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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화된 연회 감독제와 하나 되는 한국감리교회
분열의 역사는 다시 통합의 역사로 그 사이클은 돌아가기 마련이다. 갱신총회의 분리를 초래한 제12회 총회 이후에 감리교 최대 관제는 다시 통합하는 일이었다. 1974년 12월 19일에 열린 총리원 이사회는 교단을 망라한 20여 명으로 구성된 통합협의회를 구성했다. 통합협의회는 1인 감독에 의한 중앙집권제가 교단 분열의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연합을 위하여 이 제도를 개편해야한다고 결의를 함으로써 교단 통합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것이 곧 복수 감독제의 실시이다. 사실 복수 감독제 논의는 제9회 총회에서부터 시작하여 제10회 총회에서는 장정개정안까지 통과되었지만 연회장 제도로 대신하고 각 연회가 받아들이지 않아서 이루어지지 못했었다. 그런데 제12회 총회에 와서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김창희 감독은 1975년 10월 25일 아현교회에서 개회한 제12회 총회 제1차 특별총회에서 3부연회가 제출한 연회감독제 헌법 개정을 승인하였다.이듬해 1976년 3월 18일 아현교회에서 모인 제2차 특별총회에서 각 연회 감독을 선출하였다. 중부연회는 박근수 목사가, 동부연회는 박대선 목사가, 남부연회는 김순경 목사가 다원제 감독시대의 초대 감독으로 당선되어 새 시대를 열었다.
박근수(朴根洙, 호 雪鳳) 감독은 1918년 2월 12일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 577번지에서 아버지 박영하(朴永夏)와 어머니 김선(金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2년 3월 11일 영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37년 3월 11일 그가 군산중학교 5학년 재학 때 발생한 학생사건으로 말미암아 학교를 중퇴했다. 그 후 소명을 깨닫고 목사가 되고자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고 1942년 12월 20일에 졸업했다.
1942년 2월에 충남 홍성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으로 목회자로서의 길을 걸어갔다. 이어서 1947년 9월에 서울 만리현교회를 담임했다. 이때 1951년 3월부터 1953년 2월까지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강사로 활동하였고 1952년 4월부터 1953년 3월까지 학교법인 배재학당 이사로 수고했다. 1959년 3월부터 은퇴할 때까지 서울 상동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61년 6월~1988년까지 학교법인 수원 삼일학원 이사, 1963년 1월~1976년 1월까지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1965년 3월~1967년 2월까지 중부연회 서울남지방 감리사, 1965년 3월~1969년 2월까지 학교법인 배화학원 이사 및 학교법인 영명학원 이사, 1969년 3월~1971년 2월까지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KNCC)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 3월~1973년 2월까지 학교법인 감리교신학원 이사, 1974년 학교법인 삼일학원 이사로 재직했다. 박근수 목사는 1976년 3월 18일에 개최된 특별총회에서 제13대 중부연회 감독이며 다원제 감독 시대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감독 재임 시 박근수 감독은 제36회 중부연회(1977년 3월 16일~18일, 상동교회 개최), 제37회 중부연회 (1978년 3월 15일~17일, 인천창영교회 개최)를 이끌며 감리교회 발전에 힘을 쏟았다.
이외에도 1977년 3월~1988년 2월까지 감리교 서울신학교 교장, 1977년 10월~1985년 10월까지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이사로 활동하였다. 1981년 5월 10일 미국 오클라호마 주 필립스 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10월~1996년 9월까지 사회복지법인 은평천사원 이사장, 1984년~2000년까지 기독교 대한감리회 감독협의회 회장으로 일하였으며, 1985년 6월~1989년 5월까지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 상임위원, 1988년 서울연회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박근수 감독은 은퇴 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988년 12월 27일에 협성신학교 제3대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92년 3월 1일 협성신학대학으로 승격하여 초대 학장으로 재직하였다. 1993년 3월 1일 협성신학대학교로 명칭 변경에 따라 협성신학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고 제3대 총창 임기인 2001년까지 대학 발전에 힘썼다. 박근수 감독은 2007년 10월 30일 향년 90세의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장례는 삼일학원장 및 상동교회장으로 진행했으며 장례예배는 2007년 11월 2일 오전 10시 상동교회 8층 대예배실에서 거행되었다. 김기화 사모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1녀(박세용, 박찬용, 박성숙, 박민용)를 두었다. 저서로는 설교집「현실과 이상의 갈등 1권 ․ 2권」이 있다. 또한 그는 1994년 10월 21일에 감리교 신학대학교 모교를 빛낸 동문상, 2000년 11월 6일에 세계복음화중앙협의회가 선정한 교육부분 한국기독교 선교대상을 수상하였다.
