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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8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 이른 곳. キリスト者たちが近づいた所。
본문 히브리서 12:18~24
히 12: 18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내 산 같은 곳이 아닙니다. 곧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흑암과 침침함이 뒤덮고, 폭풍이 일고, 19 나팔이 울리고, 무서운 말소리가 들리는 그러한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더 말씀하시지 않기를 간청하였습니다. 20 "비록 짐승이라도 그 산에 닿으면, 돌로 쳐죽여야 한다"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1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모세도 말하기를 "나는 두려워서 떨린다" 하였습니다. 22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23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와 그가 뿌리신 피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해 줍니다.
18-19 あなたがたは手で触れることができるものや、燃える火、黒雲、暗闇、暴風、ラッパの音、更に、聞いた人々がこれ以上語ってもらいたくないと願ったような言葉の声に、近づいたのではありません。 20 彼らは、「たとえ獣でも、山に触れれば、石を投げつけて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命令に耐えられなかったのです。 21 また、その様子があまりにも恐ろしいものだったので、モーセすら、「わたしはおびえ、震えている」と言ったほどです。 22 しかし、あなたがたが近づいたのは、シオンの山、生ける神の都、天のエルサレム、無数の天使たちの祝いの集まり、 23 天に登録されている長子たちの集会、すべての人の審判者である神、完全なものとされた正しい人たちの霊、 24 新しい契約の仲介者イエス、そして、アベルの血よりも立派に語る注がれた血です。
지난 주일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이면서 성탄주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약속하시는 영혼구원과 예수동행의 복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디서나 언제까지나 동행하시며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의 약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복음을 믿고 전파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의 사명이며 특권입니다. 또한 모든 인간에게 가장 자기답고, 사람답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창조주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유일한 길이기도 하지요. 저와 여러분이 매년 연말을 맞이할 때, 그리고 주 예수님의 탄생과 성탄의 절기를 지낼 때 복음의 유익함과 기쁨으로 내면이 충만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부터는 다시 히브리서 강해설교를 다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직전에 기록된 내용은 이 땅에서 진정한 평화를 간구하고 실천하며 사는 성도의 삶을 통해 거룩함을 열매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 평화와 거룩함을 간구하는 성도들의 공동체과 그 관계에 대한 영적인 가치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가치를 “율법”의 가치와 비교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히브리인들, 즉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너무도 피부에 와서 닿는 가르침과 삶의 기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만이 아니라, 현대의 유태인들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게도 유대교와 구약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은 일상생활과 완전히 밀착되어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안식일을 지키는 풍습인데요.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을 하지 말라는 율법의 가르침 때문에 다른 나라들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습관들이 많습니다. 유대교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지고나서부터 토요일에 해가 지기 전까지의 시간입니다. 그 때에 유태인들의 사는 곳에서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극단적인 예로,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누르는 것도 일하는 것에 해당이 되어, 호텔에서는 안식일 기간에 모든 층에서 멈추도록 설계된 “안식일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극단적인 모습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근원에 대해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의 모습을 오늘의 본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18절~22절에서 육신적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세워진 율법을 받는 시내산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심지어 모세도 두렵고 떨리며, 무서운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과 모세의 가르침은 육신적인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징계하는 방식으로 두려워 함으로 거룩함과 의로움을 관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도 애초에는 선한 의도로 주어진 것임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7)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제자 디모데에게 율법의 유익함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딤전 1:8)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가르침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그래서 바울도 “복음”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모세가 고백한 그 무서운 징계를 완벽하게 해결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이 시작할 때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 이른 곳은 율법의 시내산이 아니라, 복음과 약속이 성취된 시온산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시온산의 모습을 몇 가지 상징적인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는데요. 각각 표현은 그 가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최고의 영원한 나라와 통치를 의미합니다. 계시록 21장에 이 나라의 실체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그리고 그 성 안에 들어갈 자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계 21:27)
중요한 것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 이 성의 시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의 율법을 지키는 것도 믿는 자들에게는 무시할 일이 아니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은 예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5)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어떻게 잘 했는지를 헤아리고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착하게 살려고 애쓰고, 정의로운 태도를 갖는 것도 인생에서 아주 좋은 일이지만, 예수님께서 인정하시고,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사귐이 있는 것이 근본적인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자기 의를 증명하고 내세우기 위해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여 성과를 내는 자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에 선한 존재로 무르익어 가는 자는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복음은 우리를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로 인해 신분이 변화된 자로 이끌어 주십니다.
