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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강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26.02.28(토)
여러분 우리가 어떤 시늉을 잔치를 벌이고 있는 시늉을 하든지 무슨 시늉을 하든지 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리가 돈으로 혹은 우리의 권세로 만들어내는 기쁨은 진정으로 인간의 깊은 갈망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그게 인간의 죄인의 딜레마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그 기쁨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충만하게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참된 믿음은 참된 평안과 기쁨을 줍니다. 예수님과 나의 진정한 인격적 관계 속에서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는 자의 심령에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이번엔 요한복음을 여러분들과 세 번째 시간 제목은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이 세상에 양 극단에 있는 두 인물입니다.
자 함께 보죠.
오늘 포인트는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모든 인간을 대표한다는 것이고. 이 중에서 주님께서는 특별히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거듭나야 한다.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놋뱀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민수기에 있는 말씀이죠. 놋뱀이 장대 위에 높이 달려서 그것을 본 자들이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살아났다 하는 것과 같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리셔야 한다.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이번에 중요한 오늘 포인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니고데모를 우리가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니고데모의 신분에 대해서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것은 그는 바리세인이라고 얘기합니다.
바리세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유대사회에서 굉장히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예수님께서 유대 이 바리세인들에 대해서 저주를 많이 퍼부으셨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아주 대단히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기가 쉽지만 실제로 당시의 유대사회에서 바리새인들은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또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가르치고 살아가는 말하자면 율법을 업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죠.
당시 로마의 속국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로마 제국에 의해서 주어진 자치권을 행사하는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공회가 있었습니다.
70명의 멤버로 회원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그 중에 한 사람이 니고데모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정치인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또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율법 전문가입니다. 구약성경의 전문가입니다. 구약을 연구하고 구약을 가르치고 또 그 율법의 말씀을 따라서 산헤드린 공회를 운영하고 결정하고 해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또 니고네모라고 하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유대의 전통적인 이름이 아니라 헬라식 이름을 그가 쓰고 있다는 것은 그 당시에 좀 상류 계급들이 자식을 낳으면 유대 이름을 주지만 또 헬라식 이름도 하나를 더 주었다고 해요.
그 사람의 신분이 어떠하다 이 어떤 가문 출신이다. 괜찮은 가문 출신이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근데 이 사람이 요한복음 19장 39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다시 등장을 합니다.
뭐라고 등장을 하냐하면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 재미있는 표현 아니에요. 밤에 찾아왔대요 요한복음이 그렇게 시작하고 있거든요.
3장이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왔다
그러니까 이 니고데모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별명을 가진 인물이 되는고 하니 밤에 찾아온 사람입니다.
이만한 신분과 이만한 명망을 갖춘 사람이 예수라고 하는 갈릴리에서 온 촌사람 그런데 성전을 뒤집어 놔서 하루아침에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유대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사내 이 사람에게 찾아간 것이어요.
유대인의 존경을 받는 이 인물이 부끄러웠을 수 있겠죠. 우리가 가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특별히 이 요한복음이 밤이다. 어두움이다 라고 표현할 때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지는 언어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예수님의 빛으로 어둠에 오셨다 근데 어둠이 깨닫지 못해요. 무지 몽매해요.
빛이 와도 빛을 보지 못해요.
때가 아직 낯이에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저녁 때가 온다 하는 의미로 주께서 얘기하시는 것 아닙니다.
또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거로 실족하느니라 이것도 영적인 의미로 지금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것 우리가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 13장 30절에 유다가 마지막 만찬을 하는 가운데 네가 할 일을 속히 해라 하는 말씀을 듣고 나갑니다.
근데 성경이 재미있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떡 조각을 주시잖아요. 조각을 받고 나가니 밤이로라 그는 어둠 속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성경이 밤이라든가 어둠이라든가 하는 것을 쓰고 있어요. 영적인 어두움인 것이죠.
그럼 밤에 찾아왔다 이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 자신이 율법 교사였고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갖추어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알았지만 하나님은 알지 못했던 사람이었고 구약성경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거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밤은 무지함이고 어두움을 사랑하여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오지 않을 만큼 도덕적으로는 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니고데모는 찾아왔습니다.
