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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 ⑮ :
(구원파 “이단 옹호자”) 정이철 목사 ‘저절로 성화론’은 ‘다른 복음(잡탕 신학)’이 아닌가? ⑤
사계四季 (2018.02.24 09:40)
정이철 <박영돈 교수처럼 성화를 강조해 나오는 것이 성화일까?>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35
정이철 <율법, 십자가, 성령은 하나의 목적 같은 방향으로 역사한다.>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65
다음은 제 <‘나너셋 님 횡설수설’을 비평함 ①>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건너 뛴 ‘주님의 부활’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와 ‘주님의 부활’은 분리될 수도 없고 분리해서도 안 됩니다. 즉, ‘주님의 십자가(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를 건너 뛰어 ‘주님의 부활(살아계시는 주님)’만을 강조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바꿔 말하면, 사도행전에서 증거하는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주님의 부활’은 분리될 수도 없고 분리해서도 안 되듯 ‘사도행전’과 ‘서신서’는 분리될 수도 없고 분리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죽으심’과 ‘주님의 부활’을 분리하는 김성로 목사는 “이런 고민 가운데 내 목회에서 가장 충격적인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신앙이 사도행전을 건너뛰고 서신서로 넘어갔다는 것이다.”며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분리하는군요. 이 점에서 나너셋 님에게 질문합니다.
로마서와 고린도후서는 서신서입니까,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구별할 수는 있으나 분리할 수 없습니다. 분리해 십자가를 강조하면 서울 서머나교회 故 김성수 목사 같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분리해 부활을 강조하면 춘천 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 같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구원에서 믿음(회심)으로 얻는 칭의, 이신칭의와 성화(행함)는 구별할 수는 있으나 분리할 수 없습니다. 분리해 믿음을 강조하면 반법주의 이단 값싼 복음이 태어나고, 행함을 강조하면 율법주의 이단이 태어납니다.
그러함에도 정이철 목사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고 반법주의 이단 구원파 값싼 복음을 비평하신 박영돈 교수님 글’을 두고 <박영돈 교수처럼 성화를 강조해 나오는 것이 성화일까?>에서 “복음의 원리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이단 구원파 값싼 복음’을 옹호했습니다. 또한 구원파 이단 옹호자 정이철 목사는 구원의 확신 문제에서 개혁 교회 교리에 반反하는 주장을 했습니다. 개혁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들어 ‘하나님을 아는 영적 감각에 따른 믿음(구원)의 확신’ 뿐만 아니라 ‘우상이 아닌 참된 하나님을 아는 영적 감각이 생긴 중생자가 값없는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선행(행함)을 성령을 좇아 힘써 행하는 데서 맺는 열매, 성화의 열매를 가지고 믿음(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 역시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이단 옹호자 정이철 목사는 구원(믿음)의 확신 문제와 얽힌 박영선 목사님 강설을 인용해 ≪박영선 목사가 말한 것, “하나님을 알아보는 영적 감각” 이상의 그 무엇으로 구원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결국 어디까지 가게 될까? 삶과 행동에서 얼마나 성화가 일어나는가를 가지고 구원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회개, 선행이 구원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중생)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성화와 영화)이다.” 하신 주님 말씀(요 10:10 하)을 받든 개혁 교회는 ‘성령의 내주와 함께 중생한 중생자, 성령으로 하나님을 “천부天父”로 고백하는 중생자’에게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성령 받기를 기도하라. 우리 안에 내주해 질투하시는 성령을 사모하며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위해 기도하라.’1)고 가르칩니다. 그러함에도 ‘제가 <정이철 목사 저절로 성화론은 다른 복음이 아닌가? ①>에서 밝힌 대로 반법주의 이단들 주장을 담은 글’, <율법, 십자가, 성령은 하나의 목적 같은 방향으로 역사한다.>에서 정이철 목사는 ‘성령의 권능을 1세기 초대 교회 때까지만 제한해 오늘날 교회 성경에서는 삭제한 은사 중지론’에 맞춰 “너희 천부天父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약속하신 주님 말씀(눅 11:13 하)을 성경에서 삭제하는 이단 괴수 짓거리, 마귀 짓거리를 했습니다. ㅠㅠ. ≪바울은 성령 운동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하지 않았습니다.≫고 주장2)한 것입니다.
