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뺄셈이 불가능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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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훌륭해요. 훌륭합니다. 최고예요.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만 해도 되겠어요. 덧셈은 통달했으니까, 이제 뺄셈을 해보죠. 자, 아직 안 지쳤으면 한번 대답해 보실까요? 사 빼기 삼은 뭐죠?
학생 사 빼기 삼?...... 사 빼기 삼 이요?
교수 네. 사에서 삼을 빼보라고요
학생 음....... 칠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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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자, 여기 성냥이 세 개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개, 그럼 네 개죠. 잘 보세요. 이 네 개에서 하나를 뺍니다. 그럼 몇 개가 남았죠?
학생 다섯 개요. 삼 더하기 일은 사고, 사 더하기 일은 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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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여가수 中 <수업>에서 나오는 부분입니다. 교수와 학생은 수업을 진행함에 따라서 국가의 수도나 여러 상식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뒤로 수학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덧셈에 대해서 꽤나 길게 나오고, 뺼셈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에게 뺼셈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암산이라는 측면에서 곱셈을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이 대화에서 교수는 산술에서 기본을 이해함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학생은 덧셈은 척척 잘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뺄셈에 대해서는 융통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단호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보면, 학생은 뺄셈이라는 산술에서 기본이라고 생각되는 것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더하기의 역행으로서 뺄셈을 교수가 아무리 설명하지만, 학생은 그러한 구조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냥 네 개에서 한 개를 덜어내서 몇개를 남았냐는 질문에 학생은 오히려 네 개에서 한 개를 더해서 다섯 개라고 이야기합니다. 학생에게 숫자에서 음수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생은 수에 있어서 부수적인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수 그 자체를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수학에서의 수라는 개념에 대해서 생각할때, 덧셈 이전에 1이라는 숫자, 2라는 숫자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지, -1, -2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학생은 -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깐, 수가 존재하면 그 수가 본래 지니지 않는 것을 보지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수가 학생에게 뺄셈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수에 있어서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 부분이 있습니다. 교수가 학생에게 삼과 사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크냐고 질문했을때 학생은 단번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 설명 끝에 학생은 더 크다는 것의 의미를 다른 한 쪽보다 덜 작다는 것으로 이야기했지만, 또 뺄셈에 대한 답에서는 그것을 더해서 답을 말합니다. 수의 큼과 작음에 대한 이해란 학생에게 붕뜬 이야기입니다. 수에 있어서 무엇보다 더 크다 또는 무엇보다 더 작다는 것이 그것의 본질적인 속성인가 라는 질문에는 학생은 부정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수 자체만을 바라본다면 -1은 -2보다 크지만, 1은 2보다 크지 않습니다. 우리가 2가 1보다 크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절댓값으로 바라보았을 경우에나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학생이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학생에게 1과 -1은 다르지않고, -2는 2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수학에서 수를 바라보고 계산을 해나갈때 1은 어떠한 개수나 양, 질량, 또는 확률 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학생은 음수를 보지않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관점의 차이는 수의 본질은 무엇인가에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를 수많은 분류법을 통해서 구분합니다. 저 그리스 때부터 내려왔던 이러한 수의 분류는, 오히려 본질에 대한 혼선을 주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떠올려봐도 자신이 아닌 약수의 합으로 구분하는 척도인 완전수와 과잉/부족수가 떠오릅니다. 6같은 경우 그것의 약수가 1, 2, 3 이기 때문에 그것의 합은 6으로, 우리는 6을 완전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6이라는 숫자가 지니는 본질인가요? 모든 수를 자신으로 나눌 수 있는 속성, 그것은 1이 지니는 본질인가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상징을 부여하는 수비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4라는 속성에 죽음이나 불길함이 깃들어 있는 것이고, 7이나 13에 행운이 깃들어 있으며, 2는 이원성과 대립/차이를, 3은 기독교에서의 삼위일체나 자신까지 수를 더하거나 곱해서 6이라는 결과가 나오기에 완전한 수다 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의 본질에 속하는 것인가요? 