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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박씨
2009-02-15 16:45:54
氏族의 연원
시조는 박기오(朴奇悟). 고려 태조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태보삼중대광(太保三重大匡)에 이르렀고
충정(忠貞)이라 시호(諡號)되었다.
‘경자보(庚子譜)’ 세록(世錄)에 보면 그는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인 계림(鷄林)의 후예로 죽주백(竹州伯)에
이봉(移封)됨으로써 죽산박씨(竹山朴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였다. 죽성(竹城)은 죽산(竹山)의 옛이름이다.
시조 박기오(朴奇悟)는 신라 경명왕의 넷째 아들 언립(彦立)(죽성대군(竹城大君))의 아들이다. 그래서
‘경자보(庚子譜)’에는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 이후 30세까지를 신라선원(新羅璿源)편으로 하여
상계(上系)로 하여 박기오(朴奇悟)는 중조(中祖), 31세로 하여 그 뒤의 세계(世系)를 밝히고 있다.
본관지 연혁
죽산(竹山)은 경기도 안성군 동북부에 있는 지명이다. 고구려 장수왕 때에 여기를 취하여 개차산군(皆次山郡)이라 하였고, 신라 경덕왕이 개산군(介山郡)이라 개칭하였다. 고려 초에 죽주(竹州)로 고치고, 고려 성종은 단련사(團練使)를 두었으나 목종 때 폐하였다. 그 후 현종 9년에 광주목(廣州牧)의 속군이 되고 명종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 13년에 송문주(宋文冑)가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이 되어 몽고군의 죽주성 공략을 반격하여 공을 세운 일도 있다. 태종 13년에 죽산현으로 개명하여 현감을 두고 세종 16년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 중종 38년 부로 승격, 선조 17년 현으로 강등, 선조 29년 죽산부로 복구, 1895년(고종 32년)군이 되었다. 1914년 군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용인군과 안성군에 편입시켰다.
파명록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ㆍ문헌(文憲)공파ㆍ문정(文靖)공파ㆍ전서(典書)공파ㆍ대사헌(大司憲)공파ㆍ
제학(提學)공파ㆍ충현(忠顯)공파ㆍ목사(牧使)공파ㆍ총제(摠制)공파ㆍ찬성(贊成)공파
주요 세거지
‘경자보(庚子譜)’에 의하면 시조인 박기오(朴奇悟)가 고려 태조 때 죽주(竹州)(죽산(竹山)의 옛이름)백(伯)에 봉해지면서 죽산(竹山)을 식읍(食邑)받은 후로 경기도 죽산(竹山)에서 세거하였다.
박혁거세(朴赫居世)를 1세로 하여 45세 박보로(朴寶老)의 증손(曾孫) 박희성(朴喜城)의 대에는 충북 보은군(報恩郡)에 터를 잡았고, 박희성(朴喜城)의 동생 박희굉(朴喜宏)은 양주군(楊州郡)에서, 아들 박식(朴埴)은 옥천군(沃川郡)에서 세거하였으며, 박식(朴埴)의 동생 박돈(朴墩)은 경남 남해군(南海郡)으로 이거(移居)하였다.
51세 박세관(朴世冠)은 고성군(固城郡)으로 옮겨갔고, 박욱(朴郁)은 익산군(益山郡)에 터를 잡았으며, 52세 이후로는 충주(忠州)ㆍ하동(河東)ㆍ통영(統營) 등지로 산거(散居)하여 충질공파(忠質公派)의 세거지를 이루었다.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인 46세 박익(朴翊)의 후손은 금성(金城)에서 세거하였고,
문 헌 공 파(文憲公派)의 47세 박원형(朴元亨)은 지금의 용인군(龍仁郡) 외사면(外四面)에 터를 잡았다.
일부가 손자 박수간(朴守幹)의 대에 인동(仁同)으로 이거하였고, 증손 박충언(朴忠彦)은 춘천(春川)으로,
박대손(朴大孫)은 동래(東萊)로 옮겨갔다.
51세 이후에는 파주(坡州)ㆍ화성(華城)ㆍ평택(平澤)ㆍ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청양(靑陽)ㆍ금산(金山)
등지로 산거(散居)하였다.
