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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노인행 / 성간
老人行 成侃
隴草萋萋雉雙飛(농초처처치쌍비) 밭두둑에 풀 무성하고 꿩은 쌍쌍이 나는데
隴邊老人長嘆息(농변로인장탄식) 밭두둑 가에 노인이 길게 탄식하네
自道余生年七十(자도여생년칠십) 스스로 말하길, “내 나이 일흔인데
手脚凍皴面深黑(수각동준면심흑) 손발은 얼어 터지고 얼굴은 시커멓네
男婚女嫁知幾時(남혼녀가지기시) 아들딸 혼인시킬 날이 언제일까?
短衣襤幓纔過膝(단의람삼재과슬) 짧은 옷은 누덕누덕 겨우 무릎을 가릴 정도네
前年召募度黃沙(전년소모도황사) 지난해 병사로 소집되어 누런 모래를 지나갔는데
萬死歸來鬢如雪(만사귀래빈여설) 많은 죽을 고비 넘기고 돌아오자 귀밑머리 눈과 같네
今年把鋤事耕耨(금년파서사경누) 금년에 호미 잡고 밭 갈며 김매는데
石田䂽确牛蹄脫(석전도각우제탈) 돌밭에 자갈 많아 소 발굽이 벗겨졌네
牛蹄脫知奈何(우제탈지내하) 소 발굽 벗겨져도 어찌하랴?
獨坐茫然心斷絶(독좌망연심단절) 홀로 멍하게 앉았으니 마음이 끊어질 듯하네
〈감상〉
이 시는 작자 자신은 개입하지 않고 제삼자인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당대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시이다.
『필원잡기(筆苑雜記)』에 간략한 생평(生平)이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본관은 창녕으로, 자는 화중(和仲), 호는 진일재(眞逸齋)이며 단종 원년에 급제하였다. 공혜공(恭惠公) 성념조(成念祖)의 아들로 어릴 적부터 책을 널리 읽어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집현전에 들어가 오래도록 서각(書閣) 안에 앉아서 날을 다하고 밤새도록 여러 책들을 다 열람하였다. 그래서 같은 직위에 있는 동료들이 독서벽(讀書癖)이 있다고 기롱할 정도였다. 독서 때문에 과로하여 파리해지고 병이 되어 30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벼슬은 홍문관 수찬에 이르렀으며 문집(文集)이 세상에 전한다
(昌寧人(창녕인) 字和仲(자회중) 號眞逸齋(호진일재) 魯山元年登第(노산원년등제) 恭惠公念祖之子(공혜공념조지자) 自幼博覽廣記(자유박람광기) 無書不讀(무서부독) 入集賢殿(입집현전) 長坐閣中(장좌각중) 窮日盡夜(궁일진야) 閱盡群書(열진군서) 同列以書淫傳癖譏之(동렬이서음전벽기지) 讀書過勞(독서과로) 消瘦成疾(소수성질) 三十而夭(삼십이요) 官至弘文館修撰(관지홍문관수찬) 有集行于世(유집행우세)).”
허균은 『성수시화』에서,
“우리나라의 시 중에 고시(古詩)를 본받은 것이 없다. 오직 성화중만이 안연지(顔延之)·도연명(陶淵明)·포조(鮑照) 세 사람의 시에 의작하여 깊이 고시의 법을 체득하였고, 그의 여러 오언절구들이 당나라의 악부체를 터득하였다. 이분에 의지해 마침내 적막함을 면하게 되었다
(東詩無效古者(동시무효고자) 獨成和仲擬顏陶鮑三詩(독성화중의안도포삼시) 深得其法(심득기법) 諸小絶句得唐樂府體(제소절구득당악부체) 賴得此君(뇌득차군) 殊免寂寥(수면적요)).”
라고 하여, 성간(成侃)을 고시(古詩) 작가로 지목하고 또한 조선 전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지었다고 평하고 있다. 성간(成侃)의 아우 성현(成俔)은 고시(古詩) 창작 운동을 벌이는데, 실은 형인 성간(成侃)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성현(成俔)은 성간(成侃)에게 시를 배웠음).