피타고라스 학파는 세상의 본질, 그리고 모든 것은 수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숫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본질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의 관점이 오히려 우리가 숫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머리 여가수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반복적으로 그리고 다른 요소를 첨가시키면서 등장하는 것은 대립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장 대머리 여가수가, 그리고 외젠 이오네스크가 표방하는 것 자체가 연극에 반대되는 반-연극이기에, 무언가에 대립되어 있다는 것은 계속 머리에 멤돕니다. 저는 수업에는 학생과 교수 사이에 극 내내 미묘하게 등장하는 긴장관계에서 대립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학생과 교수는 일단 그 신분만으로도 대립관계를 지닙니다. 한쪽은 가르치는 존재, 한쪽은 배우는 존재. 한쪽은 산술의 기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존재, 한쪽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 남성과 여성.... 교수와 학생은 극도로 대립되는 존재입니다. 일반적으로 수업이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는 관계로서의 장이라면, <수업>에서의 교육은 그것이 성립되지 않은 소통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후에 더 기술하겠지만, 이들 사이에서 등장하는 언어적 관계성이 무너져 버렸기에, 교수는 덧셈과 뺄셈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학생은 그것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립되지 않음, 이것은 이오네스크의 극들에서 언어와 함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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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저기요. 이런 원리를, 이런 산술의 기본을 확실히 이해 못하면, 이공대학 학생 노릇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공대학에서 강좌를 맡는 건 말도 안 되고..... 고등 유치원에서도 안 되죠. 물론 쉽지 않은 건 압니다. 대단히, 대단히 추상적이고..... 그럼요.....하지만 이런 기본 요소를 이해 못해서야 암산을 어찌 합니까? 일반 기술자들한테도 암산은 기본인데. 예를 들어 37억 5599만 8251 곱하기 51억 6230만 3508이 몇인가 하는......
학생 (재빨리) 1939경 2조 8442억 1916만 4508입니다
교수 (놀라서) 아니. 틀렸어요. 1939경 2조 8442억 1916만 4509에요
학생 아뇨..... 508이에요
교수 (점점 더 놀라며, 암산한다.) 그래요..... 그렇군요..... 맞았어요.....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빨리 말한다.) 경..... 조..... 억.....(명확하게) 1916만 4508..... (아연해서) 아니. 그걸 어떻게 알죠? 산술적 추론의 기본도 모르면서?
학생 간단하죠, 뭐. 전 논리를 믿을 수 없어서 모든 곱셈의 답을 다 외워버렸어요
교수 대단하군요..... 하지만 솔직히 전 인정 못합니다. 축하도 못 드리고요. 수학은, 특히 산술은 이해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방금 그 곱셈의 답도 귀납적이며 동시에 연역적인 수학적 추론을 통해 구해야 했던 겁니다. 다른 답들도 그렇고요. 기억이란 어떤 면에선 유용하지만, 수학에서는 철저한 적입니다. 수학적으로 해롭다는 말씀입니다..... 그래 인정을 못하는 거죠..... 그럼요.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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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들이 뺄셈이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이후 곱셈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덧샘과 뺄셈에서 드러난 이들의 수학이라는 학문에 있어 본질에 대한 차이점을 조명하기 무섭게, 뒤이어 수학적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이 둘은 또다시 차이를 보입니다. 교수는 수학에서 또는 산수에 있어서 그것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 귀납적이며 동시에 연역적인 수학적 추론을 사용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귀납이란 개별적인 사실들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통해 하나의 법칙을 만들어내는 방법이고, 연역이란 이미 알려져 있는 지식에 근거해 추가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수학은 실로 이 두가지 방법을 동시에 사용하여 증명을 향해나갑니다. 그러나 학생은 교수가 지닌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학생은 오히려 수학에서 사용되는 논리를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며 모든 곱셈의 답을 전부 외워버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문제는 비단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끝나는 문제는 아닙니다. 수학에 있어서 귀납/연역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방식과 그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자동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 이는 수학 증명에서 법칙을 만드는 것과 컴퓨터를 활용해 값을 도출해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수학을 생각하면 수식을 떠올립니다. 당장 생각해봐도 유명한 수식들이 즐비한 만큼, 수학에서 수식이란 골자처럼 보입니다. 이런 생각에 기초해서 수학계에서 어떠한 증명을 발표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그것을 수식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때로는 수식의 방향이 아니라 그저 컴퓨터에 이 문제의 조건을 넣고 돌려봤더니 이런 답이 나왔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참/거짓 이다. 