문 정 공 파(文靖公派)인 47세 박원정(朴元貞)의 후손은 지금의 안성군(安城郡) 삼죽면(三竹面)에 터를 잡았고,
증손 박배근(朴培根)의 대에는 나주군(羅州郡)으로 옮겨가 광주(光州)ㆍ흥덕(興德)ㆍ고창(高敞) 등지로
산거(散居)하였으며, 54세 박은(朴訔)의 대(代)에는 보은(報恩)ㆍ괴산군(槐山郡)에 이거(移居)하였다.
한편,
전서공파(典書公派) 45세 박옹(朴雍)의 후손은 평북 선천군(宣川郡)에서 세거했고,
☆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인 박중의(朴仲宜)(대사헌(大司憲))의 아들 박인(朴禋)은 양주(楊州)에,
박첨(朴襜)은 홍성(洪城)에,
박도(朴禱)는 여주(驪州)에, 박조(朴祚)는 파주(坡州)에 터를 잡아 대(代)를 이어왔고 그 뒤
박인(朴禋)의 후손은 철원(鐵原)과 포천(抱川), 충주(忠州)로 분거(分居)해 갔고
박첨(朴襜)의 후손은 합천(陜川)ㆍ청도(淸道)ㆍ진천(鎭川)ㆍ용인(龍仁) 등으로 나뉘어 번연(蕃衍)해왔으며
박도(朴禱)의 자손들은 이천(利川)과 부평(富平)(부천(富川)ㆍ역곡(驛谷)), 그리고 제원(提原) 등지에서 번창해왔고
박조(朴祚)의 후손들은 은진(恩津)(논산(論山))등지에서 세를 누리며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어왔다.
제학공파(提學公派)의 44세 박문화(朴文和)의 아들 박효이(朴孝以)의 대부터는 청주(淸州)에서 세거했고,
일부가 50세박지방(朴枝芳)의 대이후로 고양군(高陽郡)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충현공파(忠顯公派)인 44세 박문수(朴門壽)의 손자 박량(朴良)은 남원군(南原郡)에 터를 잡았고,
박종의(朴宗義)의 후계(後系)는 죽산(竹山)에서 세거하였다. 일부가 50세 박세영(朴世榮)의 대이후로
함양군(咸陽郡)에 옮겨갔고, 승주(昇州)ㆍ장성(長城)ㆍ곡성(谷城)ㆍ삼척(三陟)ㆍ평창(平昌)ㆍ울진(蔚珍)ㆍ
보은(報恩)ㆍ천안(天安)ㆍ장수(長水)ㆍ무주(茂州) 등지에 산거(散居)했다.
목사공파(牧使公派) 45세 박현공(朴玄公)의 후손은 춘천(春川)에서 세거했으며,
총제공파(摠制公派) 박덕공(朴德公)의대에는 양주군(楊州郡)에 터를 잡은 것 같다. 일부가 증손 박혜(朴蕙)의
대에 평산군(平山郡)에 이거(移居)했고, 일부는 고손 박겸의(朴兼義)의 대이후 진천군(鎭川郡)에서 세거하였다.
찬성공파(贊成公派) 41세 박훤(朴暄)의 후손은 양주(楊州)에서 살며, 47세 박응룡(朴應龍)의 대에 홍천(洪川)으로
이거(移居)했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용인군(龍仁郡) 외사면(外四面),
강원도 홍천군(洪川郡) 서면(西面), 춘천(春川), 금화군(金化郡)일원, 경북 청도군(淸道郡) 청도읍(淸道邑),
경남 고성군(固城郡) 불이면(不二面), 남해군(南海郡) 이동면(二東面), 함양군(咸陽郡) 휴천면(休川面),
합천군(陜川郡) 쌍백면(雙栢面),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괘간면(掛竿面), 평북 선천군(宣川郡) 남면(南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특히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외사면(外四面) 옥산리(玉山里) 하산(下山) 마을은 1980년 당시 죽산박씨(竹山朴氏)
32가구 일대에 3백여 가구가 모여살고 있는 곳이다.
