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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열왕기상17장8~24절
제목 : 채우시고 살리시는 하나님
엘리야는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말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그 시냇물을 마시고 아침 저녁으로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습니다.
그러던 중에 시내가 마르니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돈의 사르밧으로 가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말씀을 따라 시돈의 사르밧으로 간 엘리야를 통해
과부의 집에 넉넉한 양식을 주시고, 과부의 죽은 아들도 살려 주십니다.
1. 사르밧 과부의 집에 양식을 채우시다(8~16절)
1)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합니다(8절)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의 식수(食水)였던 그릿 시냇물(3절)이 말라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엘리야를 위하여 새로운 공궤지(供饋地)를 일러주십니다.
그곳은 곧 사르밧(Zarephath)으로(9절) 엘리야는 가뭄이 끌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2)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게 하고 과부에게 명령하여 그에게 음식을 주게 하였습니다(9절).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사르밧. -'사르밧'(차르파트)은 '염색하다'는 뜻에서 온 명칭입니다.
따라서 사르밧은 두로와 시돈 등과 마찬가지로 베니게(Phoenicia)의 명물인 염료 생산지였음을 알 수있습니다.
이 성읍은 헬라어로는 '사렙다'로 불리우는데(눅 4:26) 오늘날의 수라펜드(Surafend)로서 두로와 시돈 가운데쯤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이세벧의 부친 시돈 왕 엣바알이 다스리는 지역입니다(16:31). 결국 이세벧이 여호와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있을 때,
정작 엘리야는 이세벧의 고향 깊숙이 숨어버린 셈입니다.
이 점은 마치 바로(Pharaoh)의 궁전에서 온전히 양육 받은 모세를 방불하게 하는 것으로서 대적자의 심장부가 도리어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피난처와 은신처가 된 기막힌 역설입니다(출 2:10).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은신처가 이방인, 그것도 무력한 과부에게서 찾아졌다는 것은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크나큰 수치입니다.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만큼 배교의 늪에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증거해 줍니다.
한편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과부'(알마나)는 남편이 없으므로 인해 사회, 경제적 지위가 형편없는 존재였습니다(신 24:17).
*신24: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그러나 하나님은 그처럼 약한 자를 들어 존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한 특징인바(고전 1:26-31),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할 것입니다(Matthew Henry).
3) 엘리야가 나뭇가지를 줍는 사르밧 과부를 만나 물을 조금 가져다가 마시게 하라고 합니다(10절)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 이는 거리에 흩어져 있는 모든 나뭇가지를 주워 땔감을 삼을 밖에 없는 과부의 극빈을 나타냅니다.
만일 과부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종을 부려 땔감을 해오게 하였거나 아니면 시장에서 땔감을 구입하였을 것입니다.
물을...나로 마시게 하라. - 아합 당시의 가뭄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이 귀한 상황에서 낮선 나그네의 물 요구는 여간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근동에서는 식수 대접이 거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겨졌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르밧 과부가 넘어야 할 첫 번째 시험(test)이었습니다.
한편 엘리야가 물을 달라는 요구를 통해 자신을 대접할 과부를 식별하는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찾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창 24:17; 요 4:7).
4) 엘리야가 그를 불러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합니다(11절)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 앞서의 부탁을 거절치 않자 엘리야는 과부에게 이제 좀더 당돌한 부탁을 합니다.
즉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더욱 식량란 열악한 형편인 과부에게 떡을 요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엘리야의 다소 무리한 부탁은 자신을 공궤할 과부가 누구인지 알아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으니(9절) 사르밧 과부는 이 두번째 시험마저도 통과하여야 했습니다(Bahr).
5) 사르밧 과부는 현재의 상황을 엘리야에게 설명합니다(12절)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당신의 하나님. – 어떤 주석가들은 과부의 이 같은 말에서 그녀가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다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리어 이 말은 정반대의 의미를 내포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그녀가 '나의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하나님'이라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과 전통적으로 교류가 많던 베니게의 한 여인으로서 이 과부는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알고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 신을 호칭한 것 뿐입니다.
사실 이 과부가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시점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엘리야의 말을 청종한 그 순간입니다(14, 15절).
아무튼 정작 선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청종치 않은 반면,
이방인 과부는 선뜻 그 말씀을 받아들인 점이 주목됩니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봉사자가 누군지 분명히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 엘리야의 요청에 과부가 당황한 까닭은 그나마 남은 밀가루는 최후의 만찬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떡 하나를 요구한 엘리야의 한 마디는 그야말로 과부에게 자신의 전부를 요구하는 엄청난 요청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이 과부가 신앙의 표본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처럼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그녀가 순종의 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눅 4:24-26; 21:2).
