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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영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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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자작 | |
일본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 |
조선총독부 중추원 제5대 부의장 윤덕영 尹德榮 | Yun Deok-yeong | |
본관 | 해평 윤씨 (海平 尹氏) |
자 | 중덕 (仲德) |
호 | 벽수 (碧樹) |
출생 | 1873년 12월 27일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사망 | 1940년 10월 18일 (향년 66세) |
직업 | 관료, 정치인 |
종교 | 유교 (성리학)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주요 경력 | 비서원경 장례원경 태의원경 시종원경 조선귀족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조선총독부 중추원 제5대 부의장 일본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
비고 | 경술국적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2.1. 벽수산장
조선과 대한제국의 각료. 경술국적 중 1명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매국노이기도 하다. 자는 중덕(仲德), 호는 벽수(碧樹), 본관은 해평(海平).
1873년 12월 27일 서울 태생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尹徹求)의 아들이며 후작 윤택영(澤榮)의 형이다. 조부되는 윤용선은 오랫동안 의정 대신을 역임한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였다. 1894년 윤덕영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것이나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된 것 등 윤덕영이 관직에 오르는데는 모두 조부 윤용선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반 위에 윤덕영의 권세를 확고하게 해준 것은 동생 윤택영의 딸인 조카가 황후(순정효황후)에 책봉된 일이다. 윤덕영의 조카가 황후에 책봉된 것은 윤택영이 조부 윤용선을 통하여 경운궁(엄비)에 통로를 열고 엄비의 승비(陞妃) 운동에 종사한 데서 기인한다. 윤택영은 이 일에 종사하면서 많은 계책을 세워 신임을 두텁게 하고 자신의 딸이 황후에 책봉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윤덕영은 조카가 황후가 된 다음 해인 1908년 시종원경이 되었고 황후의 태부도 겸하였는데 이로 인해 궁중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이 있었지만 실제로 황후를 등에 업고 외척 세도를 부리며 정치에 깊숙히 관여한 것은 윤덕영이었다.
당시 일본은 송병준, 이용구, 이완용을 내세워 일진회를 조직하는 등 합방의 불가피성을 부르짖으며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일본은 대신들을 매수하거나 회유 및 협박하여 일본의 정책에 협조하도록 하여 합방 계획을 어느 정도 진전시켜 나갔는데 이제 남은 것은 고종을 포섭하여 허락을 받는 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이어 제3대 통감이 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여론의 귀추를 살피면서 합방을 마지막까지 순조롭게 진행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황실을 설득해야만 하였는데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황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윤덕영을 그 적격자로 삼았다. 그리하여 윤덕영을 비밀리에 관저로 초대하여 합방의 불가피성을 주지시킨 다음 적극적인 협력을 구하였다.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윤덕영에게 각의를 거쳐 조약을 체결할 시기가 되었으며 각 방면 대표자의 합의가 이미 있었다고 말하고 조선의 이해(利害)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고종 및 순종의 양해를 얻는데 진력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완용은 고종에게 7일간 조석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결단을 촉구하고 설득을 했지만, 고종은 대꾸도 하지 않고 꿈쩍하지 않았다. 이런 고종의 단호함에 이완용은 포기를 하고 돌아갔고 이에 일본이 실망했다고 한다. 이 때 윤덕영이 본인이 직접 나서겠다고 하여 고종에게 찾아가 부탁을 했지만 역시 고종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협박하기 시작했다. 덕수궁 모든 창고에 봉인(압류)을 붙히고 물건을 관리하던 상궁도 내쫓았는데 고종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윤덕영은 고종의 과거 여자 문제로 협박하기 시작했다. 단호하고 대꾸조차 하지 않던 고종이 주저 앉으면서 시선을 피하자 윤덕영이 고종 앞으로 가서 서서 말하기를 "청을 들어주실 때까지 안 움직이겠습니다."라며 오후 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서 있었다고 하는데 고종은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순종을 보냈다. 윤덕영의 집착과 집요함에 두 손을 든 고종은 순종에게 만나게 했는데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가 상궁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윤치호가 말하길. "저 자의 친일은 영어로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 일본인들조차 윤덕영의 냉혹함과 집요함에 치를 떨었는데[2] 지금까지 그 욕을 다 먹는 건 총리대신으로써 합병 문서들에 서명을 한 이완용이다.[3]
