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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가치에 차이가 있는 두 개의 텍스트가 메나르의 이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첫 번째 텍스트는 한 특정한 작가와의 <완전한 일치>라는 주제를 소묘하고 있는 노발리스의 그 문헌학적 단상이다(드레스덴판에서 이 단상은 번호 2005번을 달고 있다). 또 다른 텍스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화가에, 햄릿을 까나비에르 거리에, 또는 돈키호테를 미국의 월 스트리트에 가져다 놓고 있는 그런 기생충 같은 작품들 중의 하나였다. 뛰어난 품격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메나르는 그러한 헛되고 소란스러운 행태를 혐오했다. 그에 따르면 그러한 것들은 시대착오적인 망상에 따른 천박한 즐거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거나, 또는 (보다 나쁜 것으로) 모든 시대에 동일하다거나, 또는 모든 시대가 서로 다르다는 그런 초보적인 지식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비록 모순적이고 피상적인 구성 방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에게 있어 보다 흥미롭게 보였던 것은 알퐁스 도데의 그 유명한 제안이었다. 그 뛰어난 기사(돈키호테)와 그의 종자(산초 판사)를 타르타린이라는 한 인물의 형상 속에 결합시키는 것.....메나르가 현대판 [돈키호테]를 쓰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는 여느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은 그의 명석한 기억력을 모독하는 짓이다.
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집필하려는 게 아니었다--그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가 집필하려고 했던 것은 [돈키호테] 그 자체였다. 물론 그가 절대로 원작을 문자 그대로 옮겨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경탄할 만한 야심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일치하는--단어와 단어, 그리고 행과 행--그런 몇 페이지를 쓰는 것이었다.
“나의 의도는 단지 놀랍게 만들려는 것뿐이지.”
1934년 9월 30일 그가 바욘에서 내게 편지를 썼다.
“내가 퍼뜨린 소설이 객관적 세계, 신, 우연, 우주의 형상과 같이 목적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거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그런 사유체계보다 더 선각자적이라거나 보편적이라는 것은 아니네. 단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중간 작업 과정을 아주 멋있는 책들 속에 담아 출판하는 반면 나는 그것들을 생략해 버리기로 마음먹은 데 있지.”
사실 그가 오랜 세월에 걸쳐 수행했던 그 작업을 증거해 줄만한 단 한 줄의 원고도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처음 생각해 냈던 작업 방식은 상대적으로 단순했다. 스페인어에 능통하는 것,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는 것, 무어인 또는 터키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 1602년부터 1918년까지의 유럽 역사에 대해 잊어버리는 것,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것, 삐에르 메나르는 이러한 과정을 열심히 추적했다(내가 알기로 그는 17세기 스페인어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방법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중단해 버렸다. 독자들은 그게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한다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단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의도한 작업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했고, 그것을 성취시키기 위한 모든 불가능한 방법들 중 앞의 방법은 가장 흥미롭지 못한 방법이었다. 20세기에 살면서 17세기의 대중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어쩐지 그에게 일종의 강등처럼 보여졌던 것이다. 설사 어떻게 해서든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키호테]라는 목표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삐에르 메나르이면서, 삐에르 메나르의 경험들을 통해 [돈키호테]에 도달하는 것보다 덜 야심적인 작업--따라서 덜 흥미로운--으로 생각되었다. (내친 김에 하는 말이지만, 그런 생각 때문에 그는 [돈키호테] 2부에 나오는 자전적인 [서문]을 빼도록 만들었다. 이 서문을 삽입시키는 것은 또 다른 인물--세르반테스--을 창조하는 것은 되겠지만, 또한 그것은 [돈키호테]를 메나르의 관점이 아닌 세르반테스의 관점으로 제시하는 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메나르는 그러한 용이한 방법을 거부했다.)
“본질적으로 나의 작업이 난해한 것만은 아니네.”
나는 편지의 한 곳에 이렇게 씌어 있는 것을 보았다.
“문제는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내가 불사신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있지.”
나는 자주 그가 이미 그 작업을 끝냈고, 내가 마치 메나르가 생각했던 그런 방식으로 [돈키호테]를--[돈키호테 전체를--읽고 있다는 상상이 들곤 한다고 고백해야 할까? 지난 며칠 밤 동안 [돈키호테]의 26장--메나르가 결코 건드려 본 적이 없는--을 뒤적거리다가 나는 다음과 같은 예외적인 문장에서 그의 문체와 그의 목소리 같은 어떤 것을 발견했다. “강의 요정들과 고통에 젖어 있고 물로 축축한 에코.” 정신적 형용사와 물질적 형용사의 절묘한 결합은 나로 하여금 어느 날 오후 우리가 함께 토론을 벌였었던 셰익스피어의 시 한 편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곳, 터번을 두른 한 못된 터키인이....
