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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안테나 위로 올라가다
미네르바 시선 25/ 2012년 6월 25일 발행
발문 : 시인 김종성/ 해설 : 시인, 교수 고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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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어깨를 기대는 빛과 어둠
나는 나를 잠시 매너모드로 바꾸고
아니 아예 나를 꺼버리고
캄캄한 지하터널로 들어간다
새 한 마리 스쳐 간 뒤
나는 다시 나를 켜 우주 밖의 바다에 던질 것이다
그때 세계는 나에게 낯선 얼굴로 다가올 것이다
빛과 어둠이 서로 어깨를 기대는 세계
빛과 어둠이 입 맞추는 세계
그리고 그 소식
이 메일에 띄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늘의 그늘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201002051925금
고구마밭
고구마 밭에 여자를 들여보내지 마라.
당신은 오늘 땅이 감춰둔
처음으로 속살을 드러내는 무서운 생명의 비밀을 캐어 낼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신을 묶은 그 허리띠 풀어서 당신의 날개를 만들지도 모른다
당신은 오늘 다시 먼 옛날의 당신을 만날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신의 몸을 감고 있는 그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낱낱이 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땅 속 깊이 박힌 슬픔을 만날지도 모른다.
* 2010.2.21.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손가락으로 톡 튕귀자 들깨송이가
까만 이야기들을 자르륵자르륵 쏟아냈다.
나는 들깨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줄 몰랐다.
고소하고 달콤하고 씁쓰레한 이야기들
그렇다면 내가 기른 상추와 고추도, 가지와 쑥갓도, 토마토와 야콘과 부르콜리와 양배추도, 밭뚝의 머위도, 그 옆에서 지켜 본 봉숭아도 할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한 밭에서 울고 웃었고 밤마다 별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까.
내가 밭에 갈 때마다 그들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내가 알아듣지를 못했을 뿐,
산에 들에 사는 모든 나물들도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고,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모든 식물들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서로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걸어왔을 것이다.
나는 옥수수가 그 껍질 속에 질서정연한
단단한 구조의 이야기를 갖추고 있음을 안다.
바람이 불면 옥수수는 그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지만
우리는 그 노래를 듣지 못한다
들어도 알지 못한다.
나는 고구마나 감자가 구수한 이야기 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음을 안다
나는 양파나 배추가 액자소설처럼 많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을 안다
나는 올 겨울 내내 이 많은 이야기들을 맛있게 먹을 것이다.
어찌 식물뿐이랴?
동물들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리들이 듣지를 못하는 것이지.
어찌 돌멩이인들 이야기를 하지 않겠는가?
어찌 하늘과 산과 바다와 강이 이야기를 하지 않겠는가?
어찌 바람과 불과 흙인들 이야기가 없으며 이야기하지 않겠는가?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할 뿐,
만물은 서로 다른 기호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가을날 아침 나는 들깨를 털며
그들의 깨알 같은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을 통해 꽃과 돌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 20911011658일/200911011838화.
착한 그늘
나무의 영혼을 깨우는
까치의 보랏빛 울음소리
소나무들이 길 위에 착한 그늘을 눕힌다.
고요가 휩쓸고 간 자리
솔방울은 울고
나의 강에 그림자로 나는 한 마리의 하얀 새는
그리움으로 볼이 붉다.
씨, 씨, 씨 …
되돌이표가 자꾸 찍히고
낮은음자리표가 뛰어간다.
떡갈나무 낙엽은 영웅의 죽음처럼 허망하다.
많은 기호들이 아침을 장식한다.
암호나 상징으로만 존재하고
먼 곳에 계시고,
숨어 계시며,
증명할 수 없는 신을
우리가 믿을 수 있을까?
원색 식물도감을 펴 보고
내가 크리스머스 꽃이라고 불렀던 꽃이
포인세티아임을 알았고, 장록이 자리공이고,
아이리스가 붓꽃이며,
그 종류가 세계에 150종이나 있다는 걸 알았다.
책속에는 많은 기호와 상징들이 피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명백한 사실로 믿는다.
도서관에 앉아있던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운명론과 허무주의를 가르쳤다. 그래도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소나무가 나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 201003121000금.
부처가 익사한 주산지周山池
주산지에 가면 당신은 부처를 만날 것이다.