밤에 찾아온 이 인물인 니고데모는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사람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뭔가 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시자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를 못합니다. 이 거듭남이라고 하는 내가 거듭나지 여기 거듭난다고 하는 말은 사실은 다시 난다라고 하는 의미와 함께 위로부터 난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께로서 낳는 자가 된다.
하나님이 낳으시는 자가 된다는 얘기죠 다시 태어나야 한다. 거듭나야 한다. 이 거듭남이라고 하는 진리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거듭남입니다.
우리의 종교생활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시거나 우리의 선행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었고 그것이 죄인의 운명입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그 생명 그 생명을 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명이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님을 만남으로써 사람이 거듭나야 하는데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구원받을 수 없다.
말하자면 니고데모 같은 사람이 등장함으로써 지식과 종교가 영적인 진리를 깨닫는데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그랬어요. 근데 물과 성령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이런저런 많은 설명들을 합니다.
물은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든지 뭐 세례를 가리킨다든지 그러나 실제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뜬금없는 얘기를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은 구약의 언어를 가져다가 설명하고 계시는 거죠.
어떤 말씀입니까? 선지자 에스겔이 새 언약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거 무슨 얘기예요. 십계명을 이미 주셨죠 모세를 통해서 근데 십계명은 돌판에다가 하나님이 써주신 거잖아요.
돌판에다가 써준 거를 아무리 내 집 안에 모시고 있던 한들 내가 하나님의 이 계명을 지킬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이제 메시야를 통하여 내가 너희들에게 거듭남의 은혜를 베푸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거듭남이라는 것은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말하자면 너희의 신비 마음의 하나님의 계명을 기록하여서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싶게 만들겠다.
그게 어떻게 일어나는 거죠.
성령 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러니까 우리 차원에서 보면 항상 내가 믿는다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다. 근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뭐예요? 거듭나지 않으면 네가 바리새인이든 이스라엘의 선생이든 네가 공회원이든 상관없다.
네가 교양을 가진 사람이든 종교인이든 배운 사람이든 상관없다. 교회 생활을 평생을 하는 것 가지고 되지 않는다. 거듭나야 한다.
그 거듭나는 것은 내가 낫겠다고 날 수 있나요? 내가 원해서 나온 사람이 있나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시는 겁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지금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씀한 것처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다는 얘기를 하시는 거죠.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 누가 알리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일들을 깨닫는 것은 성령으로만 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인데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그렇게 같은 주어진 사람일지라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을 쓴 목적입니다.
두 번째 등장하는 인물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 이 여인은 니고데모처럼 그녀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름은 있었겠죠. 물론 사마리아댁 뭐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름은 있었을 겁니다. 이 여인을 설명하고 있는 이 두 단어에서 우리는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봅니다.
사마리아인 주전 8세기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의 이주정책은 자기들이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을 다 섞어 놓는 것입니다. 민족의 혼을 말살하는 것이죠.
그래서 외국인들이 북 왕국으로 왔습니다. 사마리아예요. 그리고 이스라엘에 살던 본토 백성들은 또 다른 나라로 다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북 왕국을 형성하고 있던 열 지파는 다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의 새로운 이주민들과 또 남아있는 사람들과 살면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게 혼혈 사마리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나중에 바벨론에서 유대가 해방이 되고 유다 백성들이 돌아왔을 때 성전을 짓는다 성벽을 재건한다 할 때 다 와서 자기들도 같이 껴달라고 그러죠 너희하고 같은 편이다. 그러나 거절당합니다.
왜 그래요. 유다 사람들이 볼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북 왕국에 있던 여호와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는 있었으나 자기들의 신들을 함께 섬기고 있었던 일종의 혼합 종교를 형성한 겁니다.
이런 상황이었고 또 하나는 여인이라는 것이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그런 문화 속에서 이 여인은 존중받을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니고데모하고는 정반대의 인물이라는 얘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도덕적인 삶도 그렇습니다. 니고데모는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면 사마리아 여인은 무시를 당하고 배척을 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적인 권세와 명예를 가진 니고데모하고 달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보면 나는 남편 다섯이 있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에요.
