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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사람의 열 가지 동작 들여다보기
강 돈 묵
이번 《문학미디어》 가을호에는 수필이 열 편 게재되었다. 필진을 보더라도 가히 호화롭다. 문단의 대가에서부터 이제 겨우 문단에 얼굴을 내민 초보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집을 보여 주고 있다. 편집자의 열정적인 노력의 흔적이 물씬 풍긴다. 그 덕인지 작품 또한 읽을거리가 많아 좋았다.
다양한 모습에서도 언제나 갖는 생각은 우리 수필문단의 현주소는 격차가 심하고, 그것을 평준화하기에는 좀 더 시간을 기다려야겠구나 하는 판단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평자의 생각이 오판이길, 또 가치가 있는 수필이 많이 게재되기를 소망해 본다.
수필을 아직도 생활작문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는 데에 평자들의 깊은 우려의 한숨이 있다. 생활의 주변에서 얻은 글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에 앞서 기록하고 만다면 그것은 일기이거나 편지이고 기행문이다. 하지만 문학의 한 장르인 수필은 반드시 문학적 형상화라는 면을 등한시할 수 없다. 이 과정이 충실히 이행될 때에 가치명제로서의 수필은 탄생하게 되고, 그 생명은 온전하여 오래 지속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고급화된 독자들의 시각에서 바로 버림받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그 기준은 현상의 기록이 아닌 작가만의 의미 찾기와 본질에의 접근 시도가 이루어졌는가에서 확연히 갈라진다. 또 글의 전개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집요하게 전개되었는가도 나름 크게 작용한다. 이러한 작가의 작가정신이 없는 글은 수필이라 할 수 없고, 그래서 생명력이 없다.
계간평을 씀에는 게재된 글들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테마를 얻고 그것을 토대로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며 전개하여야 함이 당연하다. 하지만 본 평자는 능력의 부족으로 몇 편의 글에서 매번 다른 명제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밤을 새워 작업한 수필가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는 심정으로 작가마다 다른 시각을 가지고 친근히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런 마음을 하고 나니 열 명의 작가가 열 가지의 몸부림으로 내게 다가온다.
고동주의 <사람다운 사람>
인간을 두 부류로 가르면 당연히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가를 것이요, 세상의 흐르는 모습을 둘로 가르면 긍정적 변화와 부정적 변화로 가를 것이다.
작가 고동주는 그 굴레에 정확히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래도 바람직한 쪽으로 가야 되지 않겠느냐는 지적을 한다. 아내의 생일을 맞아 둘이서 간 영화의 장면이 너무도 폭력적이고 부정적인데 당혹한 작가는 끝까지 영화를 보지 못하고 나와 버린다. 이런 작가의 행동의 기저에는 밝은 사회에 대한 소망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 이 세상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채워져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작가의 선한 모습이 그대로 작품의 도처에 드러나고 있다.
자신만의 안일을 위해 투쟁보다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 지역사회나 나라를 위한 봉사에 앞장서서 이루어낸 보람이야말로 사람답게 사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 주변의 현실은 그런 이상과는 너무도 먼 거리로만 달려가고 있으니 심히 답답한 일이다.
매일같이 ‘사람답기’를 수없이 반복 다짐해도 결코 부족할 것만 같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우리 모두 사람다움으로 성숙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고동주의 <사람다운 사람>에서
‘답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른 말로 바꾸어 본다면 ‘답다(如)’는 ‘같다(如)’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사람 같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러니, 작가 고동주는 이 사회의 밝음을 위해서는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흔들리지 말고 방향을 올바로 잡고 나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영화는 표현하려는 감독의 의도에 따라 밝은 면이 클로즈업되기도 하고, 어두운 면이 강조되기도 한다는 점을 유념하여, 감상할 일이다. 굳이 영화의 한 장면을 세상의 모든 모습으로 인식하여 마음 아파할 일은 아니다.