아니 부처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초록의 그림자로 녹아 흐르는 곳.
누구나 자기를 볼 수 있는 곳.
못가의 나무나 풀들이,
못 안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왕버들이,
고라니나 토끼가, 자기를 보는 곳.
날아가는 새나 나비도,
언제나 근엄한 산도, 푸른 하늘도,
영원한 나그네 구름도,
한낮의 태양과 밤하늘의 달과 별도,
밤의 어둠까지도,
자기를 보는 곳.
자기의 영혼을 보는 곳.
늘 자기를 보아도 허망이나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는 곳.
모든 것이 그의 속내를 드러내는 곳.
거기서는 부처도 그의 속내를 드러낸다.
당신은 주산지에 가면 부처의 그림자를 볼 것이다.
아니 그 그림자가 부처라는 것을 알 것이다.
진여는 현상의 그림자,
현상과 꼭 닮았으나 현상은 아닌 것.
그것은 사물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그 누구도 그의 업보를 드러내지 않고는 못 지나가는 무서운 거울.
먼지 하나가 내려앉아도 파문 지는 신의 거울.
고요의 절대값.
맑음의 절대값.
이 우주에서 가장 높은 나를 만나는 곳.
부처가 익사한 주산지.
* 201003041744목
아침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고체의
고요 속을 가로질러
바람의 여울을 타고
숲속으로 날아갔다
우주가 잠간 흔들렸다
까치가 꺄악꺄악 아침을 쪼개
우주의 공명함에 넣고 있었다
강물을 거슬러 수많은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붉은머리오목눈이들이
덤불 속에서 떨어진 햇빛을 주워 먹으며
기도를 하고 있다
하늘의 활활 타는 눈이
성수를 뿌리자 사물들의 앙상한 근골에 꽃이 피었다
바다가 눈부신 커다란 웃음을 웃자
솔잎 마다 무수한 태양이 열리고
겨울나무들이 뛰어오르며 두 팔을 높이 흔들었다
마른 풀들 속에서 아이들의 향긋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까마귀가 고장 난 콘트라베이스로
검은 악곡을 느리고 깊게 연주하자
청설모가 회색의 기억을
하늘에 휘익 그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낙엽 밑에는 아직 검은 노래가 끝나지 않았다
* 201001170003화.
2부
나는 나무다
나는 나무다
나는 다리가 없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하늘밖에 없다.
나는 싸돌아다니지 않는다.
바위가 쪼개지니까,
나는 손이 없다.
새가 와도 막지 않고, 가도 잡지 않는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햇빛이 오면 햇빛을 받는다.
나는 입이 없다.
그러므로 참말도 거짓말도 할 줄 모른다.
나는 귀도 없다.
그러므로 옳은 말도 그른 말도 듣지 않는다.
나는 가슴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나는 머리도 없다.
그러므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지 않는다.
나는 자지 않는다.
그러므로 꿈도 꾸지 않는다.
나는 날마다 조금씩 하늘에 다가 간다.
그것이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몸짓이다.
나는 나무다.
* 200907311331금
손톱을 깎으며
나를 잘라낸다;
-남을 해칠 수 있는
나를 버린다;
-나를 해칠 수도 있는
나를 도려낸다;
-나를 보호해 주고,
나의 욕망을 확실하게 붙잡는
* 200907240931금
고독
나무들은 좋겠다, 친구가 많아서.
혼자, 그래 혼자 산행을 나섰지.
가다가 무덤 가 풀밭에서 까마귀를 발견했지, 썩은 고기를 쪼아 먹는
‘까마귀야! 너,
나하고 친구할련?’
그래 또 가다가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를 발견했지.
‘독사야, 독사야 너 나의 애인되지 않으련?’
* 2005
아버지
칡넝쿨로 뻗어간 세월
졸참나무 벌레 먹은 잎이 되어
9월의 낙동강
검은 태양을 안고
모래 속으로 침몰하신 아버지, 그리고
벌레가 다 뜯어 먹은
배춧잎처럼 살다가
이제 당신 곁에 나란히 누운 어머님과
오늘은 억세가 되어
저 거무산 위
파아란 가을 하늘을 손짓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가슴이 답답하여
찔레 순 되어 자꾸 동쪽으로 뻗어 가십니까?
