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그리스도의 현존 이해 32
A.나를 위한 그리스도 32
B.그리스도의 현존양식 38
1.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 38
2.성례전으로서의 그리스도 41
3.공동체로 실존하는 그리스도 43
C.예수 그리스도 : 중심과 중보자 45
1. 인간실존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47
2. 역사의 중심되신 그리스도 48
3. 하나님과 자연사이의 중보자되신 그리스도 51
V. 역사적 그리스도 연구 53
A.역사적 그리스도에 대한 접근 53
B.비판적인 그리스도론 56
1. 가현론 이단과 자유주의 57
2.에비온 이단 59
3.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파 이단 61
4.종속론과 양태론적 이단 64
C.비판적인 그리스도론의 공헌 65
D.긍정적인 그리스도론 66
1.성육신하신 분 66
2.낮아지시고 높아지신 분 67
VI.결 론 73
A. 요 약 73
B.평가 및 제언 76
* 참고문헌
I. 서 론
A.문제제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막연한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을 성취하시고 구원을 이루신다. 기독교에 있어서 신앙과 신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의 대상이고 내용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에 대해서 자로슬라브 펠리칸(J.Pelikan)은 "그리스도론은 언제나 은사와 과제이다"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펠리칸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위한'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에 은사이고, 이것을 성서와 전통의 유산 위에서 다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과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은 은사와 과제로서의 그리스도론의 욕구를 충족 시키기에 충분하다. 유석성에 의하면 2차 대전 이후 곧 1945년 이후의 신학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본회퍼의 영향을 받고 있다. 사신신학, 세속화 신학, 상황윤리, 예큐메니칼 평화신학등이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고, 정치신학,해방신학,민중신학 등이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이처럼 본회퍼 신학은 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현대교회와 신학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회퍼 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관건과 근간이 되는 중요한 신학사상이 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론이다. 유석성은 "본회퍼 신학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그리스도 지배적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 중심적인 본회퍼 사상의 흐름 속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가지는 것이 바로 1933년의 "그리스도론 강의(Christologievorlesung)"이다. E.로버트슨도 본회퍼 신학의 핵심이 그리스도론이라고 보고, 이에 1933년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입장이 발전하여 후기에서도 계속된다고 본다. 본회퍼가 [옥중서간]에서도 끊임없이 던졌던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타자를 위한 존재"등의 출발도 바로 여기에서 부터이다. 이처럼 1945년 이후의 신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본회퍼 신학, 그 중에서도 특히 그의 신학사상의 중심이되는 1933년 "그리스도론 강의"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본회퍼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인격적(人格的)인 현존(現存)에 있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에서 부터 자신의 그리스도론을 출발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인격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는 '나를 위한(pro-me)'이라는 구조를 가진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구조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례전과 공동체라는 낮아짐의 형식으로 존재하신다. 또한 인격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소는 인간의 실존과 역사와 자연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실존과 역사의 중심이 되시며,하나님과 자연사이의 중보자가 되신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한(pro-me) 존재로서 그리고 우리를 위한(pro-nobis) 존재로서 낮아지시고 높아지셨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처럼 본회퍼의 그리스도론 이해에 있어서 관건이 되는 1933년 "그리스도론 강의"를 고찰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는 본회퍼의 "그리스도론 강의"에 나타난 그리스도 이해를 바탕으로하여 한국교회의 그리스도관을 평가하고 제언하려고 한다.
B.연구방법 및 범위
본 연구에 있어서 주된 연구의 대상은 본회퍼의 1933년의 "그리스도론 강의"이다. 이것을 위하여 먼저 제2장에서는 "그리스도론 강의"에 대한 배경을 분석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본회퍼의 "그리스도론 강의"에 영향을 주었던 요소들로서 1933년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신학적인 배경 그리고 본회퍼 자신의 초기 저서들과의 관계성들을 종합적으로 분석 고찰하게 될 것이다.
제3장에서 제5장까지는 "그리스도론 강의"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론의 문제들을 분석하되 특히 본회퍼가 인격적인 그리스도의 현존의 문제와 구조를 어떻게 이끌어 가고 발전시켜가는지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6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고,이에대한 평가가 함께 한국교회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간단한 제언을 함으로서 본 연구를 마치게 될 것이다.
II. 그리스도론 강의에 대한 배경
본회퍼에 있어서 1933년도에 그리스도론 강의에 영향을 미친 배경은 내용상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시대적인 배경으로서 당시 집권한 나치정권에 대한 저항이며, 둘째는 1933년의 신학적인 상황과 "그리스도론 강의"의 관계이며, 마지막으로 본회퍼 자신의 초기 저서들과의 관계성이다.
A. 1933년의 시대적 배경
본회퍼가 "그리스도론 강의"를 했던 시기가 1933년 여름이다. 1933년 1월 30일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1918-133)이 종말을 고하고 히틀러가 독일제3제국의 총통이 되었다. 이날을 계기로 수 많은 유대인의 생명을 요구하고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던 한 독재자의 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 독일은 세계1차 대전 이후 전쟁 패배의 수치감과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른 경제 부담등을 안고 있었으며, 이러한 정황들은 자부심이 강한 독일국민들에게 많은 심리적인 부담을 주고 있었다. 더구나 1918년 등장한 바이바르 공화국 시대에는 당시 세계를 휩쓴 경제공황으로 수 많은 실업자가 거리를 헤메였고 이에따라 정치와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틀러가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찬양하고 민족의 앞날을 약속하고 나왔던 것이다. 1933년 이전에 히틀러는 이미'나의 투쟁'이라는 연설을 통하여 그의 이론을 대외에 알린바가 있고, 1930년에는 히틀러를 추종하던 '알프레드 로젠베르그'는 '20세기의 신화'를 통하여 나치스의 철학적인 기반을 구축했다. 나치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선거를 통하여 나타났다. 1930년 선거 후 나치스의 의석 수는 12석에서 107석으로 급성장했으며, 1932년의 선거에서는 271석을 확보함으로서 지배당이 될 수 있었다. 이에따라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가 총통으로 취임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히틀러에게 매료되었던 것은 일반 국민들 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수 많은 신학생과 목회자들도 여기에 매혹당하고 있었다. 1930년말 당시의 거의 모든 신학생들이 나치스이고, 신학생들의 거의 90%가 강의실에서 나치스의 뱃지를 달고 있었다.
1933년 1월 30일 총통에 취임한 히틀러의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아리안인의 우월감에 기초한 독일민족주의의 표방이며, 둘째는 반(反)유대주의 정책이었다. 즉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표방한 것뿐 아니라, 유대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정책을 표방한 것이다.
히틀러의 정책에 대하여 독일의 교회는 두 가지의 반응으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나치스의 혁명을 지지하면서 '독일의 민족주의적 기독교'를 추구하는 '독일적 그리스도들'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본회퍼를 비롯한 다수의 독일교회 지도자들은 이에 대항하여 교회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던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운동이다. '독일그리스도인들'이란 교회와 나치즘의 연합을 주장하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민족은 하나,하나님은 하나,신앙도 하나"라는 구호 아래 독일의 교회를 자신의 지배아래 두려고 했던 히틀러의 정책에 동조하여 민족주의적인 기독교를 추구하였다. 반면 '고백교회'운동은 외적으로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에 반대하고, 내적으로는 '독일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며 일어났던 운동이다.
본회퍼는 바로 이 고백교회의 일원이었다. 본회퍼는 1933년 2월 1일 곧 히틀러가 취임한 하루 뒤에 "젊은 세대에 있어서 지도자 개념의 변천"이라는 제목의 라디오 연설을 통하여 "스스로 신성화하는 지도자와 직위는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것이 바로 본회퍼가 반나치 운동을 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때 부터 본회퍼는 나치정권의 감시대상자가 되었다.
이러한 1933년 전후의 상황들은 본회퍼의 그리스도론 강의의 내용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본회퍼는 인격체로 현존하는역사적인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며, 교회는 국가가 만드는 역사의 중심이 된다고 말한다. 또한 본질적으로 교회는 국가를 심판하고 의롭게 하며,국가의 본질은 국민들을 교회가 바라는 성취의 위치까지 이끌고 가는데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면에서 교회는 국가의 중심이자 한계이며, 교회나 국가나 동일하게 십자가 아래에서 그 질서가 완성된 것이라고 본다. 박봉랑에 의하면 이것은 1933년 당시 히틀러가 독일국민의 메시야로 까지 인식되는 상황에서 예견되는 독일 민족교회와의 투쟁에 대비한 신학적 근거에 대한 토대인 것이다. 이에대해서 로버트슨도 "바르멘 선언서의 배후에서 주된 논리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칼 바르트이지만, 본회퍼가 그리스도론에 대해 전개해 갔던 그 진지한 사고가 없었다면 바르멘 선언은 쓰여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계속해서 로버트슨은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론 강의 속에는 고백교회가 독일 기독교인을 때려부수고, 교회를 파괴시키려는 나치즘의 독(毒)을 막는 수많은 무기가 저장되어 있는 병기고가 들어있다"고 하였다.
B.1933년 전후의 신학적인 상황과 그리스도론 강의
본회퍼 초기의 신학적인 상황과 이에따른 "그리스도론 강의"와의 관계는 당시의 신학적인 흐름에 비추어 볼 때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 할 수 있다. 첫째는 1차대전 이후 쇠퇴의 길을 걷고있던 자유주의 신학과 "그리스도론 강의"와의 관계이며, 둘째는 1933년을 전후하여 등장한 바르트의 신학과 "그리스도론 강의"와의 관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회퍼 자신이 속한 루터교의 신학과 "그리스도론 강의"와의 관계이다.
