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5월 3일(금)부터 5일(일)까지 2박 3일간
제주 섬 속의 작은 섬들을 걷습니다. 제15강으로, 고려시대 화산 폭발로 바다에서 솟아났다는 기록이 전하는
비양도와 봄이면 17만 평의 들판에 청보리 물결이 출렁이는 청보리섬
가파도를 걷습니다. 또 제주올레 코스 중 가장 아름답다는
10코스도 걷습니다. 10코스는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환상의 해변올레입니다. 이 길은 특히 길을 만든 (사)<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동행해줄 예정이라 더욱 의미있는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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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만 평 가파도 보리밭이 춤춘다. 한가운데 피어난 갯무우꽃과 유채꽃이 환상을 더한다. ⓒ섬학교 |
또한
아름드리 천년의 거목들이 자라는 신비의 숲
비자림과 제주 오름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한
사진작가 김영갑 선생이 늘 오르던
용눈이오름에도 오릅니다. 서귀포 앞바다 무인도
새섬을 걷고 폭풍의 화가 변시지 화백의 그림들이 상설 전시되는
기당미술관에도 갑니다. 짧은 기간 제주의 속살을 깊이 들여다보고 올 수 있는 드문 기회입니다.
단, 집결지 제주까지는 항공이든 배편이든 자유롭게 개별 도착이며 해산 또한 제주에서 합니다. 5월이 한창 성수기라 단체보다 개인의 항공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제주 섬학교 가는 길에는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추천사를 쓴 강제윤 교장선생님의 제주
여행기 <올레, 사랑을 만나다>(예담, 2010년)를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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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화산 폭발로 바다에서 솟아났다는 비양도 ⓒ제주시 |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5월 답사지인 제주 섬 속의 작은 섬들에 대해서 들어봅니다.[청보리섬 가파도]이 나라에서 가장 낮은 섬, 머물기 위한 길가파도는 바다와 거의 수평입니다. 섬 전체에 산이나 언덕이 없습니다. 가파도는 한국의 유인도 중에서 가장 낮은 섬입니다. 섬의 최고점이 20.5m에 불과합니다. 가장 낮은 섬답게 가파도에는 높은 건물이 없습니다. 2층이 최고층이지요. 제주도에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한라산과 가장 낮은 섬 가파도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서면 가장 낮은 곳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낮은 섬 가파도는 느리게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할 정도로 작습니다. 그러므로 가파도 길은 걷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머물기 위한 길입니다. 가파도에는 보리밭길을 따라
올레길이 나 있습니다. 올레 10-1코스입니다. 예전 가파도는 평일 하루 평균 여행객이 10여 명도 안됐었는데 올레길이 생기고 난 뒤 지금은 하루 1000명 이상의 여행객이 다녀가는 명소가 됐습니다.
성게 향 가득한 포구언뜻 보면 가파도는 물에 잠길 듯이 위태롭지만 사람살이 내력은 신석기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제주도내에서 발견된 180여 기의
고인돌 중 135기가 가파도에 있습니다. 가파도 사람들은 고인돌을 '왕돌'이라 부릅니다. 가파도의 왕돌은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이지요. 판석을 세우지 않고 지하에 묘실을 만든 다음 작은 굄돌을 놓고 그 위에 큰 덮개돌을 올려놓았습니다. 왕돌의 나라. 이 손바닥만큼 작은 섬도 그 옛날부터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어 살았던 것일까요.
가파도는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항에서 서남쪽으로 5.5km 거리에 있습니다. 모슬포와
마라도의 중간 지점. 오늘 가파도는 성게 향으로 가득합니다. 해녀들은
잠수복도 벗지 않은 채 선창가 건물 그늘에 앉아 성게 작업 중입니다. 해녀들은 집 마당에서도 성게 알을 깝니다. 여객선이 닿는 상동 마을을 지나 하동으로 가는 길 주변 들판은 온통 보리밭입니다. 17만 평의 보리밭이 겨울부터 초여름까지 가파도의 들판을 푸르고 누렇게 물들입니다. 이런 보리밭을 섬에서 만나는 것은 어디서도 누리기 힘든 행운이지요. 바다 건너 송악산과 산방산 너머로 구름에 쌓였던 한라산이 흰 이마를 드러냅니다.
하동 마을 초입의 낡은 집 한 채. 이 집에서도 할머니 해녀가 성게 까는 작업 중입니다. 할머니는 손칼로 성게를 쪼갠 뒤 작은
숟가락으로 성게 알을 긁어냅니다. 고단하고 지루한 작업.
"할머니, 혼자 사세요."
