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교과서에서 보던 비석이다. 더 놀라운 건 이 귀한 천고의 보물이 동네에 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산책하며 비석을 만난다. 신라 천년이 그냥 일상에 있는 것이다. 역사성과 전통성이 내재화되는 현장을 본다.
1.방문지대강
명칭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위치 :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312.25.
2. 둘러보기
믿기 힘든 곳에 천년의 보물이 있다.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여 근처 주민드은 산책을 하며 아침 저녁으로 진흥왕의 흔적을 만난다. 비석은 비각 속에 있지만 고맙게도 유리 장벽을 치지 않아 빛 반사없이 바로 실체를 만날 수 있다. 눈으로 쓸어안으며 진흥왕님께 안부 인사를 드린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떠신가요? 오늘은 날씨가 좀 춥지만 내일은 나아진다고 해요. 오늘은 근처 맛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했어요. 아마 그 시절에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지는 못했을 거 같아요. 그렇게 지켜준 덕분에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말씀드리고 싶어요.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봉주르! 트리스테스!, 안녕하세요? 진흥왕님, 천년 왕국의 수장으로 국토를 확장해 이런 편안한 미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흔적을 아침 저녁으로 만나니 신라 역사가 엊그제입니다. ㅁㅣ천한 후손 신라의 역사에 연해 살아갑니다.
손에 닿는 천년 역사의 끝에 내가 있다. 창녕 사람들의 깊은 역사적 유대감을 보는 듯하다.
창녕비는 나머지 3개 비석과 달리 '순수관경'이라는 글귀가 없어 척경비라고 부른다.
1) 소개 : 진흥왕 순수비와 창녕비
일반적으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1962년 지정)ㆍ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 1962년 지정)ㆍ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ㆍ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등을 일컫는다. 이 진흥왕 비들은 6세기 중반 신라의 영토 확장의 산물로 신라의 정치제도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비에는 대등(大等)을 비롯해 당시 왕을 수행했던 신하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북(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황(함경남도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 함흥본궁), 마(함남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 함흥본궁), 창(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진흥왕은 540∼576년의 37년 재위하는 동안 낙동강 서쪽의 가야세력을 완전 병합하였다. 또 한강 하류유역으로 진출해 서해안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동북으로 함경남도 이원지방까지 경략하는 등 정복적 팽창을 이룩하였다.
이렇게 확대된 영역을 진흥왕이 직접 순수하면서 민심을 살피고 국가에 충성과 절의를 바친 자에 대한 공로의 포상을 선포하고, 군신이 함께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모두 4개인데, 이들은 약칭해 창녕비ㆍ북한산비ㆍ마운령비ㆍ황초령비라고도 한다.
창녕비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 있으며, 건립년대는 561년(진흥왕 22)이다. 재료는 화강암을 갈아서 만들었으며, 비의 높이는 가장 높은 쪽이 299.9㎝, 가장 낮은 쪽이 115.1㎝이고, 가장 넓은 부분이 175.5㎝, 두께는 51.6∼30.3㎝이다. 비면에 새긴 글자는 모두 27행으로, 한행은 26자 내지 18자이며 자경(字徑)은 3.9㎝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금석문 중 가장 글자수가 많은 자료이다. 그러나 발견 당시부터 비의 성격 파악에 중요한 전반부의 중간 부분이 파실되어 그 내용을 추정하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글자체는 해서체이며 음각하였다. 비문의 구성은 제기(題記, 제1행 1∼8자)ㆍ기사(紀事, 제1행 11자∼제11행 1자)ㆍ수가인명열기(隨駕人名列記, 제11행 8자∼제27행)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는 진흥왕이 창녕지방을 영토로 편입한 뒤 이곳을 순수하면서 민심을 살피고 그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부분)
글자가 마모되어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 봐도 글자를 식별해내기 어려울 정도이다.
신라진흥왕 창녕 척경비, 임광순 해설
창녕지구 전승비. 625 북한군 3개 사단을 섬멸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여 인천상륙작전 북진의 기틀을 마련한 전투 기념비. 일게 낙동강을 지켜준 덕분에 북한군을 물리쳤구나, 6.25 공부도 한다.
공연장
* 객사 소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柱心包) 맞배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 1924년 현 술정리 상설시장이 개발되면서 그 터의 중심 건물로 사용하기 위하여 이전하였다.
마루가 없고 지붕의 산자(橵子 : 흙을 받치기 위하여 엮어 까는 나뭇개비)가 드러나 보인다. 이 장옥은 높이 2.85m, 둘레 1.5m의 나무기둥 14개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용마루와 서까래 이음부분 등 건물 전체에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건립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그 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객사의 일부를 이건하면서 다소 개변된 것이며 대부분의 헌 목재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이음과 맞춤의 흔적으로 미루어보아 복원한 관아의 건물이다. (한국믽고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창녕 현감비군. 지방관의 공덕을 칭송하는 선정비
창녕퇴천리 삼층석탑
창녕 척화비
*척화비 소개
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다 실패한 후 천주교를 탄압하고 1866년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한 수천 명의 교도를 처형했다. 이를 구실로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대원군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서 싸울 것과 문호개방을 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쇄국양이정책은 1868년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에서 미국을 물리친 후 척화비가 세워졌다.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척화비는 서울 종로네거리·강화·경주·부산진·함양군 등 전국 주요도시에 세워졌다. 현재 서울 경복궁, 부산 용두산공원, 경상남도 함양군 등에 남아 있다."(다음백과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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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창녕 척경비와 주위의 유적 유물 잘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아주시고 댓글로 고무해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