*눅4:24~26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26]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21: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한편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에 몰두하는 동안 바알 숭배의 본 고장에서 한 과부가 바알신앙을 포기했다는 점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캄캄한 흑암 속에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역사할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사 42:16; 마 4:16; 골 1:13).
*사42:16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골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6) 엘리야는 과부에게 먼저 자기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오라합니다(13절).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하지 말고. - '두려워'('야레')는 '무서워하다' 외에도 '존경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 그것은 지혜의 토대로서 하나님께 대한 외경심이라는 이상적(理想的)인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단순한 정서적 반응으로서의 두려움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전환되는 것이 곧 믿음으로 이행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본절에서 엘리야가 지적하는 과부의 두려움은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서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할 어떤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정서의 극복이란 이성이나 논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이 높은 정서의 대체로서 완결됩니다.
즉 과부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대체될 때
비로소 온전히 해소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 장차에 대한 두려움에서 하나님에의 두려움으로 이행, 즉 믿음으로 가는 과정은 논리적인 순차성을 따라 자연히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 과정에는 의지적 선택에 의한 결단의 단계가 개재됩니다.
엘리야의 말 속에서 그러한 결단의 촉구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즉 떡을 만들되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 오고 차후 자신과 아들을 위해 만들라는 말입니다.
최후의 양식, 이것으로 마지막이라는 생각!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치라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를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두는 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7) 지면에 비가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14절).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 이처럼 엘리야가 '너의 하나님'이 아닌 객관 서술형의 '이스라엘 하나님'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사르밧 과부가 이방인이며 적어도 아직까지는 개종한 자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시사해 줍니다.
8)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15,16절)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 - 12, 13절에의하면 사르밧 과부에게는 가족이라곤 아들 하나 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본절에서 '식구'(바이트), 즉 권속(眷屬)이란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들은 사르밧 과부에게 임한 축복의 소식을 듣고 온 그녀의 친척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Lange, Pulpit Commentary).
'여러 날'(야밈)은 며칠 정도가 아닌, 상당히 오랜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14절에 따르면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은 시기는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적어도 2년 이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가뭄은 3년 6개월간이나 지속되었으니(약 5:17) 그 동안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머문 기간(2-7절)을 빼더라도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2년 이상 공궤(供饋) 받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상과 같이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 엘리야를 영접함로써 선지자의 보상을 받음은 물론(마 10:41),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가족에게까지 구원의 은총을 끼쳤습니다.
*마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
혹자는 본절에 묘사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익한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본절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과 말씀을 확실히 이루심에 초점을 두고있는 것이지 현상 자체의 건조한 설명을 요구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본절의 기적은 엘리사가 가난한 과부에게 기름을 가득 채워주었던 기적(왕하 4:1-7)과 예수님께서 떡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연상하게 합니다(막 6:41-43).
2.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시다(17~24절)
1) 이 일 후에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숨이 끊어졌습니다(17절).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주인'(바알라)는 '여주인'(mistress)란 뜻입니다. 즉, 엘리야가 거처하는 집의 소유주인 여성, 곧 앞서의 과부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냥 과부라 하지 않고 굳이 그 집의 주인인 점을 밝히는 이유는
다음에 잇따르는 상황의 곤경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엘리야가 몸을 의탁한 집주인의 아들이 병들어 죽고, 그 재앙이 엘리야의 기거와 결부되면서 발생하는 위기의 성격(18절)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숨이 끊어진지라. - '숨'(네솨마)은 생명 현상의 대표적인 기능인 호흡
(breath)을 가리킵니다.
'호흡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말은 '혼이 나갔다', 즉 '생명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2) 여인이 엘리야에게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따집니다(18절).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하나님의 사람. – 그 말과 행위에 있어서 진정한 선지자를 일컬을 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13:1 주석 참조.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베푼 이적을 보고서 엘리야가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였음을 확신한 게 분명합니다(15, 16절).
당신이 나로 더블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 과부에게 있어서 독자(獨子)란 대개 유일한 생의 희망인 법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자 과부는 충격을 받고 엘리야와의 관계를 부정합니다. 즉,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내가 당신을 선대(善待)한 결과가 도리어 이것입니까?
내가 당신에게 섭섭하게 대한 일이라도 있었단 말입니까?'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실 그 동안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므로 선지자의 대접을 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과부는 선지자의 보상을 받았던 셈입니다. 15절 주석 참조.
그런데 느닷없이 아들이 죽어버리자 그것은 과부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허무한 것으로 만들 정도의 큰 고통이 되고 만 것입니다.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 이 말에는 재난이나 질병을 자신의 죄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고대인들의 통념적 사고방식이 잘 담겨 있습니다(욥4:7; 요 9:2 등).