이 여인의 도덕적 삶의 수준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근데 재미난 것은 니고데모는 비록 밤이지만 예수님을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 예루살렘에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찾아왔어요.
근데 이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갈래야 찾아갈 수도 없고 유대인 남자인 예수님을 만날래야 만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여인의 경우에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어떻게요 예수님이 유대 예루살렘에 계시다가 이제 사마리아를 지나서 갈릴리로 가셔야 되는데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피해서 갔죠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더럽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를 통과하시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6시쯤 되었더라
때가 6시면 이 유대 타임인데 이 유대 시간인데 그러면 지금 우리 시간으로 보면 12시 정오여요. 정오에 물길로 오는 사람 없죠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만날래야 만날 수 없는 이 가련한 여인을 찾아가신 겁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찾아왔지만 이 여인은 주님께서 찾으신 사람이었습니다.
낮 12시에 온 단 한 사람의 여인 그가 바로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이라고도 우리가 말하죠.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여러분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이 본문을 가지고 개인 전도 방법이다. 기타 여러 가지로 얘기를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떠나서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하시는 말의 의미가 무언지를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데
물을 길러 왔어요. 근데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그래요. 그 다음에 주님이 하시는 말씀 또 하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은 여기 우물물을 달라고 하시는 것이죠. 근데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이 있다고 그래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 그리고 또 말씀하세요. 네 남편을 불러와라 이거 굉장히 뜬금없이 들리는 말이죠.
그러나 이 모든 말씀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하고 싶어 하는 말씀의 요지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너 자신을 알아라 너 누구냐 하는 얘기예요 누구예요? 사마리아 여인이죠.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그런 차원이 아니죠. 너 진짜 너 누구냐 하는 얘기예요. 목마른 인생이여요. 목마른 인생이여요.
왜 이 여인의 도덕적인 붕괴의 원인을 우리는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그렇다 여러 가지 얘기할 수 있어요. 근데 사실은 목마른 거예요. 채워지지가 않아요.
여러분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나의 잔치에서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거 뭐예요?
잔치는 있는데 기쁨이 없어요.
인생은 주어졌는데 인생이 하나도 안 좋아요.
하나도 안 기뻐요 살 맛이 안 나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보고 싶은데 맛이 안 나요?
그래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이러저러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까 남편 5명 만났고 지금 또 새로 딴 남자를 만나고 있어요. 목마르다는 거죠. 그리고 도덕적으로 붕괴됐어요.
너 자신을 알라고 주님 말씀하신 거예요.
예레미야 2장 13절에 보면 이 여인으로 대표되는 삶이죠. 모든 인생이 다 그래요. 니고데모도 다르지 않아요.
내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여 나뉘고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생수의 근원 오늘 이 말씀하고 만나는 말씀이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이게 이 여인이 했던 것입니다.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여요. 아무리 갖다 담아 물을 갖다 담아도 다 새요 없어져요 채워지질 않아요.
이 말씀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인생인 거죠. 영원히 그러니까 여인이 필요로 하는 게 뭐예요? 주님이에요.
왜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내가 너에게 줄게 라고 말씀하시는 거거든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내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내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오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첫 번째 메시지가 뭐라고요.
주님이 여인이여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까
당신의 정말 깊은 속에 있는 당신은 누굽니까
그런 얘기를 했다면 이제 주님께서 또 하나 주시는 메세지는 뭔가 하면 나를 알라는 겁니다. 너를 알고 나를 알라는 겁니다.
너 자신을 알고 내가 누군지 알라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이 얘기했던 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지식이고 함께라는 지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심오한 영적 진리를 이 여인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세요.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갈망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이제 예배라고 하는 주제로 이어집니다.
이 세상에 마시는 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관한 주제로 영적인 실제로 넘어가는 거죠.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인이여 당신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뭔지 알아요.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겁니다. 인간이 우상이 아니라 각종 우상이 있는 거죠. 내게 하나님을 대신할 만한 내 인생의 의미와 내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것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 어떤 것 다 우상이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 비로소 당신이 채움을 얻을 겁니다.
