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전 소림 이후에 중앙화단의 중추를 형성하던 서화미술회 출신의 제자들이 일제강점기를 살아왔고, 충정공 민영환처럼 붓을 꺾든지 만주나 외국으로 이민 가든지 미술 장르를 포기한 화가가 아니라면 우리나라 안에서 조선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활동해야 했다는 것은 미술사적으로 절대 불가피한 운명이었지요. 일제의 내선일체를 내세운 조선인의 일본인화 시도에 정면으로 반항하지 못하는 그 당시의 모든 교육계 조선인들은 겉으로는 일제의 공교육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 선조들은 모두 일제에 총탄용이나 군사장비용 공출을 피할 수도 없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는 역사적 상처가 분명합니다. 화업에 종사하는 화가들의 형편도 크게 다를 수는 없었겠지요.
그 와중에서 일본에 유학했든 아니든 금강산이나 후지산을 그린 화가는 수도 없이 많았으니 풍경화 산수화에서 정치적 의도를 읽어내려는 시도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일진대 그 그림이 친일의 척도로 거론된다는 것은 궁색한 이론이라고 봅니다. 한편 당대 최고의 인물화 작가가 본인이 전성기를 구가했던 일제시대에 그렸던 만 여 점의 작품 중에 친일을 주제로 한 작품이 단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게 총독부 이왕직의 중일전쟁 시기 부족했던 일제의 군수장비 구입을 위한 금모으기 운동 광풍에 휩쓸려 강요되었고 언론과 총독부의 홍보도구로 이용되면서 ... 한 점 짜리 철저한 친일작가로 매도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고요.
모택동은 외국과의 전쟁에서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자국민을 죽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소평에 의해 공7과3이라고 영웅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그후 중국은 큰 혼란 없이 세계2위의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당은 조선화단을 위해 자산을 바쳐 이루어낸 수많은 공을 모두 못본 체 묻어두고 금차봉납도 한 점으로 완벽한 친일파라고 규정되었고 그 제자와 후진들로 이어진 서울대 홍대 이대 수도여사대 중앙대 등에서 공부한 동양화 화단은 저도 모르게 원죄를 뒤집어 쓰고 함께 나락으로 떨어져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수묵위주의 조선화단에서 궁중화의 채색화 북종화 전통을 지켜온 화단의 큰 스승을 미술사에서 제거하면 한국 미술사는 단절의 시기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한국화단에 속한 화가들과 평론가들이 그 과정에서 화단을 키우는 세력으로 작동한 것 외에 주도적으로 제 발등을 찍어왔다는 것을 보면 ... 한국의 정치가 발전하지 못하고 서로 헐뜯기에만 몰두하는 것과 겹쳐 보이면서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