"혼자 살멍 고생고생하고 살았수다."
"연세가 많아 보이세요. 할머니."
"팔십이 넘었수다. 팔십 둘 난 할마니가 이거 아니면 먹을 것도 못하고, 왕래도 못하고, 이거 해야 죽을 때까장은 먹고 살거 해야."
팔십 두 살, 할머니가 매일 매일 물질을 나갑니다. 오전에 잡아온 성게를 붙들고 휴식도 없이 오후 내내 씨름합니다. 아침에 먹은 밥이 성게 가시처럼 목에 걸립니다.
"자식들은 제주 사나요?"
"육짓 할망들은 한 오십만 되도 자식드렁 언처 산다는디. 제주 할망들은 그게 아니라. 이녘대로 활동해야 살지렁. 자식들은 한 삼 명 되신디 다 모실포가 살아. 인제 나 혼자 살아."
할머니는 육지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만 뭍의 농어촌 노인들도 할머니처럼 죽을 때까지 밭일이나 갯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도시의 노인들이라고 다를까요. 그래도 모질기로 말하면 제주 섬보다 더한 곳이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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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파도 해안길은 한라산과 산방산, 송악산 등 제주의 명산과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강제윤 |
60년을 물질했어도 여전히 무서운 바다"할머니 물질해서 하루에 얼마나 버세요."
"하루 만 원도 벌고 이만 원도 벌언."
"오다가 보니까 다들 성게만 잡으시나 봐요."
"가파도는 뭐가 나지를 안혀. 옛날엔 소라도 만니 나고 전복도 만니 나고 그랜. 이제 그런건 다 없어져 부런. 오염된. 오염된. 전복 같은 건 없어. 소라 전복 같은 건 가끔, 아주 가끔 나와. 오염 되부난 없어. 바당에."
할머니는 바다가 오염이 되서 전복이나 소라가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오염 때문만이겠습니까. 소라나 전복의 새끼까지 잡아들인 남획의 책임도 클 것입니다. 가파도 근해에서도 전복은 씨가 말랐고 소라는 먼 바다에 나가야 작은 것들이 조금씩 잡힌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어디서 시집 오셨어요?"
"모실포서 태어난 이제까지 완.
하르방 찾안. 이젠 하르방 가불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보고 싶으세요?"
"보고 싶으멍 어쩌. 고향 찾어 가불고. 그 고향이 존디지."
할머니는 노구를 이끌고 물질도 하고 보리농사도 짓고 콩 농사도 짓습니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노인들에게 노년의 노동이 행복일 리가 없습니다.
"물질은 처녀 때부터 하셨어요."
"여기 와서 물질은 배완. 이거라도 해야 먹고 살고 하정. 큰 물질은 못하고. 큰 물질 해야 소라도 잡고 전복도 들고."
먼 바다에 나가야 되는 큰 물질을 할머니는 젊어서도 못 하셨다 합니다.
"에고 무서워서 못핸."
그 무섭기만 한 물 속에서 할머니는 60년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바다가 무섭지만 바다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늙은 해녀, 허망한 팔자타령이 구슬픕니다.
"물도 나무도 귀한 섬에서
점심도 못 먹고 물질을 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이
서방님 용돈에 다 들어간다.어떤 년은 팔자가 좋아
분단장 하고 살아가는데
이 내 팔자 허망하여
물질하면서 살아간다."(제주 민요 <잠수노래>)
섬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오랜 세월 무인도였던 가파도에 다시 사람살이가 시작된 것은 조선 영조 때 제주목사가 조정에 진상할 목적으로 소 50마리를 방목하면서부터입니다. 과거에 섬은 왜구나 해적들의 침탈로부터 해상방위 등의 목적으로 자주 공도(空島)정책이 실시됐습니다. 터전을 잡을 만하면 섬사람들은 섬 밖으로 쫓겨나기 일쑤였지요. 외딴 섬이거나 작은 섬들일수록 섬의 역사는 자주 단절의 역사입니다.
섬사람들은 섬에서 강제로 쫓겨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섬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도록 강제되기도 했습니다. 천민들이 이주의 자유가 없었던 것처럼 섬 주민들 역시 거주 이전의 자유마저 빼앗기고 살기도 했습니다. 육지에서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비하하는 태도가 근래까지 이어져 온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제주도에는 1629년부터 1830년까지 출륙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섬사람들은 공납의 괴로움과 관리들의 수탈을 피해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지요. 출륙 금지령은 제주 섬사람들 전체를 죄인으로 감옥에 가둔 악법이었습니다.
