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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드리드에서 살라망카로
살라망카는 마드리드에서 서북방향으로 240km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이다. 밝고 청명한 날씨가 여행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차창을 통하여 전개되는 주변경계를 감상하며 달리도 있는데 멀리에 거대한 십자가 모습이 보였다. 프랑코의 무덤이라 했다. 스페인 내란이 끝난 직후인 1940년 프랑코 총통은 죄수들을 동원하여 마드리드 근교의 과달라마 산맥 중턱에 성당 겸 묘역을 조성하여 <전몰자들 계곡의 십자가>라고 명명하였다. 여기에 프랑코 자신의 묘역을 만들고 내란으로 숨진 전몰자 40만 명의 유해를 함께 안치하였다.
18년간의 공사 끝에 1958년에 완성된 이 교회는 길이가 300m나 되는 거대한 동굴이다. 동굴의 길이가 바티칸 궁전의 길이 260m보다 길면 안 되므로 260m지점에 턱을 만들고 40m를 더 파고들어갔다. 마지막 끝나는 장소에 프랑코의 시신이 안장되었고, 그 바로 위 산꼭대기에 150m 높이의 돌 십자가를 세웠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십자가라 한다. 독재자의 야심은 항상 최고를 지향하나 본다. 절대 권력을 잡은 독재자들은 자신이 마치 신이라도 된 듯 착각에 빠진다고 했다. 오늘 날 역사가들이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가 자못 궁금하였다.
마드리드를 포함한 스페인 중부지방을 메세타 고원지대라 했다. 전 국토의 25%를 차지한다. 해발 600m의 고지대에 대평원이 형성되어 이곳에서 목축과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주변이 온통 목초지이거나 광대한 농경지였다.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에 지평선이 보였다. 드넓은 천혜의 땅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부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식량이 풍족한 나라임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기간 내내 우리들 식탁이 풍족하였다. 각종 빵과 고기제품 그리고 치즈, 요구르트 등 우유로 만든 제품들, 오렌지와 사과, 그리고 올리브유 등. 이 모두가 천혜의 땅에서 생산되는 것들이다.
목초지에서는 소와 양들이 방목하는 모습이 보였고, 이따금 도토리 나무숲들도 보였다. 이 나무숲에서 도토리를 사료로 하여 돼지들을 방목하여 키운다고 했다. 가는 곳마다 매장에 돼지 뒷다리고기가 포장되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도토리로 사육된 돼지의 뒷다리고기를 염장하여 6개월 간 발효시켜 만든 제품이다. 제품명을 <하몽>이라 불렀다. 술 안주로 또는 빵 사이에 끼워 먹는 등 이곳 사람들의 일상 식으로 애용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초원에서 생산된 소들 중 우수한 개체를 골라서 투우장으로 보낸다. 스페인투우는 축산업이 이루어 낸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축지대를 지나면서 세고비아와 아빌라라는 도시지역을 지나쳤다. 세고비아는 세계문화유산인 로마 수도교(강의 물을 시내로 공급하는 수로)가 있는 도시이다. 1474년 이사벨 여왕이 이곳에서 카스타야왕국의 국왕에 오르는 대관식을 가졌던 곳이다. 왕위 다툼으로 몰래 행해졌던 이 행사는 훗날 스페인의 역사를 가름할 중요한 계기를 맞게 된다. 이 후 이사벨 여왕은 스페인 역사상 빛나는 업적들을 남겼다. 에스파냐를 통일 시키고, 콜롬브스를 지원하여 아메리카를 발견케 한다. 아빌라는 성녀 테리사의 탄생지이다. 그래서 성녀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산타 테레사 수도원은 테레사의 생가가 있던 자리에 지어졌고 그곳에 테레사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안내자의 설명에 귀 기우려 들으며 주변경계를 감상하다보니 살라망카에 이르렀다.
