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의 큰길 하나만 건너면 개장(開場)한 지 10여 년 되는 부산시민공원이 있다. 그전까지 주한미군이 주둔했던 캠프 하이얼리어(Camp Hialeah) 기지였던 곳인데, 2010년에 부산시에 반환되었고, 시민공원으로 2014년에 개장된, 넓이 약 14만평의 공원이다. 이젠 제법 나무들이 우거져 짙은 그늘과 서늘한 바람을 이루어 내기도 한다. 또 ‘국제아트홀’이 개관을 앞두고 마지막 정리작업이 한창이다.
최근에는 잔디광장 이 외에는 개인용 그늘막(텐트)를 칠 수 있도록 되어 시원한 나무그늘에 또 그늘막을 친다. 꼬맹이들을 데리고 나온 단란한 가족들과 절친 사이인 듯한 젊디젊은 쌍쌍들의 모습에, 나는 저런 시절도 없이 후닥닥 늙어버린 것처럼 공연한 심술이 나기도 한다.
처음 공원을 만들 때 시민들의 참여를 위해 돈으로 기부받은 후 나무를 심고 각각의 나무에 기부한 사람이나 기업체의 명패를 만들어 걸어 주었다. 당시 외손(外孫) 두 녀석이 고만한 나이 때라 한그루 심었는데, 지금 녀석들보다 두어 배나 크게 자라고 있어 가끔은 둘러보기도 한다.
이전에는 1km 정도 떨어진, 우리의 영원한 선배, 박 통 시절에 만든, 성지곡(聖池谷) 어린이대공원까지 아침저녁 운동 삼아 조깅하러 다녔는데, 이 시민공원의 개장 이후에는 이곳이 내 놀이터 겸 운동장으로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거의 매일 ‘석암연당(石庵硏堂)에서 퇴근하면 옷 갈아입고 이곳을 찾는다. 며칠 전에도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가 KBS교향악단과 연주회를 열었던 널찍한 잔디광장 주변에는 군데군데 운동기구들과 쉼터들이 설치되어 있어 안성맞춤이다.
철봉 · 다리밀기 · 팔 당기기 · 허리 돌리기 등등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딱 좋아하게 되어 있어 중(中)에서부터 상(上)에 이르기까지의 할매 · 할배들도 많이 들락인다. 가끔은 나 같은 엉큼한 바깥노인네가 할매들에게 수작을 거는 모습도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보는 수가 있다.
최근 볼 수 있는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가, 공원에 애들과 개를 데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비중이, 헤아려보진 않았지만, 얼추 반반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이다.
1980년 중반 프랑스 파리의 센강 강변이나 에펠탑 광장에 갔을 때, 애들보다 개를 데리고 나오는 사람이 더 많아 완전히 ‘개판(?)’이라고 함께 간 나이 많은 일본 통신장에게 얘기 했더니 그렇다고 웃었는데, 그 사실이 우리의 현실이 되고 있다.
문제는 개가 아니라 이 개들의 똥을 줍는 사람들이다. 오줌은 액체니까 어쩔 수 없지만 똥은 굳은 것이라 부득이 개 주인인 사람이 주워가도록 게시판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개똥 줍는 남녀들을 보면 잊을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있다. 개똥 줍는 것은 지금만이 아닌 그때도 분명 있었던 얘기다.
전번 회에 「6 · 25의 기억」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올린 것에 대해 외우(畏友) 한메가 “친구야, 자네 6·25 때 10살배기 4학년이 그렇게 기억이 좋은가?”라고 댓글을 달아 주었다.
내 자신도 ‘어째서 그렇게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가?’하고 의문을 갖는 때가 가끔 있긴 하다. 출간한 『흔적-80옹 회고록』도, 지금 연제중인 『신항해일지』도 이 기억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은 내 탓이 아니고 조상님들이 쌓고 쌓아 주신 ‘내공(內功)’ 덕분이 아닌가 하고 감사할 뿐이다.
