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룡 신도비, 학촌재 : 김천시 대항면 덕전리 세송리.
黃義祠 : 영동군 매촌면 어곡리 任辰亂,義兵將 鶴村 朴以龍 ( 1533 - 1595 ) 의 影幀을 모시고 祭祀를 지내기 위하여 1998年에 完工 한 建物로 正面3칸 側面2칸의 맞배기와집 이다.
박이룡(朴以龍:1533~1595) 본관은 충주(忠州). 초명은 응렬(應烈) 자는 시윤(施允) 호는 학촌(鶴村). 증조부는 박원직(朴原直)이며, 조부는 박지(朴址)이고, 부는 군수(郡守)를 역임한 박성건(朴成楗)이다. 장인은 박윤종(朴胤宗)이다.
어릴 때에는 재종조(再宗祖)인 사암(思菴) 순(淳)에게 수학하였고 장성하여서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 사사하였다 .
1561년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이조좌랑(吏曹佐郞) 사간원정원 예조정랑(禮曹正郞)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591년 해서순찰사(海西巡察使)에 임명되어 재임 중에 군비(軍備)의 유고(有故)로 1592년 3월에 원주(原州)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었다. 박이룡은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유배지에서 뜻을 같이하는 무사(武士)들을 모아서 전지(戰地)를 향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 전쟁에서 교전하는 횟수는 무려 200 여회에 이른다. 전쟁을 하는 동안에 여러곳에서 관군과 의병들 사이에는 대로는 서로 질시(嫉視)하거나 모함하는 일들이 있어서 간혹 산란 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일들이 있었으나 호서출신 의병장인 박이룡만은 관군이나 의병들에게 동일하게 화합하고 협심(協心)함으로써 공사간에 모든일들이 완만하게 이루었다.
1593년 10월에는 능성현령(陵城縣令)에 제수(除授)되었다. 의병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성벽을 수축하고 빈민을 구제하고 동통(疼痛)을 참아 가면서 적과 싸워서 여러 가지 기공을 세웠다. 군정이 혁신되고 호남일경(湖南一境)에는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재임 2년에 선정업적(善政業績)이 청백(淸白)으로 포계(褒啓)되었고 1595년 4월30일 임지 관아에서 향년 63세에 순직하였다.
순조조(純祖朝)에 이르러 임란공신에 대한 포증은전(포贈恩典)이 있어 1812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 되었다.
충주박씨(忠州朴氏)
중시조 박영(朴英)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인 사벌왕(沙伐王) 박언창(朴彦昌)의 11세손. 고려문과 부정(副正)
>2세 박신(朴臣) 검교신호위대장군(檢校神虎衛大將軍)
>3세 박원숭(朴元崇) 삼사우사(三思右使)
>4세 박득승(朴得升) 첨의평리(僉議評理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분포 자료는 총 8559가구에 2만7486명
>박효함(朴孝諴)
>原直
>址 : 配황간인 甄季達의 무남독녀. 황간현 내동에 입향
>成楗[문] 配함창인 오창(吳昌)[生]의 딸. 군수
>①以鳳
>②以龍 配밀양인 박윤종(朴胤宗)의 딸
>①事親,
>②事君 : 후손들이 봉산면 태화리에 집성촌
>③事兄 : 대항면 복전마을에 집성촌
>③以麟
>④以雲
>⑤以虎
>⑥以鸞
義兵將 鶴村 朴以龍
公은 1533年 中宗28年 癸巳 八月 十五日 (現)永同郡 梅谷面 內洞에서考 諱 成楗과 妣興德張氏의 七男二女中 第二子로 出生. 本貫은 忠州, 字는 施允, 號는 鶴村이며, 始祖 諱는 英이고 麗朝의 副正이다. 高祖의 諱는 孝諴인데 府使로 淸白吏이며, 吏曹參判에 贈職되었고, 曾祖의 諱는 原直이니 縣監이다. 祖의 諱 址는 將仕郞이며, 考의 諱 成楗은 文科及第하여 司書와 郡守와 府使를 歷任하고 號는 邵村이다. 公은 처음 (現)永同郡 梅谷面 林山里 洗心亭에서 倡義한 故로 軍號를 黃義將이라 하였으며, 宣祖28年 四月 三十日 63歲로 綾城官衙에서 殉職하였다. 