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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
코로나와 더위로 이곳은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관람객도 거의 없다. 한줄금 비가 땅을 조금 식혀주었지만, 찌는 듯한 더위는 여전히 강력하다. 덕분에 공간을 거의 독점했다. 코로나의 혜택인가?
어려운 시절, 부친을 그리 처참하게 잃은 정조가 통한의 심정을 풀어내려 지은 이곳이 이제 거꾸로 코로나 위로 공간이 된 거 같다. 늘 관람객으로 북적이던 곳이 이렇게 적막하니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별세계에 온 것도 같다. 이쪽 세상 얘기 전하면, 그쪽 세상 얘기도 들어볼 수 있을까.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
방문일 : 2021.8.2.
1. 둘러보기
행궁은 정문 신풍루에서 시작하여 조선시대의 재현이지만, 신풍루 앞 광장을 넘어 홍살문을 지나 시작되는 너른 행궁광장은 고금이 혼재된 공동의 공간이다. 광장에서는 시간을 뛰어넘는 각종 행사가 벌어진다. 전에 주말 주간으로국한되었던 행사가 이제는 주중과 야간으로까지 확대되었지만, 요즘은 코로나로 전체적으로 주춤하다.
1) 화성행궁 소개
華城行宮 | 사적 제478호 | 1796년(정조 20) 창건 | 2002년 복원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는 1790년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하였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병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했고, 1920년대 병원 건물이 신축되며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자혜의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던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수원문화재단 홈피)
*2008년 정조행차 재현 장면
*신풍루(新豊樓)
1790년(정조 14) 창건 /2002년 복원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읍의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豐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루 좌우에는 행랑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영을 배치해서 경호 체제를 갖췄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풍루에서 수원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베풀었는데, 당시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수원문화재단 홈피)
조선왕조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전주의 객사도 <풍패豐沛지관>이다. 이외에 행궁의 장락당도 한고조 유방이 어머니를 위해 지은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모두 동아시아 유교사상의 적통을 잇는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고자 한 것이다.
조선은 이미 중국을 능가하는 문화 수준과 문화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나라는 고대 자기중심주의에 머무르며 중세 보편주의로 나가지 못했다. 이후 중세 전기 북송까지는 중국이 앞섰지만, 중세 후기에는 주도권이 한국으로 넘어왔다. 이규보를 중심으로 중세 후기를 주도하기 시작하여, 조선이 되면 완전히 한문문명권의 중심에 선다. 정조의 시대는 이행기의 시대로 문화는 한국, 일본은 경제 중심이 되어 주도권이 분산된다. (조동일 이론 참조: 조동일문화대학 강좌)
'풍패豐沛' 표방은 문체반정을 일으켰던 정조, 왕의 권한 확대와 신하 권한의 주도권을 두고 했던 군신 갈등과는 관련이 없는지도 생각해볼 만하다.
*행궁광장
신풍루를 등지면 홍살문이 있고 광장이 펼쳐진다. 왼쪽 보이는 것이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고 그 뒤편이 화성박물관이다. 맞은편 작은 누각은 여민각이다.
여민각
수원 화성. 화성 중 가장 아름답다는 화홍루는 별도로 정리하였다.
행궁 매표소.
2)
화성행궁의 규모는 전체 557칸으로 다른 행궁에 비해 현저히 크며 정조 20년(1796)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로 마련된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다.
