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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10. 19 수요 예배 - 사도행전 강해 23
개인의 권능과 경건 vs 하나님
(12)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3)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지난주에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에 대해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살펴본 것으로 그냥 끝내고 4장으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조금 더 살펴볼 점들만 3가지 더 살펴보려 합니다. 이미 살펴본 내용 가운데 있는 것들이지만 조금 따로 떼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주제들입니다. 오늘은 ‘개인의 권능과 경건 vs 하나님’에 대해서, 다음 주에는 ‘믿음인가? 예수인가?’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악을 버려야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10)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11)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이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해서 행해집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거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그가 일어서 걷고 뛴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사람이 심히 기이히 여기고 놀라는 상황, 그래서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든 상황 속에서 베드로의 설교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들을 향해 설교를 하는 데 있어서 12-13절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2)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저는 이 부분을 지난주 설교에서 하나의 소지로 다루었습니다만, 오늘은 이 부분 ‘개인의 권능과 경건’과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볼 것입니다.
1. 기이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 이적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베드로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선천적인 불구자였던 앉은뱅이 거지가 나은 것은 분명 기이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것은 전혀 기이한 일이 아닌데 뭐 그렇게 소동을 일으키느냐?’는 의미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이한 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반응은 대단합니다. 누구나 그것을 보고 듣고 싶어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명절 때면 늘 방송을 내보내던 것이 있는데 늘 내보내는 영화, 서커스, 그리고 ‘진기명기’라고 해서 희한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요즘 TV 프로 중에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것도 있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신기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심지어 믿는 사람들까지도 기이한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치명적일 수 있는 관심을 표현하게 될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곳이 있는데 마태복음 24장 24절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지막 때에 믿는 자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큰 표적과 기사’입니다. 표적이고 기사이고 그리고 그것도 큰~ 표적과 큰~ 기사입니다.
사실 기이히 여기는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연적인 것에 익숙한 우리는 자연적이지 않은 것, ‘초자연적인 것’에 매혹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솔로몬이 전도서 3장 11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지적하는 그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이히 여기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이하다고 해서 무조건 추종해서는 안 됩니다. 기이한 일일지라도 그것에 대해 분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에도 소개했지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21절은 이 부분에 대한 아주 분명한 기준이 됩니다. “(19)성령을 소멸치 말며(20)예언을 멸시치 말고(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거나 예언을 멸시치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헤아려야 합니다.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든지(범사에!) 헤아려야 하고, 그래서 좋은 것만을, 옳은 것만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이다. 그것이 어떤 희안한 일이든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평가되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2. 개인의 권능과 경건
1) 사람이 이적을 일으키는 것은 가능한가?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은 이적과 관련된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과연 사람이 이적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어렸을 때에 무언가 신기한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초능력이나 4차원의 세계, 지구공동설, 세계의 불가사의 같은 것들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면 초능력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먹으면서 하나씩 둘씩 포기하게 되는데, 그 중에 포기가 안 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요즘 자주 꾸는 꿈 가운데 하나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입니다. 심리학에서는 날아다니는 꿈이 무엇인가에 억압되어 있어서 자유를 원한다는 의미라고 말하기는 합니다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껏 날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자신이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럼데도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은 아니더라도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을 보고픈 욕망 또한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는 순전히 눈속임인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또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눈속임이 아닌 무엇인가 기이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성경에도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도 적지 않게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 부분은 이 설교의 세 번째 부분에서 제시되는 원리와 관련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만, 간단하게 말해서 이적의 근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근원이 되시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이 근원이 되는 경우입니다. 물론 세 번째 근원도 살펴볼 필요가 있기는 합니다. 즉 인간에게 내제되어 있는 잠재적인 능력이 발휘될 때에 이적을 행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심령 과학에서 파헤치고자 하는 부분이 주로 이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부분을 제쳐놓고 하나님 아니면 사탄이 이적의 두 근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누가 사용하느냐, 누가 그것을 순간적으로 극대화시켜 주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적에 있어서 ‘중립적’인 것은 없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근원이 되시는 ‘선한’ 이적이거나 사탄이 근원이 되는 ‘악한’ 이적만 있을 뿐입니다. 이 부분은 이 정도만 말씀드리고, 언제 기회가 있으면 사탄의 역사에 대해서도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악한 이적이 아닌 선한 이적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이적에 관심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사실 이적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과는 달리 특별히 몇몇 시대에만 이적이 집중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의 시대와 엘리야/엘리사 시대, 예수님의 사역 시기, 그리고 사도들의 시대가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적은 성경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적은 분명 사람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사람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베드로는 ‘개인의 권능’과 ‘개인의 경건’을 예로 들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베드로의 독단적인 지적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사람의 경건...