이 얘기는 초등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6 · 25 전쟁 전의 사건이다. 새벽잠이 없었던 동네 할아버지들이 짚으로 만든, 어께에 맬빵을 단 망태기와 긴 나무자루 끝에 작은 호미가 달린 연장을 들고 다니며 밤새 동네 개들이 퍼질러 놓은 개똥을 주우러 다니셨다. 농사를 위해 요긴한 유기농 두엄 재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개도 한집에 살았으니 반려견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애기들이 방이나 마루에서 똥을 싸면, ‘워~리 워~리’ 하고 부르면 잽싸게 뛰어와 말끔히 청소를 해주거나, 여름철의 보신탕, 야간 불침번, 식구를 불리면 그 강아지를 5일 장에 내다 팔 수도 있어 경제적 이득까지 챙기는 주요한 소득자원이어서 집집마다 몇 마리씩 길렀다. 양식이야 사람도 모자라는 판에 밥은 어림도 없고 사람이 먹다 남긴 것이면 무엇이거나 족했다. 요즘의 개 사료(飼料)는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다.
가끔 어쩌다 일찍 일어나는 아침이면 할아버지께서 개똥 주어오라고 엄명(?)을 하신다. 거역할 수가 없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할아버지의 엄명에 따라 장비를 챙기고 사립문을 나섰다.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좀 일찍 일어났던 모양이었다. 또래의 종방간이 이웃에 많았지만 개똥 주우러 나온 애들은 거의 나 뿐이었으니까… .
혹자는 ‘초등학교 갓 입학한 애들이 무슨 그런 일을…’ 할지 모르겠으나, 그 시절에는 농사철이면 ‘부지깽이도 곤두선다’고 할 만큼 일손이 필요했고, 또 막상 학교에서도 ‘가정실습’이란 이름으로 집안 일을 거들라고 며칠 휴교까지 허락했다. 너른들 한가운데까지 중참 심부름, 이삭 줍기, 젖먹이 동생들을 업고 다니는 것도 큰 도움이었다.
덜 깬 눈을 부비며 삽짝문을 나섰는데, 집 바로 앞, 마을의 공용여관이고 사랑방이며 목욕탕이기도 했던 동사(同舍) 담벼락에 누구 것인지는 몰라도 절반 이상의 개똥이 담긴 망태기와 연장이 기대어 있는데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두어 발짝 걷다가 번쩍 요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 게으런 본성이 순간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주위를 돌아봐도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얼른 그 망태의 개똥을 내 것에다 털어 붓고는 열 걸음도 안 되는 집으로 잽싸게 뛰어와 삽짝문 바로 옆에 있는 두엄더미 위에 망태를 털어 비웠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던지 가슴이 한참은 제법 콩닥거렸음은 지금도 기억한다. 아울러 절대 남의 것은 훔쳐서는 안 된다는 교훈도 터득한 셈이었다.
할아버지에게 주워왔다고 보고차 찾으니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삽짝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걸걸한 목소리로 “허어! 언 놈이 내 개똥망태 털어갔네!” 했다.
앗차! 싶었다. 머리숱이 쭈빗 섰다. 나가 보지 않아도 유명하신 내 큰집 할아버지 목소리임은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이미 엎어진 물. 어쩔 수 없었다.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 실제로 아무 일 없이 잘 넘어갔다.
내 조부님 삼 형제 중 맨 윗분이신데 몸이 당차고 힘도 장사라, 소시적에 참외와 수박밭 원두막 지키다가 도둑이라 보고 내려오셨는데 사람이 아니고 늑대였다. 짐승에게는 넘어지면 죽는다는 말에 따라 원두막 기둥을 왼팔로 부등켜 앉고 오른 손으로 허리에 달린 장도칼을 꺼내어 뛰어오르는 늑대의 안면을 그었다는 등 마을에서도 일화(逸話)가 많았던 분이다. 평소에 막걸리를 좋아하셔서 늘 얼굴이 불콰했다.
그러나 이 일은 큰집 할아버지와 내 조부님이 돌아가신 한참 후, 어떤 기회에 가족들 앞에서 실토했다. 8살 위였던 막내 삼촌이 낄낄 웃으시며 좋아하신 걸 보면 아마도 삼촌도 그런 전력이 있지 않나 생각되기도 했다. 그 삼촌은 전두환 전대통령과 대구공고 동기동창으로 재학시절 축구도 함께 하셨다는데, 후에 전통(全統)이 삼촌을 찾으셨지만 일찍 삼촌이 작고하고 난 뒤였다.
