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6일 목요일
<니체와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를 읽었다.내가 좋아하는 철학자이다. 철학대학원에서도 니체와 장자를 비교하면서 공부했다. 독서도 이 둘과 관련된 책들이 많았다. 양승권 작가도 알게 모르게 이 둘의 공통점을 알아내고 근본적인 합일점을 찾으려했나 보다.
철학은 어떻게 나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책 표제는 내 손을 반긴다.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가 말했다. 장자는 '참된 깨달음이 있고 난 뒤에야 이 세상이 큰 꿈임을 안다' 고 했다. 이 둘이 공유하는 철학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 나에게 좋으면 선함이고, 나에게 나쁘면 악함이다. ㅡ니체와 장자의 프로필을 간략히 소개해 보도록 하자. 니체는 유럽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던 시기를 살았다. 이 시기에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 혁명,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의 갈등, 19세기 후반의 세기말적인 불안 등의 그림자는 니체의 철학에 깊게 드리워져 있다. 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전국시대다. '전쟁' 이라는 뜻인 '전' 이 맨 앞에 붙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전국시대는 밥 먹듯 전쟁을 일삼던 시대였으며, 백성의 고통이 극에 달하던 혼란한 시대였다. 니체와 장자는 자기가 살던 시대의 뒷골목, 눈송이처럼 확대되는 여러 모순에 대한 아픔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면서, 사회 속에 숨겨져 있는 여러 치부를 벗겨내고자 했다.
* 1889년에 이탈리아 토리노 광장에서 말을 채찍질 하는 마부를 바라보던 니체는 그 말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미쳐버린다. 이후 10년여 동안 투병하다가 1900년에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니체는 서양에서 현대 철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근대철학을 뛰어넘는 탈근대철학의 원조로 평가받으며, 1960년 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문예운동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는 쟁쟁한 현대의 학자들인 프로이트, 칼 융, 하이데거,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장자에서 '자'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즉, 장자는 장씨 성을 지닌 선생님이라는 의미다. 장자는 이름이 '주' 이고 자는 '자휴' 이며 송나라 몽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장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주요 철학자를 동서양에서 한 사람씩 제시한다면 맹자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들 수 있다. 장자의 프로필에 대해서는 신빙성 있는 자료가 거의 없지만, 제가백가 가운데 명가 철학자로 유명한 '혜시' 와 친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장자는 경제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 <사마천>의 <사기> 에서는 장자가 송나라 몽 땅에서 칠원(옻나무를 재배하는 곳) 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장자는 자신이 살던 당대에 명성을 떨친 것도 아니고, 높은 벼슬을 한 적도 없다. 그는 대부분의 재자백가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현실 정치로부터 물러나 자유인으로 살고자 했다. 장자는 통치를 받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철학 속에 날카롭게 반영했다. 그리고 문명의 발전이 자연 그대로의 인간 본성에 상처를 입혔다고 보았으며, 권력에 봉사하는 지식과 전통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문제 삼았다. 또 홀로 유유자적하는 삶을 찬양하면서,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철학을 펼쳤다.
* 이미 말했듯이, 니체 철학과 장자 철학이 가장 깊이 공유하고 있는 사유는 바로 니힐리즘이다. 니힐리즘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무' 라는 뜻의 '니힐' 로부터 나왔다. 니체의 '니힐' 과 장자의 '무' 는 서로 통한다. 니힐리즘은 모든 독단적 사고를 해체하려 한다. 니체와 장자는 일체의 권위주의와 우상 숭배를 비판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들이 훨씬 더 많다. 이것이 이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사악한 시선' 이자, 나의 '사악한 귀' 다. 나는 여기서 망치를 들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식의 돌지구는 장자의 말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니체에 의하면 한마디로 '신은 죽었다.' 여기서 '죽은 신' 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만이 아니라, 모든 절대 이념을 가리킨다.
