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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의 세계 ㉚-2
제6장 대승불교와 굽타기 이후의 불교 – 인도 불교의 성숙과 쇠퇴
제2절 굽타 시대의 불교 – 승원 내의 부파와 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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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 승려가 본 굽타 시대의 승원과 불교
불교의 힌두화에 대하여는 다음 절에서 다시 검토하기로 하겠지만, 이 시대 이후로 승원은 예배당∙조리실∙식당∙화장실∙경행처 등을 완비하여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가람(상가 아라마)의 형식을 완비해 간다. 상류층 인사들의 토지나 재물의 기부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교단은 장원을 배경으로 경제적 풍요를 자랑하게 되었다.
예컨대 5세기 초엽에 인도에서 공부한 법현은 마투라에 대한 기술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처가 열반한 후, 모든 국왕∙장자∙거사는 중승(衆僧)들을 위하여 정사를 세우고 가옥∙택지∙전답∙건물이나 소∙송아지를 공양하여 이를 책에 기록하였다. 후대의 왕들이 이 일을 서로 전하여 감히 폐지하는 자 없어서 현재까지도 끊어지지 않는다. 중승들이 거처할 방이나 음식∙옷∙이불이 결핍되는 일은 없으며, 이는 어디서나 마찬가지이다. 중승들은 공덕을 베푸는 것을 일상의 일로 삼고, 독경과 좌선을 행한다. … … (중략) … …
중승의 거주처는 사리불탑, 목련탑, 아난탑 및 아비담∙율∙경탑 등이 있다. 안거 후의 한달 동안에 만복을 비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권장하여 승려를 공양하고 비시장(非時獎 : 어느 때나 먹을 수 있는 특별상비약)을 베푼다.
중승은 많이 모여서 설법을 행한다. 설법이 끝나면 사리불탑을 공양하고 갖가지 향과 꽃을 바친 다음, 밤새도록 등불을 켠다. 그리고 연기자로 하여금 사리불이 바라문교도였을 때 부처에게 찾아 와서 출가를 구한 인연을 연출하게 한다. 그 밖에 대목련∙대가섭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 … (중략) … … 아비담사는 아비담을 공양하고 율사는 율탑을 공양한다. 이렇게 해마다 한 번씩 공양하는데, 각각 그 날짜가 정해져 있다. 마하연(摩訶衍 : 대승) 사람들은 곧바로 반야바라밀∙문수사리∙광세음(光世音) 등을 공양한다.
중승의 안거가 끝나면 장자∙거사∙바라문들은 사문에게 필요한 옷가지 등을 공양하며, 중승도 또한 법을 보시한다. 부처가 열반한 이래로 중승이 지켜온 위의 법칙은 대대로 이어져 끊기기 아니한다.“ (「법현전」)
법현을 비롯한 중국 승려들의 기록은 비교적 사실에 충실하여, 당시의 불교 교단이 처하고 있던 상황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알려 준다. 즉 위와 같은 기록에서 우리는 승원의 풍족함과 각종 탑을 중심으로 하는 공양, 그리고 조사에 대한 공양이 연중행사로 거행되었던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특정한 공양일에 직업적인 연기자가 와서 연극을 공연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비구로 하여금 가무음곡에 어울리지 못하게 한 율전의 규정과 무척 동떨어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힌두 세계에서 보통 행해지던 푸자의 방식이 불교에 유입된 것으로서 불교의 힌두화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또 그러한 불교행사에는 바라문을 비롯한 재가신자들이 참가했으며, 비구는 그들에 대하여 법을 설함으로써 법 보시와 재물 보시가 교환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불교 교단이 기증받은 전답∙원림∙농노∙가축 등은 문서에 기록되어 국가 권렦에 의한 보호를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서력 기원을 전후하여 서부 데칸 지방의 석굴에서 본 바와 같은 교단의 형태가 당시에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더욱 일반화 되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3. 비문으로 본 승원 생활의 실태
중국 승려의 기술은 비문에 의해서도 확인을 할 수가 있다. 당시의 불교 승원이 영위해 나가던 생활의 실태는 각지에 남아 있는 봉헌 명문 중에서 몇몇 사례만을 살펴보아도 곧 알 수 있다. - 이하의 번역은 시즈야 마사(靜谷正雄) 교수에 의함 -
산치 석각(石刻) 명문(412~413) - 1개 촌락과 25디나라의 금화를 기부하고, 이자의 절반으로 5명의 비구에게 식사를 공양한다. 그리고 라트나 그리하(보전, 寶殿 : ‘3보의 집’이라는 뜻으로 대탑을 가리키는 것인 듯함)에서 등불을 밝힌다. 절반의 이자로는 5명의 비구에 대한 식사 보시 이외에도 등불을 밝히는 비용에 충당한다. 이 보시는 찬드라굽타의 복덕을 성취시키기 위함이다.