그렇지만 왜 하필이면 [돈키호테]인가? 그렇게 독자들은 물을는지 모른다. 만일 그가 스페인 사람이라면 세르반테스에 대한 선호가 굳이 설명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너나 문제는 그가, 발레리는 에드몽 떼스뜨를 낳고, 말라르메는 발레리를 낳고, 보들레르는 말라르메를 낳고, 바로 이 보들레르를 낳은 에드거 앨런 포의 신봉자인 님 출신의 상징주의자라는 사실에 있다. 메나르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내가 [돈키호테]에 대해 깊은 흥미를 느낀 것은 사실이네. 그러나,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그러니까 그 작품을 선택한 것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해야겠지. 나는 포의 그 감탄문을 연상하지 않고서는 우주를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인데 말이야.”
아, 이 정원이 마술에 걸려 있다고 생각해보라.
또는 “술 취한 배”나 “늙은 선원”을 연상하지 않고서는 역시 마찬가지의 결론에 도달하게 그런 사람인데 말이야. 그렇지만 반대로 [돈키호테] 없이도 나는 우주를 상상할 수가 있지. (물론 나는 나의 개인적 역량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러한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방향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네.) 사실 [돈키호테]는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책이고, 그러기 때문에 [돈키호테]는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지. 나는 전혀 같은 단어를 쓰지 않고서도 그 작품을 미리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을 쓸 수가 있어. 나는 열두세 살 때 이 작품을, 아마 전체를 다 읽었지. 후에 나는, 물론 현재에는 그럴 의향이 없는 몇 장을 골라 아주 꼼꼼하게 재독을 했지. 나는 또한 그의 막간극들, 희극들, [라 갈라떼아], [모범소설집], [뻬르실레스와 세히스문다의 명백한 고난], [빠르나소의 여행] 등을 읽었지....망각과 무관심 때문에 단순화되어 있는 [돈키호테]에 대한 나의 개략적인 기억은 마치 아직 씌어지기 전의 어떤 책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와 같은 거라 할 수 있지. 일단 그러한 이미지(아무도 상식의 차원에서 부정할 수 없는가?)가 형성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세르반테스가 가졌던 문제보다 훨씬 어렵다는 게 명백해지지. 그 순종적인 나의 선구자는 우연과의 협동을 거부하지 않았지. 그는 언어와 발명의 관성에 끌려 약간 되는 대로 그 불멸의 작품을 작성해 나갔던 거지. 나는 그의 그 우발적인 작품을 문자 그대로 재작성하겠다는 신비로운 책무를 떠맡게 된 거지. 나의 이 고독한 놀이는 두 개의 극단적으로 상반된 법칙에 의해 좌우되지. 첫 번째 법칙은 나로 하여금 형식적 또는 심리적 전형의 다양성들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게 되네. 두 번째 법칙은, <원> 텍스트를 위해 그러한 다양성들을 버리고, 전혀 반박의 여지없이 그러한 폐기를 합당한 것이라고 견지하게끔 만들어주지.....이러한 기술적인 측면의 장벽에 또 다른--보다 원초적인--장벽이 하나 더 있다네. 17세기 초에 [돈키호테]를 쓴다는 것은 근거가 있었고, 불가피했고, 그리고 거의 운명적인 일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지.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사정이 다르지. 극단적이리만치 아주 복잡한 사건들로 가득 찬 300년이란 세월이 그냥 헛되이 흘러간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말이네. 그러니까 그 사건들 중 단 하나만 언급한다 해도 그것은 곧바로 [돈키호테] 그 자체가 돼버리니까 말이네.”
이러한 세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메나르의 단편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보다 훨씬 더 오묘하다. 후자는 아주 조악한 방식으로 기사도 소설의 허구에 자신의 나라가 안주하고 있는 시골의 가련한 현실을 대치시킨다. 메나르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현실>로서 레빤또 전쟁과 로뻬시데의 <까르멘>의 땅을 선택한다. 만일 모리스 바레나 엔리께 가레따 박사가 이러한 선택을 했다면 작품 안에 얼마나 많은 스페인적인 요소들을 끌어들였을 것인가? 메나르는 아주 당연하게 이러한 것들을 피해갔다. 메나르의 작품에는 집시도, 아메리카대룩 정복자들도, 신비주의자들도, 종교재판도, 펜리페 2세도, 아우또라는 신앙극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지방색을 소홀히해버리거나 아예 배제해버린다. 지방색에 대한 이러한 경사는 그로 하여금 역사소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품도록 만들어준다. 이러한 경시는 전혀 반박의 여지없이 [살람보]를 가차없이 능멸하도록 만든다.