속도를 다스리는 가파도의 길가파도에는 하동과 상동 두개의 자연부락이 있고 일주 도로와 마을 중심을 가르는 두 개의 큰 길이 있습니다. 그 길들로
경운기가 다니고 트럭 몇 대가 드물게 다닙니다. 화물이나 어구를 운반하는 자동차들. 이 작은 섬에서는 자동차가 결코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과 자동차의 충돌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늘 위험한 물건은 아닙니다. 자동차가 속도를 다스리지 못하고 속도에 지배될 때 자동차는 흉기가 됩니다. 가파도에서는 가속이 붙기도 전에 길이 끝나고 맙니다. 과속할 수 없는 자동차는 전적으로 섬의 지배 하에서 움직입니다. 섬의 길은 시작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길은 섬 안의 어느 곳으로도 열려 있으나 섬 밖의 어느 곳으로도 닫혀 있습니다.
상동포구 선착장 부근에 패총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고인돌과 함께 가파도에 살았던 선사인들의 유적입니다. 시간은 사람이 먹고 남긴 쓸모없는 조개껍질들, 쓰레기마저 귀중한 유물로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시간은 삶을 지배하는 유일신이고 형체를 드러내는 유일한 신입니다. 아무리 하찮다고 여겨지는 삶도 시간의 주재 하에서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삶의 어느 사소한 것 하나도 돌이켜 보면 소중하지 않은 것이란 없습니다. 가파도 북쪽 해안 길은 이승의 길이 아닙니다. 삶의 이면 도로는 묘지들로 가득합니다. 묘지의 주인들은 끝내 평생 자맥질하던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바다 곁에 누웠습니다.
"너른 바당 앞을 재언 혼질 두질 들어 가난 저승길이 왓닥 갓닥 이어싸나 이여싸나."(제주 민요 <이어도>)
이어도, 그들은 마침내 저승길을 지나
유토피아에 도착한 것일까요. 해변의 묘지 끝자락쯤에 가파도의 할망당이 있습니다. 할망당에는 더 이상 소망을 비는 기도의 자취가 없습니다. 당 할망의 조력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섬사람들의 삶은 안전해진 것일까요. 해안선 길이 4.2km. 타원형의 섬을 한
바퀴 돌아오니 다시 상동입니다. 해녀들은 여전히 성게 알을 까고 있습니다. 성게 알은 1kg에 6만원. 젊은 해녀라도 하루 1킬로 작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노동에 비해 대가는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도시 소비자들에게 성게 알은 쉽게 맛 볼 수 없는 값비싼 음식입니다. 여기서도 해녀 노동의 이익을 가져가는 것은 중간 상인들입니다. 성게 알은 어촌계로 모아져 내일 아침이면 상인들에게 보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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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파도 돌담. 돌담은 바람의 방어막이 아니다, 바람의 통로다. ⓒ섬학교 |
돌담, 바람의 통로가파도 또한 여느 작은 섬들처럼 물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지하수와
해수담수화시설을 통해 공급됩니다. 2004년 10월부터 2005년 12월 사이에 총 예산 10억 원이 투입되어 해수담수화 시설이 만들어졌습니다. 담수화 시설은 하루 150톤의 생산 능력이 있습니다. 섬에서 오랜 세월 쏟아지던 용천수와 우물이 마르게 된 것은 인구의 증가 때문만이 아닙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었으나 물은 점점 부족해졌습니다. 섬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육지를 닮아가면서 물 낭비적인 삶으로 변했기 때문이지요.
비바람일까요. 마라도 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옵니다. 돌이켜 보면 나그네는 늘 바람과 맞서기만 했습니다. 바람을 타는 것과 바람에 맞서는 것 어느 쪽이 진리일까요. 가파도 하동포구 바다와 정면으로 마주선 집들의 돌담은 튼튼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허술하기 그지없습니다. 돌담은 구멍까지 뚫려 있습니다. 어떻게 저 혼자 있기도 위태로워 보이는 돌담이 거친 해풍을 막아내며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저 숭숭 뚫린 구멍 덕에 돌담은 오랜 세월 바람을 막아낸 것은 아닐까요. 돌담은 저 구멍으로 바람을 분산 통과시키며 바람으로부터 섬의 안전을 지켜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담은 바람의 방어막이 아니라 바람의 통로입니다. 섬사람들은 바람을 거스르고는 살 수 없어 바람이 지나갈 샛길 을 만들어 주고 바람과 함께 살아갑니다.