라고 발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어서, 유명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4색 정리가 이 상황에 딱 들어맞을거 같습니다. 인접한 나라에 색을 칠할때 인접한 나라가 겹치지 않고 색을 칠하려면 최소 몇가지 색이 필요한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수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수식을 만들고 폐기하는 과정을 통해서 답을 구하려 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하는 수학자들은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에 다 대입을 해서 답을 구했습니다. 당연히 수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방식을 거부합니다. 우리가 수학에서 수식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유가, 어떤 분야에서 새로운 수식이나 정리가 등장한다면, 다른 분야에서 그것을 사용할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데, 이들처럼 이렇게 계산을 해서 답을 내놓는다면, 그냥 거기서 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냥 이들에 비판을 가할수도 없는게, 아직까지도 4색 문제는 이렇게 컴퓨터를 돌려서 구하는 방법으로 밖에 증명할 수 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기도 하고, 어떤 문제에 대해 그것이 참/거짓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것은 또 아닙니다. 또한, 수식으로만 답을 구하겠다! 라고 이야기하는 수학자들의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컴퓨터의 발전이 나날이 증대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컴퓨터를 배제하고 수학을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교수와 학생으로 돌아와서, 이처럼 이들이 사용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미시적으로 문제를 바라보았을때이고, 거시적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할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영역에서도 이 둘을 합치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학생이 말한대로, 우리가 수학에서 사용하는 논리를 믿을 수 없기에 곱셈 결과를 모두 외워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학생이 곱셈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실제 수학에서 컴퓨터를 사용한 공식이 없는 산수로서의 증명과 공식을 만들어내서 일반화를 시도라는 증명이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에 대해서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수와 학생사이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 거리감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에게 여전히 머물러 있습니다. 여전히 개별적인 사례에 대해서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는 이유는 증명 책임이라는 개념에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증명 책임이란, 우리가 어떠한 것에 대한 엄밀한 증거를 요구할때, 그러니깐 증명을 필요로 할때 증명을 해야하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학생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네 수학에서의 논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2x2라는 수식이 1이 아닌 이유, 2가 아닌 이유, 3이 아닌 이유, 5가 아닌 이유.... 를 보여라라는 것입니다. 학생은 우리가 논리에 따른 수식의 답 4를 거부합니다. 학생을 그저 그것을 2x2=4라는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봅니다. 즉, 1x4와 2x2사이의 차이를 학생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학생이 외웠다는 모든 곱셈을 넘어서는 새로운 수를 사용한 수식이 등장한다면 학생은 답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야 곱셈이라는 논리를 통해서 새로운 수가 우리에게 제시되었다고 해도 쉽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마치 신의 존재 논쟁에서 유신론자들이 무신론자들에게 신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대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학생과 우리 사이에는 증명 책임으로 시작되는 거대한 거리감이 있습니다. 그 거리감은 사용하는 언어에까지 멀어지고, 이들과 우리는 아마 영영 가까워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대립되는, 서로를 양분하는 요소가 등장하면 그것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몸부림, 즉 변증법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오네스크는 그런 변증법의 시도를 철저하고 파괴와 폭력으로 대항하며 이들이 결코 평화롭게 새로운 것을 지향하지 못하게 막아섭니다. 교수는 자신의 안티테제로서 대항하려고 시도하는 학생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학생을 결국 살해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이 지점에서 수학과 언어학은 연결됩니다.
수학은 언어학이 되고, 언어학은 범죄의 지름길이라고요.....
라고 하녀는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있어 이들은 폭력이라는 하나의 행위로서 합치됩니다. 다만 변증법처럼 이들을 넘어서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이 지닌 근원적인 속성으로서의 폭력이라고 이야기하죠. 수학은, 하나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교수는 학생에게 그 수학이라는 언어를 또다른 언어로 번역해서 전달해주려고 하기에 그녀와의 소통의 실패를 마주합니다. 전달을 성공하려는 욕망과 이에 딸려오는 필연적인 실패, 그 괴리는 폭력으로 재탄생합니다.