당신이 원하는 만족과 기쁨은 거기서 채워질 겁니다. 하는 얘기가 예배라고 하는 주제와 연결이 되는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자기들은 그리심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진자 예배라고 생각을 하는 종교적 전통 속에 묶여 있었습니다.
여기여야 돼 장소의 문제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가 하니 장소의 문제가 아니고 때의 문제라고 말씀을 하세요.
때가 왔다 이제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형식과 너희들이 생각하는 장소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왔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세요.
진짜 사람 안에 있는 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정서와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또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잘못된 전제와 개념으로 말미암아 우상 숭배에 이르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 예배할 수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예배에 한계가 뭔지 아세요.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일천하면 우리의 예배도 천박해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우리의 예배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는 말씀을 잘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분리시킵니다. 성령으로 예배해야 한다.
진리로 예배해야한다 주님은 분리시키지 않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라고 하는 말씀을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종교적인 감정이나 흥분하는 것이나 이런 것들에 의해서 결코 대체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흥분이 크다고 해도 거룩하지 못한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은 목마르니까 물 길러왔죠 근데 매번 와야 되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으면 목마르지 않는다. 결국은 예배라는 것과 이 목마름이라고 하는 것 이거 굉장히 중요하게 만나는 두 가지 개념인데 목마름이 깊어야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가 누군지를 알아야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예요.
배부르면은 예배를 못 해요. 저는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정말 이 여인처럼 배고픔을 알았을까? 다양하잖아요.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는 인간은 다 배고프고 목말라요. 근데 목마르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고 아니 안다는 거는 많이 망가진 거죠.
사실 근데 망가지지 않은 채 그거를 다양한 교양과 학문과 성공과 이런 것들로 채워갈 수 있어요.
나 괜찮아 아이 엠 오케이 그러나 본질상으로 다 목마른 자들이고 주님을 필요로 하는 자들입니다.
여인이 회심을 합니다. 어떻게 알아요.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기가 의존하고 살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리고 좀 창피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아니에요.
근데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한테 말이에요.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하는 사람을 와 보라고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증거를 하죠.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수가성에 오십니다.
그러니까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 이 여인을 따라서 예수님을 보러 오죠 그리고는 예수님은 수가성에서 이틀을 유하십니다.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회심이 회심을 낳습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수가성 사람들이 이제 우리가 믿는 거는 내 말로 인함이 아니고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에 구주신 줄을 앎이라 이 사람들이 표적을 봤습니까?
예수님이 여기서 표적을 행했다고 말합니까?
천만에요. 그들은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사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회심 회심에 대한 설명이죠. 베드로전서 1장에서 말한 것처럼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3강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2
예수님께서 두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로 다시 갈릴리 가나로 오셔서 두 번째 표적을 행하십니다.
가나에서 그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얘기인데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약 40km 정도 거리입니다.
지금 같으면 40km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는 굉장히 먼 거리죠 그러니까 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왕의 신하가 여러분 왕의 신하가 뭐가 부족할 게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비록 그가 왕은 아니지만 여기서 얘기하는 왕은 헤롯대왕의 아들인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 이 사람이 세레요한 죽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람을 일으켜 그 여우라고ㅡ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을 따라서 가버나움까지 가시지 아니하시고 내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을 믿고 이 신하가 다시 돌아갑니다.
돌아가다가 자기의 종들이 오면서 아들이 살았습니다. 하는 얘기를 듣습니다. 언제 살았냐 계산해보니 예수님께서 자기한테 말씀하셨던 그 시간에 살아났다는 거예요.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되죠.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내 아들이 살아있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뭘 믿어요. 예수께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나에 오셔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얘기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보여주는 건 무슨 얘긴가 하면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왕의 신하라고 하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삶의 조건과 환경은 다 다를지라도 다 동일하다 어떤 면에서 주님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거듭나야 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만족과 갈망이 해소된다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우리가 한 가지 지나치면 안 되는 것이 3장에서 예수님께서 뱀이 들려야 함 같이 내가 들려야 한다.