먼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발과 그리스도론 강의와의 관계이다. 본래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의 스승들 밑에서 수학하였다. 본회퍼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튀빙엔 대학교에 입학할 때가 1923년 가을이다. 그런데 1920년대의 신학계는 이미 세계1차대전을 기점으로하여 자유주의 신학이 쇠퇴하고 있던 시기였다. 본회퍼는 1924년 당시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지인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서 공부했다. 이 당시의 베를린 대학은 에른스트 트륄치가 세상을 떠난 직후이고, 유명한 자유주의 신학자인 아돌프 하르낙(A.Harnak)이 은퇴 후에도 세미나를 주관하고 있었으며, 초대교회사에는 한스 리츠만(H.Litzmann)이, 구약신학에는 에른스트 쉴린(E.Solin)이, 신약에는 다이스만(A.Deisman)이, 그리고 저명한 루터연구가인 제베르그(E.Seeberg)와 칼 홀(K.Holl) 등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 특히 하르낙, 제베르그 그리고 칼 홀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중에서도 본회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제베르그이다. 제베르그는 후일 본회퍼의 박사논문인 [성도의 교제]를 지도한다. 제베르그는 본회퍼로 하여금 신학에 있어서 사회성(社會性)과 역사성(歷史性)의 영역을 진지하게 취급하도록 지도하였으며,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은 역사성과 사회성에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러한 영향으로 본회퍼는 그의 신학에 있어서 인간의 사회성을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당시 베를린 대학은 트륄치를 연구하는 중심지로서 '베를린 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제베르그는 이러한 베를린 학파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당시 베를린 학파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사와 공동체 이념의 역사를 객관적이고, 역사적이며,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베를린 대학과 제베르그에게서 본회퍼가 사회학이라는 주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제베르그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본회퍼는 제베르그에게서 '사회성'이라는 중요한 신학적인 통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선험성(a priori)'이라는 면에서 제베르그를 반대한다. 당시 제베르그는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선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종교적인 선험성'을 그의 신학전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그러나 본회퍼는 인간의 본성이 죄로인해 '휘어진 상태(cor curumin se)' 곧 죄로 인해 타락한 상태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상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있다고 보았다. 본회퍼는 제베르그에 대한 반대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론 강의"에서는 자유주의 신학 전체를 가현론적인 이단으로 규정한다.
왜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을 이단으로 규정하는가? 본회퍼가 자유주의에 대해 실랄한 비판을 가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원인으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외적인 행위이다. 즉 당시 본회퍼의 자유주의 스승들이 당시 히틀러 정권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은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악용될 소지가 있었다. 예컨데 당시 아리안 입법조항에 대해서도 베를린 대학 신학부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본회퍼의 스승이었던 75세의 제베르그는 "우리는 건전한 역사적인 양심에서 희랍 또는 라틴 형태의 기독교와 나란히 해서 '독일적 형태'의 기독교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고까지 했다. 본회퍼는 자유주의 스승들의 이같은 태도에 실망을 느꼈다. 로버트슨에 의하면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세상과 타협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본다. 둘째는 자유주의 신학의 내용에 대한 반발이다. "그리스도론 강의"에서의 본회퍼의 관심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현존에 있다. 즉 그리스도가 인격자로서 지금- 여기의 역사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현존해 계시며, 그러한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가 인격자로 현존한다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현존을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것으로 이해하여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가 인격자로 현존한다는 것에 관심을 둘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질문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인 질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은 단지 그리스도의 현존을 어떤 힘이나 영향력 정도로 이해함으로서 가현론적인 것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면에서 본회퍼는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반발한다.
둘째는 바르트 신학과 "그리스도론 강의"와의 관계이다. 본회퍼가 자유주의 신학에 반발하면서 그의 신학적인 돌파구로 발견한 것이 바르트 신학이다. 사실 본회퍼가 그리스도론을 강의하던 1933년에는 일반적으로 '말씀의 신학'이라고 불리우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1932)이 이미 출판된 다음이다. 본회퍼는 바르트가 그리스도를 종교적이고 관념적으로 해석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를 최초로 인식하고 종교비판을 시작한 신학자라고 평가했다. 바르트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행위나 '종교적인 선험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입장은 본회퍼 의 "그리스도론 강의"에 있어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본회퍼는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행위를 통해서 인격자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인격자가 스스로 자신을 계시해 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직 말씀의 자유로운 계시"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함으로서, 그의 그리스도론 전개의 중요한 토대를 바르트의 신학에 두고있기 때문이다.
결국 본회퍼는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사회성과 역사성이라는 요소에서는 자유주의 신학과 공유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계시 사건을 신학적인 사고의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는 바르트 신학과 통한다.
셋째는 루터신학과 "그리스도론 강의"와의 관계이다. 본회퍼가 영향을 받은 바르트는 개혁교회 출신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루터교회의 목사로서 그의 신학의 저변에는 루터의 신학적인 입장들이 흐르고 있다. 본회퍼가 루터의 신학적 기반위에 선 것은 베를린 대학에서 그의 스승들인 칼 홀이나 제베르그등의 영향이다.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본회퍼는 자신의 논리전개의 중요한 개념들을 루터의 신학적인 원리를 수용하여 적용한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면, 먼저 본회퍼는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구조가 '나를 위한(pro-me) 존재'에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루터에게서도 발견된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은 '나의 구원을 위하여','내 것'으로 받는 것이 바로 말씀에 근거한 신앙이 된다. 둘째로 본회퍼는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서 인격으로 현존함에 있어서 말씀과 성례전과 공동체라는 낮아짐의 형태로 존재하며, 이러한 것들 속에 그리스도는 숨겨져 있다고 본다. 그런데 본회퍼가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러한 숨겨져 있는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루터의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의 원리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제베르그에 의하면 이러한 루터의 '숨겨진 하나님'의 원리는 루터신학을 이해하는 핵심과도 같은 것이다. 본회퍼가 숨겨진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익명성을 말하는 것은 루터신학자인 제베르그의 영향으로 보인다. 셋째로 본회퍼는 "인간은 내면적으로 본질상 왜곡되어있다(cor curvum in se)"는 루터의 표현 인용하기도 한다. 넷째는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본질] 그리고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Christus als Gemeinde existierend)"라는 표현이다. 본회퍼의 이러한 공동체적인 그리스도 이해는 루터신학에서 부터 출발한다. 루터는 거룩한 성도들의 회중(공동체)이 곧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했다. 루터에 의하면 성도들의 공동체는 이 땅위에 존재하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성령에 의해서 한 믿음과 한 마음과 한 이해로 함께 뭉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 공동체는 여러가지 은사를 가졌으나 종파나 분열이 없이 사랑으로 연합되어있다. 성령은 이 공동체를 주관하며, 성령에 의해서 들어오게 되고, 또한 들어와서 말씀을 듣고 성례전에 참여함으로서 죄사함을 얻는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이 공동체와 연합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루터신학에 있어서의 신학적인 핵심들은 1528년 부터 1579년까지 50년 동안 작성되고 채택된 특별한 신조들 속에 잘 집약되어있다.
필립스(J.A.Phillips)에 의하면 본회퍼의 "공동체로 실존하는 그리스도"에 현저한 영향을 준 것은 그의 스승인 제베르그이다. 즉 자유주의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루터 연구가인 제베그르로 부터 사회학 뿐 아니라, 루터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와같이 본회퍼의 루터 신학의 공동체 개념에 사회학적인 개념을 도입하여, 이것을 자신의 그리스도론 전개의 독특한 신학적 주제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론 강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과 바르트 신학의 영향 뿐 아니라 그 저변에 루터 신학의 전통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C.초기 저서들과의 관계
본회퍼에 있어서 1933년 이전의 강의와 저술들을 보면 먼저 박사논문으로서 1927년의 [성도의 교제]가 있고,1930년의 [행위와 존재],1932년의 [교회의 본질],1933년초의 [창조와 타락]등이 있다. 베트게는 1933년의 "그리스도론 강의"는 이러한 초기 본회퍼 신학의 요약이라고 보았고, 갓세이(J.D.Godsey)는 이 강의가 후기 관심사의 한 요약이자 예표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박봉랑도 1933년의 "그리스도론 강의"가 전후기를 연결하는 전체 본회퍼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베트게의 분석처럼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많은 부분은 이미 [성도의 교제]나 [교회의 본질]같은 강의에서 나타나고 있다. 필립스에 의하면 본회퍼에 있어서 그리스도론 강의 만큼 준비에 어려움을 느끼게 한 것은 없었다.
본회퍼가 그리스도론을 준비함에 있어서 이처럼 어려움을 느꼈던 원인은 무엇인가? 베트게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본다. 먼저는 외적인 요인으로서 1933년의 정치적인 격변이 본회퍼가 강의에 전념하는 것을 어렵게 한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내적인 것으로서 본회퍼 자신이 지금까지의 생각하고, 시도하였던 신학적인 문제들을 정리하고,평가해 보려는 과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베트게는 이중에서도 특히 두 번째의 원인이 본회퍼가 그리스도론 강의를 준비하는데 어려움을 준 더 큰 요인이라고 본다.
본회퍼의 "그리스도론 강의"에 영향을 준 첫 번째 저서는 그의 베를린 대학에서의 박사논문인 [성도의 교제]이다. 본회퍼는 이 논문을 제베르그로 부터 지도를 받았다. 이 논문의 부제는 "교회사회학(敎會社會學)에 대한 교의학적(敎義學的) 연구"이다. 본회퍼는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의 독특한 사회구조를 사회철학과 사회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조명하였다. 본회퍼는 [성도의 교제]에서 특별히 교회를 집합인격(Kollektivperson)으로 보고 이와연결지어서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인격적인 이해는 [성도의 교제]에서 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는 이 표현은 [성도의 교제] 뿐 아니라,1932년의 [교회의 본질]이라는 강의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하고, 1933년의 "그리스도론 강의"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여기에서 기억할 것이 있다. 본회퍼의 기독론을 알기 위해서는 기독론 자체로서는 부족하고 기독론과 다른 주제들을 연관지어서 생각해야 보다 정확한 해답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본회퍼의 기독론을 알려면 그리스도와 그리고 무엇을 함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데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십자가','그리스도와 대리사상','그리스도와 제자직','그리스도와 타자를 위한 존재'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는 것은 본회퍼의 교회론에 대한 표현인 동시에 지금 여기에서의 인격적인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행위와 존재]는 본회퍼의 교수자격 논문이다. 본회퍼는 여기에서 계시이해에 있어서 기독교적인 독특한 특성을 다룬다. 당시의 신학은 계시이해에 있어서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되는 철학적인 해결방법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선험철학의 영향으로 신중심적 입장에서 행위를 강조하는 바르트와 존재적인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인간 중심의 입장에서 존재를 강조하는 불트만의 입장이었다. 본회퍼는 [행위와 존재]에서 행위와 존재에 대한 두 입장은 교회 개념에서 극복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행위와 존재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리스도론 강의" 서론에서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는 중요한 기초로 인용되고 있음을 본다.
