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91) 고종 6
- 3차, 4차 몽고와의 전쟁
고려에서 패퇴한 직후에 몽고는 주위의 동진국과 금을 정벌하는데 힘을 기울이느라 미처 고려에 신경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고려는 약 2년 동안 몽고의 침입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몽고는 1233년과 그 이듬해 동진국과 금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계속해서 남송을 공격하는 한편, 1235년부터 다시 고려를 침략하게 됩니다.
드디어 3차의 몽고 침략이 시작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의 침략은 살리타가 살해 당한 것에 대한 보복과 전날의 패퇴에 대한 앙가픔의 성격을 강하게 띠어, 몽고군은 고려에 화의를 교섭해오는 일이 없이 경상·전라도까지 침입하여 전국토를 유린하게 됩니다.
이에 고려에서는 개주·온수(온양)·죽주(죽산)·대흥(예산) 등지에서 몽고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몽고병이 온수군을 포위하자 군리인 현려 등이 문을 열고 나가 죽기 살기로 싸우니 사기가 떨어진 몽고병들은 도망 치기에 바빠 크게 이기게 됩니다. 적장 2명이 목을 베었고, 시석(矢石, 화살과 돌)에 맞아 죽은 자가 200여명이었으며, 수많은 병기도 노획하였습니다.
대흥군에서는 몽고병이 성을 수일 동안 공격하도록 며칠 동안 진이 빠지도록 내버려두다가 성문을 열고 나가 급습하여 크게 이기고 역시 수많은 병기를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몽고군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웠던 지라 1239년 4월 몽고군이 철군 할 때까지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고려는 그야말로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경주 황룡사의 구층목탑이 불타는 등 수많은 귀중한 문화재를 잃게 됩니다. 고려인들은 이렇듯 모진 시련 속에서도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불력(佛力)에 의지하여 몽고군을 물리치고자 팔만대장경의 제작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사항전의 의지와 불력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몽고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 이었습니다.
고려는 몽고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하였고,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전황이 불리해지고 각지에서 피해가 늘어가자 결국 1238년에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를 몽고에 보내어 강화를 제의하고 철군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에 몽고는 국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고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음해에 모두 철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직접 외국에 입조하는 것이 역사상 전례가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고종이 모후 유씨의 상중임을 빙자하여 왕족 신안공 전(新安公 佺)을 왕의 동생이라 칭하고 대신 입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다음해에 신안공 전은 무사히 귀국하였지만, 이때 몽고는 사신을 함께 보내와, 해도에 입보해 있는 민호를 육지로 돌아오게 하고 그 수를 점검하여 보고할 것과, 독로화 즉 인질을 보낼 것, 그리고 반몽행위를 한 고려의 관원들을 몽고로 압송할 것 등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1241년(고종 28년)에 신안공의 종형(從兄) 영녕공 준(永寧公 綧)을 왕의 친아들로 가장시켜 귀족의 자제 10인과 함께 몽고에 볼모로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몽고에서 오고타이가 죽고 간위 계승을 둘러싼 분규가 일어났으므로 고려에 더 이상의 요구를 해오지 않았고, 따라서 고려로서는 몽고와의 화의를 당분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려왕조실록(92) 고종 7 - 몽고의 5차 침입.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도 고려와 몽고 간에는 사신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요즈음도 국가간에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상호 간에 핫라인은 열어놓고 있듯이 당시에도 비상대화 채널은 항상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전쟁의 와중에도 1251년 11월에 몽고 사신 장곤과 홍고이가 40여명을 이끌고 와서 고종의 친조를 요구하였으며 이후에도 몽고는 몇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개경 환도와 고종의 친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그동안 최우가 내세운 대몽고 강경론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그런 와중에 1249년 최우가 병사를 하게 되자 당시 최우의 아들 최항은 송광사에 출가하여 중이 되었는데, 그는 부친의 병환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환속하여 무신정권을 이어받게 됩니다. 무신정권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고려의 대몽정책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이 최항 역시 대몽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고려가 성을 겹겹으로 쌓아 전쟁에 대비하고, 고종이 육지로 나와 몽고에 귀순할 뜻이 전혀 없음을 간파한 몽고는 또다시 고려를 침공하니 이것이 제5차 몽고의 침공입니다. 이때 몽고군의 원수는 야굴이었는데, 그는 여러 차례에 결처히 고종에게 항복을 권하는 등 유화책을 펴나가는 한편 고주, 화주, 광주를 공략하여 살인과 방화를 일삼는 등 강경책을 병행하는 전술로 고려 조정을 압박해 나갑니다.
야굴이 강공유화책을 병행하면서 고려 조정에 요구한 사항들은 왕이 육지로 나와 항복 할 것. 성을 허물고 원나라(몽고)에 귀순할 것 등이었습니다. 고종은 거듭되는 몽고의 공격으로 여러 성들이 함락되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자 결국 최항의 묵인 하에 육지로 나가 몽고의 신들을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인경공 창을 인질로 몽고로 보내는 조건으로 몽고군은 철군을 합니다.
그런데 몽고군은 이듬해 7월 또 고려로 쳐들어옵니다. 왕이 비록 육지로 나오기는 하였으나 진정한 개경환도가 아니니 개경으로 모든 수도의 기능을 옮기라는 요구였습니다.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몽고군의 일방적인 살육전이 진행되는 듯 싶었지만 고려의 별초군이 결사항전을 하자 몽고군도 주춤거리기 시작합니다. 몽고군에 잡혀간 남녀가 26만 6천 8백여명이요, 살육당한 자의 숫자 또한 그 이상일 정도로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몽고군 또한 상당한 전력의 손실을 당하였습니다.
이처럼 피해가 날로 극심해지자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사신을 몽고에 보내 친조와 개경환도를 약속하고 철군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몽고군은 물러갔으나 그 후 몽고에 약속한 사항들은 지켜지지를 않았습니다. 최항이 고집을 피우면서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들은 한술 더 떠서 그간 몽고에 보내왔던 봄철 공납까지 중지해 버리자고 주장합니다.
몽고는 거의 해마다 침략을 해 오는데 우리가 아무리 정성껏 그들을 대접한다 한들 별로 득이 될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