윤덕영 초상화 | 조선귀족 남작 시절 모습[출처] |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일주일 전에 창덕궁에서 열린 마지막 어전회의에 윤덕영과 민병석은 고종을 모시고 참석했으며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중 옥새가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친일파가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병풍 뒤에서 숨어서 몰래 듣고 있던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들고 울면서 도망치다가 앉아서 치마 속에 숨기는 등 온몸을 던져 항의했고 그 누구도 황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자 큰아버지 윤덕영이 나서서 빼앗았다. 이로써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고종과 순종을 협박해 왕실을 움직여 조선의 식민지화에 일조한 윤덕영은 그 대가로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그 때 받은 것 중 하나가 벽수산장이다. 군신간의 예의나 종친간의 의리를 도외시한채 고종의 결의를 촉구하고 어전 회의를 형식적으로 개최하는 등 한일 합방의 배후에서 활약한 윤덕영의 공로는 매우 컸는데 윤덕영 또한 한일 합방 과정에서 자신이 막후의 제1인자였다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합방 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이완용에게는 작위와 훈장이 거의 최고 수준으로 주어진 것에 비한다면 윤덕영에게 주어진 작위는 보잘 것 없었다. 이는 합방 과정이 표면상 이완용에 의해서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고 윤덕영의 공로는 이완용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덕영은 민병석과 함께 이완용,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회유와 사주를 받고 조정에서 '병합반대론'을 무마,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정부 대신담당이 이완용이었다면 윤덕영과 민병석은 궁중담당이었던 것이다. #
얼마나 악랄했는지 고종 독살설의 핵심 인물로도 거론되기도 한다.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가 송병준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어떤 뜻을 전했고, 하세가와는 '이태왕'(고종)을 찾아가 이를 전달했으나 고종이 수락하지 않자 이를 감추기 위해 윤덕영, 민병석 등을 시켜 독살했다고 한다. 다만 송병준은 이에 대해 '윤덕영, 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라고 밝혀 이의 진상이 명확하지는 않다. #
1919년 1월 손병희가 발표한 ‘고(告)국민대회’ 포고문에 언급된 따르면 파리 강화 회의에 일제가 마련한 ‘한국 민족은 일본의 어진 통치에 순종해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각계각층의 대표자 명의로 된 조작증명서 서명에 고종이 크게 진노하자 일제는 친일파인 윤덕영·한상학을 사주하여 독살을 꾀해 고종의 식사를 받드는 두 명의 궁녀를 매수하여 야참 식혜에 독약을 넣어 시해했다고 한다. # 그리고 독립운동가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의 유신영 편에서도 "역신 한상학, 윤덕영, 이완용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무려 3명이 윤덕영을 고종 독살설의 핵심 인물이라고 간주하는 증언을 남긴 셈이다.
친일파 중 가장 재산이 많았던 사람은 윤덕영인데 옥인동의 약 54%, 지금의 서촌 부지, 수성동 계곡, 배화여자고등학교, 인왕산 자락까지 모두 다 윤덕영의 집터였으며 아직도 그 곳에는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집 안에는 능금나무밭, 자연숲, 한옥 99칸, 하천이 있는 총 "2만 평"의 대저택이며 이완용 땅의 4배인 "19,467평"(축구장 8개의 면적)이다.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백성들의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 곳이다. 1921년 6월 23일에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에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이라고 소개된 곳이 바로 이 '벽수산장'이다.
1933년 2월 기준 윤덕영의 재산은 당시 화폐로 100만 원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경성사범학교 출신 교사의 초임 봉급이 40~50원[5]이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민병석이 30만 원[6]을 가졌다고 한다. 2023년 가치로 환산하면 66억 5000만 원 정도의 재산이던 셈이다.