살라망카는 인구 16만 명의 소도시이면서 교육도시이다. 토르메스 강을 끼고 도시가 형성되었다. 도시에 근접하니 2천 년 전에 건립된 <로마의 다리>가 보였다. 로마인들은 길을 만들고 수로를 정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로마시대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생산된 금과 은을 로마로 수송하기 위해서였다. 살라망카에서 세비아에 이르는 긴 도로를 만들어 <은의 길>이라 했다. 이 다리에서 출발하여 은의 길을 거쳐 간 금과 은이 지중해를 통하여 로마로 운반되었다.
살라망카 건축물의 특징은 장식의 화려함이다. 살라망카의 마요르 광장은 그 경관이 스페인에서 최고라고 알려졌다. 광장을 싸고 있는 건축물들이 세밀하고 호화로운 장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광장 북쪽의 종루가 있는 건물은 시청사이며, 광장은 현재 대학생들과 관광객들의 휴식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구 시가지를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중세기를 경험해보는 느낌이었다.
1218년 설립된 살라망카 대학은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며 유럽에서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과 프랑스의 파리 대학에 이어 세 번째로 긴 역사를 갖고 있다. 1254년 유럽에서 최초로 대학이란 명칭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현재 2,500명의 교수와 3만 명 이상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스페인에서 대표적인 대학에 속하며 특히 인문학분야가 강하다고 한다.
콜럼버스가 인도로의 항해계획을 제출하자 모교인 살라망카 대학의 지리학자들로 심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살라망카에서 회의를 자주 열었기 때문에 <살라망카 위원회>라 불리기도 하였다. 콜럼버스가 이 위원회에서 자기주장을 피력하고 그 유명한 달걀논쟁을 벌였다. 그만큼 살라망카는 학문과 교육이 앞선 도시였다.
볼만한 것은 살라망카 대학의 정문과 그 위에 조각되어 있는 화려한 정면장식이다. 정문 바로 위에 가톨릭 왕과 왕비의 모습과 왕국의 문장이 뚜렷이 새겨져 있고 옆 기둥에는 해골의 머리에 앉아있는 개구리 초상이 새겨져 있다. 개구리가 살라망카 대학의 상징물이란 것도 특이하였다.
그 이유는 개구리는 뒷걸음질을 못하는 동물이다. 이처럼 대학에서는 학문을 갈고 닦아 앞으로만 전진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한다. 또한 개구리는 행운을 상징하는 동물이란다. 여기에 와서 개구리를 찾지 못하면 여행의 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많은 관광객들이 개구리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개구리는 누군가 힌트를 주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옆에 있는 관광 상품 가게에는 개구리 인형들이 진열되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광객의 관심을 끌기위한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어디서나 진가를 발휘하였다.
살라망카 대학 앞에는 조개의 집이 있다. 석조 벽면 한 쪽에 400개 이상의 조개껍질을 박아놓은 건물로 15세기 후반의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순례자를 보호하던 기사의 집이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가 죽은 후 그의 열두제자 중의 한사람인 성 야고보가 에스파냐의 서북쪽 지방에서 전교하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박해를 받고 순교하였다. 그의 제자들이 시신을 배에 싣고 에스파냐로 항해 하던 중 풍랑을 만나 난파되어 시신의 행방도 묘연해졌다. 그러나 야고보의 시체는 조개껍질에 싸여 온전하게 보존된 체로 에스파냐의 해안가에 도착하였다. 그 후 조개껍질은 순례 길의 상징물이 되었다. 성지 순례자들은 순례 길에 조개껍질을 보유했다가 컵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순례 길에는 병원, 식당 등 순례자를 보호하는 시설들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이 집이 순례자들을 위한 집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국립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메세타 고원에서 본 지평선
살라망카의 마요르 광장의 건축물
살라망카 구시가 건축물
살라망카대학 담벼락
살라망카 대학 정문의 조각문양
조개의 집 (살라망카 대학 정문 앞)
관광 상품 가게의 개구리 인형
돼지의 뒷다리고기를 염장하여 만든제품 (하몽)
첫댓글 상세하게 쓴 서양사의 스페인 편을 읽는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