그리고 저 수 많은 자잘한 싸리꽃 같은
아픔을 붉게 붉게 피우십니까?
머리 위 높게 달맞이 꽃 뽑아 올려
달 뜨는 밤이면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간 한 사나이의
억울한 생애를 하늘에 밀어 올리고 계십니까?
매미가 고요를 찢어버리는 하오
햇빛의 폭포를 맞으며
당신의 몸짓과 언어 앞에서
나의 가지와 잎은 갈갈이 찢어지고
강물은 울어 옙니다
* 2009
삶이 힘드시죠?
"삶이 힘드시죠? 편히 쉴 곳이 있습니다. 가까운 교회로 오십시오."
재처방 받은 전립선비대약을 왼쪽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어느 착한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아까 병원 갈 때 육교에서 받은 관광여행사의 선전지가
"인천대교와 월미도호화유람선 관광 35,000원"
"금산인삼시장과 강경젓갈 특별 할인가 단 돈 10,000원"이라고 소리 질렀다.
시어가 꼭 아름답고 감각적이고 서정적이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일상의 시정어들, 장사꾼과 노동자들의 투박한 언어들도 훌륭한 시어가 되는 거 아냐? 라며,
지하철을 타니 맞은 편 좌석 '아토피를 쉽게 고치는 한의원' 밑에서 검은 안경 쓴 김 00 상병이 별로 예쁘지 않은 처녀의 허리를 감고 휴대폰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우리가 젊을 때는 어두컴컴한 뒷골목이나 보리밭에서 만났는데 요즘 아들은 눈치를 안 본다 카이. 지 맘대로 하는 기라. 지하철에서 뽀뽀도 한다 아이가?"
"아이구 영감아! 호랭이 담배 필 적 얘기 그만 해라이."
그 옆의 젊은이는 배낭보다 큰 손가방 속으로 도피하여 이어폰으로 습관처럼 음악을 열심히 듣고, 또 그 옆의 청년은 이어폰을 끼고 색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열심히 무엇에 도전하고 있다.
'광수 편입학'이 미친 듯이 손짓을 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우리들 병원의 척추 모양의 상호가 나의 척추를 교정하고 있고
VIPS가 강렬한 붉은 입을 벌리고 잡아먹을 듯이 달려 들었다
휴대폰이 "확인하세요. 빨리, 빨리."
"당신의 통장에서 돈이 빠져 나갔어요!" 라고 소리 질렀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 무엇? 누구?누구?누구?무엇?무엇?’
* 201003031640수
3부
꽃으로 지은 집
산사는 꽃으로 지은 집이다.
산사는 생각을 태워 하늘을 오르는 향기로 지은 집이다.
산사는 소리 없는 음악이 넘쳐흐르는 음악의 전당이다.
산사는 항상 고요가 넘쳐흐르는 돌로 된 수조(水槽)다.
산사는 초록 바람이 중생들의 이마를 닦아주는 바람의 집이다.
산사는 왼 종일 고요와 놀다가는 햇빛의 집이다.
산사는 고요를 쪼아 먹는 새들의 집이다.
산사는 팔이 잘린 나무들이 적멸을 지키는 견고한 성이다.
산사는 하늘소와 풍뎅이가 찾아와 하늘을 보고 열반하는 그들의 영원한 안식처다.
산사는 가끔 뱀과 지네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거룩한 집이다.
산사는 지붕 위에서 낮잠을 자는 고양이다.
산사는 고요를 씹어 먹고 있는 매미의 집이다.
산사는 담쟁이가 홀린 듯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는 텅 빈 마당이다.
산사는 밤이면 별들이 부처님 무릎을 베고 이야기를 듣고 가는 집이다.
산사는 닫힌 문을 열고 들어와 아우성치다 빛을 안고 열반하는 부나비의 집이다.
산사는 내가 수시로 벌레들을 장사지내는 무서운 장례예식장이다.
산사는 소쩍새가 밤마다 나의 애를 긁어대는 붉은 비애의 집이다.
산사는 칡넝쿨이 길을 잘못 들어 목이 잘리는 이상한 집이다.
산사는 나나니벌이 출구를 찾다 지쳐 익사하는 일이 수시로 생기는 무상의 집이다.
