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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하철노조 청년조합원들 연수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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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사회를 꿈꾸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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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지도부 선거가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귀족노조’니 ‘계급이기주의’니 하는 자본과 보수권력의 흑주술에 붙잡혀 있는 분들은 별 관심도 두지 않겠고, 어쩌다 관련기사를 접해도 ‘그들만의 패권싸움’ 정도로 정리해 묻어버리기 십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선거가 향후 노동운동의 향배와 정치지형에 끼칠 영향을 감안하면, 그 의의를 한번 살펴볼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선거공간 안에서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한 원론과 그 구체적 실현방안을 보는 관점들, 그 바탕이 되는 경험들, 힘들이 서로 얽히고 응결되어 확연히 드러나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서로 충돌하고 갈라서는 등의 복합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선 문재인 정권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권에 대한 노동운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를 놓고 공감대 못지않게 견해차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배후에서는 촛불혁명과 지난 대선의 의미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릴 것입니다. 또 좀 더 들어가면 현실사회주의체제의 역사와 미래사회의 전망을 어떻게 그려낼 것이냐를 놓고 심각한 대립구도가 고착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이와 관련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논란이 분분하겠지만, 그래도 노동해방과 평등사회를 함께 꿈꾸자는 관점에서는 최대한 공약수를 만들어가고자 노력할 의무는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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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과 (전/현)정권의 성격, 사회주의의 운명 등에 대한 첨예한 견해차를 잠시 접어두고, 노동자라면 누구라도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부분부터 짚어봅시다. 우선 자본의 본성에 대해서는 별 이의가 없을 듯합니다. 즉 자본의 증식욕에는 한도가 없고, 증식을 위해 자본은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따라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없는 한 무제한의 착취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그 본성 말입니다. [자본론]의 현실성은 잉여가치의 비밀을 밝혔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과 노동의 지배관계 속에서 자본의 무한증식 욕구에 따른 끔찍한 착취의 역사를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는 데에도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과정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빨아먹는 과정이었고, 그 자체가 남녀노소를 총동원하는 전면전이었습니다. [자본론] 이전에 이미 [경철초고]에서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양극화 경향을 지적하면서, 노동임금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투쟁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못 박아 놓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직 자본의 이런 본성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맑스 시대 이후 150여 년 동안에 자본의 그러한 본성은 더욱 확고해졌고, 더욱 더 문명사회의 보편적 진리인양 자신의 영토를 넓혀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임금협상도 노사협력도 사회적 합의도 투쟁의 주요 방식이자 그 성과이며, 또 그 특정 국면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자본이 자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노동과 자본이 아름답게 공생공존하는 듯한 사회모델조차, 지금의 우리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여전히 뿌리 깊은 전쟁의 관성(그 역사와 폭발력)을 고스란히 내장하고 있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보는 편이 현명할 것입니다. 전쟁은 언제라도 다시 표면화될 수 있으며, 자본은 합의를 깨고, 양보했던 것들을 되찾아가려 할 수 있기에, 그 합의 역시 투쟁으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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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 눈에는 그저 객관적일 뿐인 이런 현실파악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촛불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당시 야권을 대표하는 어느 유력 정치인은 갈등의 시대는 지났다는 신조를 역설했습니다. 