세 번째로는 [창조와 타락]이다. 이 책은 1932년 가을에 베를린 대학에서 창세기 1장에서 3장까지 강의한 것을 출판한 것이다. 로버트슨에 의하면 이 강의는 본회퍼로 하여금 창조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위치 그리고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사역사이의 관계성에 대해서 질문을 야기 시켰다. 따라서 본회퍼는 그리스도론 강의를 통하여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 자신의 신학을 정리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갓세이는 [창조와 타락]을 통하여 본회퍼가 자유와의 관계 개념이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존재유비(analogia entis)가 아니라, 관계유비(analogia relationis)로 해석하였다고 평가하였다.
III.그리스도론 이해의 출발점
A."그리스도는 누구인가?"의 물음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본회퍼의 근본관심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본질(本質)과 존재(存在),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지금 여기의 현실 속에서 인격적으로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그리스도론을 출발한다.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인 물음을 탐구하는데 그의 그리스도론의 목적이 있다. 이것은 과거 그리스도론에 대한 정통신앙의 흐름이 그 주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현존 보다도 언제나 형이상학적인 사변적인 것으로 떨어지는 위험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존재론적인 물음을 해결해 나가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비인격적인 반(反)로고스와 인간 로고스의 대립
본회퍼에 의하면 인간의 로고스에 대응하는 비인격적인 반(反)로고스는 결국 인간의 로고스에 의해서 분류되고 흡수되어 진다. 예컨데 어떤 X라는 비인격적인 새로운 주제가 발생했을 때 이것이 사람들에게 이해되고 알려지는 것은 인간의 로고스 가 제기하는 '어떻게?'라는 물음을 통해서 이다. 즉 '어떻게'라는 문제제기를 통하여 인간의 로고스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그 물음에 대답함으로서 X라는 새로운 주제를 판단하고 이해하고 또한 기존의 질서체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런데 본회퍼는 이러한 일반적인 이해의 패턴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회의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의 경우 기존에 존재하는 인간 로고스의 판단이나 분류에 예속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인간 로고스가 알 수 없는 새로운 '반(反) 로고스'가 출현한다면, 기존의 인간 로고스는 이러한 반로고스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본회퍼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로고스가 취하는 반응은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그러한 주장이 어떻게 기존의 질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만을 반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로고스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 어떤 면에서는 이해되기를 거부하는 - 반로고스가 발생함으로서 당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계상황에 부딪힌 인간 로고스는 당황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부터 다가오는 반로고스의 도전에 대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기부정의 방법을 통하여 이를 극복한다. 이러한 인간 로고스의 대응을 통하여 반로고스의 도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인간 로고스는 자기 속으로 반로고스를 흡수해 버린다. 이러한 과정이 비인격적인 반로고스의 최후이다.
그런데 본회퍼에 의하면 이러한 인간 로고스의 대응과정은 이미 헤겔(Hegel)이 그의 철학에서 말하던 것이다. 즉 반로고스 아래에서 일어난 인간 로고스의 반응을 편협한 거부현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부정의 힘 안에 나타난 위대한 통찰력으로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한계상황에선 인간 로고스의 자기부정은 곧 자기긍정이 된다.
2. 인격적인 말씀으로서의 반(反)로고스
반로고스의 도전에 대하여 인간의 로고스가 자기부정의 방법을 통하여 극복하는 것이 일반적인 로고스와 반로고스의 대립 과정이라면, 이제 본회퍼는 그의 그리스도론을 전개해 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만일 완전하게 새로운 형식으로 반(反)로고스가 자신의
주장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그가(반로고스) 더
이상 관념이 아니라, 로고스의 최종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말씀
(A Word)이라면? 만일 그가 역사 속의 어느 시간과 장소 안에서
인격적인 존재(As a person)로 나타난다면? 만일 그가 스스로
인간 로고스의 심판자라고 주장하고, '나는 길이요,생명이다.
나는 인간 로고스의 죽음이며, 하나님의 로고스의 삶이다.인간의
로고스는 반드시 죽을 것이며, 그는 나의 수중으로 떨어지며,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에서 보듯이 본회퍼는 역사 안에서 인격적(人格的)인 반로고스가 인간의 로고스 앞에 출현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질문한다. 이 질문을 통하여 본회퍼는 논의의 촛점을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것에서 부터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구도로 전환시킨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론적 질문으로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본회퍼는 이에 대해서 반로고스가 역사 안에서 성육신하신 말씀으로 나타난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인간 자신의 로고스와 그분의 로고스가 혼합될 가능성은 없어진다고 한다. 이럴 경우 인간의 이성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은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당신은 누구요? 말하시요"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로고스는 아무리 자기부정을 하여 이를 극복하려고 해도, 말씀으로 성육신한 로고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로고스가 던지는 '어떻게'라는 질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다. 본회퍼에 의하면 "당신은 누구요?"라는 이 질문은 추방당한 이성의 질문인 동시에 신앙의 질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인간의 로고스는 '누구'라는 질문만 가능할 뿐 대답은 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 질문에 대답하신다. 이것이 바로 본회퍼 그리스도의 관심사이다. 본회퍼는 이 때의 반로고스는 곧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이러한 인격적인 반로고스의 등장은 곧 인간 로고스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본다.
본회퍼에 의하면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이말은 만남에 있어서 '낯설음'과 '타자성'을 표시하며, 둘째는 질문자 자신의 한계에 대한 실존적인 물음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초월자 앞에서의 '누구'라는 질문을 통하여 비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의 원리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지닌 죄성이다. 본회퍼는 루터의 '휘어진 인간의 마음(cor curvum in se)'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내면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미 타락한 인간의 로고스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을 때 이것은 겉으로는 '순종하는 아담의 언어'로 말하지만, 내면적으로는 '타락한 아담의 언어'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즉 우리 앞에 서있는 낯선 그리스도의 로고스 앞에 우리는 '당신은 누구요?'라고 질문함으로서 마치 문제를 해결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 인간의 로고스는 이미 죄로 인해 타락한 상태이기 때문에 '당신은 누구요?'라는 이 질문은 '당신은 어떻게 그런 분이 될 수 있소?'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의 본래적 의미는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타락한 인간은 '어떻게'라는 질문 외에는 던질 수 없다. 본회퍼는 '누구'라고 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라고 물을 수 밖에 없는 데에 인간 사유의 딜렘마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본회퍼는 '누구'라는 질문이 정확한 질문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고, 동시에 두 가지의 질문이 제외되어야 한다고 본다. 먼저, 충족되어야 할 두 가지 전제조건이다. 첫째, 인간의 내적인 죄성이 해결되어야 한다. 즉 '누구'라는 질문의 대상이 되는 초월적인 그리스도의 로고스가 먼저 자신을 계시하면서, 휘어진 인간의 내재적인 로고스를 파괴하여 버리는 곳에서만 질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 질문은 교회라는 컨덱스트 안에서만 제기 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로고스라는 근본적인 전제가 수락된 속에서만 그리스도론적인 질문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본회퍼는 교회를 그리스도론이 출발해야 할 장소라고 본다. 교회 안에 있을 때 비로서 인간의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하나님의 로고스인 그리스도에게 "당신은 누구시요"라고 질문할 수 있다.
다음은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사유에서 제외되어야 할 두 가지의 질문이 다. 첫째. '누구'라는 질문은 이미 대답이 주어진 질문이므로, 이미 대답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로고스의 진리성에 대해서 의심하는 질문은 제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자신에 대한 증언은 그 증언 자체로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계시라는 '사실'이 어떻게 우리에게 인식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제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인간의 로고스가 그리스도의 계시나 주장의 배경을 추적하여 계시를 밝히려는 시도로서, 결국 이 질문은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본회퍼가 쉴라이에르마허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의 물음과 방법들을 배격하고, 계시를 강조하는 바르트의 입장에 서있는 것을 본다.
본회퍼는 이러한 두 가지 질문을 제외 하면 이제는 '누구'라는 존재론적인 질문만이 남는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본회퍼는 과거의 고대교회는 '어떻게'라는 질문에 빠져 있었고, 계몽기와 쉴라이에르마허 이후의 신학에서는 '계시'라는 사실을 인간의 편에서 추적함으로서 오류에 빠졌다고 평가한다.
3.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본회퍼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누구'라는 질문에 제한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제한을 야기 시킨 반로고스에 대항하는 과정을 갖는다. 이 경우 인간의 로고스나 반로고스 중에서 어느 한 편은 죽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로고스는 죽기를 원치않기 때문에 인간 로고스의 죽음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죽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는 성육신한 하나님의 로고스가 인간의 로고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은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로고스가 죽었다고 해서 인간의 로고스가 승리한 것은 아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하여 자기를 죽인자들 앞에 우뚝 섰다. 이 때 당황한 인간의 로고스는 부활하신 하나님의 로고스 앞에서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이제는 눈에 보이는 분으로서, 또한 질문과 대답으로서 인간의 안과 밖에서 영원히 서계시는 것이다. 본회퍼는 인간의 로고스가 성육신하신 로고스에는 대항 할 수 있어도, 부활하신 하나님의 로고스 앞에서는 대항하지 못한다고 본다.