산사는 흙 묻은 돌들을 씻고 모난 돌들을 갈아내는 소리가 가득찬 물의 집이다.
산사는 부처님과 산신령님과 보살님과 용왕님과 칠성님과 아라한이 함께 꿈꾸고 잠자는 아름다운 집이다.
산사는 나를 싣고 머무름 없이 떠다니는 구름의 집이다.
산사는 산들이 껴안고 겹겹이 고민하는 우리 모두의 집이다.
산사는 꽃이다.
* 200907311710금
안테나 위로 올라간 부처님
부처님이 법당이 답답하여
안마당을 거닐다가
물 한바가지를 마시고
안테나 위로 날아 올라갔다
수만 가정의 안방으로 부처님이 송신되었다. 그러나
전파 장애로 아무도 부처님을 보지 못했다
갈참나무에 올라가 목이 아프게 노래하던 부처님이
방송국으로 날아가 새로운 버전으로 노래를 불렀으나
이날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T.V 수상기 고장으로 보지 못했다
이튿날 조간신문 톱기사에
"보지 못한 시청자들은 www.kbs.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라고
대서특필 되었다
목을 길게 빼고 부처님이 슬금슬금
내 방문 안으로 기어 왔다
그 때 전화가 왔다
"우체국입니다. 댁으로 택배된 부처님이 반송되었습니다.
확인하시려면 2번을 누르세요!"
점심 때 국수를 맛있게 먹은 부처님이
민들레 홀씨를 타고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들어가 이메일로 송신되었다
대부분 전송 실패로 되돌아 왔다
한사코 고개를 가로 젓던 부처님이
나무에서 추락하여
석간신문으로 배달되었는데
중생들이 광고인 줄 알고 휴지통에 버렸다
* 200908101330월.
내가 저들 안에서 울어야 한다
하늘이 저렇게 문밖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도
등을 쓸어 주는 이 아무도 없구나
풍경이 추녀 끝에서 저렇게 괴로워 몸부림쳐도
누구 하나 손잡아 주지 않는구나
들코양이가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저렇게 애타게 불러도
누구하나 문을 여는 이 없구나
소쩍새가 저렇게 피나게 울어 대숲이 흔들려도
훌쩍이며 눈물 닦는 이 아무도 없구나
자정이 지난 산사(山寺)
나는 어안(魚眼)이 되어 해인삼매(海印三昧)에 잠기려는데
산사는 시방 중생들의 울음으로
넘실거린다
문밖에서 들리는 저 소리
저 소리가 밖에서 들려서는 안 된다
내 안에서 울어야 한다
아니 내가 저들 안에서 울어야 한다
* 200907290928수/200910111807일
돌에서 신라를 만나다 2
왜 부처님은 산에서만 살까
우리 동네로 내려오면 안 될까
이웃에 같이 살면
날마다 만나고 향기로운 과일과
맛있는 과자와 떡도 드릴 텐데
부처님은 우리가 싫으신가봐
어린 내가 말했다
캄캄한 밤이 무섭지도 않은가 봐
쪽배 타고 서역을 가고 싶은가
은하수의 그 많은 별을 따고 싶은가
어둠을 사랑하신 걸까
어둠 속에서 빛을 보시려고 그러는가
이미 어둠 속에서 빛을 보신 걸까?
더 어린 내가 말했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이고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
어둠이 빛이고 빛이 어둠이다
있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 이것이 있다
사랑하는 것은 미워하는 것이고 미워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즐거움이 괴로움이고 괴로움이 즐거움이다
부처가 중생이고 중생이 부처다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이다
죽음은 삶이고 삶은 죽음이다
남은 괴롭고 죽음은 즐겁다
더 더 어린 내가 말했다
* 201002051208금.
4부
나목처럼 사랑을 보여주어
지난 봄부터
너의 의미망은 너무 복잡했어
여름이 되자 너는 더욱 복잡한 문장을 만들어내었고
가을이 되자
너는 많은 기호들을 바꾸었고 화려한 수사법을 구사하며
담화가 점점 길어졌어
헌데 이제 겨울이 왔어 너는
너의 몸에서
화장품 냄새 나는 관형어들을 다 지우고
과대 포장된 부사어들도 다 꺾어 던져 버리고
감탄사와 문장부호마저 다 따 버리고
그렇게 말하는 게 좋겠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주어와 목적어와 서술어로만 말해
아니 설명어만으로 말해도 돼
그것도 동사적 설명어로
아니 말의 모방보다
보여주기가 더 좋겠어
저 시린 하늘 아래
용감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나목처럼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그래 됐어. 그렇게 하는 거야.