이러한 고시(古詩) 창작은 이후 유희경(劉希慶)·김종직(金宗直)·유호인(兪好仁)·조위(曺偉)·차천로(車天輅)·허균(許筠)으로 이어진다.
〈주석〉
〖隴〗 밭두둑 롱(농), 〖萋〗 무성하다 처, 〖皴〗 트다 준, 〖襤〗 누더기 람, 〖幓〗 찢어진 옷 삼, 〖纔〗 겨우 재, 〖膝〗 무릎 슬, 〖鬢〗 귀밑머리 빈, 〖把〗 잡다 파, 〖鋤〗 호미 서, 〖耨〗 김매다 누, 〖䂽〗 자갈땅 도, 〖确〗 자갈땅 각, 〖蹄〗 굽 제
각주
1 성간(成侃, 1427, 세종 9~1456, 세조 2):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화중(和仲), 호는 진일재(眞逸齋). 성임(成任)의 아우이고 성현(成俔)의 형이다. 문벌을 자랑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다. 유방선(柳方善)의 문인으로 1453년(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집현전에 들어가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30세에 병으로 죽었다. 용모가 추하고 성격이 괴팍해서 웃음거리였다고 하며, 훈구파의 폐쇄적인 의식에 불만을 품은 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경사(經史)는 물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두루 섭렵하여 문장·기예(技藝)·음률·복서(卜筮) 등에 밝았다. 강희안에게 준 시 「기강경우(寄姜景愚)」에서는 천고에 신기함을 남길 예술은 어떤 것인가 묻고, 개성 있는 표현을 모색하면서 문학과 미술이 조화되는 경지를 추구했다. 「신설부(新雪賦)」에서도 문학하는 자세에 관심을 보였다. 패관문학인 「용부전(慵夫傳)」에서는 세상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맞설 자신이 없으므로 게으름에 빠져 마음의 위안을 찾는다고 했다. 저서로는 『진일재집』이 있다.
수양산 / 성간
首陽山 成侃
其三(기삼)
夢入首陽山(몽입수양산) 꿈속에 수양산에 들어갔더니
愁雲憑憑欲吼怒(수운빙빙욕후노) 근심의 구름 성난 듯 울부짖으려 하고
靑兕黃熊怒我啼(청시황웅노아제) 푸른 외뿔소와 누런 곰이 나에게 성내며 으르렁거려
萬丈層崖緣細路(만장층애연세로) 까마득한 절벽 위에 가느라단 길을 따라 달아나네
不知故人在何處(부지고인재하처) 친구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萬水千山日欲暮(만수천산일욕모) 많은 물과 산에 해가 저물어 가네
嗚呼(오호) 아!
忽然覺來天欲昏(홀연각래천욕혼) 갑자기 깨어났을 때 하늘이 저물어 가려 하니
萬慮關心淚如雨(만려관심루여우) 온갖 시름이 일어나 눈물이 비 오듯 하네
〈감상〉
이 시는 꿈속에 수양산에 들어간 것을 묘사한 시로, 꿈을 통해 현실세계에서 소외된 불안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낮에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수양산에 들어갔다. 그런데 근심의 구름이 성난 듯 울부짖으려 하고, 푸른 외뿔소와 누런 곰이 나에게 성내며 으르렁거려 그들을 피하려고 까마득한 절벽 위 가느다란 길을 따라 달아났다. 목적지인 친구의 집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는데, 수없이 쌓인 첩첩산중의 물과 산에 해가 저물어 간다. 불안이 극도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깨어나니, 하늘이 저물어 가려 한다. 꿈속에서도 저물어 가고 있고 현실로 돌아온 세계 역시 저물어 가고 있어, 온갖 시름이 일어나 눈물이 비 오듯 한다.
「본전(本傳)」에 중국 사신도 성간(成侃)의 시를 보고 탄복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중국 사신 예겸이 사명을 띠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 성진일이 남을 대신하여 그를 전송하는 시를 지었다. 예겸이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면서, ‘동국 문장이 중국보다 못지않다.’ 하였다
(華使倪謙奉使東來(화사예겸봉사동래) 成眞逸代人作送行詩(성진일대인작송행시) 倪謙見之(예겸견지) 不覺屈膝曰(불각굴슬왈) 東國詞藻(동국사조) 不減中國矣(불감중국의)).”