이 뱀이 들린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3장 16절이 무슨 말씀이에요.
성경 전체에서 제일 유명한 말씀이에요.
그 말씀을 하실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놋뱀에 대한 얘기예요.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얘기죠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서 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고통을 당하고 있어요.
그리고 모세에게 부탁해요.
하나님께 제발 기도해 달라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처방이 뭐예요?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고 그거를 쳐다보면 산다 물린 자들이 살아날 거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보면 산대요 장대를 잡는 것도 아니에요. 거기까지 기어가는 것도 아니에요. 장대 높이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산다는 얘기예요.
그 말씀이 요한복음에서 어떤 말씀으로 나타나는지 여러분 아시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중요한 단어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말씀을 이렇게 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들린다는 것은 높아진다는 것이죠.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근데 모처럼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뱀을 본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걸 보는 자 믿는 자는 산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영생을 얻는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 왜 이런 식의 표현을 쓰신 걸까요?
그러면 여러분 자 제가 질문을 던질게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의 힘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까? 둘 다라고 똑같은 비중으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믿사오니 하는 믿음이 아무리 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또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이루신 이루시고 죽으신 일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피 흘림이 없음즉 사함이 없습니다.
제물이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물이어야 합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셨고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는데 여기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이 우리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을 부둥켜 안는 것도 아닙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놋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지 믿음의 힘 때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어떤 신앙의 경력을 가졌느냐 얼마나 성경을 많이 아느냐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느냐가 아니라 거듭났는가입니다.
그 증거를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 거듭나셨습니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갈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바 갈망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은혜와 기쁨과 만족을 경험하는 것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만이 얻게 되는 축복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네 번째 우리가 다룰 본문은 요한복음 5장입니다. 여러분 잘 아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이야기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은 드디어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가 시작되고 이제는 살해의 대상으로 등장하시기 시작합니다. 때가 십자가를 지시는 때로 긴박하게 그 때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4강 38년된 병자를 고친 그는 누구인가 1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믿사오니 하는 믿음이 아무리 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이루신 이루시고 죽으신 일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피 흘림이 없음즉 사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물이어야 합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셨고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는데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예 믿음의 힘 때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어떤 신앙에 경력을 가졌느냐 얼마나 성경을 많이 아느냐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했느냐가 아니라 거듭났느냐 이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갈망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은혜와 기쁨과 만족을 경험하는 것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강좌 네 번째 시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스토리는 여러분 잘 아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친 사건 그게 5장의 사건이죠.
근데 중요한 것은 38년 된 병자를 고쳤다가 아니라 38년 된 병자를 고친 그분이 누구냐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의 포인트는 세 가지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누구냐
두 번째 은혜 없는 율법이 만든 율법주의 종교의 생명 없음을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침을 받았으면 기쁜 거잖아요.
그것도 38년 된 명자가 근데 그렇게 반응하지 못해요. 종교의 무서움 율법주의의 종교의 무서움이죠.
세 번째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예수님 자신이 증명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그리고 이 사건 때문에 논쟁이 벌어지게 되죠.
논쟁이 벌어지게 되고 그 논쟁에서 결국 예수님께서 증명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하는 것입니다.
1절이 이렇게 시작하죠.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얘기해요.
제가 처음에 개요에서 설명을 드렸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이 세 번 나와요.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유대인의 명절 명절이 만약에 유월절이라면 유월절이 몇 번 나오는 겁니까? 네번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생애가 대략 만 3년 이상 되는 거예요. 근데 이제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월절을 유월절이라고 명시를 했는데 여기선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거는 아마 오순절이나 초막절을 가리킬 것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죠.
물론 초막절도 7장에 가면 또 나옵니다만 그리고 또 하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양문이라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에는 문이 많이 있었습니다.
남대문 동대문 하는 식으로 옛날에 한양의 문들이 있었듯이 문이 많이 있는데 이 양문은 무슨 문이겠어요. 양이 지나가는 문이죠.
