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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이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 습 3:14-20, 빌 4:1-9
성탄절이 가까워 지면서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거리에 등장했다. 여기서 얻는 수익금은 불우이웃을 돕는데 사용되어 진다. 그런데 올해는 뽀빠이 이상용 사건으로 따뜻한 손길들이 작년보다 현저히 줄어 들었다고 한다. 최근 한국노인문제연구소가 실시한 ‘노인의 생활실태 및 의식조사’에 따르면 장남부부가 노부모와 함께 사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형태가 무너지면서 노인만 사는 가구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인이 장남부부와 함께 사는 비율은 지난 75년에 78.2%였으나 81년 47.3%, 90년 44%, 94년 39.1%로 떨어졌고, 올해는 20.1%로 급격히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장남 아닌 아들부부와 함께 사는 노인이 8.7%, 딸부부와 함께 사는 경우가 3.7%나 되었다. 특히 미혼 자녀와 함께 사는 경우가 6.8%였는데, 이들도 결혼하면 대부분 분가할 것으로 예상돼 노인만 사는 가구는 급속도로 증가될 전망이다. 60세 이상의 노인 단독 가구는 75년에 7%에 불과했으나 81년 19.8%, 90년 23.8%, 94년 41%로 크게 올랐고, 올해는 절반이 넘는 53%나 되었다. 자녀들이 부모 봉양을 꺼림에 따라 노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각종 노인복지 시설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노인복지 시설은 턱없이 낮은 수준이어서 노인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말 65세 이상의 노인인구는 264만명으로 전체인구의 5.8%로 이는 해마다 늘어날 전망이다. 그래서 21세기의 교회는 노인복지 문제에 관심을 두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지난 수요일 뉴스 시간에 종교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소식을 들었다. 일명 ‘아가교’라고 불리는데 아가교의 교주인 김기순은 지난 78년 이리주현교회 전도사였던 이교부 전도사가 독립하여 나온 일명 ‘삭발교’(교주가 머리를 삭발하였다고 하여)의 교인이었다. 삭발교는 철저한 금욕주의를 표방했는데 78년초 교주가 예배 도중에 여신도와 신도들 앞에서 나체로 춤을 추는 의식을 연출했다. 이를 항의하러 온 다른 교회 목사들을 폭행하여 교주가 구속됐다. 아가교 교주인 김기순은 구속된 교주를 면회다니면서 교주가 자신을 신임하는 것처럼 소문을 내 신도들을 끌어 모았다. 그러나 구속된 교주가 출감하여 자신을 멀리하자 일부 신도들을 이끌고 나와 예배를 보면서 세를 불려나갔다. 이때부터 김씨는 신도들과 함께 떡장사, 어묵장사 등을 하면서 이교부 전도사의 교리를 변형하여 ‘욕망과 인연을 끊고 모든 것을 바치면 큰 복을 받을 것’이라며 신도들의 재산을 아가교에 바치게 했다. ‘이자는 못주지만 언제든 필요하면 다시 돌려주겠다’며 신도들로부터 돈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이때 모은 돈으로 경기도 이천에서 야산을 사들여 신도들과 함께 옮겨가 공동생활을 하면서 신흥종교집단의 교주로 본격 등장했다. 이천에서 10만 여평의 협업농장을 건설하여 공동생활을 하면서 이곳 이름을 ‘신나라동산’이라 부르게 하였고, 자신을 ‘아가야’라고 부르게 했다하여 일명 ‘아가교’라고 불린다. 처음에는 기독교 계통의 종교인 것처럼 속여 신도들을 끌어모았으나 나중에는 자신을 신격화해 ‘내가 곧 신이다. 나를 믿고 따르는 자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라는 설교를 자주하면서 신도들을 세뇌시켜 왔다. 이 협동농장에서 탈출 등의 규율을 어긴 신도 2명을 때려 죽인 뒤 농장 안 야산에 묻었고, 7살의 어린이가 화장실에서 용변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고 때려 죽인 뒤 암매장했다. 이들은 농장뿐 아니라 사업에도 손을 대 우리나라 음반 판매고의 25%를 점유하는 ‘신나라 레코드사’ 등 4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들은 농림부가 특수종교집단임일 알고도 첨단기술농업단지로 지정하여 농어촌발전기금인 첨단기술농업생산기금을 30억이나 지원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1군 1명품 지역특화사업으로 지정돼 2억, 농산물 포장세터 건립에 3억5천 등 그동안 43억원의 국가 지원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신나라동산 10만여평 가운데 농지 4만여평이 대지로 불법 전용되었고, 불법 건물이 여러 채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정부 당국의 비호가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지금부터 약 2천년 전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다. 본문 중에서 특히 16절의 말씀을 보면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기운을 내라’로 번역되어 있다. 영어성경인 리빙바이블은 ‘cheer up, 기죽지 말라’라고 번역되어 있다. 결국 이 말씀은 ‘기죽지 말라, 힘을 내라, 용기를 내라’는 뜻이다. 어떤 처지나 환경, 어떤 경우라도 낙심하지 않고 체념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더 기운일 내고 용기를 갖고 희망을 붙들고 사는 생활이 곧 믿음 생활이다. 스바냐 선지자는 요시아왕때 선지활동을 한 분이다. 요시아왕이 등장하기 전 약 50년간은 유대 역사에 있어서 가장 어두웠던 역사이다. 므낫세와 암몬, 두 왕은 백성을 착취하였고, 자신들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서 국고를 탕진하였다. 백성들 역시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극히 부패하고 타락된 생활을 하였다. 특히 종교적 혼합주의가 성행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때로는 태양신을 섬기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하기도 했다. 