언어의 부조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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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언어학과 비교 언어학의 요소들을...
하녀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교수 정말 왜 이래요?
하녀 정말 언어학은 안 돼요. 언어학은 재앙의 지름길이에요.....
학생 (놀라서) 재앙이요? (미소 지으며, 약간 멍청하게) 정말 큰일이군요
교수 (하녀에게) 정말 너무하네. 나가요
하녀 네, 알았어요. 하지만 나중에 딴만 마세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언어학은 재앙의 지름길이라고요
교수 난 어른이에요
학생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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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글로 옮기면 얼마나 황당스러운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번 문단은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때론 너무나 당연시 되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것을 황당하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오히려 이상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오네스크는 그런 너무나 당연시 되는것, 언어에 대해서 의문을 던집니다. 대머리 여가수에 수록되어 있는 두번째 희곡인 수업에서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교수가 학생을 지도하면서 결국 언어학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가는데,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기가 어느 나라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더구나 제 각기 다른 언어로 착각을 한 상황에서, 서로 상대방의 말을 이해한다는 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언어라는 것, 그리고 그 언어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인 언어학은 그렇기에 재앙의 지름길로 이어집니다. 애초에 언어라는 것이, 그리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언어에 대한 사고방식 자체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으로 언어를 통해서 소통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저는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즐겨쓰는 하나의 모티프가 있습니다.아마 어떤 논문에서 읽었을텐데 안타깝게도 기억나지는 않지만, 언어의 연구에 대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의 언어가 소통 가능한 것이냐에 대한 것이 주된 내용인데, 한 상황을 제시합니다. 물론 아마 다른 부분이 많긴 할겁니다. 한 언어학자가 이전까지 접촉한적 없는 한 부족과 접촉한 상황을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같은 대상을 가리키며 이해라는 것을 시도합니다. 언어학자가 토끼를 가리키자 원주민은 A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언어학자는 A를 토끼로 치환해서 이해했고, 이후 그들의 언어가 활발히 번역되면서 A는 토끼를 의미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원주민들은 시간이 흘러 자신들의 언어를 서서히 까먹었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A라는 단어가 토끼다 라는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인가요? 그 논문에서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토끼로서 가리킨 것과 A를 토끼로 번역한 것은 애초애 그 언어를 번역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한 것이라고. 원주민이 토끼를 가리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토끼가 아니라 ’검은 토끼‘, ‘어린 토끼’, ‘토끼의 긴 귀’ 등을 지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토끼라는 하나의 지시체로 A를 이해한 것이라면, 우리의 번역은 전적으로 옳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에서 확장되어, 우리가 서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과연 의미가 올바르게 전달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됩니다.
그리고 이오네스크는 이곳에서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이성적인 것이라고 믿고 하나의 문화-사회적인 합의로 간주해서 그것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이냐고. 그에게 있어서 언어생활 그 자체는 비논리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언어를 사용하면서 이해하는 척하고 있다는 어떤 하나의 극 생활입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언어를 내뱉으며, 상대방의 언어를 들음으로써 그 언어를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우리가 그 착각을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그 알지못함 이라는 무지로 인해 우리는 어느샌가 극의 배우가 되어있습니다. 이오네스크는 그것을 포착했기에 우리의 삶은 하나의 전체적인 극으로서 파악했습니다. 그렇기에 극은 기본적으로 메타 극입니다. 현실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극이기 때문에 그것을 묘사하는 극은 메타 극인 것이죠. 그렇다면 부조리극은? 메타 극이라고 불리는 극 속에서 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그것은 도리어 현실로 바뀌어 보일수도 있으며 메타 극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극, 즉 메타 메타 극일수도 있습니다.