병합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자작과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은 그는 1917년에는 순종으로 하여금 일본 왕실의 참배를 종용하였으며 이왕직 장시사장(掌侍司長), 황해도 관찰사, 철도원 부총재 등을 거쳐 1925년에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그의 눈부신 활동에 대해 {공로자 명감}(1935년)에서도 "1910년 시종원경으로 있을 당시 병합을 맞아 상하의 안태(安泰)를 위해 평온원만한 해결을 하려고 노력한 한 사람으로 그 정성, 그 상식은 당시 가장 걸출한 인물로서 빛나고 있었다"(47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이후 만 15년이나 중임한 끝에 1940년 8월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오른다. 동생 윤택영이 빚에 쫓겨 북경으로 달아날 무렵에는 옥인동에 특급 호화 주택인 '송석원'을 지어 세인들로부터 빈축을 샀는데 송석원의 안방 마님으로 이길선(李吉善)의 딸을 앉힌 후 그 입막음으로 5만원을 준 일화가 있으며 참봉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먹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시국 대책 조사위원을 지냈으며 아내 김복수(金福綏, 1872~1950)[7]는 일제의 전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친일 여성 단체인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회장을 맡아 금비녀 헌납 운동에 앞장을 섰는데 남편의 반민족 행각에 걸맞는 내조를 한 셈이다. 이처럼 몰락해 가는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서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황실과 백성들을 배신하고 팔아먹은 그는 1940년 10월 18일 66살에 사망하면서 그 화려한 친일의 막을 내렸다.[8] 대한제국의 매국노 중에서는 이재곤을 제외하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윤덕영에게 아들이 있긴 했지만 요절했기에 윤덕영의 종손인 윤강로(尹强老, 1919~1965)가 윤덕영의 양자로 들어왔으며, 194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로 일하다가 같은 해 윤덕영의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심문을 받았으나 반민특위가 곧 해체된 데다 습작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이었기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윤강로는 서울에서 병원을 경영하며 당대의 유명 내과의로 꼽혔던 것으로 전해지며[9] 1965년 5월 22일 향년 4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다만 일각의 추측과는 달리 윤덕영의 후손들이 윤덕영이 남긴 재산들을 바탕으로 잘 살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미 윤덕영의 노년기부터 사치향락으로 인해 가세가 기울다가 윤덕영 사후 쇠락이 급속화되어 윤강로가 벽수산장[10], 또 다른 별장 강루정을 위시한 윤덕영의 재산 대부분을 매각했기 때문이다. #[11] 설령 윤덕영의 후손이 잘 살고 있을지라도 윤덕영의 재산의 영향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사후 윤덕영은 오늘날의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에 소재한 별장 강루정[12] 뒤편의 무덤에 묻혔지만, 1960년대 말 이 일대에 남아있던 해평 윤씨들의 무덤 대부분이 파주와 양주 등지로 이장되거나 파묘되면서 윤덕영의 무덤은 행방불명되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에는 그의 자택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이 있었는데 1913년부터 1917년[13]까지 4년 동안 프랑스식으로 건축한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평 795평짜리 호화 대저택이었다. 1945년 8.15 광복 후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사무실로 사용하였다가[14] 1966년 4월 5일 보수공사 중의 실화로 2~3층이 전소되었고, 1973년 일대 도로정비사업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철거되기 전까지 약 7년간은 철조망으로 둘러 막아 놓았지만 뚫어놓은 개구멍으로 동네 어린이들 놀이터로 쓰였으며 건물 터를 거쳐 가면 지역 관할 서울청운초등학교까지의 통학로가 100여 m가 단축되어서 학생들은 자주 들어가고는 하였는데 밤에는 스산해서 아무도 안 들어갔다. 아이들이 부르는 이름은 "언커크"였고 매국노가 쓰던 별장이라는 것까지만 알고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타서 없어졌지만 2층 바닥 일부와 벽면이 남아 있었는데 철재와 장식품, 타일 등을 독일에서 구입하는 등 외국 건축자재만 쓴 것은 물론 보일러 시설도 갖춘 데다가 집안의 응접실 천장에 수족관을 두며 금붕어를 길렀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쓰인 건축 자재가 화려하며 마당도 넓고 규모가 컸다. 2019년 현재는 정문 기둥 일부만 이후에 지은 건물 일부로 남아 있다. # 마당의 연못은 200평 규모 상당이라 뱃놀이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내부 관련 증언과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15][16]
참고로 이렇게 벽수산장을 지은 윤덕영은 정작 국민들의 반발이 두려워 완공 후 (자신이 주석으로 있던) 중국의 신흥종교인 홍만자회 조선지부에 빌려준 후 본인은 바로 뒤에 따로 지어놓은 단층 양옥과 한옥 두 채에 거주했기에 돈지랄만 한 셈이 되었는데, 사실 벽수산장의 건설비는 쌀 한 가마니 가격이 7원이던 시절에 무려 17만~30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17] 심지어 설계 과정도 막장인 게, 프랑스 공사를 지낸 민영찬(閔泳瓚, 1874~1948)[18]이 자신의 집을 설계하려 가져온 어느 프랑스의 귀족 저택의 설계도를 빼앗고(…) 그 설계대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바로 옆에 있던 이완용의 집 때문에 이완용 별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사실이며 2003년 지어진 집이 오해를 받고 있다.