즉, 사르밧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 값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옆에 있음으로 해서 과부는 자신의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은, 비록 엘리야조차도 당혹스러워 했지만(19-11절) 도리어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위함'이었습니다(요9:3).
즉,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22-24절)을 통해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보다 밝은 계시를 깨닫게 됨으로써 더욱 성숙된 신앙으로 진일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진리(롬 3:29)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니 이로써 사르밧 과부는 더욱더 진실되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한편 본절의 '생각나게'에 해당하는 원어 '자카르'는 '기억하다', '회상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하나님 앞에 등록하다'는 뜻으로도 풀이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사르밧 과부의 죄가 하나님 앞에 기록된 보고서처럼 정식 등록되어 심판이 즉각 떨어지게끔 되었음을 의미하는 셈입니다(단 7:10).
3) 엘리야가 그의 아들을 안고 다락에 올라가 침상에 누입니다(19절).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 사르밧 과부가 품에 안을 정도인 것으로 보아 당시 그녀의 아들은 퍽 어렸던 것 같습니다(Hammond).
따라서 그처럼 어린 자식의 죽음은 그녀에게 애처로움을 더해 줬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죄 값이라고 밖에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게 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 이스라엘인들의 '다락'(알리야)은 우리네 감각과는 달리 그 집의 가장 좋은 처소입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틴과 같은 뜨거운 기후의 지방에서 지붕 위에 툭 트인 방은 비교적 통풍이 잘되는 쾌적한 곳이기 대문입니다. 대하 33:1-11 강해, '히브리인의 주거 형태' 참조.
그러므로 엘리야가 다락에 기거하고 있다는 것은 사르밧 과부로부터 기꺼운 환대를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사르밧 과부가 큰 불행을 당하였으니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엘리야로서도 난처하고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4) 부르짖어 주께서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의 아들을 죽게 하셨습니까라고 항변합니다(20절).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부르짖어.('카라')는 도움을 호소하여 급히 부르는 절박함과 안타까움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과부 아들의 죽음과 과부의 항변은 엘리야를 적잖이 당황하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는 당시 엘리야 자신도 미처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당혹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간구하는 자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분이심이 드러났습니다(24절).
또 -한글 공동 번역은 이를 '기어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이는 아이의 죽음을 그대로 당신의 최종 결론으로 삼으시겠냐는 하나님께 대한 엘리야의 항변인 것입니다.
5) 엘리야는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해달라고 합니다(21절).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 이 행위가 무얼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손을 얹고 기도할 때의 간절함 및 치유자의 자기 투신의 극단적 확대 형태일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은 아이에게 전달되므로 그 아이가 소생(蘇生)할 것을 염원하는 신앙적 행동입니다(Schmidt).
물론 여기에는 간절한 염원 외에도 의식(ritual)적인 요소가 담겨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세 번 엎드린 것이 그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아이의 소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엘리야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3'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 수'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성경에는 본절과 비슷한 장면이 더 나오는데 곧 엘리사와 바울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왕하 4:34; 행 20:9 이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 이 말은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마치 인간이 혼과 몸으로 구성된 이원론적 존재임을 시사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혼'으로 번역된 '네페쉬'어디까지나 '생명', '목슴'을 의미할 따름입니다. 17절 주석 참조.
그러므로 '혼이 몸에 돌아오다'는 말은 목숨을 되살려 달라는 말일 뿐입니다.
6)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아이의 혼이 돌아오게 합니다(22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 '소리'(콜)에 귀를 기울였다는 말은 곧 기도의 응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절에서 '들으시므로'('솨마아')는 특히 '이해하며 경청하는' 세심한 동작을 의미합니다.
즉 이는 엘리야의 항변하는 듯한 기도 속에 담긴 처지와 곤경, 다급한 마음을 통틀어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경청 자세를 잘 나타내줍니다.
한편 엘리야는 신약에서도 기도의 대표적 인물로 언급됩니다(약 5:17).
그러나 엘리야의 기도의 능력이란 엄밀히 말해 엘리야의 기도들 들으시는 이의 능력입니다.
7) 엘리야가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네 아들이 살아났다고 합니다(23절)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 17절 이하의 사건에서 다락과 방은 이야기의 전개상 다분히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즉 고대 근동 지방에서 다락이란 귀빈 접대의 장소입니다. 19절주석 참조.
그런데 아이의 죽음이 발발했을 때 엘리야는 다락 아닌 방으로 불려와 있습니다(17, 18절).