이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당황하여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 인간 로고스에게 이번에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이와같이 질문하는 너는 누구냐?'라고 되묻는 것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이처럼 그리스도에 의해서 전도된 질문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통하여 인간은 비로서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도된 질문은 오직 하나님만이 물을 수 있다.
본회퍼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시 전도된 '누구'라는 질문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총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가 먼저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은 은총이며, 인간의 내재적인 로고스가 파괴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 설 때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결코 피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신 인격체로 현존하시면서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누구'라는 질문을 되묻고 대답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본회퍼는 교회를 떠나서는 삶과 죽음과 구원과 저주가 인식되어지지 않는다고 본다.(행4:12).
B.그리스도의 인격과 행위
그리스도의 인격과 행위를 논함에 있어서 본회퍼는 "그리스도론은 구원론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인격성을 의미하며,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행위를 의미한다.본회퍼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아는 것은 그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말씀의 계시를 통하여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는 방법에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행위가 인격자를 설명해 주는 방법이다. 즉 그리스도의 행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성을 추론하는 방법이다. 본회퍼는 이 방법을 배격한다. 왜냐하면 행위가 선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 행위는 마귀의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이해가 행위를 통하여 접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쉴라이에르마허나 리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였다. 본회퍼는 예수의 행위를 통하여 인격성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수를 단지 하나의 영웅 정도로만 해석할 소지가 있다고 본다.
둘째는 인격자가 행위를 설명해 주는 방법이다. 즉 사람이 선하면 행위도 선하다는 논리이다. 본회퍼는 이 방법에 동의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루터의 견해와 일치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도 어려움은 있다. 그것은 우리들 스스로는 인격자 자체에 대한 탐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대해서 본회퍼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딤후2:19)라고 한다. 다시말하면 그리스도라는 인격자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계시해 주는 곳에서만이 그의 인격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자신을 계시하는 장소는 기도이며, 말씀의 자유로운 계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행위와 인격성이 알려진다. 그러나 본회퍼는 이러한 구분은 지식적이고, 신학방법론을 위한 것일 뿐 실제로는 역사적 예수의 인격성은 행위와 분리시킬 수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론이 일차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그분의 존재이지 행위는 아니다.
IV. 그리스도의 현존 이해
A.나를 위한(pro-me) 그리스도
지금까지 본회퍼의 강의가 '당신은 누구요?'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에 촛점을 맟추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어떤 분인가'라는 그리스도의 인격적(人格的)인 현존의 문제로 그의 관심이 옮겨간다. 본회퍼에 의하면 현존이란 '동일한 시간과 장소(Space and Time)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이것은 행위(구원론의 영역)와 인격자(그리스도론의 영역)에 대한 영역 중에서 인격자를 이해하는 부분에 속한다. 그리고 이처럼 인격자로 현존하시는 곳은 다름이 아닌 승천과 재림 사이에 있는 교회 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행위와 인격자가 하나로 합해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현존은 곧 그리스도론적인 질문이 발달하는 전제조건이 된다고 본다.
그런데 본회퍼에 의하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해함에 있어서 범하기 쉬운 오해가 있다.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현존을 역사상에 나타난 하나의 영향력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며, 둘째는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단지 역사 밖에 존재하는 분으로만 이해하려는 오해이다. 전자의 경우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현존은 단지 공동체 안에서 또는 역사안에서 영향을 미치는 힘이나 동력에 불과할 뿐 인격적인 존재는 되지 못한다. 쉴라이에르마허나 리츨은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이다. 후자의 경우 그리스도는 역사 밖에서 존재하며, 인간의 내적인 부분에서 관념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뿐 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은 인정하지 않는다. 본회퍼는 계몽주의자들이나 빌헬름 헤르만같은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고 본다. 자세히 보면 두 경우 모두 그리스도의 현존을 역사상 어떤 관념적인 사실로만 돌리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들은 예수의 인격성(Personality)은 강조하지만, 인격자(Person)로서의 예수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인격성은 비인격적인 개념이다. 인격성에 대한 관심은 결국 그리스도의 현존을 어떤 힘이나 영향력, 가치등으로 제한시켜버리며, 인격성에 근거하여 제기되는 질문 역시 관념적인 '어떻게'와 '무엇'등에 국한된다. 그러나 인격자에 대한 관심은 행위를 넘어서서 '누구?'라는 질문에까지 이르게 한다.
본회퍼는 역사적인 예수가 단지 이러한 인격성으로만 끝나는 위험을 극복하고 인격자로서 '누구?'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해답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부활 때문이라고 본다. 부활 때문에 그리스도는 죽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예수의 인격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학자들의 문제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만 취급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소홀히 하였다는데 있다. 오직 살아나신 분 만이 인격자의 현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본회퍼는 부활을 그리스도론적인 질문과 현존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부활을 통하여 '지금-여기'에서의 그리스도가 인격자로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면 여기에서 또 하나의 그리스도론적인 질문을 제기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가 어떤 힘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인격으로 현존하고 계시다면, 어떻게 지금의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에 부딛치게 된다. 이에대해 본회퍼는 '현존이라는 것은 동일한 시간과 장소 내에서 같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역시 지금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 예수로 존재하게 된다고 본다. 즉 부활하신 예수는 '지금 여기'의 시간과 공간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존재하며,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으로서도 현존한다는 말이다.
본회퍼는 하나님이 단지 무시간적인 영원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본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완전한 신-인으로 현존해야 하며,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졌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서 계실 수 있는가?'라든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 예수가 어떻게 우리와 같은 시기에 존재 할 수 있는가?'라는 등의 물음은 하나님을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시간이나 공간과는 관계없는 분으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배제한다. 인간의 물음과 관계없이 이미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인격으로 현존하고 계신다. 그렇기에 본회퍼는 이러한 의미없는 질문보다는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하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그 대답은 '신-인'이신 한 분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이러한 신-인이신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숨겨진 현존'으로 존재한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인간 속에 숨어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온전하신 분으로서의 신-인이 죄많은 육신의 모습으로 유혹과 죄 사이에 있는 세상 속에 숨겨져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그리스도론의 중심 문제가 하나님과 인간사이가 별개의 것이며 이 사이에 그리스도가 관계를 맺어준다는 구원론적인 것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가 우리가 사는 현재의 시대에서 죄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하나의 장애물(Scandalon)이 되어 현존한다는 것에 있음을 말한다. 이는 곧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신-인이신 그리스도와 죄많은 육신으로 모습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정해진 신-인이신 그리스도의 현존은 복음선포라는 장애물 형식 안에 숨겨져있는 현존을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교회 안에서 설교라는 형식(장애물)을 통하여 선포되어지는 그리스도가 참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본회퍼는 이러한 말씀의 선포는 제2의 성육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낮아지심(Humiliation)이라고 하여 성육신과는 구별한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선포되어지는 말씀으로인한 낮아짐을 통하여 가능하다.
본회퍼는 이처럼 낮아짐의 형태로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세 가지의 모습을 지닌다고 한다. 그것은 곧 말씀(the Word)과 성례전(the Sacraments)과 공동체(the Community)로 현존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어떠한 구조를 통하여 교회에서 현존하시는가라는 것이다. 이에대해 본회퍼는 신-인이신 그리스도는 '나를 위한(pro-me)'이라는 구조 속에서 현존하신다고 본다. 즉 그리스도가 진정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것은 나와의 관련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가 여기에서 나를 위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필립스에 의하면 본회퍼에 있어서 '나를 위한(pro-me)'이라는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구조는 그리스도론의 핵심적인 논거이다. 또한 이것은 어떤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존재에 정의이며,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구조의 중심인 것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낮아짐의 형태로 존재하는 세 가지 모습 곧 말씀과 성례전과 공동체 역시 나를 위한 말씀, 나를 위한 성례전 그리고 나를 위한 공동체라는 구조를 통하여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한(pro-me)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차라리 무신론적인 행동이며 그의 경건은 쓸모없는 명상에 지나지않게 된다. 본회퍼는 '나를 위한(pro-me) 존재'라는 말은 그 자체가 이미 인격자 자신의 본성과 존재을 나타내며, 동시에 그리스도가 개별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는 분임을 의미한다고 본다.
본회퍼에 의하면 이러한 '나를 위한(pro-me)'구조는 세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나를 위한(pro-me)이라는 말은 곧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구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역사성과도 관련된다. 둘째는 그리스도는 나를 위한(pro-me)의 구조를 통하여 인류가 서야할 자리에서 대리적인 존재로 서있는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이 곧 공통체로서 십자가를 지고 죄를 담당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다. 셋째는 그리스도가 새로운 인간성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성은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은 새로운 인간성 안에 있게 된다.
요약하면 하나이시고, 동시에 전체이시며, 인격자이시고,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나를 위한(pro-me)이라는 구조를 통하여 말씀과 성례전과 공동체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B.그리스도의 현존(現存)양식
1.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
말씀으로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본회퍼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본회퍼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본다. 이 말은 곧 진리는 말씀 안에서 또한 말씀을 통하여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살아계신 말씀(요1:1-3)이며, 영(靈)도 본래가 말씀과 언어이지 힘이나 감정의 행동이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였으며, 이 말씀 안에 자신을 얽어 메어 놓으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말씀을 변경하지 않으시며, 우리는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둘째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한 말씀으로 계신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로고스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은 이 로고스 안에서 인간을 만나신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로고스가 먼저 하나님의 로고스 앞에 나설 수 없고 오직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
셋째로 하나님의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의 로고스와 다르게 그리고 따로 존재한다. 즉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을 향하여 '살아서 말을 걸어오는 형태'로 존재하지만, 인간의 말은 단지 '관념의 형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본회퍼는 부름의 말(Address)과 관념(Idea)의 말을 구분하며, 이 둘은 말의 기본구조를 형성하면서도 동시에 서로에 대해 배타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고 본다. 즉 인간의 언어가 관념이라는 형태의 말에 의해서 지배되는 반면, 그리스도의 말은 부름의 말에 해당한다. 관념의 말은 무시간적이고, 비인격적인데 비하여 부름의 말은 역사적이고 인격적인 특징이 있다. 부름의 말은 인격자의 마음에 따라 질문과 대답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항상 새로운 것이다. 또한 부름의 말은 그 자체가 공동체적인 성질이 있다. 왜냐하면 관념의 말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부름의 말은 두 인격 곧 부르는 자와 듣는자 사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름의 말은 공동체를 요구하며, 오직 말씀으로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말씀의 뜻을 완전히 알 수 있게 된다. 본회퍼에 의하면 이러한 부름의 말 안에서의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가 바로 나를 위한(pro-me) 그리스도가 된다.