1875년에 영국에서 시작된 케직 사경회는 성결(성화)의 수단으로 ‘날마다 하나님 말씀 읽기, 예배 참석, 기도’를 강조했습니다. ㅡ물론, 이 강조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귀한 강조입니다.ㅡ 그런데 ‘중생에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100% 능동이시고 사람은 100% 수동이다.’고 가르치는 개혁 교회는 ‘성화에서도 성령 하나님께서 100% 능동이시다. 즉, 성령만이 성화의 근원이시다. 그런데 중생자 책임이 따르는 성화는 사람(중생자)에게도 100% 능동의 면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중생자를 아바타로 대우하지 않으시는 성 삼위 성령 하나님, 성령의 유기적인 역사(organic operation)를 가르치는 이 가르침3)은 지난 22일에 제가 {개혁주의 마을}에 올린 故 김홍전 목사님 강설, [‘성신 충만’과 ‘성신의 역사를 판별하는 기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이 가르침은
‘성화를 오직 성령 하나님 100% 능동의 역사로만 보며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싸우시게 해라. 그러려면 성령께 너를 완전히 맡겨라. 성령께서 네 안에서 마음대로 활동하시도록 너는 가만히 있어라. 그러면 너를 죽여 네 죄성을 치료하시는 성령으로 성화는 자연스럽게(자동으로) 이뤄진다.”는 주장은 미국 오순절 운동을 일으킨 일에 큰 영향을 준 영국 케직 사경회, 케직 운동가들 극단의 주장임’4)을 밝힌, 에드윈 파머 {감동적인 성령론}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정이철 목사 “온전한 말씀 선포와 정상적인 예배와 기도가 있으면 성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빌어도(가만히 있으라고 빌어도) 저절로 반드시 성화”론은 ㅡ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은 성화론 같지만ㅡ 이와같이 정이철 목사 자신이 이단으로 경멸하는 오순절 운동, ‘구원(성화)에서 이차 축복을 강조한 미국 오순절주의 성화론’에 닿아있는 성화론이기도 한 것입니다. 참고로, 정이철 목사 이런 듣보잡 신학을 두고 저는 “짬뽕 신학, 잡탕 신학”이라고도 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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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을 맺기 전에 이 한 가지는 강조하고자 한다. 곧 성경이 애매하지 않고 밝히 주장하는 것은 신앙과 성결은 성령의 충만한 내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 충만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것을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유혹에 넘어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충만하게 소유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가서 그분을 구하면 그분께서는 우리 생명 안에 더 충만히 들어오실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것(성결)을 하도록 능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것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잘못이다. 우리 탓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죄를 내버리자. 성령을 사모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구하자.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령의 충만한 내주를 받을 것으로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1장 11절~13절에서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누가복음 11장 9절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 받기를 기도하라. 그분을 더욱 풍성히 받을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죄에서 구원하신 그대의 구주시라면 이 영원한 성령 내주內住의 충만充滿을 아는 것보다 더 높은 목표는 없으리라.≫ 에드윈 팔머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 최낙재 역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개정판 1쇄 2006) 315쪽~316쪽.
2) 오순절 운동이 태어난 배경 같은 교회사를 간식으로 씹어 먹은 정이철 목사 이 주장을 읽고 생각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2011년 2월, {뉴스앤조이}에서 톰 라이트를 내세우며 ‘이 땅 위 예수님 신성’을 부정한 이단, ‘파발 <바보를 위한 엘레지>’에서 평신도 파발 님께 “교회사는 간식으로 씹어 먹었는가?”라는 독설을 들어야만 했던 ‘바보 박창진 씨’였습니다. 이때 제가 ‘new 2007’이라는 별명으로 박창진 씨를 대항에 이지끼을 님과 함께 싸우면서,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이단이다.” 했다는 박창진 씨에게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까”? 반론했음에도, 바보 박창진 씨는 줄기차게 “예수님이 신인이셨다면 사도들이 성경에 신인이라는 말을 썼을 것인데, 성경에는 신인이라는 말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원파 이단 옹호자 정이철 목사가 ‘2010년 5월 {뉴스앤조이}에서 <구원파가 이단이라면>이라는 글로 구원파를 옹호했던 이단 옹호자 바보 박창진 씨’처럼 ≪바울 사도가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기도했다는 게 성경에 적혀 있느냐?≫ 듣보잡 바보 반론을 할까, 걱정됩니다.
