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05 주일설교
바보처럼 살라고요?
(시편 37:1~11)
I. 도입
우리나라 고전소설 가운데는 춘향전, 흥부전, 홍길동전처럼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주제인 것이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악당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경우가 많지만, 사람들은 소설의 주인공처럼 지조를 지키며 욕심을 버리고 약자를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칠 때 환호성을 지릅니다.
권선징악은 사람들의 양심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양심의 소리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온유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온유하게 살면 어떻게 될까요? 온유하게 사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리한데 왜 온유하게 살아야 할까요?
II.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여덟 종류의 복 있는 사람에 관해 설명하셨습니다. 그 세 번째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시간적, 문화적 간격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1)온유하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2)복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3)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의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복에 대하여 설명하고 시편으로 돌아가서 온유한 자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과 마태는 유대인입니다. 또한, 마태복음의 주된 독자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2000년 전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태복음이 사용한 복(μακάριος)이라는 말 속에 담긴 히브리적 개념부터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대표적인 성경은 시편 1:1입니다. 여기서 복 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쉐르(אֶשֶׁר)인데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결론적으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 세속적인 복을 받는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와 함께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청중들은 모두 시편 37편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회당에서 이 성경을 여러 번 읽고 달달 외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라는 말을 하면 누구나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시편 37편을 통해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III. 온유한 자는 의인이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이다.
시편 37편은 두 가지 이미지(image)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데 첫째는 풀이고(2절) 둘째는 빛입니다(6절). 풀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 농부들은 풀과의 전쟁을 치릅니다. 조그마한 주말농장만 해도 이것을 실감합니다. 그런 풀들도 겨울이 오면 다 죽어 버립니다.
이스라엘에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가을부터 봄까지 우기(雨期)입니다. 그러다가 봄에 건기(乾期)가 시작되면 온 세상은 메마르고 강렬한 햇볕이 내리쪼입니다. 우기 동안에 쑥쑥 자라던 풀들은 건기의 햇빛에 금새 말라 죽어 버립니다.
다윗이 보기에 지금 떵떵거리는 악인들은 우기 때의 풀과 같습니다(2절). 하지만 하나님께서 의인들은 정오의 빛 같게 해 주실 것입니다(6절). 그러니까 악인들이 까불어 봐도 별 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시편 37편을 인용하여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온유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온유하다는 말을 헬라어로 보면 프라우스(πραΰς)인데 이 말은 gentle하고 친절하고 겸손하고 동정심이 많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인용하신 시편 37편에서 말하는 온유한 자란 인정 많고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은 것과는 다릅니다.
시편 37:11에서 온유한 자는 히브리어로 아나우(עָנָו)인데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싸울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대신 싸워 주실 것을 믿기에 가난하고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 자신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울은 전쟁터에서 적에게 죽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이 사울을 제거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이 원수를 제거해 주실 때까지 가난하게 고통받으며 사는 것이 복되며 결국 주인공이 되어 몽땅 차지할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서 말하는 온유한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9, 22, 29, 34절과 비교해보면 선명해집니다. 온유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9절을 보면 그들은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입니다. 22절을 보면 그들은 주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또 29절을 보면 그들은 의인이며, 34절을 보면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자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자의 싸움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자의 문제는 악한 방법으로 싸우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그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런 사람이 진실로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이긴 것은, 바로 이 유혹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제가 부끄러운 고백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저는 제 일생에 이 싸움에 진 적이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딱 한 번만 눈 질끔 감으면 되겠지 했는데 그것이 평생의 후회로 남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저는 한 번 눈 감으면 다음에 또 눈 감아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알았습니다. 반면에 한 번 물리치면 다음에도 물리치게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한번 외쳐 보세요. “한번 눈 감으면 또 눈 감게 되고, 한번 물리치면 또 물리치게 된다. 한 번만 물리치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말과 행동만이 아니라,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온유한 사람이란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사람입니다. 그런 온유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IV. 진정한 기업(상속)은 영원한 천국이다.
이제는 ‘땅을 차지한다’ 혹은 ‘땅을 기업으로 상속받는다’는 말을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땅이며 풍요롭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구약 시대에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지 완성된 천국은 아닙니다 .
그래서 세상에는 악인이 순진한 사람의 땅을 빼앗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긴 땅을 되찾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은 땅을 빼앗길지언정 악한 방법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권리를 빼앗겼을 때 그것을 되찾기 위해 악한 방법을 동원하기보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럴 때 이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며 어떤 조처를 내리실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네 권리도 못 챙기는 너는 참으로 어리석구나. 그래서야 어디 세상에 살아남겠니?”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시편 37편에서 다윗은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 결국 땅을 차지하게 된다고 5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윗은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이것은 다윗의 고백일 뿐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느라 나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겨서 가난하고 고통당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고 하나님이 도우시고 하나님이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 놓칠 수 없는 다른 비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사느라고 손해를 본 것 가운데 이 땅에서 다 보상받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것을 다 보상해 주지 않으실까요? 그 이유는 이 땅은 영원히 살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지만 완성된 천국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복을 누리는 것도 영원한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방식으로 사느라 빼앗긴 것 가운데 다 보상해 주지 않으신 것은 천국에 적립해 놓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월급을 받아서 다 써버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은 국가에서 강제로 월급 일부를 떼어가서 적립해 놓습니다. 그렇게 떼어간 돈으로 갑자기 직장을 잃어버리면 실업 급여를 지급해줍니다. 또 퇴직할 때는 퇴직금을 지급해줍니다. 은퇴 후에는 연금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보상해 주는 대신 일부는 천국에 적립해 놓으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V. 마무리
세상에는 악인이 있어 성도의 권리를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괴롭히는 악인은 저 밖의 불신자 가운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같은 교회의 지체나 한 가정의 가족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던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 우리는 내가 나서서 그 사람을 혼 내주고 빼앗아 오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은 원수를 자기 손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온유한 사람을 돕는 것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시편 37편에서 말하는 온유한 사람이란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시편 37:1은 그렇게 바보처럼 살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시편 37편에는 ‘왜냐하면(כִּי 키)’이라는 단어가 8번이나 나오는데 첫 번째가 2절입니다. 2절에서는 우리가 바보처럼 빼앗기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온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주의 복을 받고 땅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