조선 예종조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이 자신의 묘터를 찾다가 지금의 안성군(安城郡) 삼죽면(三竹面) 비봉산(飛鳳山) 아래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우 박원정(朴元貞)이 먼저 세상을 뜨자 그 자리를 동생에게 주고 자신은 그 옆 하산(下山)부락 뒤쪽산에 묻혔다고 한다.
순조조(朝) 효행으로 온 고을을 감화시킨 박인영(朴仁永)의 정문(旌門)등이 충효(忠孝)의 죽산박씨(竹山朴氏) 전통을 상징하며 마을을 지키고 있다.
씨족史
시조(始祖) 박기오(朴奇悟)의 후대는 문열공(文烈公)파, 철성백(鐵城伯)파, 찬성공(贊成公)파, 문광공(文匡公)파, 대복경공(大僕卿公)파의 5파로 갈렸다.
문열공(文烈公) 박인량(朴寅亮)은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급제, 좌복사첨지정사(左僕射僉知政事)등 여러 관직을 거친 인물로 특히 문명(文名)을 날렸다. 그는 요동에서 압록강(鴨綠江) 이편을 국경으로 하려는 정책의 부당함을 정연한 논리의 글로 설명해 결국 이를 막았고, 호부상서(戶部尙書) 유홍(柳洪)과 함께 송(宋)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그가 지은 시들이 송(宋)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특히 사주(泗州) 귀산사(歸山寺)에서 지은 율시(律詩)는 현판에 새겨져 후세에까지 전해졌다. 문집(文集)과 고금록(古今錄) 10권을 남겼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철성백(鐵城伯) 박서(朴犀)는 중조(中祖) 기오(奇悟)의 9대손. 고려(高麗) 중종(中宗) 18년 살례탑(撒禮塔)을 대장으로 쳐들어온 몽고군을 철주(鐵州)에서 격퇴하고 귀주(龜州)에서 성을 굳게 지켜 버틴 공으로 후일 벼슬이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고려조(高麗朝)는 그의 위훈을 기려 철성백(鐵城伯)에 봉하고 음성(陰城)을 식읍으로 주어,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본관을 음성(陰城)으로 하였다.
문광공(文匡公)(박전지(朴全之))파는 5대 파 중 후손이 가장 많아 조선조(朝鮮朝)때 상신(相臣) 2명을 배출하는 등 죽산(竹山) 박문(朴門)의 기개를 크게 높였다.
중조(中祖) 기오(奇悟)의 11대손이자 판서(判書) 박휘(朴煇)의 아들인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는 「고려조(高麗朝) 4대 시인」의 하나로 꼽히는 문장가. 그는 원(元)나라에 가 그곳 명사들과 교유했고 원(元) 세조(世祖)의 사랑을 받아 정동성도사(征東省都事)로 임명됐다. 그 후 돌아와서 이부(吏部)ㆍ병부시랑(兵部侍郞)에 제수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벼슬이 높다 하여 사양하고 안동(安東)의 원이 되었다. 충선왕(忠宣王) 때는 밀직부사(密直副使)ㆍ중경(中京)(개성(開城))유수(留守)를 지냈고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졌다. 충숙왕(忠肅王) 때는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충숙왕(忠肅王) 때의 공신 박원(朴遠)은 그의 아들이며 죽산군(竹山君) 문보(文珤), 문충공(文忠公) 덕룡(德龍), 판서(判書) 수룡(壽龍), 제학(提學) 문화(文和), 충현공(忠顯公) 문수(門壽)는 그의 손자다.
박원(朴遠)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忠肅王) 11년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앞서 충숙왕(忠肅王)을 원(元)나라에서 시종한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었다. 후에 정당문학(政堂文學)ㆍ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고 경원군(慶源君)에 봉해졌다.