동일한 산치 석각 명문(450~451) - 영원히 기부를 행하며 이자로는 매일 비구 1인의 식사와 등불 비용을 충당한다. 부모를 위한 기부.
왈라(Waḷā, 카티아와르 지방)에서 출토된 동판 명문(535~536) - 쉬바파와 비쉬누파 힌두교도인 지배자 4형제가 양친의 복덕 증대와 내세와 현세에서의 자신들의 행복을 위하여 누이동생의 딸인 우바이가 세운 비하라 안의 불세존과 성스러운 비구 상가 앞에 한 마을을 보시하여 비하라의 수리 및 향∙등불∙기름∙꽃∙음식물∙약품∙의복의 구입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바구 석굴의 기부 명문 - “양친과 자기 자신의 공덕 증대를 위하여” 이 “비하라에 다시라카 팔리의 파타카 안에 있는 한 마을을 아그라하라로서 공여한다.” 이것은 “불세존(을 공양하기 위한) 향∙꽃 등 공양물의 조달과 구빈원(救貧院)의 유지, 승원의 수리, (이 승원에 거처할) 사방에서 오는 성스러운 비구 상가에 대한 의복∙음식∙의약품∙간병∙침구∙앉을 자리 등의 공급을 위함”이며, “이 보시에 대하여 그 부하나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도 방해를 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다.
6~7세기의 문자로 쓰여진 보드가야의 난간의 입석(笠石) 명문은 백 마리의 암소를 기증함으로써 버터 기름을 사용하는 하나의 등불이 부처님을 위해 기부될 것임을 말하고, 버터유(由) 등불을 대대로 기부한다는 양도서를 발행하고 있으며, 또 토지가 확장된 사실도 기재하고 있다.
구나이가르(동부 벵갈) 마을에서 출토된 동판 비문은 507~508년 것으로서 바이니야굽타왕 – 마하데바, 즉 쉬바신의 신봉자 –이 신하에게 명령하여 그의 양친과 그 자신의 공덕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칸테다다카 마을에서 11파타카에 달하는 미개간지를 아그라하라로 증여케 했다. 이는 불퇴전의 대승 비구 상가의 소유로 기부한 것으로서 “세존에 대하여 하루에 세 번씩 향수∙꽃∙등불∙향을 계속해서 바치고, 비구 상가의 의복∙음식∙침구∙좌석∙의약품 등을 공양하며, 비하라의 파손 수리를 위하여 기증한 것”이었음을 기록해 놓고 있다.
말라르(Mallar) 마을에서 출토된 동판 명문은 7세기 전반 것인데, 쉬바 신의 신자인 왕이 카이라사프라 마을의 바라문들에게 공양한 다음에 마을 주민들과 촌장∙세무관∙관재관(管財官) 등의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린 사실을 기재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이 토지에 있는 ‘작은 승원에 거주하는 성스러운 사방의 비구 상가’에 증여하고 특권을 부여한 사실과 이러한 기부 행위가 왕의 양친과 자신이 공덕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며, 마을 관리들은 왕의 명령을 충실히 실천하여 세금으로 징수한 수입을 비구 상가에게 제공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마투라(자마르푸르)에서 출토된 명문은 상가의 후원자인 상인들이 조리용 작업대를 기부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날란다 1호 승원에서 출토된 석각 명문(8세기 전반?)은 바라디탸가 불당∙향수∙등불 등을 영구히 기부하고 비구 상가의 4인 비구에게 쌀과 기(ghee), 그리고 버터유 등을 보시하며, 또 자선 시설에서 매일 보시를 행한다는 것과 이것이 친척들의 무병장수와 일체 유정물의 깨달음을 위한 행위임을 말하고 있다.