또 현 정부의 정책을 담당하는 핵심인사 한 분은 대중강연에서 아직도 사회를 갈등과 투쟁의 눈으로만 보느냐는 식의 공격적 수사법을 구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언술들 자체가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올바른 현실인식의 산물이라기보다, 약자들의 투쟁의지를 무장해제하는 지배무기의 하나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는 자본의 힘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 미리 한 수 접고(굽히고) 들어가는 싸움의 기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짓눌러온 극심한 양극화현상을 감안할 때, 특히 국민들 99%를 개돼지로 대접하고 싶어 한 지난 정권의 실상을 돌이켜 볼 때, 또 박정희 신화가 지배하는 그 때 그 시절을 연모하는 분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갈등의 시대를 건너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가 염원해온 평등사회,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 맑스의 멋진 말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위해서는, 아직 차이의 인정과 상생의 미담을 나누기보다, 엄존하는 모순들, 곳곳에 뿌리박고 있는 갑을관계들을 들춰내고 그 극복의 전략을 만들고자 머리를 모을 때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론과 전략에 우선하는 단결투쟁의 지상과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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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갈등은 크게 두 축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박근혜 정권과 문재인 정권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 민주주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좀 더 근본적인 갈등, 즉 노동과 자본의 갈등에 비하면 부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차적이라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박근혜 정권은 전쟁위기를 조성하면서 공안몰이로 모든 비판과 저항을 침묵시키고 부와 권력을 소수의 수중에 몰아넣을 수 있는 체제, 파시즘체제를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유신체제의 재림이 그 목적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촛불혁명으로 이를 저지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본질이 지배자의 얼굴이 아니라 지배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에 있다면, 촛불혁명은 이름값을 반쪽도 하지 못하고 있는 미완의 혁명입니다. 우선 재벌과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종편들이 혁명을 촉발하고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에 한몫 거들었다는 점에서 그것이 정말 혁명이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재벌중심 지배구조의 지속성을 위협하는 박근혜 정권을 좀 더 효율적인 친재벌 정권으로 대체할 필요성에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혁명 초기에 지배계급의 일부가 가담하거나 주도하는 것은 예외현상이 아닙니다. 문제는 촛불의 물결이 그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가이드라인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동안 지배구조 변혁의 전망을 잃어버린 시민운동이 길잡이 역할을 주도한 점도 촛불혁명의 운명을 제한했습니다. 혁명에너지가 전국을 뒤덮고 있는데도 그 동안 이론적 조직적 준비를 제대로 못해온 진보 좌파 노동운동세력의 움직임은 혁명에너지의 연쇄 폭발을 초래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수준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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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힘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의 민주주의도 역시 그에 따르는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정권 초기이며 두고 보아야 할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표면적인 정치문화는 어느 정도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극우 보수 쪽이 악의적으로 좌파(친노동, 반재벌)정부라는 과분한 명칭을 붙여놓는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권 역시 같은 대우를 받았지만 구조조정= 정리해고라는 공식은 그 시절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지배구조 문제를 정권의 처분에 내맡겨 놓는다면 재벌중심의 자본주의적 지배구조를 그저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수준에서 개선하는 데에 그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한 개선조차 늘 아쉽기는 합니다. 하지만 평등사회를 꿈꾸는 우리의 입장에서 그것은 이상적인 사회, 예컨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과는 물론이고, 민주주의 본연의 의미, 즉 경제와 문화를 포함한 사회 전 영역에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정치체제와도 한참 거리가 멀 것입니다.
그러나 촛불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중요한 근거는 살아 있습니다. 촛불혁명의 근본 에너지는 경제성장과정에서 수십 년 간 심화⋅고착되어 온 양극화구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노동과 자본의 모순구조는 어떤 미봉책들, 대화나 협상으로 극복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객관적 모순구조를 압축해서 말해주는 개념이 ‘개돼지’였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너나없이 사장님 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실은 1%를 제외한 모두가 개돼지 위치로 내몰려 왔다는 자각은 쉽게 지워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혁명의 에너지는 소멸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잠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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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너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회든 상이한 수준에서 비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베버는 예컨대 가족공동체라는 것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공산주의 원리를 구현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미 가족관계 속에도 자본주의가 스며들어가고 있어 베버의 말은 타당을 많이 잃어가지만, 여전히 자본의 증식 메커니즘과 별도로 노는 삶의 영역들이 없지 않습니다. 연인관계, 자식사랑, 동지애, 자연에 대한 미적 관심, 온갖 취미활동 등에서도 자본증식의 관점으로 설명되지 않는 에너지가 긍정적으로 작동합니다. 부정적인 비자본주의적 관계도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레닌은 어느 민족문화 속에나 노동자대중의 노동조건으로 인해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문화요소들이 비록 지배적이지는 않지만 요소로서 존재한다고 지적합니다. 우리 사회라고 왜 그런 요소들이 없겠습니까.
