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회 2025 봄 나들이/ 백제 옛 고도 부여를 찾아서
<2025. 5. 15>
지난달 오상회 회장단과 함께 금년 봄나들이 목적지인 부여 답사에 참여했었다. 부여 하면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배운 백마강과 낙화암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답사팀은 부여에 도착하자 바로 낙화암과 백화정 그리고 고란사를 찾았고 유람선을 타 보았다. 점심 장소를 정하고 미리 밥도 먹으면서 최종 코스를 정했는데, 낙화암과 고란사 그리고 유람선 코스는 우리 오상회 당일치기 코스로는 적합치 않다는 결론을 냈다. 시간도 부족하고 낙화암 가는 오르막과 고란사로 내려가는 급경사 계단길은 위험요소가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전에는 정림사지 5층석탑과 궁남지 산책으로 정하고 식사 후 오후에는 부여 국립박물관을 구경한 다음 백제의 천년고찰 부여 무량사를 탐방키로 정했다.
압구정역에서 아침 8시 출발 예년과 같이 압구정역 현대백화점 주차장 입구에서 8시정각 출발한 버스는 동천역 환승정류장에서 경기남부지역 회원들 10명을 마저 태우고 부여를 향해 달렸다. 아쉽게도 한 친구가 장소를 잘못알아 탑승치 못하고 결국 26명이 이번 봄나들이에 참가하게 되었다. 서른명을 넘기려고 회장단이 노력했으나 매년 참가회원 수는 줄어들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리고 부여쪽은 날씨가 계속 흐리고 비 소식도 있어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날씨는 여행의 조건에서 절대적인 항목이기 때문이다. 정안휴게소에서 20분 가량 쉬는 동안 햇볕이 나서 다행이라며 모두들 좋아하는 모습이다. 평일이라선지 고속도로는 밀리지 않고 예정대로 10시 반경 부여 정림사지에 입장할 수 있었다. 버스 안에서 우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오늘의 답사여행지에 대한 소개 영상물을 보면서 사전 공부를 한 셈이다. 매번 많은 수고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정림사지와 5층석탑(국보), 석조여래좌상(보물) 첫 방문지는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정림사지이다. 여성분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능숙한 말솜씨에 모두 학구적인 자세로 경청한다. 2015년 7월 유네스코로 부터 백제 후기 문화권 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유적지 8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공주의 공산성과 무령왕릉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그리고 오늘 찾아온 이곳 부여 정림사지를 비롯하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부여 왕릉원, 나성 등 네곳이다. 정림사지는 1983년 사적으로 지정된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 터이다.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현재 절터에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1982년 지정)과 고려 시대 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이 남아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서 높이가 8.3m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좁고 낮은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우고 정상에는 상륜부를 형성하였다. 이 석탑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 변형하여 표현했는데, 얇고 넓은 옥개석의 형태 등에서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백제 석탑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우아한 조형미 그리고 완벽한 균형이 돋보이는 백제 석탑의 특징이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목조건물 형식을 따르면서도 세련미와 창의적인 조형미를 보여주며 특히 지붕 네곳 가장자리를 살며시 들어올려 예술성을 가미했다. 두꺼운 화강암을 깎아 이토록 얇고 멋지게 각층 지붕을 만든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백제와 조선의 미를 상징하는 말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조선경국전에 나오는 고사성어로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의미로 백제 건축을 상징하는 표현에 적합할 듯하다.
이어 보물로 지정된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고 고려시대 절을 중창할 때 만든 불상으로 추정돤다. 높이는 5.62m로 이 불상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지(경전 연구와 교육하던 전각) 자리인 경내 팔각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다. 불상의 부위가 화재로 극심한 손상과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은 상태로 머리가 크고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 얹었기 때문이란다. 또 오른쪽 팔과 왼쪽 무릎은 완전히 없어졌다. 얼굴은 좁은 어깨와 가슴,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감싸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의 후면을 보니 가운데 구멍이 있는 게 연자방아로 사용된 적이 있음을 말해 준다.