〈주석〉
〖憑憑(빙빙)〗 왕성한 모양. 〖吼〗 울다 후, 〖兕〗 외뿔소 시
대우제청주동헌 / 성현
帶雨題淸州東軒 成俔
畫屛高枕掩羅幃(화병고침엄라위) 그림 병풍 속에 베개 높이고 비단 휘장으로 가리니
別院無人瑟已希(별원무인슬이희) 별원에 인적 없고 비파 소리 벌써 끊겼네
爽氣滿簾新睡覺(상기만렴신수각) 시원한 기운이 주렴에 가득해 막 잠이 깨었는데
一庭微雨濕薔薇(일정미우습장미) 온 뜰의 보슬비가 장미꽃을 적시네
〈감상〉
이 시는 비를 마주하고 청주 동헌에서 쓴 것으로, 화려하게 수놓은 병풍과 비단 휘장 안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 가진 자의 여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관각(館閣)의 시이다.
그림 같은 병풍과 비단 휘장 속에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자는데, 별당에는 인기척도 없고 비파소리도 벌써 끊어져 들리지 않는다. 비가 오고 있어 상쾌한 기운이 드리운 주렴에 가득해 막 잠에서 깨니, 온 뜰에 내린 가랑비에 장미가 촉촉이 젖어 들고 있다.
이처럼 15세기 관각시인(館閣詩人)인 성현(成俔)과 서거정(徐居正)의 시에는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으나, 16세기 관각시인 이행(李荇)과 박은(朴誾)의 시에서는 사화(士禍)로 인한 정치적 문제 때문에 그러한 여유를 얻지 못하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석〉
〖幃〗 휘장 위, 〖睡〗 자다 수, 〖薔薇(장미)〗 장미꽃.
각주
1 성현(成俔, 1439, 세종 21~1504, 연산군 10): 본관은 창녕. 자는 경숙(磬叔), 호는 허백당(虛白堂)·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국오(菊塢). 서거정(徐居正)으로 대표되는 조선 초기의 관각문학(館閣文學)을 계승하면서 민간의 풍속을 읊거나 농민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노래하는 등 새로운 발전을 모색했다. 1462년 식년문과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가 된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사록(司錄)이 되었다. 1468년 예문관수찬·승문원교검을 겸했고, 1485년 첨지중추부사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성·대사간·동부승지·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488년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을 거쳐 1493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여말선초의 정치사·문화사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의 후예로 비교적 평탄한 벼슬생활을 했으나 공신의 책봉에서는 빠지는 등 정치의 실권과는 거리가 있었다. 62세 때는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大提學)에 올라 이 시기의 문풍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그의 시론의 특징은 이규보와 서거정의 기론(氣論)을 계승·발전시키는 한편 다양한 미의식의 구현을 주장한 점이다. 또한 사회적 효용을 중시하는 각도에서 정치적 득실에 대한 풍간(諷諫)의 작용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그의 애민시(愛民詩) 계열 작품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매우 다양하다. 형식적 측면에 있어서 고시(古詩)·율시(律詩)·악부(樂府)·사부(辭賦) 등의 양식을 고루 창작했는데, 그중에서도 고시(古詩) 창작에 관심을 가졌다. 주제 면에서도 사회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관리나 승려 등의 부패와 횡포를 비난하고, 그들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실상을 묘사했다. 우리나라의 풍속을 소재로 한 국속시(國俗詩) 계열의 작품을 썼으며, 명나라 여행 중에 쓴 시를 모아 엮은 「관광록(觀光錄)」은 그의 이름을 중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일상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도가적 초월을 지향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자연에서의 즐거움과 한적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형인 성임(成任)과 성간(成侃)은 서거정과 절친하여 서거정이 확립한 관각문학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했고, 역시 시를 잘 썼는데, 그 두 사람은 성현(成俔)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문장, 시, 그림, 인물, 역사적 사건 등을 다룬 잡록 형식의 글 모음집인 『용재총화(慵齋叢話)』를 저술했으며, 장악원의 의궤(儀軌)와 악보를 정리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유자광 등과 함께 편찬했다. 문집으로 『허백당집(虛白堂集)』이 전한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당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었고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시호는 문재(文載)이다.
