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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라 하셨으니. 悔い改めるように。(2021년 12월 12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17:28~31
17: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29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신을,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새겨서 만든 것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무지했던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31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28. 皆さんのうちのある詩人たちも、/『我らは神の中に生き、動き、存在する』/『我らもその子孫である』と、/言っているとおりです。29. わたしたちは神の子孫なのですから、神である方を、人間の技や考えで造った金、銀、石などの像と同じものと考えてはなりません。30. さて、神はこのような無知な時代を、大目に見てくださいましたが、今はどこにいる人でも皆悔い改めるようにと、命じておられます。31. それは、先にお選びになった一人の方によって、この世を正しく裁く日をお決めになったからです。神はこの方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て、すべての人にそのことの確証をお与えになったのです。」
지난 한 주간도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호흡과 손짓과 생각과 태도를 인도해 주신 것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매 주일 첫 날을 구별하여 예배하며, 지난 주간을 돌아보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천국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믿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던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나게 체감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인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과 인생 가운데 현실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우시는 것도 기대할 수 있으니 더욱 설레고 감격스러운 날들을 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매 주일을 맞이하고 예배할 때마다, 그런 고백과 감동과 감격이 늘 마음과 생각에 채워져 있기를 다시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바울의 아테네 아레오바고 연설의 후반부입니다. 지난 주일에 바울이 연설한 내용의 전반부를 정리하여 한 가지 메시지로 나누었습니다. 한마디로 액운을 피하고 복을 구하는 것이 신을 대하는 행동의 전부라고 생각하던 이들에게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선포한 것이지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들의 존재가 곧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곧 우리와 매우 가까이 친밀하게 동행하고 계시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28절에는 이방인 즉 그리스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시인들이 쓴 시의 구절들을 예로 들며, 창조신앙과 그리스인들의 지적인 영역의 공통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미 사람들의 생각과 철학이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기록해 놓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 안에서 발견되는 공통의 윤리와 도덕 사상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성경도 말씀하고 계시지요. 하나하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잠언서 한 권만 제대로 읽어보면 우리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얼마나 도덕적이며 윤리적이고 인류의 보편적인 건전한 상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시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신의 자녀들이다.”라고 한글 새번역 성경은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것을 원어로 직역하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 자손(게노스)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신을 뜻하거나 하나님을 뜻하는 “데오스”라는 단어를 직접 쓰지는 않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신의 피조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표현인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여 그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는 분이 곧 “하나님(데오스)”이고, 우리가 그 자손(게노스)라고 29절에서 뚜렷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누가복음은 후손에서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눅 3장 마지막 절인 3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눅 3:38)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아담의 아버지가 되시고, 아담을 낳으신 것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창조된 첫 번째 사람이며, 피조물인 아담의 후손인 오늘날 모든 인류가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성경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액땜해 주는 우상처럼 섬기거나, 창조주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피조물인 물질로 만들어 물질적인 존재처럼 생각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도 그런 물질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사람은 물질이나 사실의 가치로만 헤아릴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평가되고 헤아려져야 할 고귀한 존재인 것을 바울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선언은 곧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 16:26)
아무리 이 세상 모든 재물과 능력과 재미를 얻어도 목숨, 즉 영혼의 존재가치를 잃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를 눈에 보이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같은 돌에 비교하거나, 그것들로 조각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오직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바로미터는 곧 예배와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자신의 일상을 사용하고 있는가와 비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예배하는 일과 말씀을 먹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시간사용의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문자적으로 혹은 시각적으로 기독교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꼭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늘 그 분과 동행하는 일상생활과 인생의 태도가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헤아리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본으로 바울은 회개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30절에 이제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즉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에게 회개의 메시지와 명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회개란 몸을 돌이키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가던 길에서 돌이켜 반대의 길로 간다는 것인데요. 만일 지금 가는 길이 바른 길이라면 이미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 방향으로 가는 길을 잘 지키는 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고 하여 자꾸 돌이키면 바른 방향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계속 돌기만 하는 셈이 되는 것이지요.
영국의 극작가이며 변증가인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결코 벼랑길이 아니다. 지옥으로 향하는 길은 밋밋한 내리막길이다. 사람들은 그 길을 기분 좋게 걸어간다.”