張氏 胎夢에 羽衣道士가 張氏를 門墻 사이로 불러내 鯉魚 七마리를 주면서 정성들여 기르라 하여서 蓮塘에 넣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뛰어 올라 龍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서 黑龍과 싸우다가 떨어졌는데 깨어 보니 꿈이었다. 因하여 以龍이라고 名을 하였다. 어려서 再從祖父인 思庵公께 漢學 入門하였고 文成公 李栗谷선생께 四書를 修學하여 鶴村溪上에 書齋를 짓고 아우 孝節公과 學問에 專念하였으며, 重峯 趙先生과 往來하면서 性理學을 講論하며 道義之交가 되었다. 司馬 兩場에 合格하였으며, 成均館 居齋生으로 宣祖大王이 親히 聽講하실 때 가장 事理에 맞게 分明한 講論을 하므로 稱讚과 아울러 第一로 選拔되어 春秋一部를 下賜받았다. 이후 御使 朴弘老의 特啓에 따라 宣祖10年 丁丑에 太廟庭試를 親命으로 赴擧하여 登第하니 鄭崙과 高從厚와 同榜이었다. 上이 卽席에서 經筵을 베풀고 春秋를 講論할 때 極讚하면서 將來가 囑望되는 賢俊이라며 承文院正字를 除授하였다. 後에 禮曹正郞, 吏曹佐郞을 거쳐 原州敎導 祭官으로 差定되었고, 이때 祭官이 詩作을 하는데 公이 五律二首를 쓰니 座中이 깜짝 놀라며 손에 잡은 붓을 놓쳤다고 한다. 司諫院正言을 역임하다가 世俗의 煩惱를 벗고자 學者들과 江上에서 學問을 즐기는데 司憲府執義를 數次 除授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늙고 依支할 곳도 없어 歸鄕코자 永同에 田庄을 求하고 家眷을 永同으로 보내었다. 그 후 西海에 不祥事가 생겨 不得已 免치 못하여 巡察使를 除授받고 君王의 원수를 殲滅하고자 天地神明께 盟誓하고 永同, 黃澗등 鄕里의 義兵 千餘名을 모아 林山 洗心亭에서 倡義하여 掛榜嶺에 本據했다가 곧 金山 賀老村으로 옮겨서 오랫동안 큰 싸움만도 二百餘回가 넘게 倭寇와 싸웠다. 湖南, 嶺南 義兵들과 合勢하여 扶桑에서 敵을 물리치기도 하였으며, 權察訪과 鄭經世가 黃嶺洞口에서 義擧하여 倭敵을 討伐할 때 朴以龍을 上將으로 추천하는 것을 金山, 開寧의 敵을 防禦하기 위해 辭讓하고 敵陣을 燒滅시키고 큰 戰果를 올렸다.
扶桑에서 싸우다가 敵의 流矢에 左便 발꿈치를 맞아 落馬하여 負傷의 傷處도 甚하였지만, 忠淸道 都體察使 鄭澈이 明나라 救援兵이 南下하는데 湖西에서 接待할 責任을 公에게 一任하니 사양치 않고 厚히 接待하였다. 廟堂에서 公을 綾城縣令(전남 화순)으로 除授하니 單騎로 不撤晝夜하고 赴任하여 義兵을 모으고 訓練하며 城壁을 修築하고 倭寇를 防禦하며 糧穀을 購入하여 貧民을 救濟하고 負傷의 傷處를 참아가면서 倭敵과 수차례 싸워서 功을 세웠다. 그리하여 軍政이 革新되고 湖南一境이 安定을 찾게 되었다. 在官 二年에 善政한 治積이 上聞되어 上이 特히 淸白을 表彰하고 勉勵하는 恩典이 두터웠다.
宣祖28年 63歲에는 軍資監正을 除授받고 表裏一襲도 下賜받았다. 倭寇를 討伐하는 計策과 難民을 賙恤하는 行政에 하루도 軍服을 벗을 날이 없었고, 晝夜 勞苦로 過勞中, 前日 負傷의 鐵毒이 再發하여 全身의 浮脹으로 漸次 危篤하였다. 4月 30日 臨終에 諸葛武候의 “出師未捷身先死” 句節을 暗誦하면서 官衙에서 殉職하니 境內의 百姓들이 親父母喪을 當한 것 같이 呼哭 哀痛하였다. 또한 全羅監司가 그 忠節을 壯하게 여겨 各 고을 官軍으로 하여금 永同 遠坪에 返葬케 하였다. 그러나 文臣으로 壬亂에 倡義하여 盡忠報國하였으나, 當時 制度上 武士에게만 武功을 認定하는 탓에 아무런 褒賞도 없다가 數次의 湖西, 嶺南 士林들의 上疏에 依하여 純祖12年 壬申年에 吏曹參議에 贈職되었다. 然이나 可謂 埋山之玉이 된 四百年 동안 士林들이 哀惜慨歎하였는데 지난 庚午年(1990) 永同文化院에서 公의 殉國 遺蹟을 搜探하여 倡義地인 永同郡 梅谷面 掛榜嶺 上 功績碑 竪立하고 1997年 朴潤根,朴東根宗親의 積極的인 建議로 當時 故 박완진郡守, 주병덕道知事의 物心兩面 도움으로 因하여 郡에서 主幹하고 建築은 朴文基,朴鍾熙宗親이 맡아 公의 遺愛地에 祠宇를 創設하여 妥靈 奉安케 하고, 遺事誌를 編纂하였다. 그 以後 義兵將 朴以龍先生 崇慕祭가 現 永同郡 梅谷面 漁村里 祠宇에서 初獻官은 永同郡守로 하여 年年이 陰4月22日 열리고 있다
.....至於金沔高敬命趙憲者爲首其次郭再佑之嶺南倡義朴以龍之湖西倡義也勦除倭賊恢復國家乃義兵之力也. (...金沔과 高敬命과 趙憲은 우두머리로 倡義하였고, 그 다음 嶺南에는 郭再佑, 湖西에는 朴以龍이 倡義하여 倭賊을 추격하였으니 나라를 회복함은 義兵들의 힘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出處 : 李芝峯睟光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