어떤 양이죠. 제사 드려져야 하는 양들이 들어가는 문이에요. 그래서 성전 가까이에 있는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살펴볼 것은 이 사건과 관련해서 그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이 있었다.
여러분 베데스다 그러며는 베데스다 미국에 저희 살 때 동네 이름도 베데스다가 있었는데 병원 이름이 베데스다가 많아요.
그러니까 베데스다는 아무래도 이런 병자들이 많이 몰려 있었던 여기서 근원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베데스다라고 하는 말은 베데 베들레햄 하는 것처럼 베이트 이거는 집을 의미해요. 그리고 헤세드 여러분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 말은 히브리 말이지만 많이 우리 설교에서도 쓰는 말이죠. 은혜 사랑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끊어질 수 없는 사랑 실패할 수 없는 사랑 얘기하는 거예요.
베데스다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의미죠
은혜의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보시지죠.
그 안에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고 했어요.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스스로 자신의 병을 고칠 수도 없고 스스로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롭게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다 불편하고 힘든 사람들이에요.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없어요. 게다가 우리가 보게 되는 바 3절 하반절에 이렇게 괄호를 넣고 이런 말이 있죠.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어라
근데 여러분 이게 얼마나 비참한 거예요.
정말 천사가 내려와서 물이 흔들릴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낫는다
그런데 여기서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일단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리를 절어서 마음대로 불편해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누워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기적 같은 일들을 기대하고 살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얼마나 죄인의 실존이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름은 은혜의 집이지만 실제로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가 낳는다는 얘기죠 이거는 율법의 원리이지 은혜의 원리가 아니에요.
사실은 그러니까 죄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라는 게 제가 이제 베데스다라는 말을 통해서 너무나 의미를 부여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베데스다라는 거는 은혜의 집이어야 하는데 실제로 죄인들이 살아가는 거는 은혜는 구호일 뿐 실제로는 율법이 지배하는 거예요.
능력 있는 자가 적자생존이죠. 승자 독식이죠.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또 38년 된 병자가 그중에 있었다고 그랬어요.
이 사람은 이제 중풍 환자였을 것입니다.
아 38년 된 병자라고 그러는데 이 38년이라는 것은 굉장한 숫자예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역을 일으키죠 그 반역 이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세요.
앞으로 38년 동안 너희들이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고 1세대들은 여기서 다 죽을 거다 그게 38년이에요. 신명기 2장 14절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38년 동안이나 38년을 방황한 겁니다.
근데 여기에 유사한 게 또 있어요.
예수께서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인 줄 아시고 예수님 아시죠. 그리고 이르시되 내가 낫고자 하느냐 이게 무슨 의미겠어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왜 물어봐요. 당연히 낳고 싶죠 낳고 싶어서 지금 여기 있잖아요. 근데 주님이 물어보시는 건 뭔가 하면 너 정말 나에게 맡길 수 있겠느냐 내가 너를 고쳐주기를 네가 원하느냐 하는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나 당연히 이렇게 생각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거는 주님이 언제나 믿음을 요구하는 질문이에요.
그래서 병자가 대답을 하죠.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이건 무슨 말이겠어요.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친절하게 말을 거니까 조금만 도와주면 내가 할 수 있다고 근데 지금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그게 아니죠.
이 사람이 너 지금 나에게 너를 맡길래 근데 이 사람은 자기 자존심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조금만 도와주면 나 할 수 있다는 거죠.
자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해요.
내가 널 고쳐주려고 그랬는데 너 아직도 준비가 안 됐구나 그래 딴 사람 알아보마 주님이 그러지 않으세요.
이 사람에게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단도 직입적으로 일어나 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세요. 명령이에요. 주님이 좀 마음을 여시겠어요.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아요. 이건 전능자의 명령이에요.
마치 빛이 있으라고 했을 때 천지를 창조하셨던 것처럼 말씀과 명령으로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금 재창조를 하시는 거예요.
이 사람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명령하세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죠.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말씀대로 되는 거예요.
이건 정말 소름 돋는 얘기죠 이렇게 해서 이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라 여기에 어떤 설명이 있나하면 이 날은 안식일이니 라고 그래요.