* 200912072150월
가슴 저린 사랑
저문 저 강물 위의 불빛
어머니의 가슴에서 나오는 저 불빛
봄이 녹아 있는 시원의 저 불빛
어둠조차 품어 주는…
아, 저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목말라 찾던 건
누구나 언제나
가슴 저린 사랑을 가지는 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저 깊고 어두운 강물을 비추는 불빛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찾아야 할 것은
어둠을 태우는 저 사랑이다
우리는
저 아름다운 불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새벽이 오기 전에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고속열차를 타야 한다
* 201002052108금
독서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사랑초와 쿠페아
그들은
아침 햇살 아래서
입술 같은 작고 예쁜 성기들을 벌리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손가락을 갖다 대면
그들은 깜짝깜짝 놀라며
노오란 소리를 질렀다
내가 코를 갖다 대자
붉은 냄새가 베란다에 가득찼다
해가 달아오르면 그들은
성기를 더욱 높이 치켜 올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하지만
닫힌 베란다
그들의 목은 길어지고
눈은 충혈되고
몸은 피빗 노을이 된다
그러나
해가 지면 그들은
성문을 닫고
고개 숙여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들은 날마다 더욱 많은
새로운 성기들을 벌리고
누군가를 열심히 기다린다
나의 독서는 거의 광적이다
잠
먼 이국의 항구에서 구름이 되었던 외항선이
모항에 들어와 가만히 지느러미를 흔든다
황야에서
모진 비바람을 맞으며 그리움과 고독에 몸부림치던
탕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잠잔다
평생을 객지로 떠돌던 한 사나이가
남루를 뒤집어쓰고 고향의 미루나무 아래서 울고 있다
황야의 여우가 고향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
연어들이 난바다에서 5,000킬로미터를 달려 어머니의 강에 돌아와
생의 단 한 번의 사랑을 사정하고 영원한 안식에 잠긴다.
육탈의 쾌락이 수포로 떠오른다
흔들리는 여인의 초록 다리 사이에 나는 코를 박고 익사한다
밝은 빛이 내장을 핥고 따뜻한 양수를 마시며
안식과 평화의 수포가 만다라 꽃처럼 하얗게 피어 오른다
폭포를 뛰어오르는 연어 떼의 발기로
그 쾌락의 발사
이후의 잠
저 풍요로운 녹색의 잠에서 부화하여 나는 꽃이 된다
그리하여 수포로 떠오른다
나는 아궁이 앞에서 청솔가지 타는 밝은 불빛을 가슴에 담고 있다
그녀는 아궁이 앞에서 뜨거운 불을 사타구니에 담았다
나는 그녀의 등에서 칭얼대다 잠든 아기가 된다
호주산 양털 이불 속에서 나는
푸른 애벌래가 되었다
엉뎅이에 장미가 피다
사과를 2등분했다
엉뎅이가 향기롭다
자궁 속에는 귀여운 새끼들이
잠자고 있었다
아, 저 아늑한 궁전
그걸 다시 2등분했다
궁전이 실종되었다
아뿔사!