#1, #2, #3, #4, #5, #6 #7
경술국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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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2024-08-28 1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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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해평 윤씨 (海平 尹氏) |
자 | 중덕 (仲德) |
호 | 벽수 (碧樹) |
출생 | 1873년 12월 27일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사망 | 1940년 10월 18일 (향년 66세) |
직업 | 관료, 정치인 |
종교 | 유교 (성리학)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주요 경력 | 비서원경 장례원경 태의원경 시종원경 조선귀족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조선총독부 중추원 제5대 부의장 일본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
비고 | 경술국적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2.1. 벽수산장
조선과 대한제국의 각료. 경술국적 중 1명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매국노이기도 하다. 자는 중덕(仲德), 호는 벽수(碧樹), 본관은 해평(海平).
1873년 12월 27일 서울 태생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尹徹求)의 아들이며 후작 윤택영(澤榮)의 형이다. 조부되는 윤용선은 오랫동안 의정 대신을 역임한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였다. 1894년 윤덕영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것이나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된 것 등 윤덕영이 관직에 오르는데는 모두 조부 윤용선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반 위에 윤덕영의 권세를 확고하게 해준 것은 동생 윤택영의 딸인 조카가 황후(순정효황후)에 책봉된 일이다. 윤덕영의 조카가 황후에 책봉된 것은 윤택영이 조부 윤용선을 통하여 경운궁(엄비)에 통로를 열고 엄비의 승비(陞妃) 운동에 종사한 데서 기인한다. 윤택영은 이 일에 종사하면서 많은 계책을 세워 신임을 두텁게 하고 자신의 딸이 황후에 책봉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윤덕영은 조카가 황후가 된 다음 해인 1908년 시종원경이 되었고 황후의 태부도 겸하였는데 이로 인해 궁중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이 있었지만 실제로 황후를 등에 업고 외척 세도를 부리며 정치에 깊숙히 관여한 것은 윤덕영이었다.
당시 일본은 송병준, 이용구, 이완용을 내세워 일진회를 조직하는 등 합방의 불가피성을 부르짖으며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일본은 대신들을 매수하거나 회유 및 협박하여 일본의 정책에 협조하도록 하여 합방 계획을 어느 정도 진전시켜 나갔는데 이제 남은 것은 고종을 포섭하여 허락을 받는 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이어 제3대 통감이 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여론의 귀추를 살피면서 합방을 마지막까지 순조롭게 진행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황실을 설득해야만 하였는데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황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윤덕영을 그 적격자로 삼았다. 그리하여 윤덕영을 비밀리에 관저로 초대하여 합방의 불가피성을 주지시킨 다음 적극적인 협력을 구하였다.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윤덕영에게 각의를 거쳐 조약을 체결할 시기가 되었으며 각 방면 대표자의 합의가 이미 있었다고 말하고 조선의 이해(利害)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고종 및 순종의 양해를 얻는데 진력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완용은 고종에게 7일간 조석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결단을 촉구하고 설득을 했지만, 고종은 대꾸도 하지 않고 꿈쩍하지 않았다. 이런 고종의 단호함에 이완용은 포기를 하고 돌아갔고 이에 일본이 실망했다고 한다. 이 때 윤덕영이 본인이 직접 나서겠다고 하여 고종에게 찾아가 부탁을 했지만 역시 고종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협박하기 시작했다. 덕수궁 모든 창고에 봉인(압류)을 붙히고 물건을 관리하던 상궁도 내쫓았는데 고종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윤덕영은 고종의 과거 여자 문제로 협박하기 시작했다. 단호하고 대꾸조차 하지 않던 고종이 주저 앉으면서 시선을 피하자 윤덕영이 고종 앞으로 가서 서서 말하기를 "청을 들어주실 때까지 안 움직이겠습니다."라며 오후 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서 있었다고 하는데 고종은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순종을 보냈다. 윤덕영의 집착과 집요함에 두 손을 든 고종은 순종에게 만나게 했는데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가 상궁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윤치호가 말하길. "저 자의 친일은 영어로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 일본인들조차 윤덕영의 냉혹함과 집요함에 치를 떨었는데[2] 지금까지 그 욕을 다 먹는 건 총리대신으로써 합병 문서들에 서명을 한 이완용이다.[3]