언어를 무너뜨려랴! 이오네스크는 언어에 대한 공격을 극단적인 과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불을 불태우는 시에 대한 것이나 옥수수밭, 깡총거림, 이 모두가 과장성을 보여줌으로서 언어의 허위를 까발려낸 것입니다. 이것이 극대화되는 지점이 스미스 부부가 바비 와트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그저 그들은 바비 와트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 가계도를 그려본다면 이렇게 나타납니다. 스미스 부부는 바비 와트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기에 그들은 어느 바비 와트슨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들마저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바비 와트슨은 죽고, 그들의 아들 딸인 바비 와트슨은 또다른 백부와 백모인 바비 와트슨에게 맡겨질 예정이고, 백부인 바비 와트슨의 아버지인 바비 와트슨이 낳은 또다른 백부인 바비 와트슨과 결혼한 바비 와트슨 사이에서 낳은 아이인 바비 와트슨은 죽은 바비 와트슨과 결혼할 수 있어서, 과부인 바비 와트슨은 혼자 살아도 되지 않습니다. 바비 와트슨에서 이야기 된 내용이 제가 간략하게 추려서 써놓은 것입니다. 단번에 이해가 가시나요? 총 10명의 바비 와트슨이 등장하고 이들은 때로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탓에 우리를 헷갈리게 민듭니다.이렇듯이 가계도와 같은 방식으로 정리해놓아도 직관적으로 온전하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언어가 지니는 약점입니다. 결과적으로 언어란 그저 소음에 불과한 그것일 수도 있습니다. 언어는 마치 슈티르너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고정관념의 군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음을 우리는 하나의 체계이자 무기로서 사용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나와 같은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받아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언어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만약 언어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체계는 온힘을 다해서 그 사람을 공격합니다. 교수는 언어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언어에 공명한 사람입니다. 이에 반해 학생은 언어를 받아들일 힘이 없기에 교수와의 수업에서 지속적으로 이가 아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학생을 교수는 언어, 무기가 되어 찔러 죽이게 됩니다. 수용하지 못하는 학생은 죽음을 맞이하고 또다시 새로운 학생이 들어오고, 언어를 강요하는 그러한 분위기는 또다시 반복됩니다. 언어를 받아들이는 학생은 교수가 될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끊이지 않는 교정과 살육의 반복은 이오네스크가 이야기하는 잘못된 원으로서 순환논증으로 이어집니다.
대머리 여가수
어째서 이 극의 제목이 대머리 여가수인 것일 까요? 대머리 여가수, 이는 이오네스크의 언어에 대한 관념을 극도로 압축해서 표현한 단어의 집합입니다. 머리카락의 유무는 가수로서의 생활에서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머리카락이 많아서 노래를 잘부르거나 못부르는 것이 아니고 머리카락이 없어서 그런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수식언으로서의 대머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가수라는 말을 들을때 여러가지 이미지를 생각할수 있습니다. 단순히 가수로서의 여가수의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이미지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대머리라는 말을 듣기 이전까지, 우리는 여가수라는 한 사람을 머리가 긴 가수, 머리가 짧은 가수, 머리가 검은 가수, 머리가 빨간 가수 등등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머리라는 수식언은 이런 이미지들의 파괴를 이끌어냅니다. 대머리는 여가수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수식언은 그러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머리는 다른 수식언과는 다른 이유는, 우선 그것이 생물학적인 이유에 있어서든 다른 이유에 있어 대머리 여성이 많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키가 작은 여가수라고 한다면 우리는 여가수의 키가 크거나 작거나 상상한 이미지를 잃어버릴 것이고, 음치 여가수라고 한다면 우리는 노래를 잘부르는 이미지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대머리가 수식할 때보다 많지도 않고 우리에게 있어서 그렇게까지 이질적인 존재로서 보이지 않습니다. 키가 작거나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여가수는 꽤나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머리를 제시했기 때문에 여가수에게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생성하려고 해도 그것을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대머리 여가수란 수식적으로 전혀 오류가 없는 단어를 제시함으로서 책을 읽기 전부터 어떠한 불편함을 느끼게 합니다. 어디서 기인한지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이런 불편함은 우리가 대머리 여가수를 끝까지 읽어나갈때 다시금 상승하게 됩니다. 대머리 여가수는 극에서 말로만 한번 언급될 뿐이지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머리 여가수가 이오네스크의 언어와 연결되는 지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대머리 여가수가 우리에게 보편적인 인간상이 아니기 때문에, 대머리 여가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상,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질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나아가서 일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의 차이는 무엇인지 생각하는것, 그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지 않나요? 그는 일상적인 언어로 소통하고 사용하는 것에 의문을 던지기에, 대머리 여가수를 우리 앞에 들이밀면서 자신이 한 생각을 한번 해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머리 여가수는 일상성에서 벗어난 존재에 대한 탐구입니다. 우리와 극도로 밀접하며 동시에 우리로부터 극도로 떨어져 서로가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있는, 가까이 있지도 멀리 있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존재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하게 되는 계기로서 그것은 작용합니다. 대머리 여가수는 언어로 변모합니다. 언어로 표현하였고 언어로 그것을 구성하고 묘사하였지만 대머리 여가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어떤 말을 하는지 우리는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함에도 상대가 아마 이런 의도로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으로 사용되는 그것. 그런게 어디있어 말하면서도 아예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그것. 대머리 여가수가 애용하는 미용실은 어디인가요?