김동분의 <뜨인 민화 ‘십장생도’를 그리며>
한 마디로 십장생도에 대한 예찬이다. 민화는 신분의 자유로움과 시대적 자유로움이 내재해 있다는 지적이다. 무명의 서민화가가 낮은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도덕적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한 것이다. 어둡고 깜깜했던 조선시대에, 체면과 권위가 중시되던 그 시대에 과감하고 파격적인 민화를 그렸다는 것은 무명화가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 백합꽃 같은 순수함이 스며 있고, 그리움과 사랑이 깃들어 있는 민화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뒤흔드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 민화를 그리면서 그 병을 극복했다는 사람을 보았다. 민화를 통해 삶의 휴식을 얻을 수 있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동분의 <뜨인 민화 ‘십장생도’를 그리며>에서
역시 십장생도에 대한 예찬으로 이 글은 마무리된다. 그 예찬이 기능에까지 도달해 있다.
김민정의 <수석>
예술이 상상에 의해 탄생되어짐을 보여주는 글이다. 수석을 바라보면서 작가는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편다.
선물 받은 수석이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태아도 되고, 젖을 물린 어머니도 되고, 깊이 생각에 잠긴 로댕의 조각품도 된다. 그때마다 작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상상의 세계를 전개한다.
더러는 다른 곳에서 봄직한 성모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스페인 몬세라트 수도원에 있는 검은 성모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수석은 바로 성모상의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작가에게 성모상으로 작용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또 슌스케 강아지로 보이자 바로 상상은 시작한다.
질그릇 위에 금빛모래를 깔고 앉히니 멋진 수석작품으로 살아난다. 작가는 이것을 바라보면서 운보의 정원에 있는 수석을 떠올린다. 풀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원에서 적송분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수석을 끌어올린 작가는 운보의 삶을 상상한다.
화백은 무언의 수석을 바라보며 절절한 고독과 절규를 이겨내며 소신공양으로 붓끝을 놀리며 도반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말하는 그에게 수석은 잃어버린 귀와 입이 되어 그의 생명과 공존하며 수많은 명작을 남길 수 있었으리라. -김민정의 <수석>에서
이 글은 작가의 상상력이 수필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분명 문학은 현상의 기록이 아니라 상상을 통한 본질의 기록이 되어야 한다.
김학의 <낙엽을 바라보며>
단문의 묘미를 한껏 살린 글이다. 문장이 짧다고 하는 것은 담고 있는 의미가 크다는 것. 그 의미의 사냥을 독자에게 떠나게 한다.
낙엽(落葉)은 가으내 이루어진다. 잎자루에 물기는 마르고, 힘이 다한 잎자루에 바람이 부딪히면 잎은 유랑을 떠난다. 수시로 떨어지는 잎. 가으내 떨어지는 잎을 형상화하기 위해 작가는 ‘낙엽이 진다’를 반복하여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그 잎에 새겨진 추억을 건져 올린다.
작가에게 있어서 ‘낙엽’은 바로 젊은 날에 자신을 따르던 ‘향(香)이’이다. 그 낙엽 앞에서 작가는 젊은 날의 ‘사랑’에 발이 멈추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랑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고 언제나 가슴 아린 사랑이다. 그 사랑이 이 가을에 되살아나고 노래로 돌아온다. ‘오텀 리브스’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으로 작가의 귀를 울린다.
낙엽 하나하나가 향이의 스냅사진이 된다. 그러다가는 향이의 얼굴이 되고, 향이의 엽서가 된다. 향이도 지금 낙엽을 보고 있을까. 낙엽을 주워들고 ‘오텀 리브스’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열창하고 있을까. -김 학의 <낙엽을 바라보며>에서
스러져가는 낙엽은 작가에게 있어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언제나 애틋하게 가슴에 남아 작가의 가을을 살찌우고 있다.
박지연의 <세계인의 이웃>
어느 세계든 그 구조를 살펴보면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되어 있다. 지상의 모든 동물들은 힘이 좀 세다 하면 상대를 업신여기고 지배하려든다.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피지배자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여기서 갈등은 초래되고 전쟁은 야기된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상황에 안타까움을 적은 글이다. 그런데 그 관계가 가장 가까이 이웃하고 있는 처지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애석해 한다. 그리고 그러지 말고 정겹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을 적은 글이다. 글의 내용이 작가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제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글이 아니고, 사회적이나 세계적인 문제를 글감으로 가지고 나왔다. 이런 글에서는 새로움이 있어야 하는데 글의 내용이 상식선에서 멈추고 있어 조금은 아쉬웠다.