물론 자본은 어디에든 파고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움직임들을 어떻게든 틀어쥐고 길들이고 싶어 합니다. 또 이미 가지고 있는 풍부한 물적 인적 자산과, 오랜 지배 역사에서 익힌 온갖 지배기술을 활용할 줄 알고 있습니다. 효과적으로 떡밥을 풀고 미끼로 코를 꿰는 방식, 언론과 전문가들을 동원한 세련된 이데올로기 공세, 공권력을 포함한 물리력 행사 등으로 노동자대중 분열시키기, 노노갈등 유발하기, 노동운동 지도부 매수하기, 공포분위기 조성하기, 여론상 고립시키기 등등이 지배기술의 ABC임은 이미 뻔히들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쉽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양산을 통해 자본은 분할하여 지배하는 맛을 한껏 누려왔습니다. ‘친노동 좌파’ 정권도 만족스러운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의 충격에 따른 이데올로기적 혼선으로 변혁전망은 아직 오리무중 상태입니다. 진보좌파 활동가들 내지 지식인들은 대중들로부터는 물론이고 대학가에서도 고립되어 왔고 이 고립상태는 블랙리스트나 국보법 이전에 지식생산 과정에서 자체 검열을 부추겼습니다. 이런 상황을 전체적으로 굽어보면서 자본은 누가 예컨대 노골적으로 파쇼체제 따위를 끌어들여 판을 깨려 덤비지 않는 한 만세를 불러도 좋을 상황이었습니다. 또 비록 판을 깨려는 불상사가 일어났지만 촛불의 정화와 축복을 통해 최소한의 출혈만으로 불편한 상황은 넘겼으며, 다시 탄탄대로를 달릴 때가 됐고, 이제 민노총의 악당들만 길들이면 된다고 계산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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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난관을 헤치고 정의롭고 자유로운 평등사회로 한 발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데에 역사적 사회주의 운동들은 아무 의미도 없을까요. 그럴 수는 없다고 봅니다. 과거 운동들에 대한 평가는 전망을 세우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며, 전망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실천방안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컨대 일부의 좌파 이론가들은 소련을 자본주의 국가였다고 보기도 하고, 스탈린과 레닌을, 레닌과 엥겔스를, 엥겔스와 맑스를 떼어놓고 현실사회주의 실패의 모든 책임을 스탈린에게, 레닌에게, 혹은 엥겔스에게 넘기면서 맑스만은 살리는 식으로 퇴각전을 벌입니다. 신좌파를 넘어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가면 우파 청산주의가 기세등등합니다.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가 이들의 기본 논조입니다. 이 분위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물론이고 사회주의라는 말도 기피대상이 됩니다. 소련 붕괴의 원인이 반민중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관료체제 내지 독재에 있다는 논리가 애용됩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프롤레타리아를 대상으로 한 독재로 변질되었다는 식입니다. 이 경우 종종 소련이 제국주의 국가들과 벌일 수밖에 없었던 체제전쟁의 의미는 파묻히고 맙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본래 의미가 바로 자본주의와의 전쟁을 의미한다는 점도 묵살됩니다. 자본으로부터 털끝만한 양보라도 얻어내기 위해서도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소련의 붕괴는 이 전쟁에서의 역사적 패배를 의미하지 그 전쟁의 불필요성이나 영원한 패배의 필연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바람직한 사회주의를 위해서도 역사적 사회주의운동의 의의는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청산주의자들은 미래사회를 위해 프로이트나 니체 혹은 칸트나 스피노자, 심지어 플라톤을 열심히 읽으면서도, 맑스⋅엥겔스⋅레닌의 글을 들이대면 ‘아직도?’라는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러나 [자본론]이나 [제국주의론]은 100년 전, 150년 전의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매우 적합한 현실진단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탁월하게 구사하는 변증법적 사유는 당면과제들을 푸는 데에 더할 바 없이 유용한 전략무기입니다. 그 동안 포스트모던 이데올로기의 파상공세로 인해 생매장되다시피 했지만, 그 복권은 시급하다고 봅니다. 문화비판,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등과 관련한 까다로운 이론들도 억압의 다양한 양태들을 깊이 인식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나름 가치 있다고 봅니다. 대학이 대안적 진보적 지식생산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역할은 이제 노동운동 쪽으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조합마다 혹은 몇몇 단위들이 결합하여, 모든 노동자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공부프로그램들을 운영하자고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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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 치하의 극단적 탄압 속에서 불가피했던 레닌의 전위조직 원칙들이 오늘날에도 운동의 철칙이 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만인이 동시에 같은 수준에서 얻어낼 수는 없으며, 그 진도차이를 인정한다면, 앞서 나간 사람들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과 인식을 공유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전위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레닌은 호민관이라는 말도 썼습니다. 대중들이 겪는 어떤 작은 문제에서도 지배체제와의 본질적 관련을 폭로할 줄 아는 활동가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호민관들은 결코 경제투쟁에 매몰되어 있는 조합 서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도 했습니다. 