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는 단순하게 보인다 해도 모순은 항상 과잉결정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예외는 자신을 규칙으로, 규칙의 규칙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새로운 규칙에 입각해 과거의 “예외들”을 규칙의 방법론적으로 단순한 예들로서 생각해야 한다. 이제 나는 이 규칙의 관점에서 현상들 전체를 포괄하기 위해, “과잉결정된 모순”은 역사적 억제의 방향, 즉 모순의 진정한 “차단”의 방향으로 과잉결정될 수도 있고(예컨대 빌헬름 황제 시대의 독일), 혁명적 단절의 방향으로 과잉결정될 수도 있다고(1917년의 러시아),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조건 속에서도 모순은 결코 순수한 상태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맑스를189)
알튀세르가 헤겔변증법의 대안으로 내놓는 과잉결정의 핵심대목인데, 결국 현실적 힘관계의 복잡성, 혁명의 어려움이라는 원론적 판단을 구체적 사례들로 풀어 설명하는 동어반복과 혁명의 들뜬 전망에 찬물 뿌리기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 가운데 맑스가 헤겔 변증법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예컨대 범주들의 역사성, 현 지배구조의 가변성, 사물들의 제반 연관들과 규정들의 총화로서의 구체성 등등. 자본론 한 구절 한 구절에서 작동하는 변증법적 서술방법이 불필요한 사변철학의 유물은 아니었을 텐데...헤겔의 유령을 상대로 헛발질할 역사적 필요성이 알튀세르에게는 절박했는지 몰라도 오늘날 헤겔을 죽은 개취급할 각별한 이유는 보이지 않습니다.
맑스주의적 정치적 실천은 “잔재”라 불리는 현실에 끊임없이 부딪친다. 잔재가 존재한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잔재의 생명력은 강인하다. 레닌은^ 이미 혁명 이전에 러시아 당 내에서 잔재에 대항해 투쟁했다. 새삼 상기할 것도 없이 혁명 이후 줄곧,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잔재는 많은 어려움들과 전투들과 논평들에 재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잔재”란 과연 무엇인가?(맑스를202-203)
그런데 이 용어에 합당한 개념을 제공하려면(그것은 그런 개념을 이미 획득했다!) “지양”과 “자신의 부정 자체 속에서의 부정된 보존”(즉, 부정의 부정)이라는 모호한 헤겔주의에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로 잠시 되돌아가면 우리는 헤겔에게 “지양된” 과거의 잔재는 단순히 기억의 양태, 즉 예견의 역(逆)에 불과하며 따라서 예견과 동일물인 기억의 양태로 환원됨을 확인하기 때문이다.(맑스를203)
헤겔의 경우 지양을 통해 이루어진 진리로서의 전체 속에서 지양된 것들(모순들)은 기억에 머무는가? 믿기 어렵습니다. 추상적 출발원리는 "그것이 원리로서 참일지라도 원리에 머무는 한 허위이기도 하다"는 논리에 의하면 모든 것을 추상적 원리의 표현으로 환원할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는 동전처럼 주머니에 담아 갈 수 있는 추상적 테제들이 아니며, 출발원리와 전개과정과 결과를 모두 포괄한다는 헤겔의 관점에 근거해 보면, 예컨대 계획경제를 헤겔식으로 수립할 경우 어떤 지도부가 일괄해서 계획을 세우고 일사분란하게 전 사회가 그에 따라 돌아가는 구조로 될 수 없습니다. 각각의 단계들, 과정들, 단위들 속의 모순은 여전히 살아서 작동하고, 그 운동의 총화로서 계획이 세워지고 실행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순들은 지양되어도 기억에 머물지 않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기억을 폄하할 뜻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