박대선(朴大善) 감독은 1916년 4월 15일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에서 아버지 박상동(朴尙東)과 어머니 김순이(金順伊)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30년 일본 관서학원 부속중학교 3년 수료, 1935년 일본 나고야(名古屋)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40년 관서학원대학 법학부 영문과를 졸업하여 일본 문부성 중등영어과 교원자격증을 수령하였다. 이어 신학을 공부하여 1942년 신학부를 졸업했다. 박대선 전도사는 이미 1940년에 일본 니시노미야(西宮)시 한인교회를 담임하고 목회를 했고 신학교 졸업 후 바로 창광산교회에 부임했다. 이때 받은 월 사례비가 15원이었다. 박대선 전도사는 영어 교사로 일하면 90원을 받게 되는 것과 비교해보니 목회에 대해서 회의(懷疑)를 품기도 했다. 이때 한상동 목사를 찾아가서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한상동 목사는 부흥회 때 받은 은혜를 상기시키면서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을 기억하고 목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목회의 길로 나가게 되어서 그 후 1950년까지 박구리교회, 중앙교회, 서평양교회에서 목회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성화신학교 교무주임 겸 구약학 교수로 북한지역 교역자양성에 힘쓰다가 월남하였다. 1951년 초대 군목으로 대구 육군본부에 근무했다. 1955년 10월에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1964년까지 강사로 활동했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서울 광희문교회를 담임했다. 1961년 혜촌회(惠村會) 회장, 성화회(聖化會) 회장을 지냈다.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연세대학교 제4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1965년 한국유도연맹 회장, 한국 기독교학교 연합회장, 1968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9~1971년 한국 기독학생회 이사장, 1971년~1974년 서울YMCA 이사장, 1974~1975년 운정장학재단 이사로 으로 활동하였다. 1974년 5월에 일본 국제기독교대학에서 명예인문학 박사, 1982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89년에는 일본 관서학원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박대선 목사는 1976년 3월 18일에 개최된 특별총회에서 제13대 동부연회 감독으로 취임하고 연회을 책임지고 돌보았다. 감독 재임 시 제27회 동부연회(1976년 4월 6일~8일, 시온교회 개최), 제28회 동부연회(1977년 3월9일~11일, 동대문교회), 제29회 동부연회(1978년 3월 8일~10일, 왕십리교회)를 이끌었다. 감독의 직무를 마친 1978년에 바로 동부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85년까지 교장으로 재직하며 신학생을 양성혰다. 1978년 대한성서공회 이사, 1979년 아시아기독교고등 교육연합 재단 이사, 1980년 대한기독교서회 이사로 있었다. 1983년에 한국선명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80년 신애교회를 개척하고 담임하였다가 1986년 서울남연회에서 은퇴하였다. 믿음․정직․진실․겸손을 좌우명을 삼고 평생을 살아온 박대선 감독은 정비다 사모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박영기, 박태기, 박성기)와 1녀(박애나)를 두었으며 2010년 향년 94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1974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성서개설」, 「구약성서개론」(공저), 「대학과 국가발전」, 「고등교육의 개혁」, 「진리의 골짜기」, 「하늘에 정의가 땅에」, 「진실이」, 「낙수」,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 역서로는 「구약성서신학」(오토바압 저), 「예레미야애가」가 있다.
