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광산의 전경. 평북 운산군 북진로 동자구에 있는 이 금광산은 미국의 J.R.모스가 채굴권을 얻어 1939년까지 경영했다.
1903년 10월 미국 신문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에 실린 고종과 미국 여성 에밀리 브라운이 결혼했다는 오보 내용. 민경배 교수 제공
알렌의 기구한 한국 생활
한국에서 알렌의 생활은 기구했다. 처음에는 의사로 시작했고, 다음에는 고종으로부터 한국 외교관으로 임명받아 일했다. 1890년 7월에는 한국 주재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말단직이었지만 한국 주재 역대 미국 공사들이 병을 핑계로 자주 일본으로 휴가를 갔기 때문에 종종 임시공사직을 수행했다. 사실상 한국 주재 미국 외교관 대표로 처음부터 일한 셈이다. 알렌은 미국 공사관에서 일하는 동안 네 명의 미국 대통령을 모셨다.
그는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치료해주면서 고종 등 조정 인사들과 가까워졌고, 외국인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며, 한국의 국익과 자주독립을 위해 실로 헌신적으로 일했다.
미국, 한국 운산금광에 투자
고종은 미국이 한국에 대대적으로 투자해 줄 것을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일제의 침략 야욕에 맞서고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길은 미국 자본이 한국에 쌓여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상수도사업이나 전차, 전화, 철도에 대한 미국 자본 유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가 한국에 손을 뻗을 때 미국이 쉽게 손을 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알렌은 고종에게 경인철도사업을 미국 모스사에 맡기도록 권했는데 알렌이 잠시 외국에 나간 사이에 일본 회사가 그 이권을 가로챘다. 알렌은 그 사실을 알고는 땅을 치며 울었다고 한다.
알렌의 최대 외교적 성과는 평북 운산금광이다. 알렌은 여러 자료에서 운산금광의 매장량이 아시아 최대라는 것을 알고는 1895년 7월, 25년 기한으로 미국 회사가 채굴권을 갖도록 교섭해 성사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명성황후의 입김이 있었다.
이 광산사업은 서북지방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게 했으며 수천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가히 근대 한국산업의 정점에 서게 한다. 그 수익은 1897년 시세로 미화 110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알렌은 고종에게 미화 1만3000달러를 진상했다. 선교사 출신의 외교관 알렌이 한국 최대의 금광 채굴권을 미국 회사에 맡기도록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이 얽히고설킨 국제관계에서 독립과 자주권을 확립하는 길은 미국의 대규모 투자를 받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금덩어리로 통용된 노다지
그때에 ‘노다지’라는 말이 금덩어리라는 말로 통용됐는데, 그 내력은 이렇다. 한국 노무자들이 금광석에 손을 못 대게 하느라고 미국인 기사들이 노터치(No Touch)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 말이 한국인들에게는 금덩어리로 알려지게 됐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만’이란 말이다. 한번은 한국인 광부가 커다란 바위 덩어리에 깔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주변 광부들은 서둘러 큰 나무들을 세워 거기 밧줄을 감아 당겨 돌을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데 그것을 보고 있던 미국인 기사가 ‘힘을 더 내자’는 취지로 “컴 온!(Come On) 컴 온!”이라고 외쳤다. 그랬더니 한국 광부들은 그 소리가 ‘그만’ 하라는 소리인 줄 알고 밧줄을 놓았고, 바위에 깔린 사람이 사망하고 말았다.
서북지방 교회의 급격한 발전
당시 서북지방은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장로교 한 교파 성도 수만 해도 전국 모든 교파의 성도 수를 합한 것의 약 3분의 2가 되었다.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가파른 상승세로 세계가 경탄하고 있었던 곳이다. 운산금광으로 인해 서북지방에 자본 유통이 매우 활발했다. 그 예로 운산부근 순천의 인구는 평양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헌금액은 2배 이상이었다. 이 생기 넘친 신앙과 경제활동으로 서북지방 성도들은 “우리에게도 이런 힘이 있구나”라며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고종황제와 미 처녀와의 결혼 와전 소동
1903년 10월 2일의 일이다.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 텔레그래프’, 다음 달 29일자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 그리고 신시내티의 한 신문에 한국의 고종황제가 미국 여성 에밀리 브라운과 결혼했다는 기사가 대문짝처럼 실렸다. 제목은 ‘한국의 유일한 미국인 황후!’였다. 그 기사에 따르면 에밀리는 한국 주재 미국 장로교 선교사 피터 브라운의 딸인데 당시 15세였다는 것이다. 결혼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는 고종 황제와 브라운양의 신혼행차 모습을 요란하게 스케치해서 커다란 삽화로 신문에 게재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선교사가 없었다.
이런 황당한 기사는 물론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어떻게 미국 거대 신문들에 이런 신기루 같은 기사가 실렸을까. 짐작 가능한 것은 알렌과 아주 친했던 콜로라도 스프링 텔레그래프지의 편집국장 리턴하우스가 알렌을 위해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알렌은 당시 친일정책을 펴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대들어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안에서 한국에 대한 호의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그런 여론몰이를 기도한 것이 황당한 사건의 동기였으리라는 짐작이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출처]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9) 미국 외교관 알렌이 겪은 일들|작성자 뱅갈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