또, 니체가 볼 때 선과 악이라고 하는 도덕적 가치판단도 결코 '사실' 이 아닌 개개인 저마다의 '해석' 에 불과하다. 니체의 도덕관에서 선과 악이란 힘의 증대 및 감소와 관련이 있다. 힘이 충만하여 향상되는 것을 느끼면 그것이 곧 선함이고 좋음이다. 또 힘이 빠져나가 퇴보하는 것을 느끼면 그것이 곧 약함이고 나쁨이다. 무엇이 선함이고 무엇이 악함인지는 내가 정한다. 나에게 좋으면 선함이고, 나에게 나쁘면 악함이다. 장자도 세상에 통용되는 선함이란 가치에 대해 의문부호를 던진다. 장자에게도, 도덕적 규범이란 생의 의지를 복돋아 주는 방향으로 기능해야만 한다. 장자가 유교를 그렇게 비판한 이유도 '인의예지' 와 같은 유교의 도덕 가치가 인간의 자유스러운 욕망을 억압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519년 동안 유교를 절대 가치로 숭상했던 조선 시대에서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평생을 수정해야 했다. 장자의 시각으로 볼 때 이런 도덕률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또 장자는 약자의 처지를 대변하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갑절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장자가 보기에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자들은, 자기의 부도덕한 행위를 감추기 위해 도덕을 이해한다, 도덕은 이 힘 있는 자들의 잘못된 행위를 합리화시켜주는 도구로 전락했다. 장자로 볼 때, 도덕과 지식, 그리고 법이 살아있는 권력에 봉사하는 사례는 현재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장자에게도 선과 악의 문제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사적인 판단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 본래부터 정해져 있는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니체의 주요 철학 개념에는 동양철학의 개념이 짙게 녹아들어 있다. 비록 니체가 동양철학으부터 받은 영향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말한 적은 없지만, 우리는 그의 단편적인 언급 속에서 도먕철학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니체의 동양철학에 관한 관심은 고등학교 때부터 싹튼 것이었다. 특히 인도의 '업' 이나 '윤회 사상" 은 그의 영원회귀 개념은 생성에 대한 긍정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만물은 없다. 장자 또한 모든 현상이 둥근 고리와 같이 생장과 소멸을 영원히 반복한다고 말했다. 장자에 말하면 '기' 의 이합집산에 의해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장자에게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 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장자가 볼 때 우주에서는 그냥 소비되어 사라지는 것은 없으며 단지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가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죽으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변모해 우주 어딘엔가 남아 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비슷한 주장을 한 셈이다. 장자에게 삶은 죽음의 시작이고 죽음은 삶의 시작이다. 이러한 사유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유와 일맥상통한다. '삶은 손으로 비둘기를 잡는 것' 과 같다는 말이 있다. 너무 강하게 잡으면 비둘기는 죽을 것이고 너무 느슨하게 잡으면 비둘기는 날아가 버릴 것이다. 요컨대 니체와 장자의 말은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끌어안아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추어 새롭게 세팅해낼 수 있는 능력을 선사한다.
* 놀이 속에서 찾아낸 진정 자유로운 삶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의 삶을 동물에 비유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성실하게 사막에서 짐을 지고 나아가는 낙타와 같은 삶이 아닐까? 전통사회와 비교하면 충분히 자유로운 환경임에도. 전통사회에는 없었던 새로운 예속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부자유한 것이다. 과연 진정한 자유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민주주의 사회라면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시켜 일반인들에게 강요하는 따위의 일은 있을 수 없다. 중세시대에서 기독교와 같은 종교 가치나 조선시대에서 성리학과 같이 말하다. 오늘날은 수많은 가치가 난립하는 시대다. 가치의 아노미 상태에서 개개인은 정체성의 훼손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또, 수많은 가치가 난립하고 있으나 우리의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주는 참가치를 찾을 수 없어 괴로워하기도 한다. 참가치를 찾을 수 없어 아쉬움에 빠지면 빠질수록 불안감은 그만큼 더 심해지기에, 참가치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점점 더 심해진다.
*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차라리 참가치를 찾지 않는 태도를 지녀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가치의 다면성은 동일성의 상실이 아니라 이리저리 맛볼 음식이 많은 것을 뜻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오히려 기쁨의 가치가 고갈되지 않게 된다. 장자와 니체의 철학 사유는 기댈 것이 없다는 것에 실망하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얽매임이 없는 자유의 지평으로 옮겨놓고자 했다. 그리고 가치의 다면성을 도리어 놀잇감의 풍부함으로 여겼다.
* 아주 먼 옛날 인간은 수많은 포식자로부터 쫒기는 '사냥감' 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교한 도구를 만들고 공통된 신화를 만들어 강력한 집단을 이루게 되면서 어떤 동물보다도 뛰어난 '사냥꾼' 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문명화를 계속 일구어 나가며 근대 시기 이후가 되자 모든 자연 대상을 인간의 발아래 두게 되었다. 하지만 한번 더 도약해 이제는 '놀잇꾼' 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이렇게 '사냥감' 에서 '사냥꾼' 으로진화했고. 마침내 "놀잇꾼' 으로 올라설 수 있는 시대를 맞이했다. 니체는 저편의 세계가 아닌 생생하게 약동하는 지금의 삶과 운명을 사랑하면서 선과 악을 넘어가 위대한 놀이꾼이 되고 했다. 니체에게 놀이는 우주의 리듬이자, 모든 사물이 행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계기다. 장자의 놀이(유) 는 세속에서 벗어난 정신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장자는 자신의 마음이 일구어낸 절대 자유의 공간에서 유희하고자 했다. 이것은 예술가가 자신이 만든 작품 세계에 빠져든 것과 비슷하다.
우리 모두, 장자와 니체의 철학에서 삶을 유희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보자.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후회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않는 현실이므로 공허한 것일 따름이다. 과거나 미래를 생각함이 없이 생생한 지금, 이 순간 삶에 머물며 모든 대상을 놀이의 대상으로 삼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가 되어보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