김순경(金淳璟) 감독은 1922년 경기도 화성군에서 출생하였다. 1948년 서울 중앙신학교를, 1950년 서울신학교를 졸업했다. 1948년~1950년 수원 평촌교회에서 목회했으며 1950년~1953년 수원 고모리교회를 담임하고 1954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해 바로 수원 남양교회를 목회하여 1959년까지 담임했다. 남양교회 재임 중이던 1955년 수원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김순경 목사가 남양교회를 재임하던 때 감리교는 호헌파로 인해 심한 내홍을 겪었다. 1954년 3월 18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제7회 총회가 열렸다. 이때 류형기 감독이 선출되자 1955년 3월 1일 천안에서 류형기 감독의 자격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의 감독 선출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천안읍제일교회에서 모여 전국신도대회를 개최했다. 이어 총회를 개최하여 김응태 목사를 감독에 선출했다. 이로써 호헌파가 조직된 것이다.
호헌파(護憲派)는 말 그대로 법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류형기 감독이 법에 의하면 자격이 안 되는데도 감독에 선출되었으니 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로 모인 정치 조직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렇더라도 내면적인 이유는 이북 평양 성화신학교 출신의 목회자들과 경기도와 수도권의 목회자로 구성된 정동교회 출신의 정동파에 비해 한강 이남의 목회자들이 소외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법을 수호하는 단체로서의 명분으로 호헌파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감리교회는 성화파, 정동파, 호헌파라는 정지 서클이 감리교회의 분열의 극치를 보여주게 되었다.
이에 1955년 3월 10일에 제6회 중부연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호헌파에서 수원지방의 기존 목사들을 파송한다는 전문이 유포되었는데 이를 전면 부정하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남양교회 김순경 목사는 이 성명서에 동참하지 않아서 총리원은 1955년 임명기에 남양교회로 파송되었다. 총리원 측에서는 김순경 목사가 호헌파에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남양교회에 파송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그의 입장이 호헌파에 확고하게 자리를 굳힌 것을 확인하고 총리원은 남양교회에 1955년 8월 25일에 수원 매산교회 김연호 목사, 1956년에는 방부신 목사를 파송함으로써 남양교회는 두 명의 담임자가 부임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김순경 목사는 호헌파동에 휘말려 그의 목회 가운데 가장 험난한 격랑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총리원 측과 호헌파 측의 고소고발이 난무했고 김순경 목사 측은 남양교회 예배당에서, 방부신 목사 측은 교회 주변의 조선시대 감옥 터에서 텐트를 치고 예배를 드렸다. 남양교회 역사 상 가장 힘든 분열의 시대를 김순경 목사가 겪었던 것이다. 결국 1958년 3월 연회에서 류형기 감독이 사퇴하고 김종필 감독이 선임되어 그의 적극적인 중재로 교회 연합이 추진되었다. 김순경 목사는 1958년에 부산으로 떠나고 고원휘 목사가 부임하고 1년 뒤 양준택 목사가 1960년 부임함으로써 감리교 호헌파 분열은 정리되었다.
부산으로 온 김순경 목사는 1959년~1961년 부산 보수교회, 1961~1963년 마산중앙교회를 담임했다. 이후 대전으로 자리를 옮겨 1963년~1970년 대전 남부교회를 담임했다. 그 시기 1974년 목원대학 교역대학원을 졸업하였고 1975년 대전 소망교회를 담임했다. 1976년 3월 19일 특별연회에서 역사상 제1대 남부연회 감독에 취임했다. 재임 시 김순경 감독은 제22회 남부연회(1976년 4월 7일∼9일, 대전제일교회 개최), 제23회 남부연회(1977년 3월 23일∼25일, 대전제일교회 개최), 제24회 남부연회(1978년 3월 29일∼31일, 대전제일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김순경 감독은 1981년 총회에서 제명 처분을 받았으며 1989년에 남부연회에 재허입하고 1990년에 자원 은퇴하였다. 감독직을 끝내고 남부신학교장으로 재직했다.