넷째, 하나님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부름의 말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 자신이 응답하기를 바라면서 먼저 부르시는 인격적인 부름인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가 용서와 명령의 말을 걸어오는 자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인격적인 부름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교회의 말씀안에서 현존할 뿐 아니라 교회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 곧 설교로 현존한다. 그리스도는 설교로 현존한다. 설교 속에 있는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환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통하여 인간의 언어로 낮아지신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는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또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지 않다'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설교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불가능성과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 된다.
2.성례전으로서의 그리스도
본회퍼는 말씀과 동일하게 성례전 역시 그리스도의 현존이며, 동시에 성례전은 그 자체로서 독특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현존으로서의 성례전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첫째로 성례는 그 자체가 복음선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또한 성례는 단지 하나님의 성육이 아니라, '신-인'이신 분의 낮아짐의 행위이며, 성례전 안에서의 말씀은 곧 육신을 입은 말씀이 된다. 즉 성례전 자체가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이다.
둘째, 그렇다면 어떻게 물질적인 형태를 지닌 피조물이 성례가 될 수 있는가? 본회퍼는 이에 대해 말씀이신 하나님이 먼저 부름의 말을 걸어 오는 것을 통하여 나를 위한(pro-me) 그리스도의 현존이 가능한 것처럼, 성례 역시 하나님이 타락한 피조물에게 먼저 오셔서 말씀을 건네시고 그분의 특수한 말씀으로 어떤 요소에 이름을 불러주고 거룩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례전은 해석되고 거룩해진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로 된 성례에 자신을 묶어놓으신 것이다. 따라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성례 가운데에서 현존하신다.
셋째, 그렇다면 왜 이러한 성례전이 존재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본회퍼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제정하신 것이며 동시에 공동체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성레전 가운데에서 과연 그리스도는 현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이 질문은 다른 말로는 그곳에(There) 계신 그리스도와 나를 위한(pro-me)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성에 관한 것이다. 본회퍼는 지금까지의 성만찬에 대한 논의들이(칼빈과 루터를 포함하여) 그곳에 계신 그리스도에 중점을 둔 나머지 '어떻게 그리스도의 현존이 가능한가?'질문에만 대답하려고 시도하여 왔다고 비판한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현존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두 가지의 교리로 대답하였다. 하나는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현존하신다'는 편재론(The Doctrine of Ubiquity)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는 오직 그가 당신을 위해 거기서 존재하기를 원할때 당신을 위해서 거기에 계신다'는 임의론(The Doctrine of Ubivoluntarianism)이다. 본회퍼는 루터의 두 가지 교리 모두 그리스도의 존재양태가 나를 위해 현존하고 있다는 면을 간과했다고 본다. 또한 두 교리 모두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답을 주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가장 올바른 질문은 '성례 가운데 현존하고 계시는 분은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인 물음이다.
본회퍼는 그리스께서 말씀 가운데서의 현존을 위해서는 우리의 로고스를 사용하시고, 성례 가운데서의 현존은 우리의 몸을 사용하신다고 본다. 성례 때 그리스도는 우리들 가운데에서 형체를 가지고 우리들과 함께 피조물로 서계신다. 그러나 성례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은 우리의 영적이고 육적인 존재의 회복된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회복된 새로운 피조물의 요소인 빵과 포도주는 그 자체를 위한 것이기 보다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바로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성례전이 인간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것이다.
3.공동체로 실존하는 그리스도
본회퍼의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의 마지막은 '공동체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례전 안에 현존하시듯이 공동체 안에서 나를 위한(pro-me) 존재로서 현존하신다. 사실 말씀이나 성례로서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결국 공동체로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나를 위한(pro-me) 존재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 현존의 본질이 공동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가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로고스가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와서 공동체로 존재하게 되었고 또 공동체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의 로고스라 함은 강력한 창조의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통하여 공동체라는 형태를 창조하신다. 따라서 공동체는 말씀을 받는 그릇 정도가 아니라, 공동체 자체가 계시요,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본회퍼는 '성례이신 그리스도는 공동체로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 존재하신다'고 본다. 성례는 원래 말씀을 넘어서는 육체적인 형태가 있다. 이러한 면에서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여기에서 몸이라 함은 단지 몸에 붙어 있는 어떤 기능적인 개념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심과 수욕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존재양식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공동체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머리인 동시에 모든 지체도 되신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에베소서에 나타난 바울의 교회개념과 다른 교회의 개념을 제시한다. 에베소서에는 머리와 지체 사이의 구분이 나타난다. 그러나 본회퍼는 머리가 주권을 뜻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지체와 주권의 개념이 서로 상반되는 것은 아니라 하나로서 통일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것이다.
C. 예수 그리스도 : 중심과 중보자
본회퍼는 '누구?'라는 그리스도론적 질문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한 인격자로서 교회 안에서 현존하신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그의 기독론 전개가 '나를 위한(pro-me)'이라는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구조에 논증의 촛점을 맞추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장소(Place:Where)로 그의 기독론 전개의 영역을 확대한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소를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누구(Who)?'라는 질문 속에 있는 '어디에(Where)?'라는
구조를 인지해야 한다. 그럼으로해서 우리는 그 인격자의 구조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있는
그의 교회 안에서 하나의 인격자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의존
하게 된다. 만일 이러한 구조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것으로 표현되려면, 우리에게는 부활하긴 분의 인격적인 실존
양태에 대한 신학적인 증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어디에(Where)?'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시는가?'. 본회퍼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내가 마땅해 서야 할 곳, 그렇지만 내가 설 수 없는 그 곳에서 나를 대신하여 그리고 나를 위하여 계신다'. 이 말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나의 실존의 한계선과 한계선 너머에서 '나를 위한(pro-me)' 존재로 계신다는 것이다. 이 실존의 한계선의 위치는 나와 나 자신(Me and Myself)사이 그리고 과거의 나와 새로운 나(Old 'I' and New 'I') 사이 이다. 이러한 한계선에 있을 때 우리는 판단되어지고, 홀로 서있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본회퍼는 바로 이러한 한계선 곧 '나와 나 자신'사이 그리고 '과거의 나와 새로운 나' 사이의 중심에서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나와 나' 사이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중심이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고 동시에 새로운 자신의 중심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인격체의 본질과 구조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항상 중심에 존재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본회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리스도가 중심으로 존재하는 영역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그것은 '인간존재(人間存在)과 역사(歷史) 그리고 자연(自然)'이다. 즉 말씀과 성레전과 공동체로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인간실존과 역사와 자연의 중심이 되신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누구'라고 하는 그리스도론적인 질문과 '어디에'라는 질문을 합하여보면 그리스도의 본성과 존재양식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 대답은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pro-me) 존재하는 분으로서 중보자(Mediator)가 되신다"는 것이다.
파일(E. Feil)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장소에 대한 관심은 본회퍼의 기독론이 [윤리학]등에서 보다 넓은 시야를 갖게되는 기반이 된다고 본다.
1. 인간실존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본회퍼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인간존재의 중심이라는 말은 단지 인간의 인격과 사유와 느낌의 중심이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식의 주변에 있을 때에도 여전히 그는 중심이 되신다. 본회퍼가 말하는 "인간존재의 중심"이라는 말은 어떤 심리학적인 성격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신학적인 성격을 갖고있다. 또한 이말은 우리의 인격성(人格性)과 관계된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인격자(人格者)로 서있는 우리의 존재와 관련이 있다. 인간이 인격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곧 이것이 곧 인격자이신 하나님과의 접촉점도 된다는 의미이다.
타락한 세계에서 인간은 율법과 성취 사이에 있다. 율법이 있지만 율법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법에 대해서 실패한 존재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인간이 실패한 바로 그곳에 서계신다. 이말을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중심되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성취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인간존재의 한계이며 심판인 동시에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고, 그것의 중심이 되신다. 따라서 '인간존재의 중심되신 그리스도'라는 말은 곧 그리스도가 인간의 심판자이며, 동시에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역사의 중심되신 그리스도
본회퍼는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약속과 성취의 도식에서 바라본다. 그는 역사를 철학적이나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배격한다. 그는 철저하게 역사를 신학적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역사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역사의 흐름과 모든 촟점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본회퍼에 의하면 역사는 약속과 성취 사이에서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탄생시키는 모태 될 약속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생명은 이 메시야에 대한 기대 속에 있고, 이 기대 속에서 나온다. 역사의 의미는 메시아의 도래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역사가 죄로 인해서 부패되었다는 것이다. 죄로 인해서 부패된 역사는 오직 부패된 형태의 약속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인해서 역사는 여러 거짓된 형태의 메시야들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한 곳을 지정하여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고 거짓된 메시야들의 물결에 대항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약속의 성취로 오신 그리스도는 역사상의 모든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성취이며, 동시에 모든 거짓 메시야들을 파괴하는 분임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와서 이제까지의 역사는 자신의 한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모든 역사에 대한 주장들을 심판하신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역사의 한계이자, 중심인 위치를 성취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역사에서도 나를 위한(pro-me) 존재로서, 또한 중보자로서 계신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그리스도와 역사 사이의 관계에 유비(analogia) 하여, 이번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 이후 교회 안에서 현존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역사의 중심이 된다고 본다. 즉 교회는 현실 속에서 국가가 만드는 역사의 중심의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 영역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논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숨겨진 현존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교회 역시 국가의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현존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국가의 숨어있는 의미이자 약속이며, 국가의 생명은 그 중심인 교회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본회퍼는 교회는 본질적으로 국가를 심판하고 의롭게 할 수 있으며, 반면 국가의 본질은 법과 질서를 창조하는 행위를 통하여 국민들을 교회가 바라는 성취의 자리까지 이끌어가는데 있다고 한다. 이러한 면에서 교회는 국가의 한계이며, 이 한계 속에서 교회는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인간적인 질서와 붕괴를 선포한다. 반면 국가의 질서는 십자가 안에서 완성되었다.