쿠다의 제6굴에는 불교의 비구에게 불타를 위한 등불 비용에 충당하도록 전답을 증여한 사실이 5~6세기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4. 보시의 의미 변화
보시가 불교 교단에 대해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서 불교 교단에 대하여 비구들의 생활 필수품을 기부했으며, 왕들도 토지를 주어서 사원과 정사의 유지를 도모하였다. 불상에는 밤이나 낮이나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서 결코 꺼지는 일이 없었다. 이점은 현대의 남방불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앞에서 말한 법현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렇듯 풍요로운 교단 생활이 때로 세속화되어 퇴폐를 자초한 측면도 있었을 것임은 상상하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다. 7세기 말엽에 인도에서 공부한 의정은 이러한 실정을 다음과 같이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승원은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 되어서 (쓰지 않은 채) 썩어버린 곡식이 창고에 쌓여 있다. 노예도 많고 창고에는 금전과 재물이 남아돌고 있다. 사회의 서민들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이 마당에 (이러한 상황은) 도저히 승원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에서 말한 명문의 내용으로 봐도 사람들이 행한 막대한 기부의 목적은 자명하다. 즉 양친이나 친척, 혹은 자기 자신보다 나은 현저한 생활과 보다 나은 사후 세계를 위한 공덕을 쌓으려는 것이 그 목적인 것이다. 이것은 종래의 재가신자가 보여주던 신앙 형태, 특히 그 보시의 기능과 전혀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정착된 이 시대에는 공덕이라는 의미가 점차 확대되어 간다.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을 통하여 얻는 종교적 체험을 ‘지혜’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주객이 분리된 입장에서 구축되는 의도가 아니라, 분별을 초월한 경지에서 감득되는 반야의 지혜를 말한다. 이 지혜는 현실 사회 속에서 자비로서 작용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지혜와 자비의 상즉(相卽)이라는 형태로 해설되는 것인데, 종교적 체험을 얻은 불교인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굽타 시대와 그 이후의 불교는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렀다가 다시 현실 사회로 되돌아와서 발현되는 자비를 강조했으며, 그러한 정신은 갖가지 형태로 실천되었다.
8세기의 불교 논사인 샨티데바(적천, 寂天)는 자신의 저서 「보디차랴 아바타라」(입보리행경, 入菩提行經)에서 “경전을 읽되 몸으로 읽으라.”고 하여 병자가 치료법을 읽는 것만으로는 병을 고칠 수 없듯 이 경전의 내용도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그 궁극적인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타인에 대한 봉사를 실천 덕목으로 강조했다.
보시에 있어서도 대승불교에서는 재가자가 비구의 교단에 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봉사 활동도 모두 보시라 설하게 되었다. 「보행정도론」(寶行正道論)에는 일곱 가지 복전이 나타나 있는데, 사원에 대한 각종 보시 외에도 과수원을 일궈서 나무를 심고, 의약품을 병자에게 주고, 배를 비치하고, 다리를 놓고, 도로 근처에 우물을 파두는 등의 세간적인 선업이 모두 공덕을 낳게 하는 행위라고 설해져 있다. 이것은 사회복지의 실천이 공덕의 관념과 결부된 교설로서 대승불교가 사회 활동을 매우 강조했음을 대변해 주고 있다.
보시의 목적은 이러한 세간 차원의 공덕을 쌓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적잖은 수의 비문은 상가에 대한 기부, 특히 불상의 기부가 스스로의 현실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부모…… 등의) 친척이나 일체 중생의 최고지(最高智) 획득을 위하여 …”라는 거의 상투적인 문구를 가진 명문이, 아잔타(제4, 6, 16, 22, 26굴), 보드가야(6세ㅔ기), 데오랴(5세기), 쿠다(제6굴, 5~6세기), 쿠라(펀잡 4~5세기), 마투라(카드라 549~550년) 마투라(자마르푸르 454~455), 사르나트(5세기) 등지의 불상 대좌 명문에 나타나 있다.
또 친족이나 세계 사람들이 “위대한 깨달음의 과보를 얻기 위하여” 기부했다는 문구가 아잔타 제26굴(6~7세기)에 나타나 있고, “불과(佛果)의 획득”(오랑가바드 600년경), “일체 중생의 성불을 위하여”(카넬라 5세기), “일체 중생의 불과 획득을 위하여”(마투라 5세기 후반) 등의 문구도 보인다.