사분오열(四分五裂)의 감리교회는 통합의 의지를 갖고 먼저 뜻을 같이 하는 이들끼리 연합을 이루었다. 이로써 감리교회 안에는 합동추진위원회와 총회일치연구위원회로 압축되었다. 이후에 두 위원회는 통합에 대해서 서로 노력하였고 그 결과 합의문을 만들어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78년 5월 24일에 김창희 감독과 조피득 총회장이 날인함으로써 불행했던 과거의 비극을 씻고 자랑스러운 일치를 위한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 합동위원회가 합의한 사항을 1978년 2월 27일에 개회된 제12회 총회 제4차 특별총회에서 가결한 것으로 1978년 5월 24일에 정동제일교회에서 감리교 일치를 다짐하는 합동선교 대회가 개최되어 감리교회는 하나의 교회로 다기 태어나게 되었다. 이로써 4년간의 분열의 상처를 씻어 내고 교단 통합을 위한 모든 노력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1978년 10월 26일 배화여고 강당에서 열린 제13회 총회에 양측 대표가 참석하여 감리교회는 공식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13회 총회 감독들
이번 총회는 단순한 합동만 이루어 분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 합동 총회를 계기로 한국감리교회가 새로운 교단 체제로 전환되어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제13회 총회에서는 다음 4개자 사항을 처리하였다. ① 합동위원회가 합의한 4개 원칙을 실현할 것, ② 총리원을 감리회본부로 개칭하고 조직을 개편할 것, ③ 갱신총회 측의 연회 명칭을 중앙연회로 하며 지역을 초월하여 조직할 것, ④ 미비한 사항은 1976년 10월의 특별총회에서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4개 합동 원칙의 요체는 그간 4년 임기의 중안 감독과 2년 임기의 연회 감독제를 병행해 오던 것을 지양하고 “완전 다원화 감독제”로 바꾸는 것과 중앙 집권제를 지양하고 “개체 교회 중심화” 체계로 바꾼다는 데 있다. 따라서 감리교회의 특징인 감독의 목사 파송권이 없어진 새로운 체계가 만들어 진 것이다. 4년에 한번 모인 총회를 2년에 한번 모이며 감독의 임기를 4년에서 2년으로 개정하였다. 그리고 감독들이 감독회를 조직하여 감독회장은 윤번제로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으며 그 임기는 6개월로 했다.감독회에서 감독회장을 선출하여 연회 감독과 감독회장 직을 겸임하도록 한 것은 1980년 제14회 총회 때부터다. 그리하여 1978년 10월 27일에 개최된 총회에서 각 연회는 감독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중부연회 김지길 감독, 동부연회 이경재 감독, 남부연회 박우희 감독, 중앙연회 김재황 감독이 각각 피선 되었다.
김지길(金知吉, 호 松鶴) 감독은 1923년 12월 11일에 전라북도 익산군 오산면 송학마을에서 아버지 김득주와 어머니 조복임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8년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조치원교회에 시무하던 중 1952년 3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2년 3월에 천안제이교회, 1955년 평택 성광교회를 담임했다. 이때 1955년~1958년까지 도지사가 발령하는 팽성고등공민학교 교장과 에덴고아원 재단이사로 활동했다. 1957년~1961년까지 대전 남부교회, 1961년~1965년까지 선화교회를 담임하였고 1961년~1965년까지 대전지방감리사, 총리원 실행이사로 활동했다. 1960년~1967년까지 학교법인 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재단 이사, 1967년~1967년 대전 목자관 재단이사, 1961년부터 1968년까지 학교법인 대전 보육대학 재단이사장을 역임했다. 1963년~1977년 재단법인 기독교봉사회 이사, 1968년~1970년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실행위원, 1977년~1982년까지 재단법인 배화여고 재단이사, 1976년~1978년까지 한국기독교교육협의회 회장, 1984년~1985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65년부터 1993년 서울연회에서 은퇴할 때까지 아현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으며 이때 1970년 감리교 선교대학원을 수료하고 1978년에 제14대 중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고 윤번제 감독회장 직무를 맡아 제13대 감독회장 직을 수행했다. 김지길 감독은 제38회 중부연회(1979년 3월 14일~15일, 상동교회 개최)와 제39회 중부연회(1980년 3월 12일~14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또한 1980년 1월에는 제13회 특별 총회에서 연회 구역을 조정함에 따라 1980년 9월 29일에 경기도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중부연회 조직연회를 내리교회에서 개최하였다.