아버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시길, 당시 할아버지들의 개똥 줍기는 단순한 두엄 재료의 수집만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하셨다. 동네 골목마다 다니시며 어른들로서 마을 형편도 살피고, 오가며 만나는 노인들끼리 이웃 마을은 물론 국내외의 중요한 뉴스나 정보 교환의 의미도 있었다고 했다.
대변(大便) · 소변(小便)을 순수한 우리말로 하면 똥이고 오줌이다. 이 말은 내가 태어나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듯 말 듯 할 때부터 몸으로 익힌 경험적 실체이다. 생명체로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먹고 배설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기도 한데, 왜 쉽고 알기 쉬운 말을 두고, 우리말도 아닌 ‘변(便)자’를 써서 햇갈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큰 사전이 아니면 ‘변(便)’이 똥이나 오줌을 뜻한다는 의미보다는 ‘편하다. 소식’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고 나와 있다.
우리나라의 어떤 학자가 “똥은 흙과 섞였을 때 가장 완벽하게 분해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결국 세상이 ‘윤회(輪回)’라 했듯이 이 똥도 윤회의 한 현상이리라. 흙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다시 우리 몸에 들어가고 다시 나오고 섞이고… .
그래서 사람 똥을 인분(人糞)이라 한다면 개똥은 견분(犬糞)으로 게시판에 표시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과 개가 함께 산다 하여 반려동물이라고까지 하고 사람대접을 하고 있는 듯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개는 어디까지나 개다. 개가 사람일 리는 없고 또 개가 사람이 될 수도 없다.
어떤 아줌마는 데리고 나온 강아지를 보고 “엄마한테 오너라” 한다. 그러면 자기는 ‘개 애미’가 아닌가. 자기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를 욕보이는 말이다. 진짜 우리도 ‘개판’이 돼간다는 실감이 나기도 한다.
특히나 예쁘고 젊은 아가씨들이 딱 조이거나 히프가 보일 듯 말 듯한 짧은 옷차림으로, 혹은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남자가 앉아서 비닐봉지를 뒤집어 손에 끼고 개똥을 줍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한심스럽다는 생각과 더불어 우리 역사상 그런 일이 민초(民草)들의 일상 속에서 삶의 한 부분으로써 엄연히 존재했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고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래 살았단 소리를 하면 고참 선배, ‘재식이’ 성님이 “이 고얀 넘 같으니…” 라고 하며 꾸중하실 것만 같아 송구스럽기도 하다. 헐헐헐~~
추기(追記) : 한때 유럽 마트에서 동물 뼈다귀 모양으로 된 과자를 보고 산 적이 있다. 먹어보니 맛대가리는 하나도 없어도 우선 달지가 않았기에 ‘먹을 만하군’하고 사 두고는 한 봉지를 다 먹은 적이 있었다. 내 자신이 개가 된줄도 모르고.
어느 해 여름철 네덜란드인가 어느 항에 입항 중 용선자로부터 아이슬란드까지 왕복하는 항해지시서를 받은 적이 있다. 생전 처음이기도 하여 내심 염려를 하면서 자료를 찾아보니 우선 북극권(北極圈)인데다 세계적인 화산과 기이한 자연환경등이 있다 해서 해도(海圖)도 방한복도 마련했다.
화물(貨物)은 생선이거니 했더니, 그곳에서 잡히는 물범/물개 등의 냉동육(冷凍肉)으로, 사람들의 식용(食用)이 아니고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나 개들의 양식으로 쓰기 위한 것이랬다. 내가 맛은 없어도 다 먹은 바로 그 과자를 만드는 재료였다
혼자서 고소(苦笑)를 금치 못하면서 호기심이 더 커졌었는데, 불행히도 집하량(集荷量)이 모자라 그 항차가 취소되고 말았던 적이 있다. 갔다 왔더라면 유럽 반려견이나 고양이들에게 인심 한 번 크게 쓸 수 있었을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