1874년(고종 11)에는 2만 냥을 들여 행궁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 때 까지도 잘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으나 구한 말 개화의 물결과 함께 수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1910년 세워지면서 행궁 일부가 파손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촬영된 사진에는 신풍루 뒤로 좌익문이 보이고 중앙문과 유여택, 정당인 봉수당과 장락당, 내당인 복내당 등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행궁 건물까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자혜의원이 도립병원으로 바뀌면서 크게 증축되었고 수원 농업시험소 등 여러 기관이 설치되고 주변에 경찰서와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1923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부근에 신풍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낙남헌 건물이 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9년에는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1991년에는 수원 의료원 건물이 이전되면서 1993년에 수원시에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2003년 복원공사가 완공되어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3) 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때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곳으로 그 어느 행궁보다 크고 웅장하였으며 활용도도 높아 경복궁의 '부궁'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곳이다. 정조 18~20년에 화성을 축성하고 팔달산 동쪽에 행궁을 건립했는데 평상시에는 유수부(지금의 시청) 관청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화성은 창룡문(동), 화서문(서), 팔달문(남), 장안문(북) 4개의 문루로 이어져 있으며, 뛰어난 건축술로 인해 세계 문화 유산으로 선정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개발 사례로도 평가받고 있다. 조선 22대 정조는 아버지 사도 세자가 뒤주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자 그 무덤을 당시 최고의 명당이라 평가받던 수원(현재의 화성시)으로 이장하였고, 능 주위에 살던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도시와 성곽을 축성하였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인용)
*화성행궁 좌익문
*좌익문. 신풍루를 지나면 바로 만나는 문이다.
*중앙문. 좌익문에 이어 중앙문을 통과하면 봉수당을 만난다.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궁이다. 가운데 통로는 어로이다.
*봉수당(奉壽堂)
1789년(정조 13) 창건/1997년 복원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을 바꾼 것이다.
건물은 정면 7칸으로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한가운데에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로를 두었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를 갖추었다. 어로와 월대는 일반 동헌에는 없고 임금이 머무는 공간에만 설치하는 시설이다. 1795년 윤 2월 13일,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가 열리던 날 봉수당 월대 앞에 넓은 무대를 설치하고 궁중연희가 편쳐졌다. 당시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수원문화재단 홈피)
봉수당. 행궁의 정전이다.
*봉수당 내부.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어좌 뒷편에 놓였던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등을 소재로 그린 일월오봉도 병풍이 보인다.
혜경궁 홍씨 회갑연 재연이다.
방 앞문을 닫아놓아 처소 안쪽은 잘 들여다 보이지 않는다.
봉수당 뒤편 행각에는 환관 궁녀들의 처소가 있다.
환관들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하였다.
등정 차비 환관. 아래 서적 '사문유취'가 흥미롭다. 이제 공부를 하다 출근 준비를 하나보다.
*나인처소. 환관이 남는 시간 책을 보는 대신 나인은 바느질을 한다.
*나인은 바느질을 하지만 궁녀는 책을 본다.
*진찬연 음식 재연.
*회갑연 기록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음식
정조는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기록으로 남겼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가 바로 그것인데, 1795년 정조(正祖)가 화성으로 행차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고, 행궁의 봉수당에서 어머니인 혜경궁(惠慶宮) 홍씨의 회갑연을 열고 다시 궁으로 돌아가는 8일간의 기록으로 총 10권 8책으로 되어 있다.
2015년 10월에는 바로 이 기록에 의거, 창경궁에서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공영 예술 형태로 재현하면서 음식도 함께 재현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음식 부분은 모아 정리하거고 재현해서 책으로 펴내는 작업도 했다. 한복려 조선왕조궁중음식 보유자(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의 <수라일기>(2018)와 이효지ㆍ정길자 외, <원행을묘정리의궤-혜경궁홍씨 회갑연>(2021) 등이 그것이다.
수원문화재단도 2018년 11월 수원전통문화관 전통식생활체험관에서 이 의궤를 근거로 봉수당진찬연 당시 혜경궁 홍씨에게 올린 자궁진어찬안의 고임음식을 재현하였다. 고임상은 백미병, 점미병, 석이병으로 이뤄진 각색병고임과 율란, 조란, 강란으로 만드는 숙실과고임, 유밀과의 일종인 다식과고임 등으로 나뉜다.
의궤에서 혜경궁이 8일간 받았다고 하는 음식은 315가지이다. 닭, 전복, 도라지, 미나리, 한약재 등으로 만들어진 ‘궁중 전복 초교탕’도 이 회갑연에서 처음 등장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회갑날은 12기의 소별미와 70가지의 음식과 42개의 상화를 올렸다.