경제투쟁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경제투쟁에 매몰되지 말고 그것을 정치투쟁 내지 지배구조 문제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하고 지배구조 자체의 해체를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라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소수정예 전위조직이 아니라 누구라도 레닌의 호민관이 될 수 있고, 또 서로를 호민관으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전위의 역할은 특정 인물들에게 고정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각 개인들 사이의 관계는 평등해질 것입니다. 운동에 헌신하는 분들의 중요한 의의를 깎아내리자는 것이 아니라, 헌신이 특권과 권위로 전도될 위험을 늘 의식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충분히 경계하는 운동방식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지금 이 자리에서 부분적으로 낮은 단계에서나마 이미 구현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맑스가 지적한 파리코뮌의 주요 특성, 즉 누구도 다시 사회구성원들 위에 군림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근래에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 현실사회주의의 대안으로 각광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의 유연성을 입증하는 알리바이 노릇을 면하려면, 체제변혁운동과 결합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체제변혁운동이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배계급의 지배장치로서의 국가 소멸 및 그 궁극 형태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지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후자를 체제변혁 이후의 먼 훗날로 미루어 놓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가능한 규모에서 구현하고 확대해가는 운동방식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변증법적 종합의 정신에 의하면 여러 부분운동들 사이의 칸막이들도 절대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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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운동을 통해 등장하게 될 사회의 구체적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인류문명의 궁극적인 답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아직 한동안은 더 증식의 향연을 누리겠지만, 그 한계는 장기 경기침체, 전쟁위기 등으로 반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별잉여가치를 노리는 기술혁신은 자본의 의지와 달리 착취할 노동력의 보편적 절약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미 19세기 중반에 맑스는 당대의 물적 관심을 충족시키는 데에 노동가능 인구 전체가 5시간 노동만 하면 충분하다는 연구결과를 찾아냈습니다. 현재의 생산력이면 지금 당장 지구를 낙원으로 바꿀 수 있으며, 문제는 생산관계 곧 지배관계라는 것이 신좌파의 기본신조였습니다. 차세대의 평등사회는 최소한의 노동시간으로, 하루 4시간 노동제를 통해서도 생태계와의 평화공존을 지속할 만한 물적 조건을 만들어 내리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정규직이니 비정규직이니 파견이니 하는 개념들은 역사책 속에 파묻힐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이 갖춰져야 할 것입니다. 물적 욕구의 적절한 조절, 새로운 사회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범사회적 인식, 이를 위한 교육체제, 주거 및 의료 등의 문화적 생활조건 완비, 제국주의적 패권주의와 전쟁의 소멸 등등.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만, 꿈을 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미 우리보다 훨씬 낮은 생산력으로도 그 가운데 상당부분을 실현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잊어버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체제가 저절로 이루어질 리는 없습니다. 8시간 노동제를 위해 인류는 러시아 혁명기까지 100년 이상을 피 흘리며 싸웠습니다. 그 후 다시 100년간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 전쟁에서 사회주의는 일단 패했습니다. 4시간 노동제를 위해서는 다시 얼마간의 전쟁을 치러야 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싸움은 이미 진행 중입니다. 자본 쪽은 초조하며, 시간은 노동 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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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산호세 광산 매몰 사건을 다룬 영화가 있습니다. 광부들 33명이 지하 624미터 지점에 매몰되어 있다가 69일만에 전원 구조되었습니다.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국가의 대응은 세월호와 대조되지만, 그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3일치 식량만으로 버티는 방식입니다. 다른 재난영화들에서는 식량을 독점하기 위해 서로를 죽이거나 인육을 먹기도 합니다. 33인도 초기에 갈등은 있었지만, 모든 음식을 완전히 똑같이 나누기로 결정합니다. 그 약간의 식량으로 구조 시까지 버티리라는 기약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누는 순간 그들은 이미 생사의 경계를 넘어서 구원의 영역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만듭니다. 이때의 윤리는 어떤 셈법이나 정세분석 혹은 전략도 초월하는 듯합니다. 이 절대적 공생윤리의 힘이야말로 평등주의 운동의 원동력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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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상의 관점으로 이번 민노총 선거를 유심히 들여다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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