윤덕영 초상화 | 조선귀족 남작 시절 모습[출처] |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일주일 전에 창덕궁에서 열린 마지막 어전회의에 윤덕영과 민병석은 고종을 모시고 참석했으며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중 옥새가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친일파가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병풍 뒤에서 숨어서 몰래 듣고 있던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들고 울면서 도망치다가 앉아서 치마 속에 숨기는 등 온몸을 던져 항의했고 그 누구도 황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자 큰아버지 윤덕영이 나서서 빼앗았다. 이로써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고종과 순종을 협박해 왕실을 움직여 조선의 식민지화에 일조한 윤덕영은 그 대가로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그 때 받은 것 중 하나가 벽수산장이다. 군신간의 예의나 종친간의 의리를 도외시한채 고종의 결의를 촉구하고 어전 회의를 형식적으로 개최하는 등 한일 합방의 배후에서 활약한 윤덕영의 공로는 매우 컸는데 윤덕영 또한 한일 합방 과정에서 자신이 막후의 제1인자였다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합방 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이완용에게는 작위와 훈장이 거의 최고 수준으로 주어진 것에 비한다면 윤덕영에게 주어진 작위는 보잘 것 없었다. 이는 합방 과정이 표면상 이완용에 의해서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고 윤덕영의 공로는 이완용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덕영은 민병석과 함께 이완용,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회유와 사주를 받고 조정에서 '병합반대론'을 무마,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정부 대신담당이 이완용이었다면 윤덕영과 민병석은 궁중담당이었던 것이다. #
얼마나 악랄했는지 고종 독살설의 핵심 인물로도 거론되기도 한다.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가 송병준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어떤 뜻을 전했고, 하세가와는 '이태왕'(고종)을 찾아가 이를 전달했으나 고종이 수락하지 않자 이를 감추기 위해 윤덕영, 민병석 등을 시켜 독살했다고 한다. 다만 송병준은 이에 대해 '윤덕영, 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라고 밝혀 이의 진상이 명확하지는 않다. #
1919년 1월 손병희가 발표한 ‘고(告)국민대회’ 포고문에 언급된 따르면 파리 강화 회의에 일제가 마련한 ‘한국 민족은 일본의 어진 통치에 순종해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각계각층의 대표자 명의로 된 조작증명서 서명에 고종이 크게 진노하자 일제는 친일파인 윤덕영·한상학을 사주하여 독살을 꾀해 고종의 식사를 받드는 두 명의 궁녀를 매수하여 야참 식혜에 독약을 넣어 시해했다고 한다. # 그리고 독립운동가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의 유신영 편에서도 "역신 한상학, 윤덕영, 이완용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무려 3명이 윤덕영을 고종 독살설의 핵심 인물이라고 간주하는 증언을 남긴 셈이다.
친일파 중 가장 재산이 많았던 사람은 윤덕영인데 옥인동의 약 54%, 지금의 서촌 부지, 수성동 계곡, 배화여자고등학교, 인왕산 자락까지 모두 다 윤덕영의 집터였으며 아직도 그 곳에는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집 안에는 능금나무밭, 자연숲, 한옥 99칸, 하천이 있는 총 "2만 평"의 대저택이며 이완용 땅의 4배인 "19,467평"(축구장 8개의 면적)이다.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백성들의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 곳이다. 1921년 6월 23일에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에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이라고 소개된 곳이 바로 이 '벽수산장'이다.
1933년 2월 기준 윤덕영의 재산은 당시 화폐로 100만 원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경성사범학교 출신 교사의 초임 봉급이 40~50원[5]이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민병석이 30만 원[6]을 가졌다고 한다. 2023년 가치로 환산하면 66억 5000만 원 정도의 재산이던 셈이다.