1986년부터 2년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을 역임하고 1998년에는 지역감정해소 국민운동협의회 상임의장으로 활동했다. 1992년에 감리교신학대학 박사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웨슬리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1998년 기아살리기 법국민운동연합 대표, 1998년 실직자 돕기 위한 사랑 나누기 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제2건국정신운동본부 대표, 한국사회발전시민실천협의회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상황 판단은 정확하게 하고 그 처리는 덕스럽게 하라”는 좌우명으로 평생을 살아온 김지길 감독은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오분인생론」, 「지금이 그럴 때냐?」,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설교선집」, 「물 위로 걸어라」, 「오늘의 구원」,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한국교회, 사회의 어제 오늘 내일(고희기념논문집)」, 「민족화합과 공동체 의식」, 「멈출 수 없는 천국 복음 운동(팔순 기념문집)」이 있다. 논문으로는 「교회와 사회관계에서 본 기능적 목회」(1970년 신학석사), 「한국사회의 지역갈등과 한국교회 해소방안」(1992년 목회학박사)이 있다. 김지길 감독은 배세계 사모와 결혼하고 슬하에 4남 2녀(김영식, 김영진, 김영세, 김영빈, 김전미)를 두었으며 2010년 8월 7일 향년 87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경재(李景在, 호 隱巖) 감독은 1913년 5월 3일에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에서 아버지 이긍도(李肯道)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부모이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잘 배우면서 성장했다. 1927년 3월 용강자복공립보통학교 5학년을 수료하고 1932년 3월에 진남포 공립상공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동시에 진남포 사립 삼승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35년 진남포 사립 대영학원 원장으로 일했다. 청년 이경재는 목회자의 꿈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고자 간사이(關西)성서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생 시절인 1937년 일본 고베(神戶) 성서교회 전도사로 시무했고, 1940년에 일본 간사이성서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40년 일본 고베에서 조선예수교회를 개척 시무 중 아멘단 사건으로 인해서 구속되어 10개월 동안 옥중생활을 했다. 출옥 후 1941년 서부연회 강서지방 함종교회, 1947년 진남포지방 덕동교회에서 목회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 지역에서 공산당의 학정에 힘들어 하던 북한 지역 주민들은 1951년 1.4후퇴 때 대거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때 이경재 전도사는 후퇴하는 대열에 합류하여 남한에 정착하면서 1951년 5월 마산지방 신흥교회를 개척하였고 재임 중 감리사를 역임했다. 1955년 5월에 공주제일교회에 부임하였으며 재임 중 역시 공주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59년 5월에 서울 돈암교회를 부임하였고 총리원 실행이사를 역임했다. 1965년 서울동지방 동광교회에서 목회하고 1971년 4월부터 성동지방 광희문교회를 담임하였고 감리사 일도 함께 겸임했다. 1976년 3월에 동부연회 부흥전도단장으로 활동했다.
이경재 목사는 1978년 제14대 동부연회 감독으로 선출되어 제30회 동부연회(1979년 3월7일~9일, 동대문교회 개최), 제31회 동부연회(1980년 3월 3일~7일, 동대문교회 개최)를 주재하였으며 1980년 행정구역상으로 연회를 조정하며 전국을 5개 연회 즉 서울, 중부, 동부, 남부, 삼남연회로 조정함에 따라서 1980년 9월 29일~30일에 청주제일교회에서 새로운 동부연회 조직연회를 주관했다.
또한 윤번제 감독회장 제도에 따라서 제13대 감독회장으로 직무를 수행 하던 중 제14회 총회(1980년 10월 29일~31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사회를 맡았으며 1980년 5월에 미국연합감리회 4년 총회에 한국감리교회 감독회장으로 참석했다. 1981년 미국 뉴욕 평강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미주 한인 감리교회 총회장 직을 겸임했다. 1984년 미주선교연회에서 은퇴하고 1985년 캐나다 뱅쿠버 한인교회 개척했다. 1988년에는 은암선교교회를 개척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2006년 향년 94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경재 감독은 노문채 사모와 결혼하고 슬하에 이요한, 요섭 두 아들을 두었다. 저서로는 「한 알의 밀이 되자」, 「육신이 되어(요한복음)」,「사랑의 노래 중의 노래(아가)」,「하나님의 은혜 주여 오시옵소서(계시록)」, 「이 작은 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나이다(자서전)」가 있다.