궁남지(宮南池) 산책 멀지않은 곳이지만 버스로 이동했다. 궁남지에도 해설사가 나와 있었다. 놀랍게도 중년의 일본여성이다. 우리말을 어찌나 완벽하게 하는지 놀라고 더구나 백제역사를 통달한 것 같다. 이름을 물어니 스루모도 시오리(鶴本 しおり)라고- 부여 궁남지는 부여읍 동남리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궁원지로 1964년 사적 제135호로 지정된 백제시대의 연못이다. 궁남지는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 무왕의 서동요 전설이 깃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일본인 해설가로 듣다니--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오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못 한가운데에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 연못은 백제 무왕 때 궁의 정원임을 알 수 있다. 전체 면적은 13,000평 정도이지만 원래 규모는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긍남지 연못 중앙에 포용정(抱龍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抱龍亭이라는 현판은 김종필씨의 글씨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보니 후대 부여군수가 쓴 포용정기가 걸려 있고 서예가 석운 최훈기씨가 쓴 서동요 원문과 한글 해석이 있다. 포용정으로 가는 긴 다리 밑에는 잉어들이 따라 다닌다. 궁남지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남긴다. 매년 7월에는 천만송이 연꽃축제로 서동연꽃 축제가 열린다. 올해도 7월4일부터 3일간 연꽃축제가 열린다는데, 화려한 연꽃 축제가 눈에 선하다, 과연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
연잎쌈밥 향우정 점심시간이다. 사전답사 때 예약한 향우정에서 연잎쌈밥과 돌솥밥을 나누어 불고기 찌개와 된장국으로 포식했다. 고급와인도 준비했는데 조중헌, 박호전 동문이 스폰 했다고 감사의 박수도 - 이광현 동문이 건배사를 했고 백제 화이팅으로 건배구호도 함께 했다.
백제의 미소 국립부여박물관 오후 첫 일정은 부여 박물관 관람이다. 한시간의 자유관람으로 진행되었다. 해설사의 설명이 붙으면 한시간으로는 턱없이 시간이 부족하다. 전시관은 4개의 전시실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1전시실은 "부여의 선사와 고대문화"로 충청남도의 청동기시대부터 마한까지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전시다. 제2전시실은 "사비백제와 백제금동대향로" 인데 특히 국보인 금동대향로는 모두의 관심과 탄성이 쏟아진다.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능산리 사찰터를 발굴 조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향로의 받침은 용이 향로 몸체를 입으로 물어올린 모습이고, 몸체는 반원형의 대접 모양이며 3단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디. 신선 모양의 뚜껑은 산봉우리가 층층이 겹쳐진 모양을 하고 있다. 42마리릐 동물, 5인의 악사, 12명의 인물이 74개의 봉우리 사이에 있다, 뚜껑 위에는 날개를 활짝 핀 봉황이 턱 밑에 여의주를 끼고 앉아 있다. 제3전시실은 "백제의 불교문화"의 전시로 산수무늬벽돌, 부여 왕흥사 사리기, 금동관음보살입상,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4전시실은 "기증으로 빛난 문화유산사랑" 방으로 귀걸이, 분청사기, 그릇받침, 세발토기 등 다양하다. 건물 내 로비 앞 넓은 광장에는 부여 석조가 놓여 있고 신기술융합콘텐츠 영상물로 관람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통일신라 시대 창건된 천년사찰 무량사(無量寺)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마지막 코스인 무량사로 향한다. 큰 다리를 건너고 있다. 부여대교이다. 시골 한적한 풍경이 이어진다. 좌우 논밭에는 하얀 비닐하우스가 전개되고 --대백제로 구룡면을 지나 사찰 입구로 들어선다. 근 40분이 걸려 도착한 곳은 외산면 만수리이다. 버스에 내리니 무량사 입구에 광활한 녹색 초지 빈터가 시선을 압도한다. 누구는 드라이브로 골프공을 날리고 싶단다. 萬壽山 無量寺 일주문 앞에서 단체사진을 남긴다. 일주문 뒷면을 보니 서예가 김찬균씨의 글씨 光明門의 편액이 걸려있다. 일주문 글씨도 김찬균씨의 글씨다.