병합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자작과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은 그는 1917년에는 순종으로 하여금 일본 왕실의 참배를 종용하였으며 이왕직 장시사장(掌侍司長), 황해도 관찰사, 철도원 부총재 등을 거쳐 1925년에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그의 눈부신 활동에 대해 {공로자 명감}(1935년)에서도 "1910년 시종원경으로 있을 당시 병합을 맞아 상하의 안태(安泰)를 위해 평온원만한 해결을 하려고 노력한 한 사람으로 그 정성, 그 상식은 당시 가장 걸출한 인물로서 빛나고 있었다"(47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이후 만 15년이나 중임한 끝에 1940년 8월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오른다. 동생 윤택영이 빚에 쫓겨 북경으로 달아날 무렵에는 옥인동에 특급 호화 주택인 '송석원'을 지어 세인들로부터 빈축을 샀는데 송석원의 안방 마님으로 이길선(李吉善)의 딸을 앉힌 후 그 입막음으로 5만원을 준 일화가 있으며 참봉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먹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시국 대책 조사위원을 지냈으며 아내 김복수(金福綏, 1872~1950)[7]는 일제의 전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친일 여성 단체인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회장을 맡아 금비녀 헌납 운동에 앞장을 섰는데 남편의 반민족 행각에 걸맞는 내조를 한 셈이다. 이처럼 몰락해 가는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서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황실과 백성들을 배신하고 팔아먹은 그는 1940년 10월 18일 66살에 사망하면서 그 화려한 친일의 막을 내렸다.[8] 대한제국의 매국노 중에서는 이재곤을 제외하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윤덕영에게 아들이 있긴 했지만 요절했기에 윤덕영의 종손인 윤강로(尹强老, 1919~1965)가 윤덕영의 양자로 들어왔으며, 194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로 일하다가 같은 해 윤덕영의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심문을 받았으나 반민특위가 곧 해체된 데다 습작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이었기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윤강로는 서울에서 병원을 경영하며 당대의 유명 내과의로 꼽혔던 것으로 전해지며[9] 1965년 5월 22일 향년 4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다만 일각의 추측과는 달리 윤덕영의 후손들이 윤덕영이 남긴 재산들을 바탕으로 잘 살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미 윤덕영의 노년기부터 사치향락으로 인해 가세가 기울다가 윤덕영 사후 쇠락이 급속화되어 윤강로가 벽수산장[10], 또 다른 별장 강루정을 위시한 윤덕영의 재산 대부분을 매각했기 때문이다. #[11] 설령 윤덕영의 후손이 잘 살고 있을지라도 윤덕영의 재산의 영향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사후 윤덕영은 오늘날의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에 소재한 별장 강루정[12] 뒤편의 무덤에 묻혔지만, 1960년대 말 이 일대에 남아있던 해평 윤씨들의 무덤 대부분이 파주와 양주 등지로 이장되거나 파묘되면서 윤덕영의 무덤은 행방불명되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에는 그의 자택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이 있었는데 1913년부터 1917년[13]까지 4년 동안 프랑스식으로 건축한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평 795평짜리 호화 대저택이었다. 1945년 8.15 광복 후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사무실로 사용하였다가[14] 1966년 4월 5일 보수공사 중의 실화로 2~3층이 전소되었고, 1973년 일대 도로정비사업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철거되기 전까지 약 7년간은 철조망으로 둘러 막아 놓았지만 뚫어놓은 개구멍으로 동네 어린이들 놀이터로 쓰였으며 건물 터를 거쳐 가면 지역 관할 서울청운초등학교까지의 통학로가 100여 m가 단축되어서 학생들은 자주 들어가고는 하였는데 밤에는 스산해서 아무도 안 들어갔다. 아이들이 부르는 이름은 "언커크"였고 매국노가 쓰던 별장이라는 것까지만 알고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타서 없어졌지만 2층 바닥 일부와 벽면이 남아 있었는데 철재와 장식품, 타일 등을 독일에서 구입하는 등 외국 건축자재만 쓴 것은 물론 보일러 시설도 갖춘 데다가 집안의 응접실 천장에 수족관을 두며 금붕어를 길렀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쓰인 건축 자재가 화려하며 마당도 넓고 규모가 컸다. 2019년 현재는 정문 기둥 일부만 이후에 지은 건물 일부로 남아 있다. # 마당의 연못은 200평 규모 상당이라 뱃놀이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내부 관련 증언과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15][16]
참고로 이렇게 벽수산장을 지은 윤덕영은 정작 국민들의 반발이 두려워 완공 후 (자신이 주석으로 있던) 중국의 신흥종교인 홍만자회 조선지부에 빌려준 후 본인은 바로 뒤에 따로 지어놓은 단층 양옥과 한옥 두 채에 거주했기에 돈지랄만 한 셈이 되었는데, 사실 벽수산장의 건설비는 쌀 한 가마니 가격이 7원이던 시절에 무려 17만~30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17] 심지어 설계 과정도 막장인 게, 프랑스 공사를 지낸 민영찬(閔泳瓚, 1874~1948)[18]이 자신의 집을 설계하려 가져온 어느 프랑스의 귀족 저택의 설계도를 빼앗고(…) 그 설계대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바로 옆에 있던 이완용의 집 때문에 이완용 별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사실이며 2003년 지어진 집이 오해를 받고 있다.
#1, #2, #3, #4, #5,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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