백성들은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 결과 639년에 암몬왕이 피살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분이 요시아왕이었다. 요시아왕이 즉위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초기에 활동한 선지자가 스바냐이다. 스바냐는 이스라엘의 왕실 출신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잘 알고 있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지 않나? 위의 사람들이 타락하다보니 아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스바냐 선지자는 무엇보다 먼저 이스라엘의 회개를 외치면서 1:2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라고 말했는데 이는 죄악으로 가득한 유대나라가 곧 멸 망할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러한 때 백성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절망에 빠졌다.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내려진다고 하니 겁이 났다. 두려워 떨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서 또 다시 하나님의 예언에 내려졌다.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다시 부르셔서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셨다. 이스라엘의 희망에 대해서 13절의 말씀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인해서 생긴다고 했다. 구약 선지자 특히 이사야 선지자,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 등 많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남은 자란 나무의 윗둥치를 베어내고 땅밑에 남아있는 그루터기를 비유한 말이다. 곧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자이다. 어떤 사람이냐 하면 모든 부패 속에서 믿음의 정절을 끝까지 지키고 살아가는 소수의 무리들, 모든 시련과 유혹을 미음으로 극복해 가면서 살아가는 소수의 무리들, 절망과 낙심 속에서도 메시야 대망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갔던 소수의 무리들을 가리켜서 남은 자라 부른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저버렸을 때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이 남은 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시킬 것이고, 이스라엘에 내일의 희망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킬 때도 같은 의미이 말씀을 하셨다. 모든 사람이 타락했을지라도 ‘이곳에 의인 열사람만이라도 있다면 이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하셨다. 오늘의 교회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오늘의 역사 속에 남아 있는 의인 열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이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재앙,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속에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운 삶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그리스도인 때문에 이 세상을 구해주시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남은 자들은 남다른 고민과 고통과 괴로움이 있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많은 박해를 받기도 한다. 미움과 증오가 가득한 세상에서 그래도 사랑하며 살려고 하다가 남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한다. 거짓이 만연된 세상에서 진실되고 올바르게 살려다가 바보처럼 따돌림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럴 경우에 낙심하기 쉬운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럴 경우라도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기운을 주시겠다고 가르치고 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은 자이다. 어떤 처지에서라도 기운을 내고 살아야 어둠을 깨쳐갈 수 있는 빛이 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운을 내어야할 이유가 몇 가지 있다.
1.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용서받은 사람이 힘이 있다. 15절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 형벌을 제하였다는 말씀은 모든 죄를 사해 주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남다른 고민도 하게 되고, 삶에 대한 위축감을 느낄 때도 있다. 아마 여러 가지 경우일 것이다. 돈이 없을 때, 지식이나 기술이 없을 때 등, 이런 경우 우리는 위축될 것이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없을 때 위축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죄의식 때문일 것이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사람은 누구나 다 위축될 것이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삶의 의욕이나 용기가 없어진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뒤로 물러서게 된다.