무량사는 9세기 통일신라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는데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하였다. 생육신 중 한명인 김시습이 사육신 사건 이후 전국을 떠돌다가 이곳 무량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한다. 조선 중기 고승 진묵 일욱과의 인연담도 전해진다. 김시습의 부도가 절입구 만수산 자락에 있다. 천왕문을 지나 본당 마당에 들어서니 석등, 5층석탑, 그 뒤로 2층 극락전이 일렬로 줄지어 서 있다. 가람 배치가 나란히 정열한 것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극락전(極樂殿)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치않는 2층 불전으로 무량사의 중심 건물이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외관 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에서는 아래, 위층이 하나로 트여 있다. 극락전에는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협시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함께 모시고 있다.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의 높이는 아티타여래상이 520.1cm,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 공히 437.7cm 이다. 극락전 앞에 서 있는 5층석탑과 석등은 모두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국가유산들이다. 그리고 금년 3월초 길이 약 14m에 달하는 초대형 무량사 미륵불 괘불도가 국가지정 문화유산 국보로 지정되었다.
극락전에서 좌측으로 언덕 위에 축대를 쌓아 평평하게 하고 그 위에 김시습 영정을 모신 매월당 영당이 있고, 스님의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우화궁(雨花宮)이 있었는데 雨花란 부처님 계신 곳과 대중 앞에 만다라화 등 꽃들이 비 오듯 쏟아졌다는 법화경 서품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우화궁의 주련(柱聯)의 글들이 너무 멋있어 발걸음이 멈춰진다. 그 뒤로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원통전(圓通殿)을 구경하고 전각 앞에서 기념사진도 남긴다. 반대쪽으로는 무량사 종무소 역할을 하는 향적당(香積堂)이 있다. 그리고 공사 중인 종각(鐘閣)에는 작업인이 누각에 채색을 하고 있었다. 무량사 경내를 돌아본 후 나오는 길에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에도 들러서 참배하였다. 그의 부도에 사리도 함께 묻혀 있다고 한다. 그 옆에는 매월당 시비도 있었는데 한시(漢詩)를 정한모씨가 우리말로 번역하고 서예가 김충현씨가 글을 썼다.
정아네 무량골 가게 빨리 오지 뭐하느냐며 전화가 빗발친다. 이미 간식타임이 시작 되었단다. 막걸리에 도토리묵과 파전으로 오늘 행사를 마무리 하는 간식타임이다. 마침 비는 오지않아 야외 테이블에 상을 차려놓았다. 직접 담근 막걸리 맛이 일품이다. 술을 못 마시는 필자도 한잔을 비웠다. 환갑이 지났다는 여주인은 아직 4십대로 보이는 미모다. 머리만 희게 세지 않았다면 삼십대라며 노인들 마다 찬탄의 말을 거든다. 이집 여사장은 우리 조용헌회장 부부 특히 부인의 단골로 우리 일행이 특별대우를 받았다. 술한잔 걸치고 배도 부르니 자꾸 출발 시간이 늦어진다. 사무총장의 독려로 오늘 행사를 모두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만 하루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백제 문화유적과 천년고찰을 찾는 봄나들이 행사를 모두 무사히 마친 셈이다. 상경길에는 우재 동문이 준비한 음악 영상물로 지루하지 않게 귀가할 수 있었다. 회장단 노고에 감사드리고 여행기를 보면서 회상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또 참가치 못한 동문들도 여행기를 통해 동참한 기분을 얻을 수 있었으먄 좋겠다.
|
첫댓글 미전(米田)의 해박하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집안에 편안히 앉아 부여의 모든 유적 구경과 해설에 감탄 감탄하며 즐겼습니다. 감사합니다.
牛亭의 과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심더. 동참을 못해 아쉬웠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보람을 느끼며 감사를 드립니다.
완벽을 넘어선 여행기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佑齊의 수고에 비할바 아니죠. 격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