충현공(忠顯公) 박문수(朴門壽)는 고려말 정승으로 정포은(鄭圃隱)ㆍ이목은(李牧隱)과 함께 국사를 논해 세칭 삼로(三老)라 불리었다. 충현공(忠顯公)은 공양왕(恭讓王) 4년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조를 세우면서 좌의정으로 함께 일할 것을 권해 오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글로 따를 수 없는 뜻을 밝히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충정을 지켰다. (암행어사 박문수와는 다른 분임)
역시 여말(麗末)의 인물인 박영충(朴永忠)은 공주도병마사(公州都兵馬使)를 거쳐 우왕 14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원수로서 이성계(李成桂)의 우군(右軍)이 되어 출진했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했다. 그 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다가 공야왕(恭讓王) 2년 회군의 공으로 공신(功臣)이 되었다. 조선조가 개국하자 한성부윤(漢城府尹)ㆍ강화절제사(江華節制使)ㆍ좌찬성(左贊成)을 거쳐 죽성부원군(竹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죽산(竹山) 박(朴)씨는 조선조에 들어 39명의 문과 급제자와 영의정 박원형(朴元亨), 박홍구(朴弘耈) 등 2명의 상신(相臣)을 냈다.
박원형(朴元亨)은 문종(文宗) 때 호당(湖堂)에 뽑혔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세조(世祖) 13년 이시애란(李施愛亂)을 평정, 좌의정에 올랐다. 예종(睿宗)이 보위에 오르자 익대공신(翊戴功臣)2등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문헌(文憲)이라 시호(諡號)가 내렸고 예종묘정(睿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한평생을 청렴과 검소를 신조로 삼고 산 그는 어느 핸가 그의 생일에 아들 안성(安性)이 술상을 차려 올리니 술을 마시고는 시(詩) 한 수를 지어 아들에게 주며 가훈으로 삼도록 했다.
“금야등전주수순(今夜燈前酒數巡), 여년삼십이청춘(汝年三十二靑春), 오가구물유청백(吾家舊物惟淸白), 호파상전무한인(好把相傳無限人)”(계자시(戒子詩))(오늘 밤 등불 앞에 몇 순배 술을 드니, 너의 나이 서른 둘이라, 우리집 가보는 오직 청백(淸白)뿐이니, 부디 무한히 전해다오.)
임금에게 직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그를 가리켜 세종(世宗)은 나의 급암(汲黯)(한(漢)나라의 직언 잘한 간신(諫臣))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의 5대손 박홍구(朴弘耈)는 도정(都正) 박란영(朴蘭榮)의 아들, 선조(宣祖) 15년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 광해군(光海君) 말년에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벼슬이 깎이고 다음해 이괄란(李适亂)이 일어나자 광해군(光海君) 복위를 음모했다는 조카 박윤장(朴允章) 사건에 연루돼 심문을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숙종(肅宗) 17년 신원(伸寃), 복관됐다.
박홍구(朴弘耈)와 동기간인 박신룡(朴信龍)은 인조(仁祖) 때 무과에 급제, 인조(仁祖) 정묘(丁卯) 1월 역신 강홍립(姜弘立)과 이윤(李潤) 등이 후금군(後金軍)을 이끌고 침공하자 권지중군(權知中軍)으로 적을 막다 용만(龍灣)에서 순절했다. 숙종(肅宗) 을축(乙丑)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영조(英祖) 때 왕명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그의 아들 박상현(朴商賢)과 손자 박순(朴諄)은 효행이 돋보여 후세에 귀감이 됐다.
박원(朴遠)의 10대손 박명현(朴名賢)과 11대손 박명룡(朴命龍)은 무장으로 가문을 빛낸 인물.
박명현(朴命賢)은 선조(宣祖) 29년 이몽학(李夢鶴)이 난을 일으켜 홍주(洪州)를 위협하자 목사(牧使) 홍가신(洪可臣) 휘하에서 임득의(林得義)와 함께 성을 지키며 반군을 청양(靑陽)까지 추격, 섬멸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토포사(討捕使), 충청도방어사(忠淸道防禦使),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 선조(宣祖) 37년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오르고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다.
광해군(光海君) 때 무과에 급제한 박명룡(朴命龍)은 형 성룡(成龍)과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순절한 무인. 이괄(李适)의 난 평정 때 형 성룡(成龍)과 함께 부원수 이수일(李守一)의 군중에서 공을 세워 원종공훈일등(原從功勳一等)에 녹훈되었다. 고부군수(古阜郡守)로 있다가 변방으로 자원, 평안병마우후(平安兵馬虞候)로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의 막하에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맞았다.