전가사 십이수 / 성현
田家詞 十二首 成俔
其十(기십)
良月就盈天地肅(양월취영천지숙) 좋은 달이 찼으니 천지가 숙연하고
萬稼登場高似屋(만가등장고사옥) 온갖 곡식 수확되어 집처럼 높네
夜寒碓杵隱晴雷(야한대저은청뢰) 추운 밤 이집 저집 옷 다듬는 소리
香粳浮浮炊白玉(향갱부부취백옥) 향기로운 메벼 무럭무럭 김을 내네
富者少稅豐囷倉(부자소세풍균창) 부자는 세금 적어 곳간이 풍부해도
貧者輸租反不足(빈자수조반부족) 빈자는 세를 내기도 도리어 부족하네
貧家富家愁與歡(빈가부가수여환) 빈가와 부가의 시름과 기쁨이
只在區區一寸腹(지재구구일촌복) 다만 구구한 한 치 배에 있네
黽勉餬口生理忙(민면호구생리망) 애써 입에 풀칠할 생계로 분주한데
又披雪絮妝衣裳(우피설서장의상) 또 하얀 솜을 뜯으며 옷 마련을 해야 하누나
〈감상〉
이 시는 시골집을 노래한 것으로, 빈가(貧家)와 부가(富家)의 불합리한 현실을 노래한 사회시(社會詩)이다.
천지가 숙연해지는 가을이 와서 곡식을 수확하니, 곡식이 집채처럼 쌓였다. 추운 밤에 겨울옷을 준비하느라 공이소리가 맑은 하늘에 우레처럼 들리고, 수확한 향기로운 메벼로 만든 떡은 시루에서 익어 가고 있다. 그런데 수확한 곡식을 세금 내는 데 있어 부자는 조금 내니 곳간이 곡식으로 넘쳐 나고, 가난한 자는 세금으로 내기에도 부족한 형편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의 시름과 기쁨이란 한 치의 배를 채우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애써 호구(糊口)할 계책을 세우기도 분주한데, 솜을 매만지며 옷을 지어야 한다.
〈주석〉
〖良月(양월)〗 7월의 이명(異名)으로, 가을. 〖稼〗 익은 벼 가, 〖碓〗 방아 대, 〖杵〗 공이 저, 〖粳〗 메벼 갱,
〖浮浮(부부)〗 기(氣)가 상승하는 모양. 〖炊〗 불다 취, 〖囷〗 곳집 균, 〖倉〗 곳집 창,〖區區(구구)〗 보잘 것 없는 모양.〖黽〗 힘쓰다 민, 〖餬〗 죽을 먹다 호, 〖忙〗 바쁘다 망, 〖披〗 열다 피, 〖絮〗 솜 서, 〖妝〗 꾸미다 장
궁촌사 / 성현
窮村詞 成俔
玄雲承空朔風怒(현운승공삭풍노) 먹구름 하늘에 가득하고 북풍이 휘몰아치는데
彩鴷啄啄溪邊樹(채렬탁탁계변수) 시냇가 나무에선 딱따구리가 딱딱 쪼네
山下茅廬小縮蝸(산하모려소축와) 산 밑의 초가 조그만 달팽이집만 한데
三男兩老同家住(삼남량로동가주) 세 아들과 두 늙은이가 한집에서 사네
一男荷斧撏薪蒸(일남하부잠신증) 한 아들은 도끼 메고 나무하러 가고
一男跡兔踰丘陵(일남적토유구릉) 한 아들은 토끼자국 밟아 언덕 넘어가네
最小一男啼索飯(최소일남제색반) 가장 어린 애는 울며 밥 달라 하고
姑坐補襪翁綯繩(고좌보말옹도승) 할멈은 앉아서 버선 깁고 할아버진 새끼 꼬네
土榻微溫煙火足(토탑미온연화족) 구들이 미지근하니 불은 든든히 땐 듯
瓦釜融融泣豆粥(와부융융읍두죽) 질가마에 와글와글 팥죽이 끓네
牛鳴齕箕鷄在榤(우명흘기계재걸) 소는 울며 콩깍질 씹고 닭은 홰에 있는데
人物凶年生理拙(인물흉년생리졸) 사람·짐승 흉년에 생계가 구차하네
兒牽翁衣翁撫頂(아견옹의옹무정) 애는 늙은이 옷을 끌고 늙은인 이마를 만지며
出門同看滿山雪(출문동간만산설) 문에서 나와 함께 산에 가득한 눈을 바라보누나
〈감상〉
이 시는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농촌의 궁벽한 삶을 노래한 사회시(社會詩)이다.