이게 이제 화근이 돼요.
요한복음 전체에서 이게 큰 사건이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는데 안식일이에요. 38년 된 명절을 고친 사건 베데스다 뭐죠 베데스다 은혜의 집이여요. 사랑의 집이여요.
근데 은혜의 원리가 아니라 율법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였어요. 그런데 절망적이죠. 그런데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구원은 은혜다 베데스다 은혜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 진짜 은혜를 일으키신 사건 아무것도 나에게 근거가 없어요.
나는 고쳐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왜 그분이 누군지 몰랐으니까 사마리아 여인도 네가 너에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군지를 알았으면은 니가 나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터일텐데 라고 주님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람도 몰라요.
그러니까 나 조금만 도와달라는 거죠.
근데 주님은 명령하시고 그를 고치세요. 은혜여요. 주님을 찾지도 않아요. 근데 주님이 그 일을 하세요. 구원은 은혜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문제는 이게 옆에 있던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이 은혜 없는 율법이죠. 은혜 없는 율법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우리가 보게 되는데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옳지 않다 자 이 사람들 보세요.
38년 된 병자가 지금 걸어 다녀요
그러면 얼마나 기쁜 일이에요. 우리 이웃 아니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반응하는 거는 야 너 오늘 안식일인데 왜 너 매트리스를 들고 걸어 왜 짐을 운반하느냐라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렇게 될까요? 우리들은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여기서 유대인들이라고 하는 거는 그냥 다 유대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어요.
요한복음에서 유대인이라고 얘기할 때는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예수님을 대적하고 은혜 없는 율법이라고 하는 종교에 갇혀서 예수님을 계속 대적하는 그런 사람들 예수님과 계속 논쟁을 일으키는 그런 사람들을 지금 가리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 일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해요. 드디어 예수님을 죽일 음모가 이 38년 된 병자를 살리신 사건에서 비롯돼서 시작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이제 끝까지 가는 겁니다.
요한복음이라고 하는 큰 드라마 속에서
근데 두 가지예요.
안식일을 범했다는 거죠.
안식일을 범한 것은 예수님이 일을 하신 거예요. 그리고 이 병자가 짐을 들고 걸어간 거라구요. 일을 한 거예요.
뿐만 아니라 또 하나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이 일로 인해서 논쟁을 하시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시는 일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알아들은 거예요.
아 네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렇게 접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게 했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주의 종교 은혜 없는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계명에 대한 결의론이라고 얘기를 해요.
결의론 그러면 우리말로 그냥 쓰면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몰라요. 결의론이라고 여기 한자를 보시면 의심을 의심이죠. 의심을 해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법이 있으면 안식일을 범하지 마라 그러면 안식일을 자 안식일을 범하지 말아야 되는데 내가 오늘 운동을 한 3km 10km 걸어가는데 괜찮은가 안식일을 범하는 건가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거죠.
1km 이상 걸어가면 범하는 거다 900m까지는 괜찮아 말하자면 우리의 양심에 걸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다 다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래서 영어로도 케이스라고 하는 말에서 영어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케이스 바이 케이스 다 얘기해 주는 거죠. 각각의 경우들을 자세히 이야기 다루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율법에 접근하다 보니까 이 율법은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주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율법의 기능이 인간을 죽이는 계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계명이 은혜를 잃어버릴 때 믿음을 잃어버릴 때 지식을 잃어버릴 때 은혜가 없으니까 율법이 지배하게 되는 거죠.
믿음이 없으니까 그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지식이 없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율법 항목 항목들을 지키는 지식 밖에는 남은 게 없어요. 죽은 전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린 셈이죠. 율법의 정신이 뭐예요? 율법의 정신이 뭐죠
주님께서 뭐라 그러셨어요.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근데 이 사람들은 지금 율법을 가지고 사랑을 못하죠. 율법 때문에 사랑을 못해요. 로마서 13장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뭐라고 그래요. 율법의 완성이니라
근데 이 사람들은 율법을 지금 잘못 사용하고 있는 거죠. 율법이 사람을 죽이는 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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