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이적을 일으키는 권능! 사실 이스라엘에서는 마술, 마법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을 극대화 시켜서 행하는 기적은 인정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적을 행하는 ‘개인의 권능’은 그것을 가진 ‘개인의 경건’과만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권능과 경건이 이적의 근원일 수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개인의 경건이 권능과 연결된다고 생각했을까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쫓아서 생각한다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에는 경건한 자를 통해서 하시는데, 그 사람에게 권능을 주시는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적을 행하고자 하실 때 아무다 데려다가 그 일을 시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적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줄 수 있는 사람, 즉 경건한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건하면 무조건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이 주어지느냐고 할 때에 그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가 권능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경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개인의 경건이나 권능은 이적의 근원일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진정한 이적의 근원은 하나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들에게 이러한 권능을 주시기 때문에, 이 사상을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의 권능과 경건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경건이 있고 권능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이적의 근원일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제 이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셨음
1) 이적이란 하나님의 개입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들에 근거해서 바라볼 때에 베드로가 자기들의 ‘개인의 권능과 경건’에 집중하지 말도록 경고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이적’이란 개인의 경건과 권능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을 그 도구로 사용하신다 할지라도 이적의 근원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앞에서 잠시 지적한 것처럼 물론 사탄도 역사할 수는 있습니다. <악마의 아름다운 가면>이나 <사탄 셀러> 같은 책을 보면 우리가 사탄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 외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이적들이 사탄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 역시 사탄에게 자신을 바친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집니다. 하지만 사탄이 일으키는 이적은 결국 파괴적인 것일 수밖에 없으며, 욥의 시험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허락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예를 들어서 ‘병의 치유’를 예로 든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인지 사탄의 역사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10년도 이전에 있었던 일로 기억하는데 김수희라는 가수가 암에 걸려서 국내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는데 필리핀인가에 가서 ‘심령술사’에 의해서 치료 받고 돌아왔다고 매스컴에서 한참 떠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일까요 사탄의 역사일까요? 앞에서 소개한 <악마의 아름다운 가면>이라는 책은 사탄이 ‘심령 치료’를 어떻게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는 체험 수기입니다. 사탄도 일시적으로 사람을 치유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둘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2) 이적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이것이 베드로가 지적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적을 행하신 것은 ‘심심해서’가 아니라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목적’ 때문에 행해졌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적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신기한 거 보여줄게’ 하는 것이 이적의 동기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혹시라도 이적을 접하게 된다면 반드시 “왜 그렇게 하시는가?”하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유 없이 이적을 행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 이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무조건 아니라고 해서도 안 되지만, 무조건 그렇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전에도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10여 년 전쯤에 미국에서 시작되어서 요즘 우리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멀쩡한 이빨을 금이빨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자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증거하는 sample로서 금이빨을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이 땅에서 부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성경적인 사상이 아니고, 그것을 위해서 금이빨을 주신다는 것 역시 성경적 방식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게 하기 원하신다면 돈이 잘 벌리게 해주시겠죠. 그런데 하늘에서 금덩어리가 떨어진다고 해도 그런데, 쩨쩨하게 이빨 하나 금이빨로 변하게 하신다구요?
하나님의 이적과 사탄의 이적은 그것의 목적에 있어서 같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행해지는 과정과 동기 역시 같을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소설 하나늘 간단히 소개하려 합니다. 윌리엄 W. 제이콥스라는 사람이 쓴 괴기 소설 가운데 ‘원숭이 손’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인도에서 돌아온 모리스라는 특무상사가 화이트 가족에게 세 사람의 소원을 세 개씩 이루도록 주문이 걸려있다는 신비한 원숭이 손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재앙을 불러 왔고, 첫 번째 주인은 마지막 소원으로 죽음을 빌었다고 하면서, 그것을 태워 버릴 것을 경고하며 그것을 주고 떠나갔습니다. 화이트의 아들 허버트는 집 문제만 해결되면 행복해질 거라며 2백 파운드를 달라고 빌자고 했고, 화이트씨는 그 소원을 말했습니다. 소원을 말한 순간 원숭이의 손이 움직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점심때에 아들이 다니던 회사에서 사람이 찾아와 허버트가 팔부터 기계에 휩쓸려 들어가서 죽었고 회사에서 보상금이 나올 거라고 말합니다. 보상금의 액수는 2백 파운드였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화이트씨의 부인이 원숭이 손에게 아들이 살아 돌아오도록 빌자고 간청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잠시 후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쿵! 쿵!’ 화이트씨 부인은 문을 열어주려 했지만 화이트씨는 급하게 원숭이 손을 찾아 아들을 다시 돌려보내라고 빌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원망하자 화이트씨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똑 똑’이 아니고 ‘쿵 쿵’이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정상 적인 상태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상태 그대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로 돌아왔고, 그래서 발로 문을 찰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상태로의 아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소설이 신앙적인 입장에서 씌여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사탄이 근원이 된 이적이 어떠한 성격의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항상 대가를 요구합니다. 희생을 요구합니다. 무언가를 주는 대신 다른 무엇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사탄의 이적은 항상 불행하고 처참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이적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개인의 경건과 권능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개인의 경건이 반드시 권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답만,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서 경건은 필수적입니다. 개인의 권능과 경건은 하나님의 역사와 반대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건과 권능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도구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권능과 경건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