오경자의 <나 데리러 왔어>
부부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수필이다. 부부란 서로 배려해 주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같이 있을 때에는 무심히 넘긴 일도 떠나고 나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뒤늦게 배려하지 못한 점 후회하며 사는 게 인생이다.
남편이 떠난 후 여섯 해가 될 쯤 꿈에 남편이 나타난다. 아주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난 남편은 작가를 콘도에 데리고 가는 꿈이다. 이를 자신을 데리러 온 것으로 해석한다. 저승길에 외로울 것이라 하여 마중 온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면서 남편 없는 여섯 해 동안 방황한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이제는 편안해진 현재의 삶도 추스른다.
이런 와중에 독자는 이 작가가 얼마나 부부애가 깊었는가를 감지하게 한다. 의심 없이 믿고 저승길이라도 따라나서려는 모습이 정겹다.
그래, 가자. 갈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덜 아프고 아직 건강하게 내 발로 돌아다닐 수 있을 때 누구의 부축 없이 천국에 걸어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아니 대복이랴. 함께 하지 못하고 깨어보니 꿈이었지만 그래도 좋다. 잊지 않고 나를 데리러 왔다. 이 땅을 떠나는 날 미지의 그곳에서 마중해 줄 짝꿍이 있으니 얼마나 든든한가? 힘든 세상에서 외로울까 봐 지켜보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또한 크게 다행한 일이 아니더냐? -오경자의 <나 데리러 왔어>에서
작은 몸짓도 서로 배려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면 행복인 것이다. 작은 몸짓도 서로 배려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그 또한 행복이 분명하다. 말로 서로 사랑했노라 하는 것보다 이렇게 인식하는 삶을 산다면 진정 행복한 삶일 것이다.
이창옥의 <어머니와 담배>
사람의 생각은 어떤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현격한 차이가 있다. 같은 사물이라 해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아니 바라보는 사람의 수용자세에 따라 그 차이는 엄청난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행위도 그의 삶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과 전혀 몰이해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은 같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 그만큼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 다른 이의 삶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위험이 따른다. 엄청난 실수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담배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하고, 우리의 건강을 해친다며 멀리 물리치고자 해도 작가는 어머니에게서 담배를 떼어놓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머니의 질긴 삶을 알기 때문이다. 일찍이 남편은 떠나고 혼자 여섯 자녀를 키우신 어머니. 작가는 그 어머니의 고통을 초등학교 때에 부엌문 뒤에서 훔쳐본 경험이 있다. 외출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한복도 벗지 않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과 담배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때부터 작가는 어머니의 힘겨운 삶을 읽고 동정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려야만 슬픔과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깊은 한숨을 담은 담배연기로도 슬픔과 아픔을 토해낼 수 있다는 것을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알았다. 어머니가 살아낸 모진 세월 속에 지켜내려 했던 것은 당신의 안위가 아닌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이었다. 목젖이 아프도록 담배연기를 삼키며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외로움은 가슴속 켜켜이 묻었을 것이다.
-이창옥의 <어머니와 담배>에서
다만 평자의 생각을 펴 본다면 이 글은 액자법으로 구성했는데, 개방액자의 부분에 있는 이야기가 뒤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기에 떨어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향숙의 <미호삼거리>
현대인의 고민은 개발과 보존의 갈등 속에서 이어진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마다 다르다. 개발로 인해 과거의 추억이 매몰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개발로 인한 삶의 편리를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조율하느냐는 것이 남겨진 과제다.
이 글에서는 결혼하여 남편과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아이를 낳고 기른 곳인 미호삼거리가 새로운 개발로 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잘 나타나 있다. 과거에는 정이 물씬 풍기던 곳이었는데, 도시화로 인해 묻혀 버리게 될 제이의 고향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혼례를 앞둔 신랑의 머리를 정성스레 만져주던 이발소, 꼭두새벽인데도 열병에 시달리는 아이를 보살펴 주던 한약방, 전쟁으로 여자 혼자 유복자를 키우고 뒤늦게 구순이 되어 만난 이산가족집, 동네를 알록달록 채색해 주던 페인트집. 어느 것 하나 정겹지 않은 것이 없었던 곳인데 모두 개발의 흙더미에 묻히게 되었다. 그러니 작가는 안쓰러운 것이다.