정조는 상차림에서 “먼 곳에서 진이한 음식을 구해다 바치지 말고, 음식 맛은 백성의 풍습에 따라 할 것”을 명령했는데, 의궤에는 하층의 상차림까지 고루 나타난다. 당시 가장 비싼 음식은 약과였는데, 기름이 귀했던 당시의 식재료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 관련 신문기사 참조)
화성을 축조하면서 남긴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이어 회갑연의 기록인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는 참 많은 것을 알려준다. 조선은 과연 기록의 나라다. 기록은 정보의 전달을 넘어, 정보 생산자의 엄격함을 요구한다. 조선이 중국 왕조에 비해 곱절 이상 목숨이 길었던 이유 아닐까. 덕분에 눈앞에서 그때의 음식을 살펴볼 수 있게 되고, 전통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역사 기록이 후손을 문화 부자로 만들어준다.
다복문과 장복문. 장락당과 복래당 사이의 문
*장락당
장락당은 혜경궁이 처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침소에 들기 전의 혜경궁 홍씨
장락당 내부 회랑이 길다.
*장락당(長樂堂)
1794년(정조 18) 창건 /1997년 복원
장락당은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열면서 혜경궁 홍씨가 머물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정조는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어머니를 위해 장락궁을 지은 것을 본받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장락당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연결되어 있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장락당은 임금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무는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은 전체 13칸 규모이며, 삼면에 툇간을 두어 통행에 편하도록 했다. 온돌방은 매 칸마다 겹겹이 문을 달아 아늑하게 만들었고,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실내가 트이도록 했다. 정조는 장락당과 복내당 사이의 담장에 다복문多福門과 장복문長福門이라는 두 개의 문을 내었는데, 이를 통해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는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다. (수원문화재단 홈피)
경룡관(景龍館)
1794년(정조 18) 창건 /1997년 복원
경룡관은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상부에 지은 다락집이다. 당나라 태종 때 열여덟 명의 학사들이 임금의 시에 화답한 것을 본떠서 정조가 직접 이름을 지었다. 경룡관은 당 태종의 궁전 이름이기도 하다. 아래층 대문 이름은 지락문至樂門이다. 이는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다는 의미이다. 문의 규모는 작으나 네모난 돌기둥 네 개를 우뚝 세워 위엄을 높였다. (수원문화재단 홈피)
* 혜경궁 회갑연 진찬 모형
*유여택 앞 해시계 앙부일귀
*유여택(維與宅)
1790년(정조 14) 창건/ 1998년 복원
유여택은 수원읍을 옮긴 이듬해인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은 건물로, 화성 축성을 시작하던 1794년 가을에 증축되었다. 처음 건물은 은약헌隱若軒으로 부르다가 증축 후 이름을 바꾸었다. 유여택이란 <시경>에서 주나라의 기산岐山을 가리켜 ‘하늘이 산을 만들고 주시어 거처하게 하였다此維與宅’라는 고사를 인용해서 지은 이름이다. 정조는 유여택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화령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처음 지은 은약헌의 북쪽 1칸은 공신루拱宸樓라는 누마루였는데 증축하면서 실내에 온돌을 놓고 창호를 달았다. 현재 창호는 복원되지 않았다. (수원문화재단 홈피)
*뒤주체험?
도대체 이게 누구의 발상인가. 체험할 일이 따로 있지, 이 처참한 역사의 비극을 체험해서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참담하고 예외적인 일을 체험해서 무엇을 얻겠다는 말인가. 죽음을 애도하면서 죽음을 체험하는가. 조용히 애도하면서 역사의 교훈을 성찰해야 하는 곳이 아닌가.