여가수의 수식언이 대머리이기 때문에 그녀의 머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는 곧 부조리함으로 직결됩니다. 아무런 설명없이 우리의 상상을 강제하는 그것, 그 언어의 작용으로 인해서 우리는 한계지점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부조리 철학이나 실존주의 철학에서의 세계란 우리가 어찌할수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에 내던저진 존재로 세계는 내가 존재함과 동시에 탄생한 하나의 유아적인 것이 아니라 나 이전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세계에 다가간 것처럼, 나는 여가수의 상징에 다가갑니다. 그리고 나는 그 상징을 파괴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것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내리던지 말던지 상징은 그저 존재합니다. 대머리 여가수는 나에게 부조리한 것입니다. 나는 그것에서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옳지 않음을 통해서 불편을 느끼고, 내가 여가수에 대해서 펼치는 이미지의 상상을 적나라 하게 마주합니다. 그녀의 상징 그 자체인 부조리함이 끊이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대머리는 대머리로 남아있을 것이고, 그것을 읽는 객체는 그것을 끊임없이 바라만 보고 있을 것입니다. 대머리 여가수는 일반성에 대한 배격과 동시에 그것으로 부터의 탈피가 보편화된 세계의 상징입니다. 이런 부조리함의 인식에서 이 극의 두번째 요소인 잘못된 순환논증이 등장합니다. 이에 따르면 반복됨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등장하는 순환논증으로 인해서 그러한 반복됨은 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세가지 극 중에서 의자를 제외한 나머지 극들은 직접적으로 순환성을 들어내고 있고 의자 또한 면밀히 살펴본다면 순환성을 보이고 있음을 보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받아들이지만 그러한 순환적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언어의 무의에 대해 지적하는 이 극같은 경우에도 동일한 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언어의 한계와 소통 불가능성을 계속해서 지적하지만 그 지적마저도 비판하고자하는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점, 이오네스크가 주장하는 모든 내용은 도리에 그 자신의 주장에 대응하여 자신이 자신을 비판하는, 그런 잘못된 순환이 이루어지게됩니다. 반복됨이라는 순환논증은 잘못된 원이라는 것, 이것은 이 극들 자체는 끊임없이 잘못되었지만 반복될 수 밖에 없다는 절대적인 명령아래서 기대고 있는 빠져나가지 못하는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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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 (계속 신문을 읽으며)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왜 꼭 신문엔 죽은 사람 나이만 나오는지, 새로 태어난 사람 나이는 안 나오고. 말이 안 되죠.
소방대장 어쩃든 시작해 보겠습니다만, 귀를 안 기울인다고 약속해 주세요.
마틴 부인 귀를 안 기울이면 얘길 못 듣잖아요
소방대장 다른 얘기 할게요. <수탉>. 옛날에 어떤 수탉이 개처럼 보이고 싶었대요. 하지만 금방들 알아봐서 실패했대요.
스미스 부인 집에 시계가 없어서. 소방대장 : 저 시곈요?