임진년 2012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였습니다. 불나비 바보새 노승수 목사님은 저에게 “짬뽕 신학의 대가大家 피터 마스터스 목사와 똑같이 노수승 목사님 신학 역시 짬뽕 신학이다.”는 비난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임진년 2012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 개혁 교회 ‘완전 타락, 완전 부패’ 교리를 오해해 왜곡한 글, ‘바보새 노승수 <전적 무능력과 중생>’을 제가 [이제는 내가 존경하지 않는 바보새 님에게 : ‘바보새 님 <전적 무능력과 중생>’을 비평함]으로 단칼에 날려버리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 지어주셨던 일’을 예를 드시며 강릉예명 목사님께서 전화로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비록 인터넷에서 쓰는 별명이지만, 별명이라도 이름에는 의미를 둬 지어야 하는 법이에요. 노승수 목사가 가만히 있으면 됐을 것을, 별명대로 바보새처럼 연중론 비평 토론 불길에 뛰어들어 불나비처럼 산화했어요.”라는 말씀이었습니다. ㅠㅠ.
그동안 인터넷에서 제가 쓴 별명 몇 가지는 ‘나그네, new 2007, 사계四季, 늘 푸른 솔, Tulip, 새삶, 거북선, 학익진, 청 호랑이, 봉화烽火, 풀핏, 틴델’이었습니다. 라마드 목사님께서 제 별명들을 두고 “별명을 참 잘 지으세요.”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new 2007’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태어났던 1907년, 그해 1월부터 평양에서 활활 타오른 성령의 불길로 오순절 성령 강림 때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돌이키는 우리나라 초대 교회 대大 부흥 운동, 성령께서 1907년 평양 회개 운동을 이 땅에 다시 일으키셔서 한국 교회가 성령의 권능으로 부흥하기를 바라는 마음, 성령의 부흥 운동(예수 운동)에 따른 한국 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넘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별명이었습니다.
3) ≪오직 성령께서는 유기적有機的인 방법으로 성경이 쓰이도록 하셨다. 그것(유기적인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처럼 항용 역사하시는 방법대로 더 자연스럽게 됐다.
성경 저술에는 수동의 면과 능동의 면이 있다. 어느 의미에서는 저자는 완전히 수동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협력한 것이 아니니, 그들이 절반을 하고 하나님께서 나머지 절반을 담당하신 것도 아니요, 그들이 대부분을 행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도하신 것도 아니다.
···(중략)···
성경 저술에서 성경 저자들 수동의 면이 있지만 능동의 면도 있다. 성경을 쓴 과정을 두고 우리가 공평을 기하고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케 하신 방법을 충분히 보려면 우리가 이제 강조해야 할 점은 이것이다.
성경 저술은 어느 의미에서는 신자의 구원에 비할 수 있다. 성화聖化는 완전히 하나님의 일이요 사람은 그것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의미에서 사람은 수동적이요 성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은 능동적이시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는 사람은 매우 능동적이다. 비록 그의 믿음을 포함한 전 구원이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이고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자기 기쁜 뜻을 위해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고 함으로써 사람이 완전히 수동적인 것이 사실이나, 바로 그 선행절先行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에는 사람의 능동적인 면을 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마음이나 의지가 없는 기계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취급함으로써 사람을 중생케 하거나 성화케 하지 않으신다.
···(중략)···
성경 저자들은 100% 수동적인 동시에 100% 능동적이었다. 믿지 않는 자가 믿기를 강요당하지 않는 것과 같이 그들은 억지로 성경을 쓰도록 강제당하지 않았다.≫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 81쪽~85쪽.
4) ≪케직 지도자들은 “구원은 분투나 고통스러운 노력으로 얻어지지 않으며 진지한 결의나 극기로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만일 죄를 이기려고 무엇을 한다면 죄가 그를 이길 것이다.’는 뜻이다. 또한 그들은 “사람은 단지 하나님께서 자기 인격을 붙잡으시도록 기회를 드리기만 하면 된다. 성령께서는 그 사람 인격을 자유롭게 해방하는 일을 바라신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시도록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없다.’는 뜻이다.
···(중략)···
트럼불은 ‘승리의 생활 운동’을 하면서 “가만히 둬라. 하나님께서 하시도록”이라는 표어를 강조했다. 또한 “쉽지 않으면 좋지 않다.”, “무릇 내가 얻기를 노력함으로 얻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참 값진 은혜가 아니다.” 그러한 노력은 “그러한 승리를 못 거두게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못 거둔다.” 승리를 얻을 때는 “전투에 의한 승리라기보다 자유에 의할 것이며” 모든 “죄악된 충동”으로부터 “노력 없는 자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모든 것을 하시도록 그분께서 모든 것을 하시도록!”
이런 운동에서는 종종 이차 축복을 강조한다. 아무 행위 없이 믿음으로 얻은 칭의稱義에 그리스도를 받는 것처럼 성화 시에 그가 칭의를 받은 믿음과 구별되는 별개의 믿음 행위로 재차 그리스도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감동적인 성경적인 성령론} 152쪽~154쪽.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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