성현(成俔)은 「풍소궤범서(風騷軌範序)」에서,
“대저 시는 물과 나무에 비유하면 원류와 뿌리이고, 율시는 가지와 지류이다. 시 삼백 편은 요원하니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이고, 한나라 소무(蘇武)와 이릉(李陵)은 처음으로 오언시를 지었다. ······이 뒤로부터 작자가 잇달아 나와 위·진·송·제·수·당에 이르러 극성하니, 이때에는 옛날과도 그다지 멀지 않아 원기가 아직 온전하였다. 그러므로 그 말이 웅혼 아건하고 법도에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법도가 있었다. 당나라에 이르러 또 율시를 짓게 되자 황색과 흰색을 짝지우고 병렬과 대우로 법도를 다투니, 화려한 수식은 성대하되 구법은 성기고 단련은 정밀하되 성정은 달아나고 기국이 좁아 음절이 촉급하니, 순박함을 어지럽히고 원기를 깎아 내어 날로 위축되어 갔다.
대저 고시로부터 율시를 배우기는 쉽지만 율시로부터 고시를 배우기는 어려우니, 마치 가지나 잎이 뿌리를 비호할 수 없고 지류가 원류를 당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에 시도(詩道)가 대성하여 대대로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다 율시만을 알고 고시를 알지 못한다.
그 사이에 혹 아는 자가 있더라도 대우의 병폐를 면하지 못했고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기상이 없었으니, 추녀인 모모(嫫母)의 자질로 미인이 서시(西施)의 찌푸림을 본받는 격이라 실로 오늘날의 고질이지만 치료할 수 없다
(譬之水木(비지수목) 則根本淵源也(칙근본연원야) 而律乃柯條支派也(이률내가조지파야) 詩三百篇(시삼백편) 邈乎不可尙已(막호불가상이) 漢蘇子卿李少卿(한소자경이소경) 始製五字(시제오자) ······自是厥後(자시궐후) 作者繼出(작자계출) 歷魏晉宋齊隋唐極矣(역위전송제수당극의) 當是時也(당시시야) 去古未遠(거고미원) 元氣尙全(원기상전) 故其詞雄渾雅健(고기사웅혼아건) 不務規矱(불무규확) 而自有規矱(이자유규확) 至唐又製律詩(지당우제률시) 媲黃配白(비황배백) 倂儷對偶競趨繩尺(병려대우경추승척) 華藻盛而句律疏(화조성이구률소) 鍛鍊精而性情逸(단련정이성정일) 氣局狹而音節促(기국협이음절촉) 淆淳散朴(효순산박) 斲喪元氣(착상원기) 而日趨乎萎薾(이일추호위이) 大抵自古而學律易(대저자고이학률역) 自律而學古難(자률이학고난) 如枝葉不能庇本根(여지엽불능비본근) 支派不能當源流也(지파불능당원류야) 我國詩道大成(아국시도대성) 而代不乏人(이대불핍인) 然皆知律(연개지률) 而不知古(이부지고) 其間雖有能知者(기간수유능지자) 未免有對偶之病(미면유대우지병) 而無縱橫捭闔之氣(이무종횡패합지기) 以嫫母之資(이모모지자) 而效西子之顰(이효서자지빈) 實今日之痼疾(실금일지고질) 而不能醫者也(이불능의자야)).”