15년 전의 일이다. 통일교가 한 때 기승을 크게 부리던 당시에 서울의 어느 교단 모임의 한 목사님이 양심선언을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목회를 계속하셨던 목사님은 해외여행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안내장이 왔다. ‘저희 단체에서 목사님을 성지순례와 세계여행을 시켜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신청금 20만원을 내시면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그 안내장을 보신 목사님은 마음이 설레였다. ‘내가 신청금 20만원만 내면 세계여행도 하고 성지순례도 할 수 있다’는 어떤 기쁨 때문에 깊이 생각하거나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신청했다. 그 단체가 안내하는 대로 성지도 순례하고 미국도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마지막날 그 단체는 ‘이번 여행은 저희 통일교에서 여비를 마련해서 지원해 드린 것입니다. 돌아가셔서는 저희 통일교 일에 잘 협조해 주십시오’라고 당부하더라는 것이다. 이때 그 목사님은 자신이 속았음을 알게 되고 큰 낭패감을 가지게 되었다. 돌아와서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제발 다른 사람들이 몰라 주었으면 하는 소원 뿐이었다. 그러데 하루는 엽서가 왔다. 통일교의 모임이 있으니 나와달라는 내용이었고 얼마 후 전화 확인이 왔다. 그래서 그 모임에 못가겠노라고 거절했다. 그 후에 젊은 청년이 찾아와서 ‘목사님,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만약 참석하지 않으시면 목사님의 교단 총회에 고발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신문지상에 공개하겠고 사진도 있다’고 협박했다. 참석하시면 참석하신 것은 비밀로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한번, 두번 거의 일년 가까이 그 단체의 모임에 참석했던 것이다. 마음에 괴로움이 있다. 그 다음부터는 목회자의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고, 예배시간의 설교에도 자신이 없고, 언제든지 마음을 누루고 있는 그런 답답한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견디다 못해 교단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양심선언을 했던 것이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통일교에 관계되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라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였고 날아갈 것 같더라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 같더라는 것이다. 그 다음 통일교의 사람이 찾아와서 어느 모임에 참석해 달라고 하였다. 참석하지 않겠다고 당장 거절하니까 공개하겠다고 협박을 한다. 그때 목사님께서는 큰소리로 공개하려면 하라고 소리쳤다. 나는 이제 너희들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소리치며 그 사람을 쫓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힘이 생긴다. 죄의 압박을 가지고 있으면, 양심의 가책을 가지고 있으면 움츠러 든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았다고 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법에 저촉되지 않았다고 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문제는 내 중심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앞에 떳떳하지 못할 때 나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고,기운을 낼 수 없다.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나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내가 담당해야 할 죄의 대가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신 담당시켜 주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사 1: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요일 1: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의 사유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힘을 얻는다. 여러분, 주일예배에 와서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자난 한주일을 살아오면서 묻었던 더러운 마음의 때를 벗기는 일이다. ‘주님, 저는 이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라고 주님 앞에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고 돌아가라. 그러면 다음 한주간 동안 새 힘을 받고 살아갈 수 있다.
2.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새 힘을 얻는다.
17절상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니 기죽지 말고 새 힘을 얻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 있을 때는 의기소침할 수 없고, 두려움이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편에,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이 확신이 있을 때 모든 면에서 새로운 힘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고 담대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확신이 없이 하나님이 마치 없는 것 같이 생활하는데에 두려움이 있다. 기독교윤리에서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용어가 있다. 기독교대학의 총장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는 총장, 하나님 없이 하나님 있는 것처럼, 예수 없이 예수 믿는 것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실천적 무신론자 말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관념적으로 믿지만, 그러나 실제 생활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실천적 무신론자라 한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혹시 이런 분이 계신지 모르겠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한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는 전혀 다르게 생활한다. 하나님이 내 속에 함께 계시고, 나의 삶을 움직이고 계시다는 확신없이 하루하루를 생활해 갈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이 사실을 우리가 종종 잃어버릴 때가 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개혁의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박해도 받고, 굶주리기도 하고, 오해도 받았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나중에는 혼자의 힘으로는 종교개혁을 할 수 없겠다고 희망을 잃어버린 때도 있었다. 아예 문을 닫고 병상에 누웠다. 이제 내 힘으로는 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자포자기했다. 이때 방문을 열고 상복을 입은 아내가 들어온다. 어느 초상집에 갔다온 모습이었다. ‘누가 세상을 떠났느냐?’ 물으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났다’고 대답한다. 아니 ‘하나님께서 세상을 떠나다니 그럴 수가 있느냐? 당신 돌은 것 아니냐?’라고 반문을 하니 이때 아내가 지혜롭게 대답한다. ‘여보,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찌 당신이 그리 낙심할 수 있겠소. 아무래도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아서 상복을 입었소.’ 이게 무슨 말인가? 루터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확실이 살아계시고 내 곁에 계시다는 확신이 있으면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 없을 터인데 믿음이 식어지니까 주저앉아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다. 하나님이 내 곁에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과 더불어 살 때 담대해지고 힘이 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뜻은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일매일 새로운 삶의 능력을 주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 40:3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어떤 경우에서든지 내 곁에 계신다. 약할 때 도와주시고 어려울 때 구해주신다. 낙심될 때 새 힘을 주신다. 하나님게서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나와 함께 계신 그 하나님을 붙들고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일터로, 이웃으로,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힘있게 살아갈 수 있다. 기운을 낼 수 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