[화산섬 비양도]서산이 바다 한가운데서 솟아오르니제주특별자치도에는 제주 본섬을 제외하고 모두 8개의 유인도가 있습니다. 가파도, 마라도, 우도, 비양도, 상추자도, 하추자도, 횡간도, 추포도가 아직 사람이 사는 섬들입니다. 추자군도의 섬들은 해남 반도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마지막 빙하기 때 물속에 잠기면서 남은 땅입니다. 우도나 비양도, 마라도와 가파도 등의 섬들은 화산섬입니다. 그래서 흙빛이 다르지요. 제주시 한림항에서 비양도행 도항선을 탑니다. 한림에서 5km, 협재에서는 1.5km에 불과한 거리지만 여객선은 하루 세 차례뿐입니다. 섬과 육지. 작은 섬과 큰 섬 사이의 소통은 물리적 거리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왕하는 사람의 숫자에 달려 있습니다. 비양도는 섬 속의 섬, 가까운 낙도입니다.
바다는 하늘의 거울입니다. 제주에서도 푸르기로 소문난 비양도 앞 바다가 온통 청보석 물빛입니다. 비양도는 해안선 둘레 3.5km의 타원형 섬입니다. 주민은 100여 명 남짓. 섬에는 일주 도로가 나 있습니다. 비양도는 고려 시대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제주목 고적'에는 "고려 목종 10년(1007년), 서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오르니 태학박사 전공지(田拱之)를 보내 살피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서산이 정확히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비양도로 보는 견해가 우세한 편입니다.
그래서 지난 2002년에는 비양도 탄생 천년맞이 축제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곳이 됐건 11세기 초 고려 목종 재위 기간에 화산 활동으로 제주 바다에서 섬 하나가 생겨난 것만은 사실인 듯 보입니다. 중국에서 한 오름이 날아와 비양도가 되었다는 전설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서산이 비양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지요.
아무튼 화산 활동의 원리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바다에서 섬이 솟아오른 사건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바다에서 산이 솟아나고 지옥의 유황처럼 끓는 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용의 승천이나 봉황의 출현 따위의 전설도 더 이상 전설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바다 속에서 땅도 솟아오르는데 어찌 용왕이 조화를 부려 비구름을 몰고 오고 풍랑을 일으킨다는 것 따위 소소한 일을 믿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오백 절오백' 이라는 말이 있듯이 제주에 유독 '할망당'을 비롯한 신당과 토속 신앙이 발달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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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양도 해안 용암이 굳어진 기암괴석은 그대로 조각품이다. ⓒ섬학교 |
제주서 아들을 낳으면 "이건 내 자식이 아니고 고기밥이야!"비양도에는 19세기 말(고종 13년)에 와서야 비로소 사람이 처음 입주해 살기 시작했다고 공식 기록이 남아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많은 섬들처럼 그보다 훨씬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을 것입니다. 이미 고려시대 말에 해상 방어를 위해 망수(望守)를 배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미 그 무렵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일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해변을 따라 화산 활동으로 흘러나온 용암이 굳어져 생긴 돌들, 현무암 해변이 이어집니다. 염습지인 펄랑 못을 지나 10여 분쯤 가니 애기업개돌(負兒石)이 물가에 서 있습니다. 아이를 업고 서 있는 듯한 바위의 형상에서 바위에 지성을 드리면 아이를 낳게 해준다는 전설이 생겨났습니다. 육지에서는 보통 아들 낳게 해준다는 바위나 불상들이 많은데 여기서는 그냥 아이입니다.
뭍의 사람들은 아들을 못 낳아서 안달복달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섬의 돌은 아들이 아니라 그저 아이를 낳게 해준다는 바위일까요. 과거 제주와 육지 사람들의 자식에 대한 열망의 차이가 다른 까닭이 아닐까요. 옛날 제주 사람들은 아들을 반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최부(崔府, 1370~1452)가 쓴 <표해록>에는 제주에서 육지로 나가다가 표류 되었을 때 제주도 사람과 나눈 대화가 나옵니다.
"제주 사람은 앞서 가다 죽지 않으면 반드시 뒤에 가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제주도에는 남자 무덤은 매우 드물고 여염에는 여자가 남자의 세 곱은 됩니다. 다들 딸을 낳으면 반드시 '아, 내게 효도할 애로군!' 하고, 아들을 낳으면 '이건 내 자식이 아니고 고기밥이야!' 합니다. 우리 죽음이야 하루살이 같은 것이오니 비록 평화로운 날일지라도 어찌 제집에서 죽기를 바랄 수 있으리까." (최부 <표해록>, 보리출판사)
제주도 사람들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완도의 덕우도에 갔을 때 섬의 묘지를 보며 풀지 못했던 의문의 한 가닥이 풀리는 듯합니다. 그때 나는 수백 년을 사람들이 살다간 섬에 어찌 이렇게 묘가 적은 것일까, 궁금했었습니다. 섬사람들은 대부분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었지요. 바다에서 죽어 고기밥이 됐으니 섬 땅에 묘가 많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합니다. 남자들뿐이었겠습니까. 많은 여인들 또한 어로와 잠수 중에 죽음을 당하고 시신은 찾을 길 없이 고기밥이 되고 말았을 테지요.