다음으로 수많은 천사들과 장자들의 집회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이 표현도 실은 하나님의 도성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한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영생의 나라인 새예루살렘에서 천사들이 살고 있으며, 장자들, 즉 복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는 영적인 장자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있는 도성입니다. 오늘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6절에서 “한 그릇 음식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의 예를 언급하였는데요.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위해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은 복음의 약속도 그렇게 경솔하게 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육신적인 조건이나 율법을 준수하는 노력으로는 영생의 자격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에서 모이는 장자들의 집회는 곧 복음을 믿어 영적인 장자권을 얻은 이들의 모임과 그 관계인 “교회”를 뜻하는 말이지요.
또한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이라는 표현도 있는데요. 이 세상을 최후에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자리가 최종적인 의인으로 결정과 판정되는 자리입니다. 계시록은 이렇게 그 자리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데요.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1-12)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재판정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재판관이 최종 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은 모양새입니다. 인생이 끝나고 우리의 행위들이 기록된 책들과 또한 주님과의 관계를 토대로 작성된 생명책을 기초로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각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언행, 그 자체도 주의해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실질적인 교제와 그 사귐을 견고하게 이어 줄 말씀에 대한 순종인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새언약의 중재자 예수의 피를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한 가지 덧붙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보혈은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벨은 아담의 둘째 아들로 그 형인 가인의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살해당한 사람입니다. 의로운 제사를 드린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책망하십니다. 아벨의 억울한 죽음이 부르짖는 통곡을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 4:10)
인류사상 첫번째 살인사건을 일으킨 처벌로 저주를 받은 가인은 이후 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걱정과 근심에 쌓여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인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벨을 의인이라고 인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5)
하나님께 의로운 희생의 제사를 드리다가 친형인 가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아벨의 피는 의인의 피입니다. 이 땅에 여전히 아벨과 같은 억울한 의인들의 피와 고통과 고난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 죽음과 고난과 고통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율법은 시내산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체감하며 모세가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후대에 대대로 물려 주었고, 예수님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결박을 끊고 이제 율법이 아닌, 복음의 시대를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눌림과 두려움과 막연함과 염려와 근심이 아닌 참된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아는 것이 죄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자가 하나님 아버지께 자유로이 나아갈 담력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갈 자격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 땅이 멸망하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천사들과 의인들의 모임에 들어 갑니다. 온갖 좋은 것들로 충만하고 풍성한 영생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사람이 착하게 살다가 죽으면 천당에 가게 될 것을 막연하게 약속하는 종교적 수식어가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 약속은 유효하고, 그 증거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그 분의 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 1:23)
그리고 성도는 그 몸의 각 지체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18,27)
이 땅의 교회들이 곧 천사들의 모임이며, 장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앞으로 완성될 새예루살렘에 대한 “약속의 증표”입니다. 교회는 단지 건물이나 어느 특정한 장소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장소와 건물을 수단으로 모이는 사귐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22절~24절까지의 표현은 곧 교회의 영적인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영적인 가치를 채우신 교회를 지금도 이 세상 가운데 세우고 계십니다.
그렇게 이 하치오지 땅에도 많은 교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우리교회도 그 인도하심에 따라 17년 전에 이 곳에 세워주셨습니다. 그간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고, 다양한 관계들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은혜”일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부르시고 보내신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라는 찬양의 가사가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권능과 능력으로 세워지고, 인도함을 받으며, 자라고, 또한 채워지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은 우리교회가 창립예배(2008년 12월 28일)를 드린 지 꼭 17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귀한 날에 교회의 영적인 가치에 대한 말씀을 들려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음성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리고 함께 이렇게 교회의 창립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초졸하지만, 감격스러운 식사모임을 마치고 감사예배도 함께 드릴 수 있어서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감격을 느낍니다.
이제까지의 은혜와 사랑으로 지켜 주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모든 상황과 여건과 형편에서도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며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채워주실 것을 믿고 기대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교제를 통해 영생의 주인공으로 기쁨과 행복 안에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상의 욕구를 억제하고, 억압하기 위한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조금 개선된 착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의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은 더더욱 아니지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속하여 참된 자유와 영생의 기쁨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이 땅의 가시적인 교회와 기독교라는 종교는 그런 영생의 약속을 함께 공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허용된 현실적인 그릇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하나님의 도성과 영적인 장자들의 모임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그리고 그분의 몸이 되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교회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교제가 참된 자유와 기쁨의 공동체로 관계라 맺어지길 소망합니다. 또한 신실한 교회에서 주님의 임재하심과 동행하심을 체감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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