결론적으로 본회퍼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십자가에서 새로운 것이 되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가의 기원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교회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고, 교회는 국가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다. 본회퍼가 이처럼 교회를 국가의 중심으로 보는 것은 당시 국가와 야합했던 독일의 국가교회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3. 하나님과 자연사이의 중보자되신 그리스도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장소가 인간실존과 역사 뿐 아니라 자연도 된다고 본다. 사실 자연과의 관계는 개신교 신학에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이기도 하다. 본회퍼에 있어서 그리스도 현존의 장소가 인간과 역사라는 것은 곧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자연사이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의미가 있다.
자연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본래 창조된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해서 타락한 피조물이 되었고, 이에따라 자연은 자유를 상실하고 노예 상태가 되어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러기에 자연은 새로운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그런데 본회퍼는 교회의 성례전의 원리를 통하여 타락한 자연이 새로운 자유를 얻는 원리를 발견한다. 즉 자연 역시 하나님의 타락한 피조물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례전의 말씀을 통하여 자연은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성례 속에서 그리스도는 자연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시며,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신다.
사실상 인간의 역사는 항상 역사인 동시에 자연이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자요, 창조물의 해방자인 중보자는 인간실존의 온전함을 위하여 행동하신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가 중보자이며, 나를 위한 존재이며, 옛 세계의 마지막이인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의 시작임을 강조한다.
V. 역사적 그리스도 연구
A.역사적 그리스도에 대한 접근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있어서 본회퍼는 철저하게 역사적인 예수와 그리스도는 동일한 인물이라고 본다. 만일 이 둘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며, 동시에 교회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적 예수와 현존하는 그리스도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것은 역사적 연구에 대한 그의 전제사항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본회퍼는 왜 철저하게 역사적인 예수와 그리스도를 동일하게 보려고 하는가? 그것은 이미 고찰한 바와같이 본회퍼의 관심이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현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고 계신 그리스도에게 할 수 있는 질문은 오직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존재론적인 물음인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예수와 그리스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인격적이고 현실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그는 자유주의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본회퍼의 입장에서 볼 때,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역사적인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分離)하는데 있다. 즉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예수가 원래부터 그리스도가 아니라, 원래는 하나의 인간이었던 예수가 그를 따르는 공동체에 의해서 그리스도로 선포 되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본질적인 인격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다른사람에게 끼친 영향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본질적인 그리스도와 공동체에 의해 선포된 그리스도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연구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인 예수를 탐구하기 위하여 과학적인 조사들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회퍼에 의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이러한 연구의 시도때문에 붕괴되고 말았다. 즉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예수의 생애를 증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슈바이처(Schweitzer)는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탐구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브레데(W. Wrede)도 순수한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연구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바가 있다. 브레데는 그 이유로서 공관복음서 자체가 이미 공동체의 믿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기록만으로 순수하게 역사적인 예수를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순수한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은 공관복음서의 신학적인 기록 이면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역사적인 예수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 불가능하다 해도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현재의 교회 안에서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사실을 확신 할 수 있겠는가? 본회퍼는 이것을 신앙의 영역으로 돌린다. 즉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은 역사적인 탐구를 통해서는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증명은 신앙이라는 접근을 통하여 증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신앙의 근거를 가지고 이를 증명 할 수 있는가? 본회퍼는 그 근거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자기증거"에서 찿는다. 그리스도가 자기 스스로를 증언한 것으로 인해서 교회는 그 분이 역사적인 존재임을 증언한다. 지금 여기에서의 교회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 자신이 과거에 역사적으로 존재하셨다는 것을 스스로 증언하는 것이다. 즉 부활이 역사적인 예수의 근거가 아니라, 부활을 통하여 그 이전의 역사적인 예수가 증명되는 것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신앙은 역사로 부터 어떠한 확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스스로를 증거하신다고 본다.
B.비판적인 그리스도론
본회퍼는 역사적 그리스도를 논함에 있어서 "비판적인 그리스도론"과 "긍정적인 그리스도론"을 구분한다. 비판적인 그리스도론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함에 있어서 어떤 한계영역을 설정하고, 이것을 기준으로하여 이미 설정된 그리스도론과 대한 다른 견해가 등장하면 항상 "어떻게"라는 물음을 통하여 비평적인 측면에서 그것을 판단하고 규정함으로서 자신을 지켜나가는 연구방법을 말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고대 종교회의들은 주로 비판적인 그리스도론을 산출해 내었다. 본회퍼는 고대교회가 이처럼 비판적인 그리스도론의 경향으로 기울어 지게 된 원인이 "어떻게?"라는 물음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반면 긍정적인 그리스도론은 '어떻게'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는 것에 관심을 둔다. 본회퍼는 고대교회가 제기한 '어떻게'라는 문제는 이미 칼게돈 회의의 정의에서 종결되었으며, 칼게돈 이후에 '어떻게'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러기에 칼게돈의 정의는 궁극적으로 '어떻게'의 종말인 동시에 '누구'라는 질문의 시작이다.
이제 본회퍼가 칼게돈의 고백에 기초하여, 비판적인 그리스도론과 관계된 이단들을 비판한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1. 가현론 이단과 자유주의
본회퍼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형태의 가현론은 배격되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가현설은 기본적으로 모든 물질적인 것은 악한 것이요, 영적인 세계는 선한 것이라는 이원론적인 도식에 입각하여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현존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즉 본회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교회공동체(敎會共同體)로 현존하는데, 만일 역사적인 예수와 그리스도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와 현존하는 교회공동체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럴 경우 그의 신학적인 출발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그는 모든 형태의 가현설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본회퍼는 이러한 가현설 이단의 특징을 두 가지로 본다. 첫째는 가현설 이단의 하나님에 대한 비인격적인 추상적인 관념이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과는 관계가 없는 단지 초자연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럴 경우에 그리스도 역시 하나의 관념으로 밖에는 표현될 수 없다. 둘째는 가현설의 특수한 구원개념이다. 가현설 이단에서는 인간을 자기 개체 속에 감금되어 있는 존재로 파악하고, 이러한 감금의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자기 본질로 회복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본다. 본회퍼에 의하면 고대교회에서 가현설이 끊임없이 혼란을 일으킨 것은 구원의 개념에 있어서 인간의 개체와 본질을 구별한데 있다. 가현론자에 의하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본체이고 인간예수는 하나의 우연성에 불과하다.
본회퍼는 이러한 가현설 이단이 지금도 존재한다고 본다. 본회퍼는 쉴라이에르마허 이후의 모든 자유주의 신학 전체를 가현론적인 그리스도론의 견지에서 파악한다. 고대의 가현설이 하나님에 대한 사변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자유주의를 통하여 역사에 대한 사변적 관념이 등장했다. 즉 역사는 어떤 특수한 종교적 관념과 가치의 보조자로 전락한 것이다. 예컨데 쉴라이에르마허의 경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인간의 종교적인 관념과 능력의 구체적인 모습 또는 대표자일 뿐이라고 본다. 본회퍼의 분석에 의하면 현대신학에서 이러한 가현설이 나타나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론 연구의 출발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인 예수 보다도 특수한 종교적인 관념을 먼저 취급하고, 그후에 역사적 예수를 그것에 적용한 것이다. 여기에서의 결정적인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역사 속에서 인간의 종교적 관념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모든 가현론적인 형태의 신학이나 관념론은 배격되어야 한다.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레전과 공동체로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2.에비온 이단
본회퍼에 의하면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가현설 이단과 대조되는 또 하나의 이단이 에비온 이단이다. 에비온주의는 이스라엘의 유일신적인 신앙의 배경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접목하려고 시도한 기독교적의 이단이다. 에비온주의자들은 유대의 유일신적 신앙관에서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에, 인간 예수를 지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따라 에비온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탄생과 선재성 그리고 예수의 참된 신성을 부인하였다.
에비온주의자들은 예수의 초자연적인 탄생을 부인하는 대신, 예수의 세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즉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그에게 임함으로서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세례 때 임한 성령을 통하여 인간예수가 특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 이후에 예수는 성령에 사로 잡힌바 되어 점점 더 발전적으로 하나님이 되어갔다. 한 마디로 예비온주의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이후에 하나님의 자리로 높임을 받은 한 인간이었다.
본회퍼는 가현론과 에비온의 근본적인 차이는 가현론자들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한계를 구분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에비온주의자들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한계를 명확히 구분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에비온주의의 대표적인 사람은 군주신론을 주장하는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사모사타의 바울을 자신들의 선구자로 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는 잘못되었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그 출발점에서 부터 인간의 무한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으므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한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에비온주의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여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가현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결국 가현론이나 에비온주의나 모두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한다. 본회퍼는 이러한 그들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원인은 '어떻게'라는 물음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3.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파 이단
본회퍼는 그의 그리스도론의 표준을 칼게돈 신조(451)에 둔다. 왜냐하면 칼게돈 신조를 통하여 고대교회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神人兩性)교리가 최종적으로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칼게돈 신조는 '어떻게'라는 물음의 대답인 동시에 페기이라고 본다. 칼게돈 이후 더 이상 '어떻게'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고, 오직 '누구'라는 질문이 있을 뿐이다.