박우희(朴祐熙) 감독은 1915년 충남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에서 태어났다. 1945년 서울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48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대전지방 부여교회를, 1949년 논산교회를 담임했다. 1955년에 강경중앙교회, 1959년 공주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이때 1959년 대전지방 전임감리사를 역임했다. 1961년 대전 남부교회, 1963년 마산중앙교회를 담임하였으며 그때 경남지방 감리사로 일했다. 1972년 부산동성교회, 1974년 예산 오가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그리고 1978년 제2대 남부연회 감독에 당선되고 감독회장 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박우희 감독은 제25회 남부연회를 1979년 3월 21일~23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하고 1979년 11월에 윤번제 제13대 감독회장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제13회 총회 특별 총회(1980년 1월 30일~31일에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 박우희 감독은 감독회장 재임 시 1980년 3월 19일에 별세했다. 박우희 감독회장의 별세로 제26회 남부연회는 1980년 3월 19일∼21일 김순경 감독의 사회로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고, 1980년 5월 16일에 남부연회 총대회의에서 장만석 목사가 감독으로 보선되어 취임하였다. 연회 경계구역 조정에 따른 남부연회 조직연회는 1980년 9월 29일 대전제일교회에서 장만석 감독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김재황(金載黃, 호는 海岩) 감독은 1917년 12월 24일 평안북도에서 출생하였다. 1932년 비현 사립신성학교, 1937년 만주국 신경중학교, 1951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55년 3월에 동부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55년 충주서부교회, 1960년 청양교회, 1964년 홍성제일교회를 담임하였다. 1966년 충서지방 감리사를 겸임했다. 1967년에는 대구제일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1968년 경북지방 감리사를 지냈으며 1974년에 갱신총회 남부연회장을 맡았고 갱신 측 부총회장을 맡았다.
1978년에 갱신총회가 감리회와 통합을 하고 중앙연회로 바뀌면서 제1대 중앙연회 감독으로 선출되어 1980년에는 제13대 감독회장을 지냈다. 1978년 총회신학교 이사장, 1979년 한국성서신학교 이사장, 1982년에 대한성서공회 실행이사, 1980년 대구 생명의전화 창립이사로 1984년까지 활동했다. 1987년 3월 28일에는 필리핀 유니온 대학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8년 삼남연회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김재황 감독은 제13회 총회 제2차 특별총회(1980년 8월 28일~29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4회 총회(1980년 10월 29일~31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저서로는 「생명의 생수(설교집)」, 「대구제일교회40년사」, 「거성 은재 신석구목사 일대기」가 있다.
제13회 총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그동안 쟁점이었던 연회 분할 문제이다. 그래서 1979년 5월 특별총회에서 기존의 4개 연회를 5개 연회로 재편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1980년 1월 30일 제13회 총회 특별총회에서 해결하여 새 지방회와 새 연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특별총회는 연회경계분할전권위원을 선정하여 이 문제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였다. 그리하여 연회와 지방회를 행정구역 단위로 분할하였는데, 서울연회는 서울특별시 전 지역, 중부연회는 경기도 전 지역, 동부연회는 강원도와 충청북도 전지역, 남부연회는 충청남도 전 지역, 삼남연회는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제주도 전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그리하여 각 연회 조직연회가 1980년 9월에 일제히 개최되었다. 서울연회는 2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김재황, 김지길, 이경재 감독의 공동사회로, 중부연회는 29일~30일에 인천내리교회에서 김지길 감독의 사회로, 동부연회는 29일~30일에 청주제일교회에서 이경재 감독의 사회로, 남부연회는 29일에 대전제일교회에서 장만석 감독의 사회로, 삼남연회는 29일 대구제일교회에서 김재황 감독의 사회로 각각 개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