섬사람들은 바다 생물들에 대한 약탈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바다 생물들이 일방적으로 먹고 먹히기만 하는 수탈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밥이 되어 주는 상생의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전 섬들의 일반적인 장례 풍습은 매장도, 풍장도 아니고 수장이 아니었을까요. 관도 없고 상여도 없이 물에서 나와 물로 돌아간 수생 생물들의 운명적 모천회귀.
그뿐이겠습니까. 섬사람들은 자주 난파당하고 표류한 뒤에도 쉽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최부의 <표해록>에 "우리 제주도는 아득히 바다 가운데 떨어져 있어 수로로 구백여 리나 되고 또 파도가 어느 바다보다 흉포하기 때문에 공물 실은 배와 장삿배가 끊임없이 표류하고 침몰하는 것이 열에 대여섯은 됩니다."라고 한 제주 사람의 탄식은 결코 제주 섬사람만의 한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이나 삶과 죽음의 양식에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물고기 밥을 면하고 중국이나, 일본, 유구국 등의 해안에 표류했더라도 살아 돌아오는 경우는 열에 한둘도 안 됐습니다. 해적들에게 사로잡혀 노예로 팔려가거나, 최부 일행이 그랬던 것처럼 때때로 공적에 눈이 먼 그 나라 관군들에게 왜구나 해적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섬사람들의 운명은 섬을 떠나 바다로 나온 순간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섬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뼛속까지 숙명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된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운명의 거친 파도 때문이었겠지요.
시간은 늘 나의 편이다느릿느릿 걸으며 한 바퀴 돌아도 비양도는 한 시간 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언덕 하나 없이 평탄한 길, 섬에서도 이런 걷기의 천국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섬을 걷는 내내 차를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걷기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은 비양도가 뭍에서 온 길손들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선착장 부근에서 보말(고동)죽 한 그릇을 점심으로 먹고 비양봉 꼭대기의 등대까지 느리게 다녀온 뒤에도 배시간이 남습니다. 이번에는 왼쪽 길로 섬을 한 바퀴 더 걷습니다. 그 사이 물이 빠졌습니다. 화산석의 해변은 온통 먹빛입니다. 잠수들이 미역을 따고 있습니다. 걷기에만 집중하니 어느새 한 바퀴를 다 돌았습니다. 바닷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습지를 이룬 펄랑 못,
산책로를 돌아 나와 골목길에서 메모를 하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뭐라고 말을 걸어옵니다. 선뜻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뭐라고요 아주머니."
"수돗세 받으러 나왔냐구요."
아주머니가 이번에는 제주말이 아니라 서울말로 되묻습니다. 이 섬도
수돗물을 먹는 걸까요. 용암이 굳어져 생긴 섬이라 샘이 귀할 것입니다. 수첩을 들고 기웃거리는 내 모양새가 수도 검침원처럼 보였던가 봅니다.
"아주머니 여기도 수돗물을 먹는가요."
"여기 아주 살기 좋아요. 한림에서 이렇게 큰 빠이쁘로 물이 건너오고, 발전소가 있어 전기 걱정도 없고."
섬에 먹을 물이 귀하니 제주 본섬에서 해저 관로로 물을 날라다 먹습니다. 섬의 가장 큰 고통이던 물 걱정을 던 기쁨이 몸으로 전해져 옵니다. 문득
남해안 어떤 섬에 갔을 때 만났던 할머니 말씀이 떠오릅니다. 할머니는 물 한 동이 얻기 위해 반나절을 걸어갔다 와야 하는, 물이 귀한 섬이 고향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 섬으로 시집을 오니 집안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드셨다더군요. "천국이 있다더니 여기가 천국이구나!" 천국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마실 물 한 그릇 속에도 천국이 있습니다. 비양도 사람들에게도 마실 물 걱정 없는 것이 천국입니다. 우리의 천국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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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레10코스. 봄철 제주는 어느 길이나 꽃밭이다 |
첫댓글 강제윤 시인님께서 내년 봄으로 계획을 옮기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