이러한 문구는 불상의 기부나 드물게는 차이탸의 기부에서 특히 쓰여지고, 비구의 생활용품에 대해서 사용되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같은 보시라도 불상의 보시(불물, 佛物)와 생활용품의 보시(승물, 僧物)가 차이가 있음을 의식했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일체 중생의 깨달음을 위한다는 말은 대승적인 관념 하에서 세간차원의 현세이익적인 기원으로부터 출세간 차원의 기원으로 공덕이 승화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기원은 다만 교리상으로 도출되는 관념이나 혹은 단순히 이상에 대한 부르짖음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너와 나, 자타가 함께 깨달음을 얻는다는 사실이 중시되고 있었음과 동시에 비록 세속화의 물결이 교단을 휩쓸더라도 깨달음의 실체가 교단 내부에 연면히 전승되고 있었음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상 교단의 저변에는 한결같이 수행에만 전념하는 비구들의 존재가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한 바 있는 마투라에서의 법현의 기술은 승려의 위의(威儀) 법칙이 정비되어 있었음을 전해 주고 있다. 3년을 머물렀다는 파탈리푸트라에서도 그는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다. 「법현전」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리하여 법현은 이곳에 머물기를 3년, 범서와 범어를 배우고 율전을 필사했다. 도정(道整)은 인도의 중부지방에 이르러서, 사문의 법도와 중승의 위의 행사를 보고 느낀 바가 많았으므로 정말로 변장에서는 승려의 계율이 흐트러져 있음을 한탄했다. 이제부터는 부처가 될 때까지 모쪼록 변방에 태어나지 않도록 서원을 발하여, 그대로 (천축, 天竺) 땅에 머무른 채 돌아가지 않았다. 법현은 처음부터 계율을 중국땅에 전하고 했으므로 혼자서 돌아갔다.
현장도 날란다 사원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데, 그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기에도 승려들의 수가 수천에 이르고 있는데 … (중략) … 덕이 당대를 풍미하고 명성이 외국에까지 알려진 사람도 수백을 넘는다. 계행이 청결하고 수칙범절도 순수하다. 승려에게는 엄격한 규칙이 정해져 있는데 모두가 이를 굳게 지키므로, 인도의 여러 지방에서 모범으로 삼아 숭앙한다.”(「대당서역기」)
여기서는 변방인 중국에서 불교의 본고장에 온 승려들의 감격도 감격이려니와 불교 교단 안에 남아 있던 엄숙한 규율과 수행의 전통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더욱이 굽타 시대 이후의 대승불교 사상은 눈부시게 개화되어 중관(中觀)∙유식(唯識)∙여래장(如來藏)∙인명(因明) 등의 사상과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분명히 사상의 일종이며, 형이상학적 사변이다. 그러나 중관 철학의 배후에는 중관의 관법이 있고, 유식 사상의 저변에는 요가의 수행이 사변을 뒷받침하는 종교적 체험으로 전승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사상이 구축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깨달음의 전승은 이렇게 하여 세속화된 불교 교단의 내부에도 유지되어 있었다. 오히려 온갖 모순을 간직한 채 교단이 존속해옴으로써, 그 기반 위에 실존적 차원의 관념과 행법이 전승, 보존되어 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자기 자신과 일체 중생의 불과(佛果) 획득“이 보시의 의한 공덕과 겹쳐져 기원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굽타 시대의 불상 조각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마투라의 카트라에서 출토된 2세기의 불상은 초기 불상의 대표적인 명품인데, 거기에는 정신적인 면보다 오히려 매우 동적인 움직임이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5세기의 마투라에서 출토된 굽타 시대의 몇몇 불상들은 하나같이 깊은 고요 속에 잠긴 모습이다. 자비롭고 원만한 상호를 보여 주면서 내적으로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정신성을 간직하고 있는 이 같은 불상이 단지 불교 조각 기법의 완성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불상의 배후에는 고도의 기법을 살리고 있는 엄연한 실존적 정신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출처 : 佛陀의 世界 / 中村元 著, 金知見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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