돌아가신 장헌세자에게도 그 아드님 정조에게도 이런 잔인하고 참혹한 일이 있을 수 없다. 평생 아버지를 그리며 천추의 한 속에서 살다간 정조의 마음에 대못을 꽂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조임금이 살아나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할 것인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당하며 살았던 정조가 부친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어렵게 세운 이곳에서 부자를 함께 우롱하는 패륜과 망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도 기가 막히고 믿기지 않았는데, 아직도 그대로다.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희롱하며 뒤주 앞에서 술을 마셨다는 군졸들의 광기가 떠오른다. 그런데 그 광기가 너무 오래 계속된다. 범인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이래서는 안 되는, 인간 존엄성의 말살이다. 하물며 지극히 존경받는 군주의 부친 죽음을 이래서는 안 된다. 아서라.
비극의 현장에 와서 참사를 우롱하는 천박하고 잔인한 역사의식에 분개한다. 정조를 기린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능욕을 당장 멈추라!
* 외정리소(外整理所)
1796년(정조 20) 창건 /2000년 복원
1796년(정조 20) 창건 2000년 복원 외정리소는 화성에서 거행되는 국왕의 행차나 행사에 드는 모든 비용 문제를 총괄하는 곳이다.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치를 때 행사준비를 담당한 임시기관으로 만들었다. 화성 성역이 끝난 후에는 행사준비뿐 아니라 화성행궁의 수리와 군사들의 식량과 말 먹이까지 관장하였다. 1796년에 유여택 동쪽의 빈의문 밖에 건물을 짓고, 대문에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현판을 걸었다. 마루로 된 대청 6칸을 중심으로 주위에 행랑과 창고를 두었다. (수원문화재단 홈피)
이외에 복내당(福內堂) 낙남헌(洛南轩), 득중정(得中亭), 노래당(老來堂), 미로한정(未老閒亭), 화령전 등등 중요건물을 둘러보지 못하였다. 특히 낙담헌은 일제 때 훼손되지 않은 원형 건축물인데, 이번에 사진으로 못 담아온 것이 많이 아쉽다. 후일을 기약한다.
2. 둘러본 후
행궁은 세종 이래 최고의 군주라 평가되는 성군 정조의 효심과 인간적 고뇌가 담긴 곳이다. 정조는 백성을 동원하는 데 최대한 생업을 배려하는 애민의 정신을 실현하였다. 화성 노역에 임금을 줘서 분발해준 백성들 덕분에 예상된 공기를 1/4로 당겨 건설했다.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전할 때도 그러하였다. 심지어 업무를 보는 신하들에게 민폐를 방지하기 위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게 했다. 인부들에게는 급료를 배로 줬으며, 비용도 상당부분 궁중의 자금으로 충당했다. (정조실록 13.7.11.)
뛰어난 능력에 애민정신을 가졌으나 복잡한 여건으로 수를 누리지 못하고 세종만큼 치적도 이루지 못했다. 일설에는 화성행궁은 정조가 일찌기 업무에서 은퇴하고 말년을 보내기 위해 건설했다고도 한다. 그의 인간적인 고뇌가 그대로 담겨 있는 곳이다.
조선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민주화가 강력하게 이루어졌던 곳이다. 전국 곳곳에서 상소가 이처럼 많이 도달하여 장삼이사가 의견을 내는 나라는 아마도 조선 말고는 더 없을 것이다. 모두의 의견을 조화롭게 수렴해야 하는 왕의 위치가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거기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안고 가야 했고, 노론의 위세에 시달리고, 천주학과의 문제에도 부딪쳐야 했다. 왕위 등극 전 세자 시절에는 시해의 위험 때문에 몇 달씩이나 옷을 입은 채로 자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며 화성행궁, 수원화성 외에 수많은 치적을 이룩했다. 무엇보다 규장각을 설치해 학문의 수준을 높인 것은 주목해야 할 문화적 공적이 아닌가 싶다.
이곳에 오면 많은 고뇌를 어느 정도 벗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못다 이룬 개혁의 열망을 우리가 이루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진정으로 정조를 쉬게 할 수 있는 길이 그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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