박명룡(朴命龍)은 오랑캐에게 투항한 정난영(鄭蘭英)이 그에게도 항복하라고 권하자 “난(亂)에 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은 신하의 직분인데 어찌 너희들의 짓을 본받으라 하느냐”며 거절하고, 성이 적에게 포위되자 홀로 성위에 서서 화살을 옆에 쌓아 두고 수백 명을 활로 쏘아 죽였다. 활을 당기는 엄지손가락이 끊어지자 칼을 빼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됐다.
박원형(朴元亨)의 아우 박원정(朴元貞)의 7세손 박경(朴璟)은 한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심취하며 충효를 실천한 인물이다.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한가함을 즐기며 수고스러움을 싫어하고 조용함을 즐김이 내 뜻하는 바이다(오번낙한(惡煩樂閒) 오로낙정(惡勞樂靜) 소오지야(所吾志也))”고 고집한 그였지만 임진왜란으로 국운이 위태롭자 창의대장이 되어 의병 수천과 군량을 모아 왜적과 싸웠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을 제수하면서 환로(宦路)에 나서기를 권했으나 그는 정중히 거절했으며, 이에 왕은 궤장(几杖)과 죽림처사(竹林處士)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박경(朴璟)은 난이 끝난 후 광산군(光山郡) 임곡면(林谷面) 불당곡(佛堂谷)에 은거하니 인근 향당, 유림들이 그의 충의를 기념하고 그가 여생을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가학정(駕鶴亭)을 지어주었다.
선조(宣祖) 25년 임란(壬亂) 때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捷)에 큰 공을 세운 박계성(朴繼成)은 충현공(忠顯公) 박문수(朴門壽)의 8대손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구례(求禮)에서 전사했다. 그의 동생 박승성(朴承成)과 종제(從弟) 박언정(朴彦貞)도 진주성(晉州城)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비문을 지으며 “한집안에서 삼충(三忠)이 났음은 고경명(高敬命)과 비교가 되나 효열(孝烈)이 더 있으니 장한 일”이라고 칭송했다.
이 밖에 조선조의 인물로는 박포(朴苞), 한천(寒泉) 박경신(朴慶新), 만봉(晩峰) 박종유(朴宗儒) 등을 들 수 있다.
박포(朴苞)는 조선조 개국 후 대장군(大將軍) 사헌중승(司憲中丞)ㆍ황주목사(黃州牧使) 등을 지내고 제1차 왕자(王子)의난(亂)에 이방원(李芳遠)(태종(太宗))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전공을 세워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는데, 상작(賞爵)에 불만을 품고 태조(太祖)의 4남 이방간(李芳幹)을 업고 이방원(李芳遠)에 맞섰다가 패하여 니산(尼山)으로 유배되었고, 결국은 참살당했다.
한천(寒泉) 박경신(朴慶新)은 장령(掌令) 박사공(朴思恭)의 아들로 선조(宣祖) 15년 문과에 급제하여 임란(壬亂) 때 청도조전장(淸道助戰將)으로 참전, 뒤에 밀양부사(密陽府使), 전주부윤(全州府尹), 서흥부사(瑞興府使), 동래부사(東萊府使), 삼척부사(三陟府使), 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내고 경상도(慶尙道)와 공홍도(公洪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는데, 문명(文名)이 높았다.
만봉(晩峰) 박종유(朴宗儒)는 영조(英祖) 4년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는데 경전(經傳)과 백가(百家)에 통달했고 시(詩)ㆍ서(書)ㆍ화(畵)에도 능했다. 저서도 ‘사변(史辨)’이 전한다.
근세 인물로는 3ㆍ1 운동 이듬해에 형 박치조(朴治祚)ㆍ박건채(朴健采)와 함께 평북(平北) 선천(宣川) 군청과 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파괴하고 채포돼 사형을 당한 박치의(朴治毅) 국난(國難)에 목숨을 던지는 충성의 전통을 이었다.
고종(高宗) 20년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지낸 박주현(朴周鉉)은 남원(南原)에 내려가 군민회(郡民會)를 조직하고 만석의 가산을 풀어 항일운동의 군자금을 제공했다가 일군(日軍)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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