이는 곧 다락으로 상징되는 환대를 받게 했던 하나님의 선하심이 의심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안고 다시금 다락에 올라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19-21절).
그리고 여기서 지금까지 그가 다락에 머무를 수 있었던, 또 앞으로 계속 있게 할 참된 힘의 소재가 분명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사 죽은 아이가 소생하였기 때문입니다(22절).
따라서 이제 엘리야가 두 번째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갈 때는 이전의 당혹스럽고 비루한 처지가 아닙니다.
대신 엘리야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를 안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외면상 똑같은 동작이긴 하나 거기에 실린 의미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때문에 여기서 모든 의심을 종식 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극적 강조는 더욱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났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하이'는 '산 채로 있다' 또는 '생명을 회복하다'는 듯의 '하야'에서 온 말입니다.
따라서 이는 문맥상 '되살아 났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8) 여인이 엘리야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24절).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이제야'(앗타제)는 '앗타'(now)와 '제'(this)의 결합어입니다.
즉 '이제 이것으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죽은 아이 소생 사건으로 인해 사르밧 과부가 더욱더 확실히 엘리야를 신뢰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 - 원래 구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곧 침묵과 비밀로 자신을 감추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은 자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전달됩니다.
따라서 이때 선지자의 입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궁극성를 지키기 위해
자의적(恣意的) 조작이 아닌 진실만을 말할 것이 요구됩니다.
즉, 이때 그의 입은 곧 하나님의 입과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렘 15:19).
*렘15: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그런데 비단 선지자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해서도 '입'(페)은 일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기관입니다(시 141:3).
*시141:3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그러므로 지금까지 엘리야가 겪은 사건은 엘리야의 입과 하나님의 입 사이의 일치성이 일시적이나마 의심받은 위기의 사건이요(17-21절) 동시에 잠시 후 그 일치의 공고성이 확증됨으로써(22, 23절)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궁극성이 더욱 입증된 승리의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후 이 사건은 그 시대를 향한 엘리야의의 모든 발언에 권위를 부여해 주는 효과를 발휘하였을 것입니다.
진실한 줄 아노라. - '진실한'('에메트')는 그 확실성을 분명히 신뢰할 수 있는 '진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하나님 말씀의 본성을 지적할 때에 자주 사용되었습니다(시 119:142, 151, 160; 단 10:21).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 것임을 시인한 점은 이제 그녀가 보다 확고한 신앙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던 시대에 이처럼 한 이방인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에메트'라 고백한 사건은 예수님께서도 인용하시리 만치 뜻깊은 사건이었습니다(눅 4:24-26).
*사르밧 과부는 순종의 길을 따랐습니다.
모든 면에서 우선 순위를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두어야 합니다.
기도는 반듯이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가뭄 속에 있을 때에 성령님은 우리를 잦아와 주시고 그를 의지할 때 우리의 필요로하는 것을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가뭄으로 그릿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은 ‘즉시’엘리야를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보내십니다(8,9,15,16절).
그리고 오랜 기근에도 주리지 않도록 엘리야가 기거하는 과부의 집에 곡식 가루와 기름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은 “위기에 처할 때 피할 곳과 쉴 곳을 예비하시고, 궁핍할 때 쓸 것을 채우시는”분입니다.
그 손길은 결코 ‘지체되거나 지연되는’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에 있습니다.
그러니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찾기 전에, 주님을 내 삶의 왕으로 모셔야 하지 않을까요?
2) 아이를 살려 달라는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19~24절).
이를 통해 죽은 아이가 살아나고, 하나님을 향한 여인의 원망은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일 때도 생명의 소망을 남겨 두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어도 믿음의 기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기도를 통해 그분의 생명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엘리야는 아들과 나눌 한 끼 양식밖에 없는 과부에게 그 마지막 남은 양식을 가져오라고 요구합니다(10~16절).
야박하고 매정한 요구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엘리야를 공궤할 형편도, 엘리야의 말을 납득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릅니다.
목숨을 건 순종입니다.
이런 시험 속에서도 믿음이 내 머리와 마음을 설득할 수 있을 까요?
말씀을 우위에 두지 않는 한, 이론이나 이해만으로 그 믿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2) 겨우 기근을 피한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의 죽음이라는 뜻하지 않은 비극이 찾아옵니다(17,18,24절).
여인은 자책도 원망도 해보았지만 “슬픔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인생은 얼기설기 짜인 융단처럼, 예기치 않은 은혜로 기뻐할 때도,
예기치 못한 사고로 슬퍼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망의 때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믿음의 더해지는 기회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행복의 그림자와 불행의 후광을 보면서,
참 소망을 오로지 하나님께만 두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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