스미스 엉터리예요. 반항아처럼, 꼭 실제 시간의 정반대만 가리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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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들의 몇몇대화들을 가져와 봤습니다. 어떤가요? 우리가 일상에서 전혀하지 않을 말들을 그저 나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대화들을 들고 왔지만 극의 대부분은 이런 무의미해보이는 대화들이 주를 이루며 이들은 전혀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극이 끝나더라도 이들의 대화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대머리 여가수의 마지막은 스미스 부부에 이어 등장한 마틴 부부의 마지막 말 때문에 그렇습니다. 극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대사가 중단되고 조명이 밝아지며 마틴 부부는 처음, 스미스 부부가 앉아있던 방식으로 앉아 처음, 스미스 부부가 했던 이야기를 또다시 하고 막이 내립니다. 이오네스크는 언어의 허위를 들어내기 위해서 이상해보이는 문장들을 배우가 내뱉게 합니다. 그리고 인물들은 이를 통해서 정상적으로 소통합니다. 마틴 부부가 스미스 부부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이런 언어의 이상한 소통은 끝나지 않습니다. 다르게 보였던 인물들은 하나로 보이고, 언어는 끊이지 않습니다.
이런 결말로 인해서 의문이 남습니다. 이때까지 다른 인물로 여겨졌었던 스미스 부부와 마틴 부부는 왜인지 하나로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애초에 다른 사람이었던 걸까요? 프로이트가 행한 예술 분석의 개념 중에서 더블, 혹은 분신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 개념은 자아의 분할과 복제, 즉 서로 같지만 다르기도 하고 분리불가능한 어떠한 동일시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익숙한 것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바뀌는 과정 또한 이 개념에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프로이트의 더블이라는 개념으로 우리는 언어의 또다른 한계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낯섦이라는 감정은 상징 체계를 지니고 있는 어느 대상이 그가 지닐수 있는 모든 의미와 기능이 갖춰진 상태로 드러날때 가능하다고 파악했습니다. 그렇게도 허위적이라고 했던 언어에 이 정의가 들어맞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언어라는 대상물이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스미스 부부와 마틴 부부도 대화를 나눌때 있어서 온전한 소통에 성공했습니다. (그것이 성공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로서 스미스 부부와 마틴 부부는 결말에 이르러 반복되는 양상을 보이며 마치 분신처럼 행동합니다.
언어의 사용은 자아의 희석입니다. 언어를 사용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어느 부분을 잃어버립니다. 프로이트는 자아가 섞이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이 과정을 저는 대머리 여가수에서는 언어로 이해한 것이죠. 언어란, 개별적인 인간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것입니다. 언어는 내가 정한 법칙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 타자가 지정한 법을 따라서 행동하고 우리는 그것을 따릅니다. 온전한 자아의 것이라는 것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우린 단호하게 타자의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그 중 하나죠. 이미 나의 것이 아닌 타자의 것으로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아를 소실하게되는 것입니다. 언어는 인간적이다. 의미는 인간적이다. 진정으로 자아적인 것은 무엇인가요? 나에게 관계되어 있고, 나의 소모를 막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제는 인간의 것에서 넘어서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부조리 극은 자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개념과 범주가 지니는 한계, 그 한계설정으로서의 인간 개념들에 대한 지적과 문제제기,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자아.
교수는 학생을 살해하고 또 다른 학생을 받습니다. 교수란, 언어란 악의 상징입니다. 인간의 생과 운명의 비극성, 부조리한 상황. 무한하고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있는 순환논증, 그것은 우로보로스의 형상입니다. 세계는 이어지고 인간은 소모됩니다.
언어의 파괴와 불이해는 여전히 우리 주변을 떠다니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불가해함이 너무나 거대하기애 우리는 그것을 오롯이 바라보지 못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척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오네스크가 평생을 고민해오고 생각했던 언어의 도달불가능한 목표, 그가 지시한 언어의 한계는 수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듯합니다. 대머리 여가수는 우리에게 단지 언어는 인간에서 있서 상호불이해적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가 진정으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일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그것들이 옳다고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져보라는 것 아닐까요?