칼게돈 회의가 열리게 된 과정에는 단성론자들과 네스토리우스파의 논쟁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있어서, 성육신한 주님은 신성이라는 한 가지 본성 만을 갖는다고 보았다.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신성이라는 하나의 본성으로 연합(聯合)되었다고 본다. 본회퍼는 이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개성을 가진 한 인간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성서의 입장과도 반대되는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동일하게 모든 성질과 제한성을 가진 개성있는 인간임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성론자들의 지나친 신성의 강조에 대응하여 네스토리우스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보다 강조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는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인성과 신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존재는 연합이 아니라 분리라고 보았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완전히 분리된 채로 존속한다는 것이다. 네스토리우스파에서는 두 개의 본성이 연합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고통을 당한 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이지 신성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네스토리우스파의 주장은 더이상 하나님의 성육신을 말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파의 논쟁은 점점 극단화 되어갔으며,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의 단성론자인 유티케스(Eutyches)에 이르러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유티케스는 그리스도는 두 본성으로 이루어졌던 것이지, 두 본성의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가 연합 이전에만 두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연합 이후 곧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한 본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두 이단에 대항하기 위해서 교회는 451년에 칼게돈 회의에서 ,그리스도가 양성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고, 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본회퍼에 의하면 칼게돈 신조가 그리스도의 양성을 정의하는 방법은 '자신을 스스로 상쇄해 버리는 방법'이었다. 즉 칼게돈 신조는 서로 모순되고 상반된 주장들을 '--은 아니다(Without)'라는 서로 단순한 부정의 방법을 통하여 페기시킨 것이다.
4.종속론과 양태론적 이단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동일본질'이라는 것에 비추어서 종속론과 양태론적인 이단사상을 비판한다. 첫번째로 종속론자들은 성부 하나님의 통일성과 유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하나님께 종속된 존재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본회퍼에 의하면 이러한 생각을 계시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종일한 존재인 아들에 대해서 말하는 곳에서 만이 계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양태론은 종속론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유일성과 계시을 조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즉 양태론자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양태 중의 하나인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양태론자들 역시 하나님의 계시라는 측면을 심각하게 취급하지 못했다고 본다.
본회퍼는 종속론자들이나 양태론자들이나 모두 계시하는 측면을 간과한 나머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평가한다. 즉 종속론들은 '양자설(養子說)'을 양태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C.비판적인 그리스도론의 공헌
본회퍼는 고대교회의 비판적인 그리스도론은 칼게돈 회의를 통하여 종결되었다고 보면서, 비판적인 그리스도론에 대한 분석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획일적인 언명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고를 객관화 시키는 작업은 결국 스스로의 한계에 부딛치고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셋째로 '어떻게'라는 물음이 아니라 '누구'에 관한 물음을 물어야하며, 칼게돈 정의는 비판적인 그리스도론의 종결이다.
본회퍼는 칼게돈 신조는'어떻게'라는 물음의 대답인 동시에 페기이라고 본다. 칼게돈 이후 더 이상 '어떻게'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고, 오직 '누구'라는 질문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비판적인 그리스도론의 공헌은 칼게돈 신조을 이끌어 냈다는 것과 칼게돈 신조를 통하여 이제는 '누구'라는 존재론적인 질문만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D.긍정적인 그리스도론
본회퍼의 긍정적인 그리스도론에 대한 설명은 본회퍼 자신이 서두에서 던진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과 같은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내용상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여 이해 할 수 있다.
1.성육신하신 분
성육신에 대하여 본회퍼의 관심은 "어떻게 성육신하신 분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가?"라는 데에 있지 않고,"(성육신하신) 그는 누구인가?"에 있다. 본회퍼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동일하게 완전한 인간이 되신 분으로서, 우리가 그를 향하여 할 수 있는 말은 "이분은 우리를 위한(pro-nobis) 하나님이시다"라는 말 뿐이다. "이분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은 사람들이 이성이나 경험을 통하여 정의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오직 위로 부터 수직적으로 예수에게 내려진 말로서, 예수라는 사람 전체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며, 말씀인 것이다.
본회퍼는 엄격히 말해서 우리는 '성육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분'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성육신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라는 질문을 야기시키지만, 성육신하신 분에 대한 관심은 인격적인 대상인 '누구'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기 때문이다. 성육신하신 분은 다름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 예수이다. 바로 성육신하신 분으로서의 인간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된 것이다. 육체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동시에 인간의 영광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회퍼는 "성육은 인간이 되심으로 해서 자신의 영광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영광의 메시지"라고 본다.
2.낮아지시고 높아지신 분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이심에 관한 본회퍼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존재하시는 방식에 있다. 본회퍼에 의하면 낮아지심이나 높아지심은 하나님의 어떠한 상태를 의미하거나, 하나님의 제한 당하고 계신 어떠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낮아지심이나 높아지심에 관계없이 항상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 계셨다. 따라서 우리가 "이분은 하나님이다"라고 할 때, 이말은 단지 그리스도가 높임받으실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시고 고통당하는 인간 예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만약 우리가 낮아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의심하던 인간 예수를 향하여 "이분은 하나님이다"라고 말 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의 의미를 알고 있지 못한 것이 된다.
본회퍼는 성육신의 교리와 낮아지심의 교리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성육신이 '어떻게'라는 질문을 야기 시키는 것이라면, 낮아짐의 교리는 '누구'라는 인격체 곧 '성육신 하신 분'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본회퍼의 관심은 항상 "낮아지신 신-인이신 분은 누구인가?"에 있었다.
따라서 낮아지심 속에 계셨던 분은 인간이나 하나님의 로고스 또는 그리스도의 인성이나 신성이 아니라, 신-인이신 분의 전(全)인격이었다. 본회퍼에 의하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낮아짐의 원리는 그의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같은 모습"(롬8:3)에 있다. 즉 그리스도가 죄있는 육신을 입으로신 것이다. 낮아지심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그분의 자유의지로, 죄와 죽음의 세상 속에 가장 연약한 모습 속에 숨어있는 형태로, 그리고 신-인이라분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으로, 죄인들 가운데서, 죄가 없으신 자의 길을 걸으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추시는 존재양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낮아지신 모습은 부활과 재림을 통한 높아지심으로서 없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은 낮아지심이나 높아지심과는 관계없이 영원히 존속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으로서 죄인들 가운데 오셨지만 죄는 없으시다는 것은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의 해석이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예수가 우리와 동일한 죄인이라면 어떻게 죄인들인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또는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가 무죄(無罪)인가?'라는 것들이다.
이에대해 본회퍼는 '육체와 같은 모습'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서 해명한다. 이 말은 먼저 그리스도가 우리와 동일한 인간임을 의미한다. 그는 인간으로서 동일하게 유혹을 받았고, 때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He) 우리와 같은 인간의 육체를 취하셨다는데 있다. 육신을 취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없으신 하나님이신 그분 스스로가 먼저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심으로 해서 인간의 육체는 권리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분은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이러한 것을 선언하셨다. 즉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진 그리스도가 유죄(有罪)인가 무죄(無罪)인가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의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는 예수의 무죄성을 예수의 외적인 행동을 통하여 찿으려 한다면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그분의 행동은 육체의 모습 속에서 일어난 것들이며, 그분의 행동 자체에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공존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육체로 오셔서 이러한 모호한 행동들을 하신 분이 바로 그분이며, 영원히 죄 없으신 분이 바로 그분 이라는 신앙적인 묘사가 이를 증명한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무죄성도 결국은 신앙의 고백 속에있는 익명성(Incognito)에 귀결된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나로 인해 실족치 않는자는 복이 있다(마11:6)"라고 하셨다.
유대인들 곧 경건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낮아지신 신-인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걸림돌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낮아진 그리스도의 행동이나 주장들은 모든 율법 관념을 깨뜨리는 것들이렀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이 요구하였던 이적이나 표적들을 행하였다면 그들은 예수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표적이나 이적을 일으킬 때가 되었을 때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눈에 보이는 어떤 확증이나 증거들 주지 않았다. 만약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 대해서 어떤 표적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었다면, 그 그리스도는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전혀 어떤 기적적인 일들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증거하고 확증함에 있어서 이적을 통해서 한것이 아니라, 자기선포와 자기증거를 통해서 하셨다는 것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만일 그리스도가 이적을 통하여 스스로를 증명하였고 우리가 그러한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가시적인 신성의 현현'을 믿는 것이지, 나를 위한(pro-me)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기적을 믿는 신앙만을 내세운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은 단지 눈에 보이는 어떤 증표를 통하여 믿으려는 노력을 포기한 곳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우리의 믿음을 보증해주는 것은 유일하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에게 다가오는 말씀 그 자체라고 본다.
본회퍼는 이러한 스캔달(Scandal)의 형식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능케 한다고 본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스캔달)의 형태가 곧 "우리를 위한(pro-nobis)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믿음을 가진 공동체만이 예수의 이적 속에 숨겨져서 다가오는 왕국의 도래를 깨달을 수 있다.
본회퍼에 의하면 낮아지신 분은 오직 부활하시고 높임을 받은 존재로서 우리게 현존하신다. 그러나 여전히 부활과 높여지신 분은 익명의 신-인으로 현존하고 계시다. 이러한 익명성은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밝혀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성육신하신 분은 더 이상 낮아지신 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높임을 받으신 분이 되어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회퍼는 낮아지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말한다. 우리는 현재에서 낮아진 분과의 만남 속에서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며, 교회는 낮아지신 분과 함께 낮아짐의 길을 걸어야 한다. 교회가 낮아짐의 길을 가는 것에는 어떠한 법칙이나 원리가 없다. 교회는 자신의 낮아짐을 마치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다는 증거로 삼아서도 안된다. 다만 낮아짐은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교회가 걷는 낮아짐의 길이 바로 교회와 더불어 계시는 하나님의 길인 것이다. 교회는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낮아질 수도 있고 높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어느 경우든간에 낮아지신 그리스도만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교회는 그리스도로 부터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육신 하시고, 낮아지시고, 높아지신 분이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VI.결 론
A. 요 약
지금까지 필자는 디이트리히 본회퍼의 1933년 "그리스도론 강의"를 중심으로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을 살펴보았다.