그걸 와지작와지작 씹어 먹었다
엉뎅이에 붉은 장미가 피었다
장미는 뻗어가 머리에서 저녁놀이 되었다
* 20100528금
5부
수평선 위에 커피 잔을 올려놓다
강아지풀 쪼개
콧수염 달고 돌아보니
모처럼 아내가 수선화처럼 웃었네
긴 풀 맺어
뒤쫓아 오는 친구
걸려 넘어지면
깔깔 웃던 어린 시절
구름고개* 오르며
나는 유년의 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네
감탄사 절로 나오는 멋진 분재들 눈에 담고
테라스 하얀 난간에 기대서니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어 보였네
나는 팽팽히 부풀어 오른
그녀의 수평선 위에 커피 잔을 올려놓았네
그리고 커피 스푼으로
나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떠 넣었네
수평선이 조금 아래로 처졌네
나는 두둥실
한 조각 구름이 되어
그 수평선을 넘어갔네
그 때 나는
바다와 초록 바람과 하늘
구름과 나무와 꽃들이 잘 어울린
한 폭의
그림이었네
* 금련산 청소년수련원 위에 있는 커피가 있는 집
* 20080831일/200809032235수/
음악이 흐르는 숲속의 궁전
2년만에 목베고니아가 피었다
겨울에도 붉게 타는
여배우의 치마 밑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다가 자꾸 나의 가슴을 열었다. 간지러웠다
열대어들이 가슴 속을 헤엄쳐 다녔다
수평선을 들고 한 번에 일곱 마리씩 여덟 마리씩 고래를 낚았다
어느 젊은 여인의 시집에서 싱싱한 야채와 향기로운 과일들을 잔뜩 사서 껍질째 먹었다. 화려한 패각들의 진열장 그 안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또 다른 젊은 여인의 시집에서 자꾸만 가슴 속에서 저절로 피는 노을과 어둠과 눈을 녹이는 불타는 꽃을 보았다. 사랑을 앓는 작은, 작은 새가 밤을 새워 울고 있었다.
야스퍼스의 이야기를 듣다가 부처와 원효를 만났다.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 마르구스아우렐리우스를 만나 그의 설교를 듣다가 늙은 고양이에게 시선施善하였다
동백나무와 사철나무와 연산홍과 피라켄사스 울타리로 달아나는 붉은머리오목눈이를 추격하다가, 산을 쪼아대는 까치소리를 듣다가, 직박구리의 꼬리를 잡고 날아다니다가,
다시 숲속의 궁전으로 들어가 왕관을 벗은 아우렐리우스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그의 행복의 궁전을 거닐며, 그의 별을 따고, 사물의 내장을 관찰하다가, 다시 젊은 시인의 어두운 망망대해를 헤엄쳐 다니다가, 고요와 명상을 조용히 밟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에 진달래가 뭉텅뭉텅 피었다.
젊은 시인들과 야스퍼스와 원효와 부처와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가 따라 와 목베고니아 꽃나무 아래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뜨거운 바람이 계속 불었다
* 201002200800일
여름
봄이 되자 어느 날 갑자기 난초 잎이 하나 둘 누렇게 시들더니 이내 짙은 갈색으로 변하고 얼마 후 툭 부러졌다. 병이 들었나 보다 했다. 불어나야 할 잎들이 오히려 줄어들다니. 왜 그럴까? 그런데 여름이 되자 그 이유가 밝혀졌다. 어느 날 문득 새 촉이 고개를 쏘옥 내민 것이다. 어린 아이 잇몸에 돋아나는 이빨처럼. 이삼일 후 두 개의 새 촉이 한꺼번에 고개를 내밀었다.
아야! 아야!
* 2009
가을에 2
햇살이
방 안까지 놀러 왔다
두 손 펴 받으니
가슴에
불이 켜졌다
릴케의 기도 소리가 들렸다
* 20091020화
벚꽃의 투신投身
수만 마리의 하이얀 나비 떼가
포도 위로 투신한다
시퍼런 강물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몸을 던진다
신의 언어가
폭설이 되어
쏟아진다
선녀들의
눈부신 속옷이
하염없이 적강謫降한다
하얀 슬픔의 화려한 자살!
연두빛 바람이 흐르고
地上이
꽃으로
활활 타오른다
* 200905282115목
홍시
저 홍시 참 맛있겠네
얼굴이 볼그스레한 처녀 같네
저 홍시 딸 수 없네
나의 긴 바지랑대로도
반점 하나 없는 저 홍시
누굴 생각하나
하늘만 더욱 푸르네
* 2010
6부
누가 아프가니스탄을 울리는가?
전쟁과 테러 속에서도 아이들은 태어났다
사막 한 켠에는 눈부시게 푸른 밀들이 자랐고
요염한 양귀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누가 그들에게 자살 폭탄 테러를 하게 하는가?
누가 그들의 손에 총을 들게 하는가?
누가 그들 형제와 부자를 적이 되어 싸우게 하는가?