라고 하여, 당대 시단의 문제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시(古詩)를 창작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형인 성간(成侃)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주석〉
〖朔〗 북방 삭, 〖鴷〗 딱따구리 렬, 〖啄〗 쪼다 탁, 〖縮〗 오그라들다 축, 〖蝸〗 달팽이 와, 〖撏〗 따다 잠,
〖蒸〗 섶나무 증, 〖跡〗 밟다 적, 〖襪〗 버선 말, 〖綯〗 꼬다 도, 〖繩〗 새끼 승, 〖榻〗 침대 탑, 〖融融(융융)〗 푹 익는 모양. 〖齕〗 씹다 흘, 〖箕〗 콩대 기, 〖榤〗 홰 걸
등조령 / 유호인
登鳥嶺 兪好仁
凌晨登雪嶺(능신등설령) 이른 새벽에 눈 내린 고개에 오르니
春意正濛濛(춘의정몽몽) 봄뜻이 참으로 흐릿하구나
北望君臣隔(북망군신격) 북으로 바라보니 군신이 막히었고
南來母子同(남래모자동) 남으로 오니 어미 자식이 함께하네
蒼茫迷宿霧(창망미숙무) 흐릿한 밤 지난 안개에 헷갈리고
迢遞倚層空(초체의층공) 높고 험한 층층 하늘에 기대네
更欲裁書札(갱욕재서찰) 다시 편지를 쓰려 하나니
愁邊有北鴻(수변유북홍) 시름 가에 북으로 가는 기러기 있네
〈감상〉
이 시는 조령에 올라 지은 시로, 임금에 대한 충성과 어버이에 대한 효도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 이와 관련된 일화(逸話)가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호인이 성종조(成宗朝)에 문장을 잘한다 하여 가장 총애를 받았다. 어버이가 늙어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므로, 수찬으로 있다가 거창현감(居昌縣監)에 제수되고, 교리(校理)로 있다가 의성(義城) 원에 제수되었으며, 최후에는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또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그 모친을 서울로 태워 오게 하였는데, 병들어 오지 못하였다. 임금이 친필로 이조에 내리기를, ‘호인은 어버이 섬길 날이 짧으니, 그 고향 이웃인 진주 목사로 제수하라.’ 하였는데, 이조에서 아뢰기를, ‘진주 목사를 까닭 없이 중간에 갈아서 법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때 마침 결원된 합천으로 제수하였다. 호인이 비록 외직에 있었으나, 임금이 그로 하여금 해마다 저술한 시문(詩文)을 초록하여 올리게 하고는 그때마다 표창하여 장려하였으며, 그의 모친에게 음식물을 내려 주었다.
당시 매계(梅溪) 조위(曹偉)도 역시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외직으로 나갔었는데, 호인과 같이 임금의 총애를 입어 보통 사람과 특이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兪好仁在成廟朝(유호인재성묘조) 以文章最承恩寵(이문장최승은총) 親老乞養(친로걸양) 由修撰除居昌(유수찬제거창) 由校理除義城(유교리제의성) 最後以掌令(최후이장령) 又乞歸養(우걸귀양) 上使之輦母來京(상사지련모래경) 病不能致(병불능치) 御札下詮曹曰(어찰하전조왈) 好仁事親日短(호인사친일단) 可除其隣晉州牧使(가제기린진주목사) 銓曹辭以不可無故經遞(전조사이불가무고경체) 以毀成憲(이훼성헌) 乃待陜川闕除之(내대합천궐제지) 好仁雖在外任(호인수재외임) 上令歲抄錄進所著詩文(상령세초록진소저시문) 輒褒美(첩포미) 賜母食物(사모식물) 時曹梅溪偉(시조매계위) 亦爲養補外(역위양보외) 與好仁同被睿渥(여호인동피예악) 逈出常數(형출상수) 人皆榮之(인개영지)).”