먼저 제2장에서는 "그리스도론 강의"에 대한 배경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그것은 1933년 "그리스도론 강의"의 시대적 배경, 1933년 전후의 신학적인 상황과 "그리스도론 강의"와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론 강의" 이전의 초기 저서들과의 관계이다. 1933년은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고,교회에서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과 반발의 분위기가 교차하던 시기였다. 또한 1933년을 전후한 시기는 자유주의 신학이 이미 퇴조하고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이 등장하였던 시기이다. 이러한 때에 본회퍼는 신학을 공부했고,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론 강의"에는 자유주의를 가현론적인 이단으로 규정하면서도, 신학에 있어서서 사회성에 대한 관심이나 인격개념등을 자유주의로 부터 배웠다. 그리고 1933년 이전에도 박사논문인 [성도의 교제], 교수자격논문인 [행위와 존재],[창조와 타락],[교회의 본질]등의 저서와 강의들을 하였다. 이러한 저서와 강의들은 "그리스도론 강의"와 내용적인 연계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제3장에서는 본회퍼가 그리스도론 전개함에 있어서 문제인식의 출발점이 되는 부분을 다루었다. 본회퍼에 있어서 그리스도론의 근본관심은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본질과 존재에 있다. 그는 이것을 탐구하는 것이 그리스도론의 목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처럼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심을 둘 때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은 "당신은 누구요(Who)?"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바로 "당신은 누구요?" 라는 물음에서 부터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은 출발한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로고스는 오직 인격적인 존재로서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구"라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답을 얻게된다고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인간의 로고스는 비로서 자신의 실존을 알게되고 그리스도를 알게된다. 또한 본퍼회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아는 방법에 있어서 행위를 통해서 접근하는 것을 반대하고, 오직 인격자가 자신을 먼저 계시하는 곳에서만 알 수 있다고 한다.
제4장은 앞에서 앞에서 밝혀진 인격적인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에서 어떠한 현존양식의 구조를 갖고 있는지를 고찰하였다. 본회퍼는 '현존'이라는 말의 의미를 지금-여기의 시간과 장소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본회퍼는 지금-여기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인격성이나 어떠한 영향력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현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완전한 신-인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낮아짐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때의 낮아짐은 성육신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복음선포라는 장애물을 통하여 현존한다. 본회퍼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낮아짐의 형태 곧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현존하는 양태는 말씀과 성례전과 공동체라고 본다. 그리고 이처럼 인격으로서 현존하는 그리스는 '나를 위한(pro-me)'이라는 인격적인 구조를 갖는다. 또한 인격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소는 인간실존과 역사와 자연의 중심(Mitte)과 중보자(Mittler)가 되신다.
제5장은 역사적인 그리스도론 연구에 대하여 다루었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자신의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는 기준은 칼게돈 신조(451)에 두고 자신의 그리스도론을 전개한다. 왜냐하면 고대교회의 그리스도론 논쟁에 있어서 "어떻게"라는 질문은 칼게돈 신조를 통해서 확립되었으며, 칼게돈 이후에는 "누구"라는 질문만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있어서 본회퍼는 철저하게 역사적인 예수와 그리스도는 동일한 인물이라고 본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을 가현론적인 이단으로 규정하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는 역사적인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함은 물론이거니와 고대교회의 가현론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변적인 관념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부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자유주의를 통하여 역사에 대한 사변적인 관념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본회퍼는 "누구"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에 근거하여 긍정적인 그리스도론에 대해서 말한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분'으로서 '나를 위한(pro-me)'존재일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pro-nobis)' 존재임을 피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를 위한 그리스는 낮아짐의 형태로 존재하며,부활과 재림을 통하여 높임을 받는다.
정리하면 본회퍼는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적인 현존에 관심을 둔다. 하나이고 동시에 전체이시며, 인격자이시고,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나를 위한'그리고 '우리를 위한'이라는 구조를 가지며, 지금-여기라는 현실 속에서 말씀과 성례전과 공동체라는 낮아짐의 형태로 현존한다. 또한 인격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소는 인간실존과 역사와 자연의 중심(Mitte)과 중보자(Mittler)가 되신다.
B.평가 및 제언
지금까지 살펴본 본회퍼의 연구를 토대로하여 이제 필자는 1933년 "그리스도론 강의"가 끼친 영향과 공헌점들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하여 한국교회에 몇 가지의 제언을 함으로서 본 논문을 마름하고자 한다.
먼저 "그리스도론 강의"가 끼친 영향이다. 이미 서론에서도 언급한 바와같이 본회퍼 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론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본회퍼 신학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론 강의"는 그 중심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본회퍼는 베를린의 테겔 감옥에서 그가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던졌던 질문을 발전시킨다. "도데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기독교란 무엇이며, 그리스도란 누구인가?". 그리고 그는 그 해답으로서 [옥중서간]에서 예수를 '타자를 위한 존재'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과 대답의 형태는 이미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나타난다. 파일(E.Feil)에 의하면 본회퍼가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나를 위한'구조에서 '우리를 위한'의 구조로 변화하는 것은 본회퍼의 윤리사상과 [옥중서간]에 나타나는 '타자를 위한 존재-그리스도'의 출발이 된다.
일반적으로 2차 대전 이후인 1945년 이후의 신학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본회퍼와 연관되어 있다고 평가되어 진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론 강의"는 이러한 신학적 전개의 가장 원초적인 근원지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음은 "그리스도론 강의"의 공헌점에 대해서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필자는 먼저 "그리스도론 강의"의 공헌점을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고와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 두고싶다. 그의 신학적개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었으며, "그리스도론 강의"는 그 핵심이다. 두 번째로는 '지금-여기'에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현존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찿고싶다. 그 이전 자유주의 신학이 그리스도를 사변적이고 학문적인 위치에서 연구하였다면, 이제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현존에 촛점을 마추고 '지금-여기에서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을 학문적인 위치에서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계신 분으로, 그리고 우리와 인격적으로 관계를 갖는 존재로 인식시킨 것이다. 세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공헌점은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강조한 것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성육신과 구별하여, 그리스도의 현존양식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현존의 장소에 대한 시야를 확대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실존 뿐 아니라 역사와 자연의 중심과 중보자가 됨을 지적하였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며, 동시에 교회는 역사와 국가(國家)의 중심이 된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연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다. 자연에 대한 언급은 본회퍼 자신의 말처럼 그 이전에는 관심이 적었던 분야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현존에 대한 위치를 언급은 곧 [윤리학]등에서 기독교인의 책임적(責任的)인 삶을 강조하는 기반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론 강의"에 나타난 본회퍼의 그리스도론과 연관지어서 미약하나마 한국교회에 몇 가지 제언을 함으로서 본 논문을 끝맺고자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그리스도론은 언제나 은사와 과제이다" 라는 펠리칸의 지적은 한국교회의 그리스도관에도 적용이 된다. 일반적인 한국교회 신앙유형의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주의적인 경건신앙, 내세지향적인 타계신앙'등이다. 이러한 신앙유형들이 형성된 원인은 먼저 역사적으로 초기 선교사들의 보수주의적인 신앙형태와 한국의 재래종교등과의 접목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의 내용 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문제점은 곧 교회론과 그리스도론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즉 성속(聖俗)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교회개념과 함께, 교회의 주인되신 그리스도론을 개인적인 구원의 측면에서만 조명한 것이다. 이에따라 구원은 곧 개인적으로 한(恨) 많은 이 세상에서 탈출하여 천국으로 가는 것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이로인해서 교회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공동체성 약화 되고, 현실 속에서 국가에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사회에 아픔이 있을 때에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이것은 거룩한 교회와는 구분되는 세속의 일이라는 이유로 무관심해온 경향이 많았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론이 주는 과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리스도론적인 약점을 지닌 신앙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필자는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이 어느 정도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개인주의적인 경건신앙이다. 개인주의적 신앙이라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공동체성(共同體性)이 약하다는 것과 통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를 개인의 영적인 구원을 위한 존재로만 인식했지 공동체를 위한 존재로의 인식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인들이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듣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본회퍼의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교회는 그리스도를 단지 '나의 구원을 위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존재로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한국교회 전체와 민족 전체, 그리고 인류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존재라는 공동체 신앙을 갖을 때, 교회 민족의 통일과 세계선교에 더 큰 관심과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는 내세지향적인 타계신앙이다. 내세지향적이고 타계적인 신앙을 가졌다는 말은 곧 지금-여기의 현실을 중요시 않고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교회가 이 세상을 외면하고, 사회의 아픔에 무관심 할 때 일수록 교회는 현실 사회로 부터 배척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본회퍼는 나치하에서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고 있을 때 "유대인을 위하여 소리치는 자만이 그레고리안 찬가를 부를 수 있다"고 외친바가 있다. 한국교회는 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지나오면서 사회에서 들려오는 비난과 아픔을 뼈져리게 느꼈왔다. 그리고 90년대인 지금은 민족의 통일(統一)과 환경보호 그리고 핵문제 라는 명제들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러한 명제들 앞에서 한국교회는 스스로에게 "과연 오늘의 한국교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또한 교회공동체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존재 뿐아니라 역사와 자연의 중심과 중보자이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는 영적인 문제 뿐 아니라, 역사와 자연 속에서도 중심과 중보자로서 교회의 사명과 역할을 다하는 책임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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