1년동안 각기 다른 장소를 물색하여 12번의 행사라....!!
산악대장이 제일 욕본 것 같은디....?!
그동안 6산회에 관심 갖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후기와 사진 남겨준 우천 안수당 벽곡....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