그렇다며 천국으로 가는 길은 어떤 길일까요? 당연히 밋밋한 오르막길이겠지요. 사람들은 그 길을 어렵고 힘들게 여기며, 걸어가기를 버거워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도 매우 좁다고 하셨습니다. 좁은 길이든 밋밋한 오르막길이든... 바른 길을 가는 데에는 마음의 부담과 거리낌이 생기는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인생에는 여러 갈래의 길로 갈라져 있다고 정의하는데요. 저는 조금 다른 비유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인생이라는 단 한 줄기의 길이 있고, 바른 방향과 그릇된 방향이 있을 뿐이라고요. 그래서 바른 방향으로 걸어가던가, 아니면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수많은 경험과 선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한줄기 길을 걸을 때 시시때때로 내 앞으로 던져지고 있는 수많은 기회라는 선물상자들입니다. 바른 방향으로 가도 많은 기회들이 던져지고, 그른 방향으로 가도 기회들은 던져집니다. 어떠한 방향으로 가더라도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천사가 던져 주시는 선물상자가 있구요. 마귀의 졸개인 귀신들이 던져 주는 유혹과 미혹의 상자도 있는 것이라고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여 바른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이 밋밋한 오르막길을 걷는 걸음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그 오르막길에 시시때때로 주시는 기회의 선물상자를 받아 열면서 자신을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선물상자로 위장한 미혹의 상자는 무시하면서 말이지요.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 1:21)
그리고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용기를 주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회개란 단지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밋밋한 오르막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옥과 패망으로 가는 기분 좋은 밋밋한 내리막길로 가려는 유혹과 미혹과 싸우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31절에 최후의 심판에 관하여 선언하고 바울은 자신의 연설을 마무리합니다. 이제 회개하지 않고, 바른 방향으로 돌이키지 않은 자들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데요. 그 최후의 심판에 관해 환상적인 비유로 기록해 놓은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많은 분들이 무서워하거나, 어려워하거나, 꺼려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참으로 드라마틱하고 감동스러운 기록입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보며 친히 경험한 것을 기록하였기 때문이지요.
물론 여러 가지 비유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모든 기록은 단 한 가지를 초점에 맞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심판하시는 예수님이라고 하면 조금 무서우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도인 우리를 위해서 마귀의 놀이터인 세상을 심판하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사실은 성도들이 통쾌하게 읽고 감격해야 할 책이 요한계시록인 것을 믿습니다.
어렵다고 여기는 것은 표현들이 매우 예스럽고, 환상 속에 본 것을 비유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초점과 무게중심을 맞추고 읽으면 너무도 감동스럽게 읽혀지는데요.
혹시 여러분은 억울한 고소와 무고를 당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누명을 썼거나, 거짓 선동으로 인해 손해를 보고, 재판까지 가게 된 경우가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도 그런 일을 직접 당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종종 매스컴이나 주위의 경험담을 통해 억울한 옥살이를 하신 분들의 이야기나, 혹은 거짓고소를 당해서 괴로움을 당한 분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어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하루라도 빨리 그 억울함이 해결되고, 거짓으로 고소당한 재판에서 승소하기를 함께 간절히 바라게 되는데요. 요한계시록이 말씀하시는 최후의 심판이란 곧 그런 무고에 대한 재판을 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밋밋한 오르막길과 좁은 문과 통하는 협소한 길에 닿아 있는 생명의 나라,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이 땅에 현실이 된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이 현실적인 괴로움과 낙심과 문제와 질병과 사탄적인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는 날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습니다. 바로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신 것이지요.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2)
계시록에는 오늘 사도행전에 사용된 ‘심판(크리노)’이라는 단어가 모두 9번(헬라어 성경기준) 등장합니다. 정의를 기준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시는데요. 그 정의의 기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이란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뜻하는 것이구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중에 죽음의 권세, 곧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뜻이 가장 강력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께로부터 맡으신 여러 가지 사명이 있으신데요.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 3:8)
마귀는 속이는 자이고, 죽이는 자입니다. 그에게 속한 자는 오직 죽음의 열매만을 맺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분의 능력으로 살인자인 마귀의 역사를 끝장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하신 사람인 예수님으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은 부활에 참여할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신다는 뜻입니다. 부활에 참여할 자는 생명으로 가는 좁고 협착한 밋밋한 오르막길의 방향으로 서서 하루에 하루만큼 걸어가는 자인 것을 믿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태어난 모든 이들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고, 생명에 속한 자로 최종 승인을 받을 자가 되기 위하여 회개해야 함을 바울은 당당하게 아레오바고의 수많은 청중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은 또한 탄생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대강절 제3주일을 맞이하며 드리는 이 예배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역에 있어서 첫 단추와 같은 날을 기대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력에서는 이미 대강절 첫 주일을 시작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연말연시와 성탄이 함께 포함된 이 시기를 단지 들뜬 마음으로, 혹은 재미나는 이벤트를 욕망하는 시간들로 낭비하거나, 허비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이미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더 자주 의식하고 생각하고 바라보는 연습으로 충성스러운 일상들을 살 수 있기를 또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하는 삶이란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돌이키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에 하루만큼 생명을 향해 가는 인생의 밋밋한 오르막을 주님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인생입니다. 내 손을 잡고 내 앞에 한 걸음 앞서 가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주님과 동행하는 이 귀한 생명길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두려움과 공포와 고통으로 떨리는 날이 아니라, 기대와 소망과 흥분으로 학수고대하게 되는 날로 믿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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