이렇게 해서 오늘의 책인 대머리 여가수를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네요. 제 이전 리뷰들을 보다가 최근의 것들을 보면서, 점점 크게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이게 내가 리뷰라고 부르는 이유가 확실하구나 하고. 사실 제가 서평을 쓸때는 수대연에 올리는 리뷰글이랑 어어엄청 다르게 씁니다. 제가 생각하는 서평은 조금 더 그것을 읽는 사람들을 고려해서 쓰고, 분량도 미친듯이 길지 않고, 하나의 주제를 잡고 그것과 작품을 결부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가 최근에 쓴 리뷰들을 보자면 그냥 저 혼자서 차력쏘하는 거 같이 보이네요. 가끔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길게 쓸때도 있기는 하지만 여러가지 산발적인 주제들을 가지고 우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라고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제가 쓰는 글이 논문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해야하나요? 일반적으로 생각했을때 느껴지는 인문학 도서가 그런것처럼, 여러가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보니까 작품 그 자체의 깊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거 같다고 생각이 드네요. 당장 4 3 2 1 같은 경우에도 폴 오스터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러 메타포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바로 유기해버리고, 때로는 아 이점은 직접 읽어보시면서 얻어가시길 바랍니다 라는 방패를 하나 들고 엉성하게 끝내버리기 합니다. 이게 참 고민이네요. 아마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카프카의 글'이라는 주제로 하나의 책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징에 대해 글을 쓰는게 맞는 걸까요? 지금은 그냥 여러가지 주제를 툭툭 건들어보면서 글쓰기 연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네요. 이글에서 각주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처럼, 지금 생각해보니 제 글들은 모두 어떤 책에 대한 각주가 아닐까 하고 팍 떠올랐습니다. 그게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고착화되고 있다는게 문제같네요. 4 3 2 1처럼 완전 뒤집어서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쓴 경우도 있지만, 앞으로는 형식 자체를 바꿔서 글을 쓰는걸 시도해봐야겠네요.
그래서 이번에는 두개로 쪼개봤습니다. 점점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되는군요. 아아 아니면 책책책을 그냥 완전 박정균의 놀이터로 앞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영역표시마냥 그래야겠네요.
마지막으로 부조리라는 이제는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이 되어버린 장르에 있어서 미래란 어떤 것일까요? 현실의 허위만을 다루는 것일까요? 인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비인간적인 것을 다루는, 동물이나 식물을 다루는 것일 까요? 이들은 이미 카프카나 다른 작가들을 통해 이미 시도된 것들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다루는 것일 까요? 그러나 이는 이미 로렌스 스턴과 월리엄 포그너에 의해서 시도되었습니다.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편견이라고 생각하고 깨부서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인간이라는 한계에 직면하고 성장하기 위한 발판은 어디에 있나요?
첫댓글 정균님은 자신에게 어떤 상징과 수식언을 붙이고 싶나요?
헉 그럼 숱많은 스님도 대머리 여가수와 동일 선상일까요??
무튼 수학을 못했던 저로서 논리를 믿을 수 없으니 답을 외웠다는 저 말을 채택하고 싶네요!! 왜 답 외울 생각을 안했지...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머리여가수시리즈 잼있네요!!
저는 그 수식언은 비워두고 싶네요! 대머리 여가수라는 단어 자체가 여가수 스스로가 지은것이 아니라 이오네스크가 지은 것처럼, 그것은 타인에 의해 기인한다고 생각해서요
숱많은 스님이라 글을 쓰면서 생각해본적이 없네요. 아마 스님의 의미에 따라서 달라질거 같네요. 단순히 불교를 믿는 불교신자라는 입장에서는 대머리 여가수와는 다르게 굳이 부조리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로서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고, 절에 들어가 도를 닦는 사람으로 본다면 충분히 부조리로 비춰질수 있겠네요.
다만 이미지적인 측면에서는 스님이라는 것이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가 스님을 생각할때 특정하기 생각할수 있는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쉬워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반하여 여가수 같은 경우에는 특정한 복장이나 스타일에 구애되는 것이 아니기에 기이한 현실성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과 언어로 이어지는데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