각 장들을 하나하나 고찰해 봐도 놀라움은 전혀 감소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부의 28장을 시험해 보자. 이 장은 돈키호테가 무예와 문예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장에서 돈키호테가 (마치 께베도가 후에 [모든 자들의 시간]에 나오는 비슷한 문구에서 그러한 것처럼) 문예에 반해 무예를 선호하는 논쟁을 펼쳤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세르반테스는 재대 군인이었다. 따라서 세르반테스가 그러한 판결을 내렸다는 것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버트란드 러셀, 그리고 [지식인들의 배반]과 동시대 사람인 삐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가 그러한 아리숭한 궤변들 속에서 작가가 주인공의 심리 속으로 종속되는 경탄할만하고 전형적인 한 현상을 파악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통찰력이 없으므로) [돈키호테]가 <문자 그대로 베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바꾸르 남작 부인은 니체의 영향을 보았다. (내가 보기에 전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이 세 번째 해석에 감히 삐에르 메나르의 거의 신성한 겸손함에 배치되지 않을 네 번째 해석을 덧붙여야 할지 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의 겸손함이란 자신이 선호하는 생각들과 정반대되는 생각들을 주창하게 돼버리는 삐에르 메나르의 움츠리고 반어법적인 습관을 가리킨다. (우리 다시 한 번 그 허망한 초현실주의적 책자에 들어 있는 자끄 르불의 폴 발레리에 대한 공격을 상기해 보자.)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삐에르 메나르의 텍스트는 언어상으로는 단 한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다. 그러나 삐에르 메나르의 것은 전자보다 거의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 (그의 반박론자들은 전자에 비해 보다 애매모호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매모호성은 하나의 풍요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메나르의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비교해 보면 그것은 확연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세르반테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고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돈키호테] 제 1부 9장
17세기의 <평범한 천재>인 세르반테스에 의해 편집된 이러한 열거형 문장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반면 메나르는 이렇게 적는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고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이다. 이러한 생각은 놀라운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동시대 사람인 메나르는 역사를 현실에 대한 탐구가 아닌 현실의 원천으로 정의한다. 메나르에게 있어 <역사적 진실>이란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났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마지막 문구--<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감관>--는 뻔뻔스럽게도 실용주의적이다.
또한 문체에 있어서의 차이점도 아주 명명백백하다. 메나르의 고어체--무엇보다 외국어 문체적인--는 작위적인 흔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았던 선구자 세르반테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어떤 지적인 활동도 종국에 가서는 쓸모없게 되기 마련이다. 하나의 철학적 원리는 시초에 세계에 대해 그럴 듯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철학사 속에서 단순히 한 장--만일 한 단락이나 명사로 되어버리지 않는다면--으로 남게 된다. 문학에 있어서 이러한 시간에 따른 쇠락 현상은 더욱 치명적이다. 메나르는 내게 [돈키호테]가 무엇보다 우선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 그것은 애국주의적 취향, 문법적으로 오만함, 호화로운 장정으로 꾸민 각종 난잡한 판본들이 난문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될 뿐이다. 영광이란 일종의 몰이해에 불과하며, 아마 최악의 몰이해일는지도 모른다.
이 허무주의적 확인이 전혀 새로운 적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러한 허무주의적 진실 앞에서 삐에르 메나르가 이끌어낸 결단일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의 노력 뒤에 기다리고 있는 허무와 마주 서기로 결심했다. 그는 난삽하기 그지없고, 애초부터 쓸모가 없는 그런 작업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그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책을 외국어로 다시 쓰기 위해 온갖 노고와 수많은 불면의 밤을 바쳤다. 그는 수없이 원고를 쓰고 다시 쓰고 또다시 쓰고, 집요하게 교정을 가했고, 그리고 수천 페이지에 해당하는 그 원고들을 모두 찢어버렸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그 원고를 검토하도록 허락하지 않았고 그리고 그것들이 살아남지 않도록 유의했다. 나는 그것들을 재구성해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헛일이었다.
나는 이 [돈키호테]<마지막 결정판>을 일종의 양피지사본으로 보는 게 옳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 양피지사본 안에서는 우리들의 친구가 썼다 지운 글의 흔적들이--희미하기는 하지만 해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어렴풋이 들여다보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단지 제 2의 삐에르 메나르만이 자신의 선행자가 했던 작업을 역으로 올라가 이 트로이의 유적들을 발굴하고 복원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분석하고, 창조하는 것은 (그는 또한 내게 이렇게 써보냈다) 비정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성의 정상적인 호흡작용이네. 이러한 일반적인 기능이 이따끔 성취시키게 되는 것을 미화시키거나, 케케묵고 시대에 동떨어진 생각들을 보물인양 떠받들거나, <만능박사>가 생각했던 것을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게으름과 야만성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네.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미래에는 그처럼 될 것이네.”
메나르는 (아마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테크닉을 통해 그때까지 여전히 초보적이고 불완전했던 읽기라는 예술을 풍요하게 만들었다. 고의적인 시대 교란과, 잘못된 원저자 설정의 테크닉을 통해서 말이다. 이러한 무한적용의 테크닉은 우리로 하여금 마치 [오딧세이]가 [아에네이드]보다 후의 작품이고, 앙리 바슐리에 부인의 [켄타우로스의 전원]이 정말 앙리 바슐리에 부인의 작품인 것처럼 여기도록 만든다. 이러한 테크닉은 가장 잔잔한 작품들조차 모험으로 가득 차도록 만든다. [예수의 모방]이라는 책을 루이 페르디낭 셀린, 또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으로 보는 것은 이러한 보잘것없는 정신적 낌새가 이룬 최대치의 혁신이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