비슷한 이야기가 『용천담적기』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극기(克己)요, 호는 뇌계(溪)로 점필재(佔畢齋)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성종 때 급제하였다. 시를 지으면 맑고 고우며 단아하고 건실하여 성종에게 매우 중망을 받아 저술한 것을 등사하여 바치게 하였다. 일찍이 장령이 되었다가 어버이가 늙음으로 인하여 합천 수령으로 갔다가 거기서 죽었다.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어버이를 위하여 봉양하기를 주청하여 수찬에서 산음 수령을 제수받고, 교리에서 의성(義城) 수령을 제수받고, 최후로는 장령으로서 또한 돌아가 부모 봉양하기를 주청하였다. 임금께서는 그의 어머니를 수레에 태워서 서울에 오게 하였으나 병으로 오지 못하게 되니, 임금은 어찰(御札)을 이조에 보내어 이르기를, ‘호인(好仁)은 어버이 섬길 날이 짧으니 그 이웃인 진주(晉州) 수령을 제수하라.’ 하였다.
이조에서는 까닭 없이 바로 갈면 기존의 법과 어긋나므로 불가하다고 아뢰니, 이에 합천(晉州)의 수령이 비게 됨을 기다려서 이를 제수하였다. 임금께서, 지은 시문을 기록해서 올리게 하여 곧 칭찬하고 그의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내리시니, 사람마다 영광스럽게 여겼다. 성종께서는 글을 좋아하시어 유림을 사랑하고 권장하시어서 한때 문장으로 으뜸이요, 걸출한 선비들로 홍문관을 빛나게 하였는데, 호인이 늙은 어버이를 봉양한다는 것으로 외직을 주청하여 나가게 되었다. 일찍이 올린 시고(詩稿)에, ······하는 구절이 있었다.
임금께서 조용히 칭찬하며 읊조리기를, ‘호인은 몸은 비록 외지에 있으나 마음으로는 임금을 잊지 않고 있구나.’ 하였다
(高靈人(고령인) 字克己(자극기) 號溪(호뇌계) 受業於佔畢齋門下(수업어점필재문하) 我成廟朝登第(아성묘조등제) 爲詩淸厲雅健(위시청려아건) 大爲成廟所重(대위성묘소중) 常令繕寫所著以進(상령선사소저이진) 嘗爲掌令(상위장령) 以親老守陜川而卒(이친로수합천이졸) 有集行于世(유집행우세) 爲親乞養(위친걸양) 由修撰除山陰(유수찬제산음) 由校理除義城(유교리제의성) 最後以掌令又乞歸養(최후이장령우걸귀양) 上使之輦母來京(상사지련모래경) 病不能致(병불능치) 御札下銓曹曰(어찰하전조왈) 好仁事親日短(호인사친일단) 可除其隣晉州(가제기린진주) 銓曹辭以不可無故徑遞(전조사이불가무고경체) 以毀成憲(아훼성헌) 乃待陜川之闕除之(내대합천지궐제지) 上令錄進所著詩文(상령록진소저시문) 輒褒美(첩포미) 賜母食物(사모식물) 人皆榮之(인개영지) 我成廟好文(아성묘호문) 寵奬儒林(총장유림) 一時文章魁傑之士(일시문장괴걸지사) 彪炳玉署(표병옥서) 好仁以親老乞外(호인이친로걸외) 嘗進詩稿(상진시고) 有北望君臣隔南來母子同之句(유북망군신격남래모자동지구) 上從容賞詠曰(상종용상영왈) 好仁身雖在外(호인신수재외) 心不忘君矣(심불망군의)).”
〈주석〉
〖凌晨(능신)〗 맑은 새벽. 〖濛〗 흐릿하다 몽, 〖滄茫(창망)〗 흐릿하여 맑지 아니한 모양. 〖迢遞(초체)〗 높고 험한 모양.
각주
1 유호인(兪好仁, 1445, 세종 27~1494, 성종 25):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뢰계(溪).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합격하고, 147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1480년 거창현감이 되었다. 이어 공조좌랑·검토관을 거쳐, 1487년 노사신(盧思愼) 등이 찬진한 『동국여지승람』 50권을 다시 정리해 53권으로 만드는 데 참여했다. 그 뒤 홍문관교리로 있다가 1488년 의성현령으로 나갔으나, 백성의 괴로움은 돌보지 않고 시만 읊는다 하여 파면되었다.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군수로 나갔다가 1개월도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시·문장·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삼절(三絶)로 불렸다. 특히 성종의 총애가 지극했는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외관직(外官職)을 청하여 나가게 되자 성종이 직접 시조를 읊어 헤어짐을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