삶이란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고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토대 위에 세워져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하여 비록 하찮은 일들이었다 할지라도 오밀조밀한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는 이 거리의 어제의 모습들은 아주 소중한 기억들로 내 안에 머물며 새로운 내일을 열어가는 주춧돌이 되리라. -이향숙의 <미호삼거리>에서
임성희의 <다시 찾은 제주도>
제주도 기행이다. 제주도에서도 성산포 지역을 관광한 기록이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볼 것은 기행문과 기행문의 형식을 빈 기행수필의 차별화 문제이다. 분명 기행문과 기행수필은 다르다. 물론 기행문 중에는 기행수필에 해당하는 것도 있다.
기행문은 여행일정에 따라 기록한다는 대원칙이 있다. 하지만 기행수필은 수필이 되어야 한다는 반드시 유지하여야 할 기본이 있다. 한 편의 수필 안에서는 반드시 하나의 주제가 있어야 한다. 작가가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 중에서 몇 개의 글감을 선택하여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을 찾고, 거기에 작가의 삶을 밀어 넣어 해석하고 주제를 만드는 작가적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 단순한 여행일정의 나열을 가지고는 감히 수필이라 말하기 어렵다.
이 글은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다. 전편에 걸쳐 제주도의 ’돌‘에다 시각을 맞추고 있다. 좀 더 이 ‘돌’에 몰두하여 의미화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어도 하나의 글감을 취택하고 그에 집중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싶다.
수필은 한정된 길이 안에서 작가의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제와 관계가 없는 이야기는 과감히 도려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기행수필에서는 여행일정에 묶기기 쉽기 때문에 더욱 조심할 일이다. 그래야 온전한 기행수필의 영역에 둥지를 틀 수가 있다. 그러니까 한 편의 수필 안에서는 집중된 작가정신으로 흐트러짐이 없어야 수필로서 성공한다는 말이다. 기행수필을 쓰기 어려운 것은 기행문의 기질 자체가 다른 곳으로 정신이 빠져나갈 소지가 많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행수필을 쓸 때의 마음가짐은 반드시 수필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 속에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심할 일이다.
허정의 <부채단상>
수필을 교술문학이라 하여 그 기록성에 하나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면 이 글은 너무도 충실한 글이다. 부채의 역사에 대해 장구한 세월을 두고 변천한 모습을 잘 기록하고 있다.
부채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이미 은殷 이전의 청동기 시대에 꿩 깃으로 만든 적선이라 부르던 부채가 있었다. 주시대(BC 1122~BC 221)에는 새 깃으로 만든 우선이 있었으며, 한나라 때는 비단으로 만든 부채가 있어 상류 계층에서 사용한 기록이 있다. 그 시기에 참대와 종이가 어우러져 아들을 낳으니 맑은 바람인 부채다.竹與紙而相婚 其生子曰淸風
전한 때(BC 202~AD 8)는 정수란 사람이 칠륜선이란 것을 발명했다. 바퀴를 돌리면 바람이 일었고, 그 수백 년 후 7세기엔 당 태종이 수력 풍선을 썼다는 가록도 있으니 지금의 선풍기에 버금가는 물건이라 짐작된다. -허정의 <부채단상>에서
부채의 변모한 모습에 대한 기록에 멈추지 않고, 효용성과 편의성에 근거한 기능의 변천에도 충실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는 독자에게 새로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나름 존재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수필에 있어서 부차적 효능일 뿐이지 그것이 주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수필이 문학이라면 어디까지는 문학적 형상화에 치중하여야 한다. 그러는 와중에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즐거움이어야 한다. 이 글에서 작가는 왜 부채의 변천의 역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일까.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동원되는 지식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독자에게 전달하려면 차라리 설명문이 더 효과적이다. 반드시 수필은 글감에 대한 참신한 해석으로 작가의 정체성이 드러나야 하고,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작가의 참신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수필의 생명이 영구할 것이다.
작가의 삶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고백의 문학인 수필은 그 어느 장르보다 작가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가슴에 새길 일은 고백만 하면 수필가의 의무를 다 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신의 삶을 숨김없이 기술하는 일로만 착각하지 말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찾아 문학적 형상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함을 기억할 일이다.
가을이 지나면 다시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절차 앞에 서야 한다. 그때에 우리 모두 흐뭇하게 웃을 수 있도록 수필가들의 끝없는 노력이 있으려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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