늙은 무슬림들의 눈물을 보라
터반 속에 가려진 그들의 분노를 보라
자식과 남편을 잃은 늙은 여인의 저 비탄의 소리를 들으라
그리고 죄 없는 저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보아라
그들의 목숨을 그들이 지키게 하라
생존을 위해서는 법죄도 악이 아니다
저 쪽의 선善은 이 쪽의 악惡이 된다
남의 집안싸움에 간섭하지 말라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모두 물러서야 한다
양들의 싸움에 이리들아 나서지 말아라
그들의 마을을 그들이 지키게 하라
그들의 운명을 그들이 결정하게 하라
그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생각하든 상관하지 말아라
그 어떤 것도 절대로 옳거나 절대로 그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르지만 또한 모든 것은 같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말아라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하라
그들의 눈물을 나의 눈물로 하라
그들의 분노를 나의 분노로 하라
생각해 보라
왜 그들이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가?
왜 그들이 동족의 머리에 폭탄을 던지는가?
50여 년 전 우리도 저렇게 하지 않았는가?
50여 년 전 우리도 저렇게 울부짖지 않았는가?
그 해 우리의 땅에도 보리는 평화처럼 시퍼렇게 자랐고
강물은 유유히 잘도 흘러갔지
죽어서 산 자여
살았어도 죽은 이가 있는데
죽었어도 살아 있는 자여
죽음으로써 산 자여
영생하는 자여
당신 앞에
꽃다발을 바칩니다
온 몸으로 엎드려 경배드립니다
하늘의 별을 따
뭇 사람들의 가슴에 심어주던 당신
자신의 믿는 바를 목숨으로 증언한다는 건
어떤 것입니까?
어둠을 기르는 사람들에게
빛을 보내는 당신이여
가르쳐 주소서
살아 있어도 죽은 우리에게
우리가 무엇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하는지를
오늘은 당신의 묘비 위에
봄비가 내립니다
천의 손가락에 촛불을 켜 오리까?
우리가 남이가?
에스칼레이트의 핸드라인에 손을 얹으면 누군가의 체온이 전해오고
전철의 손잡이를 잡으면 누군가의 끈적한 땀이 묻어난다.
의자에 앉으면 조금 전에 앉았다 떠난 사람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 온다.
내가 떠나면 내 뒤에 앉는 사람에게 나의 체온이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체온이 그 다음 사람에게 전해질 것이고… 또 그 다음 사람에게, 또 그 다음 사람에게 전해질 것이다.
이래도 우리가 남일까?
수영장에서 우리는 같은 물에서 헤엄을 치며, 때로는 그 물을 마시기도 한다.
만원 버스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숨을 주고 받고, 때로는 서로의 체온을 나누기도 한다. 찜질방에서 우리는 더욱 가까이서 체온과 체액을 수수하기도 한다. 그리고
회식을 할 때 우리는 찬과 찌개를 같이 먹으며, 한 그릇에 같이 비벼 먹기도 하며, 하나의 술잔에 서로의 입을 대기도 한다. 같이 손잡고 춤을 추기도 한다.
남녀가 칸막이 없는 방에서 같이 자기도 하고, 문을 열어 놓고 자기도 한다.
이래도 우리가 남일까?
소비자가 없으면 생산자가 죽고, 환자가 없으면 의사가 죽고, 도둑이 없으면 경찰이 죽는다.
이래도 우리가 남이가?
수천 년을 우리는 같은 하늘을 이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무엇보다 같은 문화를 숨 쉬며 살아왔다.
그런데도 우리가 남이가?
단군신화가 사실이 아니라도 우리는 남이 아니다.
국토가 두 동강이 나 서로 싸우고 원수처럼 죽였어도 우리는 남이 아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가 진실이 아니라도 우리 모두는 남이 아니다.
* 20080519월/200809071859일
저 꽃
젊은 한 아줌마
연신 고개를 꾸벅
모로 쓰러지며 옆 할머니에게 어깨를 부딪친다
고양이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곱상한 할머니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어깨를 내밀었다
“여기 기대세요.”
그녀가 계면쩍은 듯 웃으며 고개를 젖고
또다시 꾸벅
힘들고 지친 자에게
어깨를 내어 주는
오, 지하철 의자 위에 핀
저 꽃
*200905192250화/200905281931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